1월 23일 일요일 7시 동서울터미널에서 여러산님들과 함께 봉고차로 서산 팔봉산으로 향한다

해미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팔봉산기슭로 올라가는데

지도를 보니 정규둥로인 서대사입구를 지나 금강산에서 이여진 고개인 신어고개에 하차한다

 차로 능선마루로 다 올라온것이다(10시)

잠시오르니 벌써 좌측위로 8봉이 보인다

 서태사에서 올라오는 정규등산로와 만나는 8봉에서고 서해 가로림만의 바다를 바라보고

 8봉지나 헬기장에서 바라본 정상

줄잡고 바윗길을 오르 내리며 정상을 향해 간다

계단을 오르고

3봉 오르기전 공터에서 한장 5학년과 6학년 학생들인데 6학년이 더 산을 잘 타심

3봉을 오르다 뒤돌아 본 지나온 4 5 6 7 8봉 올망졸망한 능선길이고

좌측으로 보이는 둔덕봉이 이름도 기똥찬 금강산 금북정맥상의 봉우리다

정상을 향해 가까이 간다

사면의 기암릉 정상이 눈앞에 나타나고 게단을 올라 가니

벌써 저 앞에 준족에 미모를 겸비하신 6학년 반장님이 먼저 가신다

팔봉산 정상은 비슷비슷한 높이의 암봉이 두개로 정상석도 두개다 먼저 오른 작은정상 정상석

큰정상가다 바라본 3봉 작은 정상

팔봉산 3봉 큰정상

정상주의에 칠면조모냥의 바위

정상에서 바라본 2봉과 1봉

정상아래 공터에서 바라본 정상의 연꽃형상바위

휘휘돌아본다 서편으로 태안의 백화산이 희미하고 당진의 야산들과 가로림만의 바다를 바라본다

정상에서 금강산과 8봉을 바라보는 산님들

통천굴을 내려간다 굴안에 짧은 철사다리가 놓여 있고 구녕이 좁아 사람만 겨우 빠져 나오니

도봉산 포대 처럼 많은산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신다

통천굴아래 덮개바위를 빠져나와 가니

짜잘한 바위들이 모인 2봉에서의 산님들

2봉에서 바라본 팔봉산 정상 3봉

2봉에서 바라본 1봉 투구봉이라구 함

2봉에서 내려가다 만난 팔봉산의 명물 열대어 바위

1봉 투구봉

1봉에서 돌아 내려와 임도 삼거리에서 뒤돌아 본 1봉

양길리 주차장에는 버스와 자가용으로 꽉차서 정신없고

봉고를 타고 나와 양지바른 묘지에서 진수성찬으로 막초한잔하고

 팔봉산의 모습을 뒤로하고

다시봉고를 타고 서산시 부석면 도비산을 향해 출발 중턱에 있는 느티나무?들에 둘러 싸인 고색창연해보이는 고찰 이다

 의상대사와 당나라처녀의 전설이 서린 부석사에 내려 들러본다

도비산과 부석사 이름이 지어진 내력 얘기는 이렇다한다

 

때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진평왕 시대에 두 유명한 스님이있었으니 원효와 의상이라는 두 스님이었다 .

 두 스님은 당나라로 으로 구도(求道)의 길을 떠난다 . 지금의 만주의 요동땅에 들어 섰을때였다 .

산간지대를 지나 꼬불 꼬불 두사람은 오직 불심 하나만 믿고 험한 산길을 가고 있었다 .

마침 날이 어두워지고 산길에는 주막도 없고 사람이사는 흔적도 찾을수가 없는 길에 들어섰다 .

두 스님은 칠흑 같은 밤중에 길을 찾다가 조그마한 굴에 거처를 정한다

두 스님은 걸어 오느라고 땀도 많이 흘리고 허기는 지었지만 피곤 이먼저 찾아와 깊은 잠에 곯아 떨어지었다

깊은 밤 삼경은 되었을때 즘이었을것이다 .두스님중에 원효스님이 잠결에 깨어 목이말라 먹을 물을 찾게 되었다 .

그는 자기가 살던 방으로 알고 늘 하듯이 더듬더듬 캄캄한 방을 더듬어 보니 손 끝에 물 그릇이 손에 잡히었다

 원효스님은 벌컥 벌컥 물을 마시고 나니 잠이 저절로 와 쓸어저 깊은잠에 빠지었다 다음날이었다 .

날이 동녘 하늘에 밝아 오자 동굴에도 햇빛이 찾아 들었다

먼저 일어난 의상 스님이 별안간 놀란 소리를 하며 원효를 깨웠다 .

"여보 ,원효스님....이거 어찌 된 일이요?" 하고 소리치는 소리에 놀라 원효가 깨어 보니 그들이 자던 곳은 무덤 속이었고

옆에는 죽은 사람의 해골이 있었다 "아이구..." 원효가 더 크게 놀랐다 .

자기가 어제밤에 마신 물이 해골에 고인 물이었던 것이다 두사람은 겁에 질려 우선 밖으로 나왔다 .

 밖에는 어젯 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는듯이 새가 울고 햇볕이 밝게 비추고 있었다

의상은 원효의 속 사정도 모르고 중국행 길을 다시 강행하였다 .

쫓아가던 원효가 어젯 밤 일을 혼자 생각하며 구역질이 나서 도저히 갈수가 없었다

"자네가 먼저 가게 " 원효가 뒤로 쳐저 도저히 갈 생각을 않자 의상은 영문도 모르고 원효의 불심을 의심하였다

 "아니 구도의길에 나선 사람이 이래서야...." 하고 혀를 차자 "아니야 자네가 먼저가게" 하고 가기를 거부 하였다 .

의상은 도저히 않 되겠는지 그길로 혼자 떠났다

원효 스님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로

무덤 속에서 잔 일이나 죽은 송장의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잠을 잤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

그는 다시 무덤속을 들여다 보았다 .분명히 죽은 사람의 해골이 거기 있었다 .

원효는 생각해본다 .세사의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

송장의 해골의 물도 음료수라고 생각 하고 마셨더니 과연 음료수였다.

그는 눈을감고 생각에 잠겼다 사람이 세상으로 왔어도 오던길을 기억 못한다.

그리고 이세상을 떠난 들 떠날 길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

그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은 괴로워하고 슬퍼한다 .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부르지 않았는데도 이세상에 왔고 죽으라고 허락을 않았는데도 죽는다 .

그것은 말하자면 아무도 모르는곳에서 왔다가 이 세상에 잠간 머무렀다가 떠난다는것을 의미한다.

 해골의 물은 생각하자면 사람의 육신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만일 육신이 없다면 사람도 없는 것이다 . 이번 일은 사람의 육신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아닌가?

육신....육신은 무상하여 덧 없는것이다. .

덧없는 생각들은 과감히 끊어야지 끊지 않으면 괴롭기 마련이다. 그

렇다 .모든것은 생각 하기 나름이다 일체 유심조(一切 維心造)란 말도 있지 않은가?

원효는 고민에 빠젔다 당나라로 도를 닦으러 떠난들 더 무엇을 바라랴?

나는 다시 신라로 돌아 가리라 ....거기서 나스스로 도를 닦으리라 ...

원효는 그날로 발길을 돌려 신라로 되 돌아갔다 한편 의상은 당 나라로 가다가

고구려군에게 잡혀 오해도 받았으나 굽히지 않고 구도의 길을 나서 당나라 지엄스님의 밑에 들어가 수행을 한다.

그는 중국에 머물면서 지엄으로부터 화엄을 공부 했으며 도선율사와도 사귀게 된다 .

의상은 화엄을 공부하는중에 당나라 귀족의 따님인 선묘라는 미모의 낭자가 절을 자주 찾아와

 탑돌이를 하는등 과정에서 서로 자기도 모르게 서로 연모의 정을 느껴 몇번을 만나 연모의 정을 느끼기도 했지만

신라사람인 자기스님의 신분과 낭자와의 사랑이란 있을수 없는 것이었다 .

어느날 선묘 낭자가 찾아와 사랑을 고백하지만 의상스님은 단연코 거부한다 .

의상이 신라로 돌아 오던날 낭자가 부둣가에 까지 나와 같이 신라로 가서 결혼해서 살것을 다시 간청하였으나

의상은 이를 뿌리치고 배에 오른다 . 배가 멀어 지자 낭자는 바다속 깊이 몸을 던진다

 의상은 배에서 잠간 피로에 지쳐 눈을 감자 꿈에 선묘낭자가 나타났다

 "의상님 저를 데려가 주세요 " "안되오 ,나는 중이외다 . 나를 잊어 주시오...." 하고 대답 하자 벼란간 낭자의 모습이용으로 변하였다

소스라쳐 꿈을 깨니 꿈이었다 의상은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은터에 백제땅 서산에 배를 내려

신라로 가려는 도중에 멀리보니 웃뚝선 큰 산이나타났다 .

그는 무턱대고 그산에 올라보고 싶은 충동이 생겨 산에 오르니 바위가 많고 굴이 있었는데

 서해 바다와 육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 그는 이산 중턱에 잠시 머물며 그낭자의 혼을 달랠겸 굴속에서 잠시 기도를 하였다.

그는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끍어 암자를 지으려고 했다

그런데 백제 사람들인 인근 주민들이 신라 사람인 의상이 암자 짓는것을 방해 하였다 .

그날밤 서해 바다에서 검은 먹 구름이 몰려와 천둥 번개가 치더니

인근마을이 거의 물에 잠길듯이 물이 차 오르기시작하였다 .

마을 주민들이 의상이 있는 굴 까지 올라와 어쩔줄 모르고 쩔쩔 매고 있었다

의상은 차오르는 물을 바라 보며 불공만 드리고 있었다 .

그때였다 .처둥 번개와같은 우뢰 소리와 함께 분명이 사람의 암자를 못짓게 하므로

이산을 몽땅 뽑아 서해 바다에 집어 넣으리라 .

이제는 너희들이 있는 이산도 바다속에 잠기리라 " 이소리를 여러 사람이분명히 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 쏟아지는 비와 천둥소리에 사색이 되어 있었다 .

그때 마을의 노인한사람이 나서며 의상에게 "분명히 들으시었지요?' 하고 협박한다

"못 들었소이다" 의상은 눈을 감고 기도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이순간 산 중턱에있는 바위들이 천둥 번개 소리와 함께 바다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래지었다 "정말이야 ....이러다간 우리는 바다 속에 잠겨 물고기밥이되겠어

" 노인이 다급해 지자 의상에게 간청을 한다

"스님 절을 짓도록 하시오 .암자 말고 절을 ....우리가 절 짓는데 도와 드리겠으니 제발 서해 용왕님의분노나 꺼주시오"

"나무관세음보살" 의상은 노인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않는다 목탁소리만 촛불과 함께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의상은이밖으로 나가 무엇인가 주문을 외우자

언제 그랬냐는듯이 하늘이개고 저멀리 바다 가운데 큰 검은 바위가 나타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나와 보니 바위 섬하나가 새로 생기어 있었다

 "관세음보살" 의상은 무엇인가 혼자 주문만 외이고 있었다

그런일이 있은후 마을 사람들이 적극나서서 절을 짓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 한것은 이바윗돌이 간조때는 바닥이 들어나 분명히 나타나 있어야 했지만

만조때도 이바위가 가라 앉지 않고 그대로 바다 물 위에 항상 둥둥 떠 있는것 같이 보였다

"이상도하다" 모두들 기이하다고 했다

의상은 어느날 이 바위가 선묘 낭자의 혼이 변해 서해바다의 용이되었다는 꿈을 또 꾸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해 용이 천수만 바다위에 떠 있으면서

맞은쪽 산에 절이 다 짓도록 감시하고있는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

그런일로 이산의 이름은 바위가 날라 섬이 되었다는 뜻에서 도비(島飛)산이라는 명칭이 생겼으며

섬이항상 바다에 떠 있는것 같은 바위섬이 이절 돠 짓도록 까지 감시하였다 하여 부석사(浮石寺)라는 이름이 명명 되었다한다

극락전과 부도 느티나무 고목

절뒤로 눈싸인 길을 20여분 올라가니 산불감시초소와 이동통신 탑이 있는 도비산정상 (352m)

천수만 간월호와 부남호를 바라본다

다시 부석사로 내려가 차를 타고 간월도를 구경하고 궁리항 횟집에서 쭈꾸미샤브샤브와 전어구이로 거나하게 한잔

서해 낙조

세심촌호텔로 가 노천탕에서 때빼고 광좀내고 서울로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