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언제 : 9월3일 03시40분 -9월4일 12:30분(1박2일)
ㅇ 누구랑 : 선배와 둘이서
ㅇ 걸은 길
   (첫날)
   화엄사 - (알바) - 노고단 - 임걸령 - 반야봉 - 삼도봉 - 토끼봉 - 연하천 - 형제봉 - 벽소령 - 세석
   (둘째날)
   세석 - 장터목 - 천왕봉 - 중봉 - 치밭목 - 무재치기 - 유평리

 

ㅇ 산행기
새벽 3시20분
다른 곳에서는 몇 분전에 안내방송을 하더니 막상 구례구역은 아무말없이 그냥 기차가 선다. 아마 여객전무도 깜박 졸은 듯-. 제각각의 고민과 희망을 배낭에 넣은 사람들이 줄줄이 내려선다
22시57분 영등포발 여수행 기차속에서 억지로 눈을 부쳤지만 썩 깊은 잠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수학여행온 중학생같은 기분이다. 내가 잘 해 낼 수 있을까, 해 내야될텐데--
개찰구를 빠져나와서 마주치는 상큼한 공기가 참 좋다.
시작이다. 꿈꿔왔던 지리 그 지리산 종주를 말이다
성삼재를 외치는 택시 앞쪽으로 버스가 정차해 있길래 화엄사행을 물었더니 이 차는 바로 가지 않고 터미널 가서 갈아타야 한다고 한다. 시간이 아까워 다시 택시로 돌아와  '화엄사! 화엄사!'하니 택시 기사가 답을 한다. 1인당 5천원, 성삼재까지는 만원이란다. 13킬로인데 섬삼재에 비해 좀 비싸단 생각을 해보지만---
새벽길을 질풍처럼 달린다. 화엄사 입구 매표소를 통과하고도 한참을 달려 이곳서 시작한다고 알려준다
택시타길 잘했다. 기다려서 버스를 탔다면 시간 소비도 많고 내려 한참을 걸어야 하고, 매표소 문을 열었다면 그 돈이 그 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택의 기쁨은 여기까지인가?
둘이 부지런히 돌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칠흑같은 어둠으로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어디에선가 길이 끊기고 두어번 다시 내려오기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등산학교에서 등산은 있는 길을 가는게 아니라고 배웠다. 지도를 보면서 목표지점을 찾아가는 것. 하지만 지도에서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모르지 헷갈릴 수 밖에--.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어쭙잖은 실력으로 오른쪽 능선이라고 막 우겼는데 그때 왼쪽으로 붙었으면 좀 더 쉬었을 지도 모르겠다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4시간 7킬로라던데 고르쇠물을 받으러 설치해둔 검정 파이프를 타고 가기도 하고 어디에선가 그거 마저 없어져서 능선을 바라보고 오르기를 두세시간. 동이 터오고 하늘이 보이는 곳에 올라서니 작은 오솔길이 있고 노고단이 왼쪽으로 2킬로는 족히 떨어져 있는 듯 싶다. 멧돼지가 곳곳에 흙을 파 엎은 곳도 많았고-
드디어 송신소 근처에 오니 길 바깥에 출입금지 표지판이 있다.  '출입금지, 이곳은 반달곰 서식지이므로 출입을 금함'
송신소 갈림길에 7시34분에 도착했으니 꼭 4시간 걸린 셈이다. 아껴야할 기운을 알바하느라 다 써버려서 정말 걱정이 된다
하지만 보통 4시간 걸린다는 길을 똑같이 4시간에 왔으니 정상대로라고 위안을 삼고--
노고단에서 지리의 운무를 구경한 다음 목을 좀 축이고 심호흡 한 번으로 각오를 다지며 출발 ---
임걸령샘터에 도착(8:50)하여 아내가 싸 준 김밥 한 줄로 간식을 하고(알바하면서 한 줄은 먹고)
다행이다. 엊저녁 아내가 김밥을 말아주었기에 식사시간만은 단축할 수 있었으니
반야봉을 비켜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원래 계획대로 가기로 - 모든 코스를 가장 먼 코스로 - 했기에 삼거리에 배낭을 놓고 부리나케 올라보니(10:00) 멀리 내가 걸었던 길과 앞으로 내가 가야할 길이 눈 앞에 펼쳐진다
가끔은 이렇게 내가 걸었던 길을 뒤돌아보면서 내가 가야할 길을 헤아려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성 싶다
삼도봉(10:40)에서 고향쪽으로 사진을 한 장 찍고 약간의 간식
토끼봉을 힘겹게 오르며 총각샘을 찾았으나 실패하고 연하천산장에서 점심 김밥을 또하나 풀었다(13:00)
신비롭다. 어찌 그 높은 곳에 샘이 솟을 수 있는지. 어찌 적당한 거리마다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베풀어 주셨는지
흐르는 작은 개울에 발도 담그고(연하천샘물에 담겨져 있는 맥주는 모든 등산객에게 너무도 큰 유혹일게다)
형제봉을 넘어 애초 잠잘 곳으로 정했던 벽소령에 도착했다(15:00)
원래 대원사에서 출발하여 역종주를 하려고 벽소령에 예약을 했었는데 진주에서 교통편도 마땅치 않고 하여 결국 통상코스를 선택하기로 하고 세석으로 예약을 변경하였었다
벽소명월대신 아직은 여름의 열기가 남아있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누군가의 기억을 좇아 우리도 백도 통조림을 사먹었는데--- 백도가 그렇게 맛있는 줄을 정말이지 처음 알았다.  복숭아의 씹히는 맛과 그 달콤한 설탕물은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추억이리라
마당의 빨간 우체통을 보면서 1인당 4줄씩, 가지고 온 8줄 김밥의 마지막 남은 한줄을 먹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세석까지의 산행
결코 지리산 산장은 쉬 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나타날 거 같은 느낌을 주지만 멀리서 그 존재만을 보여주고는, 내 모습을 온전히 보려면- 나를 품에 안으려면 적어도 그런 노력은 요구된다는 듯 힘겹고 지칠 때 우리 앞에 나타난다
구간 마지막에 있는 세석은 정말 그러하였다
다행히 선비샘이 있어 지친 발걸음을 조금 멈출수 있게 해 주었지만--
세석에 도착하다(18:10)
30여킬로를 14시간30분동안 걸었다. 식사에 30분이상은 쉬지 않았으니 실 산행시간이 12-13시간 정도는 될 성 싶다
예약을 확인하여 자리를 배정받고 밥을 해 먹고 수건을 빨아 몸을 좀 닦고 --
세석에도 빨간 우체통이 있었다. 엽서를 물으니 지리산지역 사진엽서는 3천원, 우표(특별히 제작된)는 400원씩
급히 한 묶음을 사서 자리에 들어가 막 쓰려하니 소등이란다
다시 엽서를 들고 불있는 곳을 찾아가니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불을 끄는 거 같다(9시에 전체 소등)
자리에 누었다. 이곳 저곳 피곤기가 배어나는 숨소리가 가득한데 습관인가 눈이 말똥말똥하다
밖에 나와 하늘을 본다
싸한 바람과 함께 가까운 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진다

 

새벽 3시. 옆자리 뒤척이는 소리며 선배의 일어나자는 말소리에 짐을 챙긴다
앞 마당에 내려가 시원한 샘물을 한모금 들이키고나니 지리산 정기가 온 몸을 휘감는다
3시30분 세석을 출발했다. 촛대봉 - 장터목산장(4:45)을 거쳐 천왕봉에서 일출을 기다린다(5:45)
2대쯤 덕을 쌓은 것인가
6시10분쯤 일출이라던데 6시20분이 다 되어서야 산을 넘고 구름을 조금 넘어서서야 태양이 그 장엄한 얼굴을 내 보여준다. 해다. 왜 이곳 천왕봉에서 한국인의 기상이 발원했다고 하는가?
중봉-하봉을 거쳐 치밭목산장에서 햇반과 라면으로 아침을 먹었다(8:15-9:15)
아내가 묵은 김치를 정말 맛잇게 볶아주었는데 세석에서 젊은이들 저녁반찬과 술안주로 기부(?)하고는 막상 이곳서는 곁의 아저씨한테 얻어먹었다
무재치기폭포를 거쳐 한바탕 마무리 산등성이를 힘겹게 넘었다
지리산 다래를 몇 개 따서 나 하나 먹고 애들 선물로 배낭에 잘 넣었다
유평리 직전에 오늘 산행의 마무리
시원한 지리산 자락 계곡물에 몸을 식힌다(11:30-12:30)
15킬로 남짓한 거리를 9시간, 실산행 6시간 정도

 

유평리에서 진주로 나오는 길에 도와주신 분을 잊을 수 없다
산행의 종점을 알리는 철문을 나와 길가로 내려서서 5분쯤 걸었을까, 뒤에 차가 오길래 손을 들었는데 진주에 사는 부부가 장모님을 모시고 드라이브를 나온거란다. 딸만 다섯을 두셨다는 어머님 말씀속에서 집안의 평화가 가득 묻어나온다. 첼로를 켠다는 따님이며, 한국항공우주산업에 근무하는 사위며-- 간간히 전화를 하는 딸들(손주)까지-- 진주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정말이지 행복한 산행을 마감하였다(13:30분 진주시외터미널 도착)
그 분들과 같이 산행을 한다면 아마 지리산 일출보기는 따논당상이리라
약속대로 넷째따님께 좋은 배필을 구해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하며 다시 한번 그 분들께 감사드린다

 

덧붙인다면
도반이라고 했던가, 같이 걸었던 선배께 마음속 깊이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선배가 아니었다면 이번 산행을 이렇게 흡족하게 마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종주산행이어서 참으로 걷는데 열심이었던거 같다. 통독후에 정독이 필요한 거처럼 찬찬히 음미하며 이곳저곳 지리산의 깊이를 아는 우보행을 더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