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산(百岳山) 산행기/포토 에세이
(2005.6.16(목)/경북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입석초교-수안재-819-백악산-갈림길-옥양골-석문사-옥양폭포-옥양동/고양시늘푸른산악회 전)

*.축구가 맺어준 인연 백악산
 직장에 나가 근무를 하다 보면 동료들끼리 떠드는 소리만 들어도 오늘 몇 시에 야구경기가 있는지, 축구 경기가 있는지 등의 기타 정보를 자연스럽게 훤히 알게 된다.
그러나 정년을 하고 자식들 다 여의어 버리고 아내와 단 둘이 집에서 살다 보면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 캄캄하다.
오늘 새벽에 나이지리아와 본선 진출을 놓고 중요한 일전을 벌인다는 청소년 축구경기가 있다는 귀 소문을 듣긴 들었는데, 그게 몇시에 어디서 중계하는 줄을 몰라서 몇 번이나 자다 일어나면서 TV 채널을 돌렸다.
그러다가 새벽 3시가 지나서 드디어 경기는 시작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우리 청소년 팀이 전반 18분만에 한 골을 먹어버렸다.  
오늘 새벽 속리산 문장대로 등산을 가기로 예약하여 놓았지만 혹시나 하고 이제나 저제나 하며 일어서지 못하다가 후반전 중반이 지나서야 '이젠 글렀구나' 하고 아파트 문을 나서려는데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다시 집에 들려 비옷을 준비하고 경보로 약속한 장소를 향하고 있는데 모든 아파트에서 일제히 “와아!” 하는 환성이 들린다. ‘아아, 1:1로 비겼구나!’
그러더니 얼마 안 되어서 ‘와!’ 하는 환성이 또 터진다.
근처에 ‘24시뼈 해장국집’이 있어 달려가 환호작약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2:1로 이겼다는 것이다.
이러다가 속리산행 관광버스를 놓치고 다음에 오는 산악회 버스가 있어 따라잡기 위해서 무작정 타고 보니 경북 상주에 있는 백악산에 가는 차였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857m라는 백악산(百岳山)은  이렇게 나와 인연하게 된 것이다.

*. 왜 ‘백악산(百岳山)’이라 이름 한 것일까
 
백악산은 속리산 문장대 북쪽에 있는 화양동 계곡 쪽 긴 능선 위에 솟아있는 설악산국립공원에 속한 산으로 경북 상주와 충북 괴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도립공원이기도 하다.
백악산을 한자로 백악산(白岳山), 백악산(百岳山)이라고도 쓴다는데 어느 것이 맞을까?
속리산 쪽에서 바라보면 정상부분에 하얀 암벽이 많다 하여 백악산(白岳山)이라 하는 모양이지만, 백 개의 큰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라 해서  백악산(百岳山)이라 쓰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국립지리원 지도에도 백악산(百岳山)이라고 쓰여 있다니 말이다. 백 개나 되는 산봉우리가 하얀 병풍을 두른 모습이어서 백악산을 백악산(百岳山) 혹은 백악산(白岳山)라 하였던 모양이다.

*.물안이골 따라 길 따라
일산(一山)을 떠나올 때 내리던 비는 어느새 그쳤고 비 그친 상쾌한 6월의 아침을 달려서 충북 괴산을 지난다.
"대관령 같은 고개네."
일행 어느 사람이 말한다. 이리 꼬불 저리 꼬불 한 구절양장(九折羊腸)의 '늘재'를 넘어서 경북 상주 입석리에 도착하기니 일산에서 4시간이나 걸렸다. 노란 밤꽃이 유난히 활짝 핀 여름 6월 중순 10시경이었다.
우리들의 산행 기점은 입석초등학교부터 물안이골 계곡을 끼고 백운산 정상에 올랐다가 옥양골, 옥양폭포(玉樑瀑布)로 하산한다.
백악산은 속리산의 유명세에 밀려서 벼로 알려지지 않은 산이라서 그런가. 대표적인 입구가 입석리(立石里)련만 입구에는 어디에나 있는 안내판은 물론 이정표도 없었다. 이정표 대신 각종 산악회의 리본이 헷갈리기 쉬운 등산로의 길목을 표시할 뿐이었다.

물안이골 계곡에서 졸졸 흐르는 상쾌한 물소리를 들으며 가는 산길은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호젓한 오솔길이었다. 계곡은 물안이골이란 이름처럼 물이 거의 없는 평범한 계곡이었다.
축구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 시간에 속리산 문장대를 향하는 산길  걷고 있을 것이다.
인생길도 마찬가지. ‘내가 국문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면-, 내가 다른 여인과 결혼하였다면- 나는 다른 나로, 다른 인생의 길을 살아왔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오솔길을 거닐며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나직이 읊조리게 한다. 하얀 개망초꽃이 만발한 호젓한 산길이었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음으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가지 않은 길

*. 늙는 길에서
 ‘다쿠마 타케도시’가 쓴 ‘행복한 노후를 위한 좋은 습관’이란 책은 노인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리 체념하는 일이 많아진다.
-갑자기 사람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누군가가 말하면 되묻는 경우가 종종 있다.
-‘건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받는다.
-관광보다는 온천이 좋다.
-계단을 세면서 올라간다.
-길을 가고 있을 때 자기를 앞지르는 사람이 많아진다.

그래서 그런가. 내 나름대로는 전속력을 내어 가고 있지만 앞서가는 사람을 따라 가기가 무척 버거웠다. 오히려 나를 앞지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32명 산꾼 중에 내가 제일 고령인 것 같다.
여름 꽃과 칡이 무성한 길을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민가를 헐고 새로 짓지은 집을 지나 녹슨 철조망을 넘는다.
처음으로 나타나는 튼튼한 철제 이정표가 서 있다.
‘→낙영산’ 북쪽 능선을 따라가면  낙영산(740m) 가는 길이요, '←윗대발래20분'으로 가면 서쪽 윗대방래로 해서 충북 쪽으로 새로 포장된 사담리 대방래골로 내려가게 된다. '↑백악산100분'이니 정상이 1시간 40.분 남았구나.
그런데 가장 중요한 그  이정표가 있는 곳이 어디란 것은 왜 빠뜨린 거지? 한참 올라가 두번째 이정표에 가서야 거기가 '수안재'임을 알았다.
지금은 등산로로만 알고 있지만 옛날에는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와 괴산군 청천면 사담리 윗대방래를 넘나들던 고개인데 그 표시가 없다니 관할 당국은 시정해야 할 일이다.
그 수안재부터는 전망이 시작되고 백악산의 이름처럼 많은 봉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야산(930.7m), 군자산(947m) 등 백두대간의 산인 것 같았다.
여기서부터는 로프로 올라가야 할 암릉이 있어서 백악산의 ‘岳(악)’의 이름값을 하고 있다. 능선 길에서는 내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것이 다른 산과 달랐다.

*. 갈 길만 가르쳐 주는 이정표
백악산 이정표는 모두 크게 잘못되었다. 이정표란 한 곳에서 다른 곳 사이의 길이를 말하여 주는 것이지만 어디서부터인지가 더 중요한 것인데 두 번째 이정표에도 자기 위치는 어디인지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으로만 말하고만 있는데 그 밑에 거리표시는 왜 없을까. 시간이란 등산하는 사람 따라 다른 법인데-. 그렇다면 정상석에서도  ‘km’ 아닌 시간으로 표시하였단 말인가. 둘을 병행할 수는 없었는가. 유명한 산이 아니라서인지 각종 등산 안내서에서도 그 자료를 찾을 수 없기에 말이다.
지나온 ‘↖수안재 30분’, ‘↑백악산 50분’인데 ‘↗’대왕봉 5분’이란다. 지도로 보니 대왕봉이란 819m 봉을 말하는 것 같다.
가장 후미라서 산악회 대장에게 허락을 받고 혼자서 대장봉에 갔지만 대왕봉은 릿지 길이어서 시간도 그렇지만 위험해서 오르다 말고 되돌아 오고 말았다. 다시 돌아온 이정표부터는 내림 길이어서 속력을 내었다. 백악산 정상 가는 길의 능선은 계속 오름길이 아니라 낙옆 쌓인 평평한 능선이 있어 좋았다. 가득이나 느린 사람이 한눈을 팔았으니 우리 대장이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을까?



안부 넘어 멀리 선바위라고도 하는 돔형바위에 우리 일행이 가고 있었다. 사람도 저렇게 먼 산 위에 있으면 신선 같이 멋있게 보인다. 저것이  805m 봉인가 보다.

혼자라서라 위험한 바윗길을 버리고 우회하여 가는 길이지만 그래도 아기자기한 암릉 길이었다. 배낭을 메고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바위 샛길을 지나면 노송과 어울린 적당히 어려운 암릉이  있어 혼자 가는 길이 건만 심심치가 않았다.
 다시 로프를 타고 오르니 소나무 사이로 목 없는 부처바위(?)가 보인다.
세 번째 이정표가 있는 곳은 805봉이었다. 거기서 아까 말한 아래대방래까지는 80분, 10분이면 정상을 간다니 거북이 같은 내 걸음으로는 20분은 작히 걸리겠구나.
삼각표지점이 있다던데 891m봉에 있는가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백암산에서 전망이 가장 좋다고 하는 고사목(枯死木)이 있는 너럭바위에 앉아서 그 가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이 따라 가보니 고생 고생하여 지나온 능선이 눈앞에 머리를 조아리듯 찬란하게 푸른 녹음으로 다가온다. 돔바위(일명 선바위)라는 805m봉, 806m봉, 100여 봉의 백악산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819m 봉, 807봉 등등이.

 드디어 기차바위 아래 까만 오석의 백악산 정상석이 나를 반긴다. '정상석은 이정표를 겸하여 →수안재 2.6km', '←옥양폭포 5.2km'로 쓰여 었다. 지금까지 '시간'으로만 말하다가 정상에 와서만 왜 'km'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입석리부터 수안재까지는 몇 km란 말인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정상은 사방이 트이지 않아서 지나온 고사목이 있던 곳에서 사진을 찍은 것이 잘한 일이로구나 하였다.  
정상석 바로 아래서 우리 고양늘푸른산악회 회원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 능선 길 못지않은 용암골 계곡미(溪谷美)


정상에서 하산하는 길은 여러 갈래 길이 있지만 그중에서 제일 좋은 길이 석문사로(釋門寺)로 향하는 옥양골 5.2km의 계곡 길이다.
하산길이 시작되는 곳에 멀리 병풍 같이 둘러싸고 있는 속리산의 묘봉, 관음봉(985m), 문장대(1029m), 비로봉(1032m)   등이 너무 아름다운데 저 가운데 둥그스름한 것이 내가 축구 중계 보다가 놓친 우정산악회 회원들이 간 문장대(1,029m)였다.
하산 길은 내림 길이어서 편하겠다고 생각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856m 봉과 845m 봉을 힘들게 오르내려야 했다.
정상에서 30분 정도 내려왔더니 헬기장이 있었다. 856m봉 같은데 그 옆에 큰 바위가 있어 마치 커다란 수석(壽石)인 평원석(平原石) 을 보는 것 같다. 거기 멋진 모자를 쓴 건장한 젊음이 있다. 카우보이란 분인 것 같다. 연은 인간과 어울릴 때 저렇게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2 리틀이나 되는 물도 바닥이 났는가 싶은데 반갑게도 계곡에 고인 물이 보이기 시작하지만 좀더 내려가서 마시지-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적은 물이 어떻게 폭포를 만들까 ?  물은 내려갈수록 많아지고 넓어진다. 계곡물이 합하는 것도 아닌 것을 보면 땅속을 흐르던 물이 합하여 더하여 지는 것 같다.
'조금'이 한참 더 계속되다가 보니 물소리가 요란한 곳이 있다.
커다란 너럭바위에 와폭(臥瀑)이 보이더니 그 아래에 큰 폭포가 나타난다. 백악폭포였다. 아래서 올려다 보니 바위에서 겸손하게도 등산로가 있는 우측에서 10m 정도의 높이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면서 그 아래에 맑은 소(沼)를 만들고 있지만 물의 양이 많지가 않았다. 다가올 장마철에 저 넓고 큰 암반을 가득히 넓히며 흐를 폭포를 상상하여 본다.

거기서 조금 내려오다 보니 절벽아래에 나뭇가지 사이로 커다란 바위에다가 태양이 멋진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하고 있다. 커다란 하얀 바위가 거울처럼 비스듬히 앉아 있고 그 앞에 나뭇가지가 드리웠는데 햇빛이 그 그림자로 그려 놓은 세상이다.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

*. 보굴(寶窟)의 전설

산에 가면 봉우리, 바위와 노송과 어울린 계곡이 있듯이, 한국의 명산에는 사찰이 있다. 백악산에 있는 유일의 사찰이 석문사(釋門寺)다. 석문(釋門)은 불가(佛家)를 말함이요, 불가(佛家)란 불교의 세상를 뜻하는 말이다.
1990년 경에 세운 절이라서 당우(堂宇)는 고풍스럽지는 않았지만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신 대웅전(大雄殿) 대신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보전(極樂寶殿)도 있었지만 이 석문사에서는 약사불(藥師佛)이 제일 멋스러웠다.
커다란 바위를 인공으로 깍은 듯이 크게 움푹 들어간 자리에 새하얀 화강암의 약사여래가   왼손에 약병을 들고 오른손은 석가불처럼 손을 엎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연좌에 앉아 지긋이 눈을 감고 명상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 왼쪽에 있는 샘터에서 시원한 물에 목을 적시며 물병에 물을 담아 가지고 내려간다. 
거기서 40분 거리에 있는 옥양폭포에 이르러서야 전설 어린 보굴(寶窟)을 지나친 것을 알았다.
보굴(寶窟)은 옥양폭포 위 절 부근 서쪽으로 가면 있다는, 방 하나와 부억 한 간의 크기의 석굴이다.  지금은 불상이 있다지만 옛부터 이 굴에는 이런 전설이 전하여 온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란(癸酉靖亂)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고자 할 때였다. 이를 눈치챈 수양대군의 딸이 그 음모를 발설했다가 생명의 위험을 느껴 이 굴에 피신하여 살았다. 그때 죽음을 당한 김종서의 손자 역시 이 굴에 피신하여 앞 뒤의 굴에서 살다가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여 불공대천지수(不共對天之讐)의 사이를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 이런 다리도 있었던가
중국 장가계(張家界)의 황석채에 오르면 자연이 만든 천하제일교(天下第一橋)가 있다면, 한국 백악산 옥양골에 오면 옥양폭포(玉樑瀑布)에 자연이 만들어 놓은 멋진 옥양교(玉樑橋)에 놀랄 것이다.
길이 20여m, 둘래 4m 가량의 대들보와 같은 하얀 거대한 암석이 폭포 위에 자연스럽게 걸쳐져 있다. 안전을 위하였음인가 큰 바위 두개가 교각처럼 다리 중간에 고임돌이 되어 있는 그 사이로  40여m 쯤되는 폭포수가 흐르고 있다.
폭포수 물이 뚫은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흙이 씻겨 가고 위에 있던 돌이 내려 앉아 얹혀 된 다리인가. 신비롭기가 그지없다.

이 천연의 돌다리는 마치 옥(玉)으로 다듬은 다리요, 대들보(樑:대들보) 같은 다리라 해서 옥양폭포(玉樑瀑布)요 옥양교(玉樑橋)라 한 것이다.

대개 등산이란 정상길을 오르는 즐거움으로 하고 하산하는 법인데, 솔직히 말해서 이 옥양골 계곡은  백악산 등산에다가 그보다 더 아름다운 계곡미를 백악산은 후식(後食)으로 주고 있는 듯하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이 근처 경치를 기념하기 위해서 찍어온 사진들을 보시라.


 산행을 끝낸 뒤 옥양동 마을에서 시원한 생맥주로 노독을 풀고 있다가 들으니 삼송천을 건너 화북쪽으로 10여분 가면 거대한 소나무가 있다 한다. 
키가 무려 12.5cm, 둘레가 4.7m에 이르는 왕소나무라고 하는  것이다. 옛날에 는 이런 노송이 2 그루가 더 있어서 이 마을 이름이 삼송리(三松里)라 하고 이 내를 삼선천(三松川)이라 하였다 하는 유래가 되는 나무다.
밑에서 하늘과 맞닿는 끝까지 또아리를 틀고 있는 용처럼 꼬이면서 올라가는 가지의 모습이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라 하여 용송(龍松)이라고 부른다는 천연기념물 제 290호다. 이 소나무 때문에 이 청천면이 ‘충북의 자연환경명소’로 지정되었다.
과장을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이  천하제일이라 자랑하는 황산(黃山)의 기송(奇松) 중에도 이렇게 멋지고 큰 소나무는 못 보았다.

소나무 ‘松’(송) 자를 풀이하면 木(나무) + 公(공: 공작) = 松(송)이라, 나무 중에 공작(公爵)이란 뜻이거니와 이 ‘용송(龍松)’은 소나무 중에서도 소나무라고 품평한다면 누가 나무랄 이 있겠는가.

이제 돌아가는 길이 즐겁다. 오늘 새벽에 우리의 청소년들이 아프리카의 강호 나이제리아를 맞아 어떻게 역전승 시켰는가를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서다. 혜성처럼 나타난 박지영 선수가 쏘았다는 환상적인 무지개 같은 후리킥 동점 골과, 그런 각도에서 그런 골이 적의 허를 찔렀다는 극적인 백지연의 역전 골을 보아야겠다.
패색이 짙었던 후반 5분 내에 역전승을 이루어낸 우리의 자랑스런 청소년 축구팀의 믿음직한 저력을 어서가서 확인하고 싶다.
그렇다. 최후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오늘 나도 젊고 건강한 산꾼들 속에 높은 나아로 끼어 들어 비오듯 흐르는 땀을 씻으며 숨차고 힘 들 때마다 '이제는 이렇게 버거운 등산을 고만 두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하고 자신에게 묻던 데서 벗어나 이 무릎이 허락하는 때까지 등산을 계속하여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