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에서 덕유를 잇는 사흘간의 2차 유랑. . . (여원재-육십령)

 

딱 4주만에 다시 길을 나섰으니, 머리가 나빠도 한참 나쁜 녀석입니다.

 

8월 초, 천왕봉에서 여원재까지 2박3일에 걸쳐 지리능선을 밟으며,

뻔한 체력과 추위로 고통스러워, 다시는 등산하지 않겠다며 공공연히 떠들었었지요.

채 한 달도 되지않아 다음 구간을 이어간다고 배낭을 매고 나섰으니,

머리가 나쁠 뿐만 아니라 아마도 병이 단단히 깊었던 것 같습니다.

무슨 병이냐구요? 바로 대간병이지요. . .

 

 2004. 9. 4(토) – 9. 6(월)


 경로

 

9월 4일(토, 1일차)
여원재(12:10) – 철탑(13:05) – 암릉구간(14:09) - 고남산 정상(14:15/25) – 매요마을(15:58/16:30) – 618봉(17:12) – 사치재 88고속도로(17:35) – 헬기장(18:00) - ?봉(18:37) – 새맥이재(19:00) 야영

 

9월 5일(일, 2일차)
새맥이재 출발(04:15) – 칼바위 지나 바위봉?(05:45) – 아막산성(05:27) – 임도(06:51) – 복성이재(07:04) - ?봉(07:30) – 봉화산 정상(09:18/30) - ?봉(10:01) – 고개(11:10) - ?봉(11:29) – 고개(11:55) – 월경산 전 갈림길(12:40) – 중재(13:30/14:10) – 백운산 정상(17:15) 야영

 

9월 6일(월, 3일차)
백운산 출발(05:45) – 무령고개 갈림길(07:02) – 영취산 정상(07:12/25) – 중간지점 이정표(09:36) – 북바위(10:08) – 깃대봉(11:23/40) – 샘(11:54) – 육십령(12:50)

 

 거리 및 소요시간 : 도상거리 48km, 26시간 55분

 

 접근 및 복귀

 

   ㅇ 접근시 : 인월까지 승용차로 이동, 인월에서 남원 시내버스로 여원재 하차.

   ㅇ 복귀시 : 육십령에서 거창행 시외버스 타고 안의에서 하차, 안의에서 시내버스

       로 함양으로 이동, 함양에서 시외버스로 인월로 이동, 인월에서 승용차로

       직장 복귀.

 

 걸으며

 

남원시 운봉읍 서쪽끝 장교마을앞, 버스에서 내립니다.

여원재입니다.

1차 유랑시, 1 구간을 마치며 “유랑 끝, 고생 끝, 휴~” 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던,

잊을 수 없는 그 곳입니다.

다시 오지 않으리라 했었는데 결국은 여기 이 자리에 다시서고 말았군요.

북쪽으로 오늘 첫번째 목표물인 고남산이 우뚝합니다.

마음 굳게 먹고 긴 여정에 듭니다.

 

<여원재. 우측 숲으로 진입>

 

<대간은 논밭을 지나고. . . ,  멀리 고남산>

 

대간길은 장교마을을 우측에 두고 서쪽으로 빙 둘러 마을 야산같은 능선과 밭을 타고

이리저리 어지럽게 돌아 올라 갑니다.

리번이 보이질 않는 곳이 간간이 있어 처음부터 과외수업을 합니다.

갈 길은 멀고 마음은 급한데 날마저 더우니, 길 찾으랴 되돌아오랴

처음부터 마음이 바쁘고 온 몸에 땀이 흐릅니다.

 

백두대간보호법이 제정되면 논밭이 묶여 경제적인 손해가 예상되어

대간길 마을 주민들의 심기가 매우 불편한 상태이고

일부에서는 동네 근처의 대간 리번들을  수거, 파기하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리번이 꼭 있었을 법한 갈림길에서 흔적조차 없는 경우가 있어

길 찾느라 왔다갔다하며 헛힘을 씁니다.

 

한 시간 가량 지나 철탑 밑에서 처음으로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쉬어봅니다.

땀이 비오듯 하고 목이 타는데, 턱밑 주위가 풀에 쓸려서인지 가렵습니다.

과외수업을 한 때문인지 한참을 왔는데도 고남산은 아직도 저 멀리 버티고 있으니,

무언가 썩 탐탁치 않은 출발입니다.

두 무릎도 벌써부터 통증이 느껴져 과연 사흘을 버틸수 있을 지 걱정이 됩니다.

살살 달래가며 걸어야겠네요.

 

밧줄이 매달린 암릉구간 몇 곳을 올라 드디어 고남산 정상입니다.

초반에 헤맨 탓에 그리 높지도 않은 곳에 올라 꽤나 기뻐합니다.

발아래 운봉 들녁이 그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지난 번에는 초록빛이었는데, 이제 반쯤 누렇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저 누런 빛은, 이 따가운 초가을 볕에 하루가 다르게 여물어가,

곧 농부들의 꿈인 황금색으로 바뀌어가겠지요.

바라만 보아도 제 마음이 풍요로워집니다.

올 가을엔 그 풍요로움을 농부들이 가득 누리게 되길 바래봅니다.

누런 들판 사이사이로 낮은 구릉들이 마치 섬처럼 보입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입니다. 사방 멀리 끝없이 산들이 이어집니다.

 

<고남산 정상에서 이어지는 대간길>

 

<고남산 정상에서 바라본 운봉 들녁>

 

고남산 정상을 뒤로하고 이어 나타난 중계탑 철조망을 왼쪽으로 우회하여 내려갑니다.

숲길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작은 고개도 몇 개 지납니다.

지도를 보아도, 선답자분들의 산행기를 보아도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못하고,

그저 눈 크게 뜨고 리본만 찾으며 이어갑니다. 

어떻게든 오늘 안에 88고속도로를 건너는 사치재까지는 가야하겠기에

그리 어렵지 않은 야산 능선길을 부지런히 가다보니, 어라, 벌써 매요마을입니다.

고남산까지는 헤맨데 반하여 매요리까지는 너무 쉽게 도착하였군요.

 

마을길을 따라 그 유명한 매요휴게실에 들릅니다.

할머니가 오수를 즐기시는데, 라면을 끓여달라 부탁하고

그 사이 막걸리를 한 통 마십니다.

대간하는 분들 대부분이 들르지 않았을까 하는 곳입니다.

백두대간보호법에 대한 주민들의 생각들과 이런 저런 세상사를 주고받으며

라면을 맛있게, 막걸리를 시원하게 마십니다.

산행시 술을 자제하는 편인데, 모처럼 막걸리 몇 잔을 걸치니 기분이 고조됩니다.

물병에 물을 가득 채우고 길을 이어갑니다.

 

<매요마을을 떠나며 뒤돌아본. . . >

 

유치3거리에서 618봉을 단숨에 올라 88고속도로에 내려서고

차량이 뜸한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합니다.

이정표에 직 복성이재 4.8km, 후 여원재 12.9km라네요.

이어지는 능선을 오릅니다. 술기운에 사치재까지는 어렵지 않게 오르내려왔는데,

이 오름길은 힘이 듭니다.

내일어치 물을 가득 담아서 무게가 느껴집니다.

대간 중간중간에 막걸리 가져다 놓는 분 어디 없나요?

 

<88고속도로 사치재>

 

오름길에는 소나무들이 시커멓게 서있습니다.

10년 전엔가 산불이 났었다는데, 아직도 시커먼 모습으로 앙상하게 팔을 벌리고

채 쓰러지지 못한 나신을 보이며 무언의 시위를 하는 듯 합니다.

“늬들, 산불내지 마!”

 

<10년전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상처>

 

헬기장에 도착하여 주위를 둘러봅니다.

우측 발아래 지리산 휴게소가 보입니다.

남쪽으로 높은 봉우리가 인월의 덕두봉인가요? 아무튼 조망이 좋은 곳입니다.

 

이어 키 넘는 억새를 헤치며 전진합니다.

오늘 목표가 사치재였는데, 이젠 진도초과입니다.

맘이 편안하니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잡목과 억새가 무성한 봉우리 하나를 지나 작은 고개를 횡단합니다.

혹시 여기가 새맥이재인가 하고 자료들을 살펴보니 아직 아닌 듯 싶네요.

 

이윽고 어둠이 내려 더 이상 랜턴 없이는 진행할 수 없는 7시가 되어서

다행히 새맥이재에 도착합니다.

“새맥이재, 우측 물, 목원대 표언복”이라 쓰여진 낡은 비닐코팅지가 걸려있네요. 참 정성스러운 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우측 아래에 공터가 보여 어스름 속에 부랴부랴 텐트를 설치합니다.

무게를 줄이려고 잔머리를 굴려 생각해낸, 스스로 감탄한 기막힌 아이디어입니다.

이 방법 자체를 특허 내면 안될까요?

요즘 비즈니스 모델도 특허를 낸다는데, 이 방법도 꽤 그럴 듯 하거든요.

물론 특허를 받더라도 우리 산꾼들에게는 무료입니다.

그럴려면 왜 특허를 내냐구요? 글쎄요 . . .  그냥. . .   

 

아무튼 폴대조차 버리고 왔습니다. 이 걸 위해 스틱을 하나 샀구요.

즉 바닥용 비닐, 텐트본체, 팩5개(그나마 두개는 대못으로 대체), 노끈 3개, 스틱 하나가 다 입니다.

 

자리가 불편해서인지 쉬이 잠들지 못하고 벌레소리를 음악삼아

거의 비몽사몽으로 날을 샙니다. 안오는 잠을 어찌할 수도 없네요.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게 그럭저럭 첫날 밤을 보냅니다.

 

3시 45분에 몸을 일으킵니다. 해드랜턴을 켜고 짐과 텐트를 정리하니 4시 15분입니다.

하늘엔 둥근 구름이 가득하고 간간이 별들이 빛을 발합니다.

밤새 텐트 천장에 어리어 서서히 흐르던 달은 이젠 구름속에 숨어 희미합니다.

새맥이재를 출발합니다.

 

어둠 속에 오로지 랜턴불로 리번을 확인해가며 길을 오릅니다.

완만하지만 끝없는 오르막이 이어집니다.

작은 봉우리들을 여럿 넘고 헬기장도 지나고 또 봉우리를 넘어 칼바위같은 게 서있는데 리본이 안보입니다.

어? 알바? 조금 더 진행하니 다시 리번이 보입니다.

 

바위봉우리에 올라 배낭을 벗어놓고 어둠이 채 물러서지 않은 새벽바람을 맞으며

아침을 듭니다.

이 식사도 비즈니스모델 차원에서 특허를 내면 안될지요? 이거 다 말해버리면 안되는데. . . 

 

밀폐플라스틱용기에 누룽지를 부셔 물을 부어놓는 건데요,

서너시간 지나면 적당히 불어, 다른 큰 컵에 덜어 고추장에 비벼먹습니다.

반찬용 깻닢, 꽁치 납작캔을 두어개 가져왔는데, 이건 아껴 먹어야 하구요,

남는 반찬은 역시 소형 밀폐용기에 담아두면 다음 끼에 먹을 수 있지요.

누룽지는 인터넷쇼핑몰에서 구입했는데, 대형할인점에서도 소포장으로 팔더군요.

아마 이 방법은 특허를 내도 별로 따라하지 않을 듯 합니다.

요새 누가 이렇게 빈한하게, 불쌍하게 먹겠어요?

그러나 코펠, 버너, 연료를 생략할 수 있으니 추천할 만 합니다.

 

아무튼 식사를 하는 20여분 사이에 날이 밝아갑니다.

작은 고개를 지나 조금 가니 아막산성터입니다.

백제와 신라가 대치했다던가 하는 곳입니다.

허물어져내리는 성벽 낡은 돌에서 1500년전 이 땅에서 숨쉬던,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힘겹게 살았을 옛 사람들의 숨결을 느껴봅니다.


<아막산성터>

 

또 작은 고개를 두어 개 지나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복성이재에 도착합니다.

좌측으로는 장수군 번암면 표지판이 있고, 이정표에는 직 중치 12.1km, 후 사치재 4.8km 라고 하네요.

 

복성이재를 지나 오른 봉우리는 사방으로 시원한 조망을 선사합니다.

뒤돌아보면 오늘 지나온 시리봉? 아막산성인 듯한 곳이 보이고

가야할 방향으로는 봉화산이 보입니다. 저게 봉화산인가?

 

또 하나의 봉우리에 오르니 키를 넘는 억새가 바람에 물결칩니다.

아름답습니다.

이제 봉화산이 눈 앞에 다가섭니다. 에고. . . 저걸 어째. . .

 

봉화산은 만만치 않습니다.

무릎통증도 점점 심해집니다.

“나에게 대간은 미친 짓”이라는 1차 유랑의 결론을 결국은 반복하여 내립니다.

3차는 더 이상 없다! 없어야 한다! 

 

힘들어하며 간신히 봉화산 정상에 오릅니다.

힘들게 오른 만큼 사방 장쾌한 조망입니다.

북쪽 멀리까지 보이는데 어디가 어딘지는 모르나 아무튼 눈이 시원~해 집니다.

북으로 뻗어간 주능선이 영남알프스 신불능선과도 비슷합니다.

키를 넘는 억새 능선길을 진행하다가 잠시 임도로 내려서기도 합니다.

 

<봉화산 정상에서 이어지는 능선길>

 

10시 경에 묘 2기가 있는 이름없는 봉우리에서 또 식사를 합니다.

4시경부터 산행을 하였으니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난 셈이지요.

저보다 나이도 더 드신 분이 도착하여 반갑게 인사를 나눕니다.

이분은 새벽 3시 반에 지리산휴게소에서 출발하였다는데,

아예 오늘 육십령까지 가버릴까 하는, 정말 강철 체력인가 봅니다.

 

여러 개의 봉우리와 고개를 건넙니다.

몸과 마음이 서서히 지쳐갑니다.

곧 중재가 나타나겠지 했는데, 이제야 월경산도 못 미쳤으니 기운이 빠지고 풀이 죽어갑니다.

무지 큰 배낭을 매고 가는 남진 종주자 2명을 만납니다. 남녀입니다.

여자분도 매우 큰 배낭을 지고 갑니다. 우와~ 무서워라. . .

 

9시간 여가 지나 드디어 중재입니다.

이정표에 중치라고 쓰여있네요. 직 영취산 8.2km, 후 복성이재 12.1km입니다.

여기서는 내일어치 물을 구해야만 합니다.

 

사전 조사한대로 우측으로 조금 내려가 밭두럭 위 물 있을만한 곳을 살핍니다.

으엥? 저보다 더 커다라 보이는 개가 짖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소리에 힘이 없고 기둥 뒤로 몸을 숨깁니다.

아~ 늙고 병든 개입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곁을 조심스레 지나니 개도 가만히 저를 바라다보는 눈치입니다.

 

밭두럭에 물 나오는 샘이 있는데 위에 무밭이고 농약병이 주위에 있습니다.

분명 농약을 친 밭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라 찝찝합니다.

더 위로 올라가보지만 또랑은 말라 물기조차 없네요,

할 수 없이 무밭 아래의 흐르는 물을 페트병에 담습니다.

작은 거 하나는 어제 담은 물이 아직 반쯤 남아있어

큰 거 하나, 작은 거 하나에 농약섞인 물을 담습니다.

 

<중재>

 

<중재 우측 밭또랑물 뜬 곳. 늙고 순한 개 한마리. . . >

 

중재로 다시 돌아와 간식을 하며 쉬었다 다시 출발합니다.

이제 여기서 중고개재를 거쳐 백운산까지만 가면 내일이 수월할 거라는 희망이 가득합니다.

고도차 650m 정도입니다. 해 보자!

 

그러나 쉽지 않네요. 저에겐 마의 구간입니다.

가도 가도 백운산은 없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지친 다리를 추스리며 배낭을 집어던지며 수십 번을 쉽니다.

빌어먹을 백운산!

결국 초라한 자신을 재삼 확인시킵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턱 밑까지 차며 기운도 맥도 다 빠지게 한 후에야 백운산은 그 정상을 드러냅니다.

1278m짜리가 정말 사람 죽입니다.

치사한 놈! 아마도 백운산 이름 석자는 제 평생 잊지 못 할 것 같습니다.

 

하늘에 해가 지려면 한 시간 여가 남았지만,

새벽부터 이어지는 13시간이 넘는 강행군에 몸도 지쳤고,

이 정도면 내일 일정에 여유가 있을 듯 하고,

백운산 정상의 헬기장이 편편해 야영에 딱이다 싶고,

더 가봐야 이런 야영지를 만날지도 불투명하기에 오늘은 여기서 날개를 접습니다.

 

<백운산 정상의 특급호텔>

 

텐트를 세우고나니 딱히 할 일도 없어 그대로 텐트에 기어들어갑니다.

내일을 위해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입맛도 없고 농약섞인 물도 찝찝해서 옷만 한두개 더 걸친 다음에 드러누워버립니다.

온 몸이 뻐근합니다. 잠은 오지 않고. . .  무료합니다.

먹을 거를 담은 비닐봉지를 뒤적거리다가 생각지도 않았던 작은 술 병을 발견합니다.

야호!!!  어머니가 담근 매실주입니다.

200 cc짜리 납작페트병이라 아껴가며 조금씩 마십니다.

설탕을 넣지않아 시큼하지만, 매실 맛이 입안에 가득 남습니다.

둘째 날 밤도 이렇게 고요히 지나갔을까요?

.

.

.

.

.

 

비몽사몽간에 후두둑하며 텐트를 때리는 빗방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곧이어 텐트 천정에서 마치 스프레이뿌리는 것처럼 물방울들이

얼굴위로 내려앉습니다.

아, 비가 오는구나! 시계를 보니 밤 11시입니다. 비상사태입니다.

 

무게를 줄이려고 플라이를 빼 놓았는데,

얇은 텐트천만으로는 비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물이 줄줄 새기 시작합니다.

바람에 텐트가 펄럭거립니다.

텐트안에 널부러진 짐들을 정신없이 비닐에 싸 배낭에 넣습니다.

여차하면 튀어나갈 수 있게 등산화도 다시 신고,

이불삼아 펼친 판초를 다시 지퍼를 올려 비옷으로 덮어입습니다.

차라리 진행하는 게 나으려나 싶어 밖으로 나가보지만,

빗속에 해드랜턴 불빛은 2~3m도 나가지 못합니다.

아마 산 속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길을 잃기 쉽상입니다.

그냥 텐트에서 버텨야겠습니다.

 

한 시간 가량 내리던 비가 멎습니다.

쭈그린 채, 조금씩 젖어드는 옷으로 인해 한기를 느끼며 간신히 버티었는데

그나마 다행이다 싶은데,

그러나 잠시 후 또 비바람이 몰아칩니다.

정말 조난 직전입니다.

 

1278m인 이 산꼭대기에,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데

혼자 죽어도 아무도 모르는 개죽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 혼자 좋아서 오른 산인데 누구를 탓 할 수도 없습니다.

이를 앙다물고 버티는 수 밖에 없습니다.

 

가족들을 떠올리며 용기를 냅니다.

몸이 떨리면 떨도록 내버려둡니다. 잠시 떨다보면 가라앉더군요.

아마도 체온유지를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이겠지요.

대간길, 여러 번의 생사의 기로에서 살아야한다고 소리치며 버텼다던

불암산님을 떠올립니다.

감기에 콧물과 눈물과 빗물이 얼굴을 적십니다.

오늘 살아나간다면 이건 정말 값진 경험이 될 것입니다. 물론 살아버텨야만하구요.

 

정말 끔찍한 시간들을 간신히 버티어갑니다.

비좁은 텐트에 발도 제대로 뻗지 못하고 불편한 밤을 보냅니다.

3시를 지나, 뭐라도 먹어두어야겠기에 누른밥과 고추장, 깻닢으로 요기를 합니다.

키 낮은 텐트라 똑바로 앉지도 못하고 삐딱하게 눕듯이 앉아 먹는군요.

기상이 악화되면 여기서 두 시간 거리인 영취산까지 가서

좌측 무령고개로 하산하는 방안이 있겠군요.

 

깜빡 정신이 들어 시계를 보니 5시 15분입니다.

그나마 잠깐 잠이 들었었나 봅니다.

일단 밤을 무사히 넘겼군요.

적당한 시간입니다.

 

해드랜턴을 켜고 판초를 입은 채 밖으로 나와 텐트를 갭니다.

비에 젖어 무겁습니다.

비닐이며 팩, 노끈을 잘 정리하여 꾸려넣고 배낭을 다시 매니 5시 45분입니다.

이제 사흘째의 여정에 오릅니다.

 

내리막길은 무릎통증으로 인해 어기적거립니다.

키를 넘는 산죽밭이 이어집니다.

비를 가득 머금은 산죽을 헤치고 나가니 몇 분도 되지 않아 옷과 신발까지 철벅해집니다.

그래도 비가 조금 잦아들어 진행할 만 합니다.

남은 구간이 약 7시간 거리인데, 무릎만 버텨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살살,

그러나 부지런히 진행합니다.

 

7시가 지나 무령고개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하여 너무 기쁩니다. 이제 조금만 가면 영취산입니다.

 

7시 12분, 드디어 영취산 정상입니다.

직 육십령 11.8km 이정표가 있습니다.

사방은 안개에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질 않지만, 이제 드디어 끝이 가늠됩니다.

다섯시간 정도만 더 가면 되겠지. . .

 

비가 내리다 말다 하는데, 바람은 계속 우측에서 불어대니 오른 귀가 멍멍하고

오른 팔이 시려집니다.

사방 조망도 전혀 불가능하니 그저 앞으로 걸어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오르내림이 적어 천만다행입니다. 

 

두 시간 정도 지나서 길 바닥에 직 육십령 6.5km, 후 영취산 6.5km라는 표지판이 누워있는 곳을 지납니다.

아니 벌써 중간지점인가? 갑자기 힘이 납니다.

 

그러나 다음 봉우리인 깃대봉은 쉬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고도표에 의하면 약 200m정도를 채올라야 하는데,

가다가 오름길이 나타나면 이게 깃대봉인가 하고 힘을 내보지만 잠시 오르다 마는 둥, 깃대봉은 너무 멀리 있나 봅니다.

결과적으로 아까 중간지점 표지판은 잘못된 것 같더군요. 그 이후 육십령까지 세시간 반 정도 걸렸거든요.

 

<운무에 가려>

 

아! 저 멀리 봉우리! 저게 마지막 봉우리인 깃대봉입니다.

고도차 200m라는데 한 4~500m는 됨직합니다.

지친 산꾼의 기를 꺽는 높이입니다. 에고~.

 

억새 능선에 들어서니 그제야 햇볕이 들어 판초를 벗어 배낭에 넣습니다.

그러나 풀에 맺힌 이슬에 바지가 다시 철벅해집니다. 에이씨~

 

낑낑대고 마지막 힘을 내어 기어오르니 깃대봉 정상입니다.

덕유산 할미봉, 서봉, 남덕유산 조망안내판이 서 있습니다.

북쪽으로 저 멀리 구름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며 할미봉을 감추었다 말다 합니다.

사진을 찍으려 잠시 기다리지만 서봉과 남덕유산 정상부는 끝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군요.

아무튼 저 곳은 앞으로도 갈 마음이 없습니다.

드디어 2구간 완료가 눈앞입니다.

이제 내려가기만 하면 되겠지요.

 

<깃대봉 정상에서, 2차 사흘간 유랑에 찌든. . . >

 

<구름에 가린 덕유산 서봉과 남덕유산, 가운데는 할미봉>

 

작은 봉우리 하나를 넘어 내려가니 샘물이 있습니다.

오염된 몸에 맑은 물을 가득 채웁니다.

페트병의 농약 섞인 물을 버리고 깨끗한 샘물로 채웁니다.

 

이후 내림길은 너무 편안한 길입니다.

여원재에서 여기까지의 구간에서 대간길은 거의 모든 봉우리들을 우회로 없이 고지식하게 타넘었는데,

깃대봉부터의 하산길은 작은 봉우리조차 살짝 우회하여 편안하게 내려서게 하니,

마치 그동안 애 많이 쓴 산꾼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인가 싶네요.

 

언제 그랬냐는 듯 싶게 날도 개이고,

경사진 내림길에서는 뒤로 걷기도 하며 살살 내려오니 육십령입니다.

 

드디어 2차 유랑도 끝입니다.

 

<육십령 고갯마루>

 

육십령 고개마루의 넓직한 광장에 8각 정자가 세워져있고 만국기가 펄럽입니다.

오늘 도지사가 방문하여 무슨 행사가 있대나 봅니다.

육십령루라 현판이 걸린 2층 누각에 올라 할미봉을 올려다보고

발아래 들을 굽어봅니다. 장계 땅이겠지요.

도로를 따라 서상 쪽으로 내려가며 덕유산 등산로 초입을 살펴봅니다.

 

서상방향 휴게소에 들러 식사를 주문합니다.

문명세계로의 귀환입니다.

 


 남은 이야기

 

지리산 주능선길은 반 이상이 너덜길이었는데,

이 구간은 키를 넘는 억새밭, 산죽이 도처에 기다리고 있어 진행에 애를 먹었습니다.

특히 비온 후에는 신발까지 철벅해져버리니 발바닥이 견디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풀에 쓸리고 모기에 물려 온 몸에 가려움만 남았습니다.

턱밑하며 팔이며 손등이며 무릎근처 등 집에 돌아와서도 밤새 긁느라 시간을 보내는군요.

이거 시간만이 해결하겠지요?

 

백두대간보호법이 시행되면 마치 그린벨트처럼 대간 주위의 논밭이 묶일 터이라,

이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절박한 목소리들을 여기저기 걸린 플래카드에서,

휴게소 두 곳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대간 산행도 금지된다는 말도 있던데, 보전, 개발, 이용, 보상 등 여러 사람들에게 두루 이익이 되는 현명한 대안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대간가는 방법도 여러가지더군요.

마주친 남진 종주자 두 분의 경우처럼 어마어마한 짐을 지고가는, 아마도 연속종주일 듯 싶은 분들도 있고,

저처럼 며칠어치 먹을 거, 잘 거를 매고 가는 경우도 있고,

하루치 배낭만 가볍게 지고 멀리 가는 경우도 있을 테구요.

혼자 가는 분도 있고 단체로 이동하는 분들도 있고,

뭐 급수가 높고 낮은 게 아니라,

자신의 형편에서 가능한 방법으로 해보는 것이겠지요.

다 산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산에 드는 것이니 딱히 어느 것이 최선이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만 하겠네요.

혼자 가는 산길에 짐승을 만날 수도 있고,

발이 삐끗하여 걷지 못할 지경에 처할 수도 있고,

밤이 되어 기온이 내려가면 저체온증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휴대폰도 되지않는 곳이 많지요.

우의와 비상식량도 챙겨야하고,

지도, 나침반, 랜턴, 예비배터리는 정말 필수적이구요.

그러면서도 감내할 만한 무게로 경량화해야만 하겠지요.

 

정말, 정말, 정말로 이제 대간은 잊어야 합니다.

마약과도 같은 산행의 충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두 무릎과 발바닥 통증이 악화되어 자칫하면 심각한 지경에 빠질 우려가 큽니다.

대간길을 이어가 미시령을 넘어 진부령까지 가고싶은 갈망으로

여러 자료와 파일들을 구하고 정리하고 예습하였는데,

여기서 접자니 안타깝기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살아갈 많은 날들을, 두고두고 산에 들어 사랑하고픈 마음에서,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대간을 잊으려합니다.

아마 동네 뒷산 오르는 일도 자제해야 할 테구요.

“ㄷ”자도, “ㅅ”자도 말고 오로지 평지의 “ㅍ”자만 찾아야 될 것 같습니다.

 

보잘 것 없는 놈에게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모두, 탈없는, 아름다운 산행 이어가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