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06년 7월 20일 목요일

코스: 남현동-연주대-연주암-과천

  

  

헬스에서 운동장 돌기로 종목변경을 한 이후부터 계속계속 계~~~속 비가 오는 바람에 배는 자꾸만 책상 모서리와 친구하자 하고 팔 다리 어깨 무릎 여기저기 찌뿌둥해죽겠다. 그 뿐인가. 그간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이며 정성을 쏟아 온 프로젝트 하나가 별 것도 아닌 일로 초토화 될 위기에 봉착하면서 숨어있던 야성의 엘자가 나를 깨운다. 드디어 이 달의 바쁜 일이 모두 끝나고 천국같은 휴식의 시간이 쏟아지기 시작한 지 이틀째 되는 날, 잠을 자다가 자다가 지쳐 일어난 아주 평범한 오후, 엘자를 조용히 방출시키기로 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네 시. 날씨는 그냥 좀 우중충해질래? 하는 수준이다. 약간 늦은 감이 없지도 않지만 뭐 요즘엔 해도 기니까. 연주대까지 다녀온다고 해도 8시면 집에 떨어지겠다. 에이, 뭘 연주대까지 가나, 혼자서. 복잡한 머리나 비우믄서 쉬엄쉬엄 가고 싶은 데까지만 갔다가 오자... 그래도 혹시나 싶어 헤드랜턴이랑 잠바는 챙긴다. 그리고 물 한병이면 됐지뭐. 혼자 갈 때 술은 잘 가져가지 않지만 왠지 기분이 껄쩍지근한게 꼭 마실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서 소주 한병도 챙겨 넣었다. 아 맞어맞어..우산도 중요하댔지, 혹시 비올지도 모르니 우산도 넣자.

  

  

집에서 관악산 입구까지는 대문 잠그고 음식 쓰레기통 들여다놓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길게 잡아 3분쯤 걸린다. 초입으로 접어드니 그새 비를 엄청나게 맞아 온 몸이 푸르띵띵하게 부은 낮익은 나무숲이 반색을 하며 내 품으로 덤벼든다.

  

갸들: 왜케 오랜만에 와쪄잉~~

나: 어..쩜 바빠써~~

갸들: 오늘 왜 혼자야???

나: 그럼 내가 혼자 오지.

갸들: 그때 그 바지씨는 어케대꾸??

나: 잘몬봉겨~

갸들: 그럼 담엔 다른 바지씨겠네?

나: 시꾸랏! 철썩!!!

  

 

슬금슬금 선유암 약수터로 오르다 보니 날씨가 자꾸 우중충해지는게 아무래도 내려오는 길이 너무 허전할 것 같다. 전화가 띄엄띄엄 되기전에 애프터를 잡는다. 이왕이면 오늘은 서울대 입구로 내려가 볼까나? 한번 따라가 본 기억밖에 없어 자신은 없지만 뭐 가다보면 나오겠지. 어차피 오늘은 평소 겁많고 여성스럽고 조신한(???) 태도를 잠시 접고 엘자에게 맡기기로 한 날이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조난시 대책은 세워놔야지. 비상시 바로 구조를 할 수 있을 만한 정도의 경륜과 지식과 체력을 겸비한 친구 두 분께 소주 한잔 오케?로 연락, 한 분과 접선됐다. 서울대 입구, 8시다.

  

시간이 남을 것 같다. 약수터 벤치에 누워 하늘도 봤다가, 이 와중에 열심히 운동까지 하는 동네 아저씨 팔근육도 슬쩍 봤다가, 평소 안가보던 구석탱이 길도 쑤셔가면서 장차 자기랑 나랑 둘이서 몰래 한잔 하기 좋은 장소 물색도 해보다가, 틈틈히 셔터도 열심히 눌러가면서 참 재미나게 가고 있었더랬다. 마당바위에 다 다를 때 즈음에는 하늘에 먹구름이 어느새 잔뜩 내려앉았고 간간히 비도 뿌리고 있었다. 마당바위를 지나 조금 더 가다보면 갈림길이 하나 나온다. 평소 왼쪽으로 가는데 오른쪽 오르막 길로 가도 당근 나올 것 같아 오르막 길을 택했다. 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듯하다. 호젓한 숲길이 아주 그만이다. 이미 코 앞에 보이던 연주대는 잔뜩 안개가 끼어 있어 제대로 눈에 잡히지도 않는다.  듬성듬성 보이던 사람들의 자취는 이미 사라졌다.

 

 

한참을 가다보니 정면 오른쪽에 보여야 할 연주대 송신탑이 왼쪽 뒤편으로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제서야 그 길이 기억이 난다. 열심히 가다보니 다시 사당가는 길로 돌아가고 있었던 바로 그 길이었다. 오늘은 그래도 집앞까지 가기전에 알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바보같이... 이미 지나간 마당바위를 다시 보면서 어? 관악산에 마당바위가 두개였었나??? 언제 생겼지??? 여기도 헬기장이나 관악문처럼 제1 마당바위, 제2 마당바위, 글케 해놓지...이러고 지나왔으니..쯔쯔쯔... 그냥 집으로 갈까, 어쩔까, 갑자기 힘이 쪽 빠진다. 어느새 빗줄기는 제대로 리듬을 타고 있었다.

 

 

연주대 송신탑을 봤다. 온통 운무에 휘감겨 있다. 흐르는 치마폭처럼. 가까운 산이지만 처음 보는 숨막히는 풍경이다. 별다른 주저없이 다시 연주대를 향해 돌아선다. 대신 이제 마음이 급해진다.  비와 안개에 젖은 초록들 가운데 노란 나리꽃 하나가 풀숲 사이에서 활짝 웃으며 격려를 보내준다. 한컷으로 화답하고, 배낭에만 커버를 씌워 준채 그대로 달린다. 드디어 연주대 20분, 연주암 50분, 낙성대 1시간20분 팻말이 나왔다. 잠깐 다시 고민... 연주대에 오를 수 있을까? 혼자서는 딱 한번 다녀왔는데, 만만치가 않았더랬는데... 뭐 물론 몇 개월 전 일이긴 하지만... 다시금 운무에 휩싸인 탑이 눈앞에 아롱아롱한다. 그래, 가는거야... 하고 가려는데, 아저씨 한 분이 연주암쪽에서 올라오신다. 그리고는 멈춰 서 팻말을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다. 

 

 

 

아저씨: 과천쪽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요??

나: 연주암쪽으로 가심 될텐데요??

아저씨: 낙성대서 왔다가 누가 그쪽으로 가라 그래서 가다가 지금 다시 올라오는 길인데, 못찾아서...

나: 그럼 어째요? 전 연주대 갈꺼인디

아저씨: 연주대 가지 말래던데, 오늘, 초보는...

나: 그러게나요..그래도 거기서 과천가는 길은 분명히 있으니까 걍 오실라우? 20분밖에 안걸리는데...

아저씨: 음음.....흐음........그럽시다! 혼자보단 낫겄지요!!! 관악산은 첨인데, 사람도 없고 무서워요~

나: (저는 안무서운가부져???)

  

해서 함께 가게 됐다. 나도 뭐 그리 썩 자신은 없는데 사실...ㅋ 그래도 자신있게 길 안내한다. 좋은 안내자들에게 안내를 많이 받아봐서인지 그리 어색하진 않다. 연주대를 말 그대로 코앞에 두고 전망 좋은 날 저녁 무렵 막걸리 한잔하기 딱 좋은 솔바위에 다다르니 배가 너무 고프다. 이제 막판에 힘좀 써야되는데...기운도 없다.

  

나: 여기서 잠깐만 셨다 갑시다...근데 아저씨, 먹을거 엄서요?

아저씨: 김밥 한줄 있는데!

나: 와와...먹자먹자. 인자 힘 한번만 쓰면 되거등여~~(누가 들음 애낳는 줄 알겠다..ㅋ)

  

천원짜리도 아니고 더 두꺼운 천이백원짜리 김밥을 반이나 뚝 잘라 주신다. 답례를 해야지...암...가방서 주섬주섬 소주를 꺼내니 신기해하시기는 잠깐, 억수로 반가워하신다...비는 뿌리고 오래 즐길 여유는 없었지만, 소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며, 잠시 숨을 고르며, 김밥을 먹으며, 먹는 소주 딱 한잔의 그 맛. 역시 일품이다.

  

그리고 우린 연주대에 올랐다. 미끄럽긴 했지만 군데군데 밧줄들이 있어 생각만큼 위험하지는 않았다. 아저씨도 산에는 많이 다니지 않으셨다지만 별 어려움 없이 잘 따라오셨다(적어도 겉보기에는...아무쪼록 몰래 다치신 데 없기를). 정상에 올라오니 너무나 좋아라 하신다. 아이구..이걸 못보고 갔음 어쩔뻔했으까... 하긴, 처음 와서, 길도 잃어버릴 뻔한 마당에, 이런 날씨에, 정상까지 밟아보셨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우셨을까. 문득 어디를 데리고 가든 자신의 기쁨보다 나의 행복에 더 즐거워하던 예전의 산동무, 준 전문산악인이 생각났다. 그때는 참 특이하다 했었는데 심정이 쬐꼼 이해가 될것도 같다. 아저씨가 즐거워하시는 걸 보니 내가 더 기쁜거 같기도 하고...역시 인간은 신의 입장과 한발짝이라도 더 가까워질 때 더 큰 기쁨을 느낀다. 겸손과 중용의 생활화를  모토로 하는(가끔씩이긴 하지만) 나라고 많이 다르기야 할까...ㅋ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걸렸다. 원래 계획을 수정해 함께 과천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산악회 야간산행때 한번 다녀간 코스라 아는 길이기도 하고, 시간도 3,40분이면 충분할 듯 싶어서였다. 마음이 한결 느긋하다. 잠깐의 여유도 그냥 보내지 못하는 습관 그대로, 이미 약속시간이 절대 넉넉히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고즈넉한 습기를 잔뜩 머금은 연주암의 저녁 자태에 또 한참을 지체를 해버렸더랬다. 일곱시가 되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스님 한 분이 나오시더니 범종을 땡땡땡땡~~ 울리신다. 그리자 그 절묘한 각도로 시선을 온통 빼앗고 있던 고목 옆 처마 밑에 짜잔~~ 마술처럼 불이 밝혀진다.

 

 
이미 다 어두워졌다. 마음도 바쁘고 발걸음도 바빠지고 빗줄기도  제법 거세다. 자하동천의 물소리는 너무도 우렁차서 귀가 아플 정도다. 그냥 가기가 못내 서운하셨던지 그 와중에 아저씨는 계곡물에 한번 손까지 담그신다. 올라오던 길은 비와 바람에 몸을 떨던 나뭇잎들 소리에 정신이 아찔~하더니만, 이 길은 온통 비와 어둠과 계곡의 조화다. 가슴이 서늘해지다 못해 쓰리다. 길이 좋고 베낭커버 벗기기도 구찮아 헤드랜턴 없이 버티고 있으려니 아저씨가 핸드폰 불빛에 의지를 한다. 꺼내드릴까 하다 관둔다. 그 불빛 하나로도 이미 충분했으니.
  
약속시간은 이미 늦었다. 하산길 입구의 매혹적인 술집들을 침만 쪼금 흘리면서 곁눈질로 스쳐보내고, 아저씨와 작별인사도 하는둥 마는 둥,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갔으나 45분이나 늦어버렸다. 약속시간 지키느라 역시 눈썹 휘날리게 뛰어왔다가, 복잡한 전철역에서 주린 배를 움켜쥔 채 한참을 기다려야만 했던 친구의 나온 입을 원위치 시키는 데 삼겹살 2인분과 소주 한병이 들었다...
 
 
귀가길, 비는 그쳤지만 이미 길은 촉촉히 다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