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거망산 산행기

ㅇ 일시 : 2005. 1. 25(화)
ㅇ 위치 : 경남 함양군 안의면,서하면
ㅇ 코스 : 우전마을-신등산로-황석산-거망산-태장골-용추계곡-옛장수사터(15km.5시간)
ㅇ 찾아간길 : 대진고속도로-서상 I.C-안의방면-우전마을


   1월 22일날 미완의 계룡산 종주를 하였건만 늘상 다녀본 산이라 그런지 가슴속에 차지 않는 무엇인가가 남아있다. 과감하게 휴가를 내고 황석산으로 떠난다. 대전을 출발한지 1시간 20여분. 우전마을에 도착한다. 날씨가 흐린 것이 기어이 눈이 내리고 말 것 같다.

 

   30여분 오르자 피바위, 조금 더 오르자 황석산성이 나온다. 정유재란 때 이 고장 사람들의 애환과 의로움이 고스란히 베어 있는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장 고초를 겪는 것은 민초들이 아닌가 싶다. 70여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피바위의 빙벽이 이곳에서 몸을 던졌다는 민초들의 핏물처럼 다가와 마음이 아리다.  

  

   가파르고 미끄러운 길을 1시간 30여분 정도 오르자 황석산 정상이다. 정상의 바위가 특이하고 아름답다. 마치 이 고장 사람들의 기백이 살아 있는 느낌이다. 날씨가 흐려 주위의 조망이 좋지 않지만, 황석산 정상의 저 당당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름에 대한 보상은 충분할 것 같다.

  

   정상에서 조금 지나 거북바위에 오르자 전망이 참 좋다. 황석산 정상의 힘차고 아름다움 모습과 가야 할 거망산 능선. 거북 바위의 신기한 모습이 보기가 좋다. 대개 이런 좋은 풍경을 보면 아무 생각이 없기 마련인데, 이 높은 곳에까지 올라와도 계속하여 따라 오는 생각이 하나 있다. 바로 한일협정이다. 일제 침략기때 돌아가시고 고생하신 분들의 권리를 국가가 침탈하였다는 배신감도 배신감이지만, 한일협정 후 30여년이 흘렀건만, 그 사실이 그 오랜 세월 감추어져 있었다는 사실 앞에 더 커다란 무서움을 느낀다. 그 동안 그 비밀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한 둘 이었을까? 외무부 장관, 안기부장, 포항제철사장을 비롯하여 그 비밀의 방을 엿보고 간 사람이 오죽 많았을까? 그런데 그 엄청난 비밀이 고스란히 지켜질 수 있었다니---

  

   며칠 전 계룡산에 올랐을 때 산의 밑부분은 운무에 쌓여 있지만 산의 윗부분은 쾌청하기 그지없어, 마치 자기들끼리 비밀스런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느낌을 받았는데, 정녕 세상의 정권교체라는 것이 저 비밀스런 금기의 방 열쇠를 건네주고 건네 받는 것이었으며, 우리 민초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언제까지나 안개 속을 헤매어야 하는 것이었단 말인가--- 아직 다 열리지 않은 저 금기의 방을 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 얼마나 많이 튕겨져 나올 것이며, 우리는 또 얼마나 경악 할 것인가? 그러나, 그러나 우리 민초들도 반성할 일이다. 저 엄청난 비밀이 연예인 X화일이라는 달콤하고 현혹적인 사건 앞에서 너무도 쉽게 눈을 돌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거북바위 위에서 차갑게 몰아치는 바람 속으로 답답한 가슴을 열어보지만 쉽게 식혀지지가 않는다. 어찌 쉽게 식혀지랴? 저들은 30여년이 넘게 숨겨왔는데--- 

  

   답답한 가슴을 안고 이제 거망산 길로 접어든다. 떨치어지지 않는 생각 때문에 발길이 무거운데, 기어이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처음엔 눈방울이 조그마하더니 어느새 지나간 앞사람의 발자욱이 쉽게 지워질 정도로 크다. 뚜벅뚜벅 한참을 눈 속을 걷고 있자니 능선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 나 혼자 뿐임을 깨닫는다. 순간 호젓함과 함께 산이 참 고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산죽과 나무 위에 눈 쌓이는 소리뿐이다. 쌰르륵 싸르륵--- 눈 쌓이는 소리가 듣기 좋아, 한참 동안 눈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서 있다가 다시 길을 나서기도 한다.

  

   눈 내리는 능선길을 혼자 걷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고 맑아지더니, 나중에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기 시작한다. 아니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의 못된 잡념들이 깨끗이 지워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오래된 우물물을 치듯, 가끔은 머리 속도 이렇게 깨끗이 비워주어야 새로운 생각들이 들어오는가 보다. 분노도, 미움도, 용서는 하되 결코 잊지는 말아야 할 저 일들도---세상에 눈 내리듯, 새로운 마음이 내려와 덮어주었으면 좋겠다.

  

   산을 타기 시작한지 3시간 30여분 드디어 거망산에 오른다. 눈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만 내리지 않는다면 기백, 금원 등의 산줄기들이 장쾌하게 펼쳐질텐데---아쉬움을 뒤로하고 서둘러 하산길로 접어든다. 비탈지고 다듬어지지 않는 하산길. 아이젠을 풀고 조심조심 숨죽이며 내려온다. 눈 내리는 겨울 산. 산이 무섭고, 고요가 무섭다. 눈이 내리면 새들도 날지 않으니 말이다.

  

   산을 빠져 나오니, 어느 긴 긴장의 터널을 빠져 나오는 느낌이다. 눈을 홈빡 뒤집어쓰고 있는 마을의 지붕들이 무척이나 반갑다. 무사히 산행을 마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용추계곡을 따라 약속장소로 내려온다. 눈 내리는 용추계곡. 풍경이 참 아름답다. 눈을 맞고 서 있는 금강송들과 부드러운 바위들. 맑은 시냇물. 무엇보다도 놓치기 쉬운 용추폭포의 빙벽과 바위가 시선을 빼앗는다.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 비탈진 길을 내려가야 하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풍경이 아닌가 싶다.

  

   약속 장소인 옛장수사터에 내려오자, 절은 사라지고, 화려한 문양을 간직한 일주문만 눈을 맞으며 서 있다. 묘한 아스라함과 운치가 느껴진다. 얼마전 기백산을 오르기 위해 이곳을 지나칠 때는 이런 풍경이 아니었는데, 눈이라는 것이 우리를 참 아득한 세계로 이끌고 간다는 생각이다. 따뜻하고, 고요하고, 아름다운 그 어떤 곳---살아가며 눈길 같은 세상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저 눈 덮힌 세상 같은 세상 속으로 갈 수 있을까요? 반문하고, 반문해도 계속하여 쌓이는 눈, 눈발---   
 
 

(황석산성)


 

(황석산 정상)


 

(황석산 정상과 능선)

 

(거북바위)


 

(황석산 암봉)


  

(거망산 가는 길의 산죽)


 

(거망산 가는 길의 눈발)


 

(거망산 정상)


 

(하산길의 산죽)


 

(용추계곡)


 

(용추폭포)


 

(옛장수사터 일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