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따라 황악산 직지사Photo 에세이
-2006. 5.14 경북김천 황학산/김천파크주차장-숲속 길-갈림길-운수봉-갈림길-운수골-능여계곡-직지사/'한국산하' 모임

 

*. 왜 '금천(金泉)'이 아니고 '김천(金泉)'일까
  On Line인 '한국산하' 사이트를 인연으로 하여 알고 있던 사람들을 Off Line에서 만나려고 일산에서 김천에 달려왔더니, 김천의 분들이 스카프에, 떡과 술을 부산 분이 홍어회를 가득 준비하고 직지사 주차장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다.
  아, 반가운 사람들-. 오늘은 산보다 서로가 그리워 이른 새벽을 뚫고 전국에서 달려온 분들이다. 뒤풀이로 이 장소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주차장 오른쪽 소나무 숲길 능선을 들머리로 산행을 시작한다.
길은 교행이 어려운 좁은 길로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낙엽송 잎과 낙옆이 덮인 푹신푹신한 오름길로 단순한 능선 오름길이지만 전국에서 손한 번 잡아보고 싶어서온 우리들이라서 심심한 줄 모르겠다.
등산 내내 나무는 초여름의 뜨거운 햇볕을 가려주었고, 시원한 바람은 땀을 거두어 가고 있었다.


  김천에 도착하여 김천 분들에게 '김천의 한자가 무슨 무슨 자인가?' 물었더니 쇠 '김(金)', 샘 '천('泉) 자라 한다.
보통은 '金' 자를 성 '김(金)', 쇠 '금(金)'이라 하는데 왜 '금천'이라 하지 않고 '김천'이라 했을까?
  -문헌에 의하면 김천이란 이름은 옛날 김천지방에 '금지천(金之泉)'이라는 샘물이 있다는 데서 유래된다. 이 샘 근처에서 금이 난다해서 금지천이라 했다는 전설이다.
  -임란 때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이 이 고장을 지나다가 이 샘물 맛을 보고 자기 나라 중국 금릉(金陵) 땅에 과하천(過夏泉)의 물맛과 같다고 한 후로 금지천(金之泉)을 과하천(過夏泉)이라고도 불렀다.
김천을 '금릉(金陵)'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이야기에서 연유된다.

과하천이 지금은 어디일까? 그 위치를 모르게 된 데에도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이 금지천에서 나는 금을 해마다 나라에 공물로 바쳤는데 공물 양이 늘어나자 백성들이 그 노역에 견딜 수 없어 샘을 메워 버려서 지금은 거기가 어딘지 모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김천시 남산동 암벽에 '금릉주천(金陵酒泉)'이라 새겨져 있는 ‘과하주 샘’이 있어 이 샘물로 만들어지는 과하주는 국내 3대 명주라고 하지만 거기가 거기는 아닌 것 같다.

민간어원설로 성 '김(金)', 쇠 '금(金)'에 대한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온다.
  -음양오행설이 덕목으로 사회를 지배하던 이조 초였다. 그 음양오행에는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이라는 게 있다.
그 상극(相剋) 중에 '金剋木(금극목)'이 있어 이에 의하면 '金'(금) 자 성을 갖은 이가 '木'(목)자 성을 가진 이를 이긴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라면 나라가 금씨에게 망할 큰 일이라서, 고심 끝에 종래에 '금'씨라 하던 것을 성 '김'씨라고 바꾸어 구별했다는 것이다.
  -그 반대로 이런 이야기도 전하여 온다. '김'이란 음의 한자가 없어서 '金' 자를 빌어 성 '김'이라 했다는 것이다.
김씨 성가진 이들은 참고로 기억해 두어야 할 일이다.
이상을 종합하여 보면 옛날에 '금천'(金泉)이 '김천'으로 변한 것 같은데 이것을 국어학적으로 합리화 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국어학에서 치음(齒音) 아래 중설모음 'ㅡ'가 전설모음 'ㅣ'로 변하는 현상을 전설모음화 현상이라 한다. 발음을 편하게 하려는 자연스런 현상인데, 그 일환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보다 간단히 金의 훈(訓)과 음(音)을 쇠 '금', 성 '김' 하듯이, 여기에 하나를 더하여 지명 '김' 하면 간단하겠지만, 이 고장에는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해 주는 연구를 한 학자는 없는가.

*. 황악산 전설
출처: 한국의 산하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황악산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속리산 맥이남쪽으로 내려와 추풍령에서 크게 끊어졌다가 다시 솟아나 황간(黃澗)의 황악산이 되었다.
  -황간은 추풍령 서쪽 땅이다. 황악산과 덕유산 동쪽의 물이 합쳐져서 감천(甘川)이 되어 동쪽으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황악산의 어원을 우리 ‘한국의산하’ 홈페이지에서는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 예로부터 학이 자주 찾아와 황학산(黃鶴山)으로 불렀고, 지도상에도 그렇게 표기되어 있으나, 직지사의 현판을 비롯하여, 이중환의 擇里志(택리지) 등에도 황악산(黃岳山)으로 명기되어 있다.
절의 문패라고 할 수 있는 직지사 일주문(一柱門)에 쓰여 있는 ‘黃岳山直指寺’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왜 학이 자주 찾아와서 이름 하였다는 황학산(黃鶴山)이 왜 백학산이 아니고 황악산(黃岳山)으로 바뀌었을까?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는 '악(嶽)'이 들어가는 산은 설악산, 월악산, 치악산, 운악산 등과 같이 암릉이 빼어난 바위산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위의 글처럼 황악산은 육산으로 산세가 유순하고, 두루뭉술하고 능선이 완만하며 골이 깊은 산으로 ‘嶽’(악) 자가 붙을 만한 산이 아니다.

  거기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이가 있다.
  -황악산은 삼도봉(1.177m), 민주지산(1,242m)과 함께 백두대간[소백산맥]의 허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동으로는 영덕, 서로 서천, 남으로 남해, 북으로 강원도 홍천까지 똑같이 130km의 직선거리를 가지고 있는 중심 산으로, 1111.4km의 높이로 웅장하게 우뚝 서서 남북으로 신선봉(944km), 형제봉(1040km), 황악산, 백운봉(770km) 등을 주위에 거느린 웅장한 산이라서 큰 산 ‘嶽’(악) 자를 붙인 것이다. 그럴 법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 전의 황학산은 왜 항학산(黃鶴山)이라 불렀을까?
‘예로부터 학이 자주 찾아와 황학산(黃鶴山)으로 불렸다고-.’라는 말 때문에 그렇겠지- 한다면, 학은 백학이 맞을 텐데 왜 ‘黃鶴’(황학)일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다음은 우리말 큰 사전[한글학회]에 나오는 설명이다.
-황학(黃鶴): 전설에 나오는 누런 빛깔의 학.
황학이 들어가는 말은 우리나라에도 중국에도 많이 나온다.
직지사 비로전 앞의 종각 이름이 황학루요, 서울 사직공원 뒤에 인왕산 기슭에 있는 사정(射亭)은 이름이 황학정(黃鶴亭)이다.
중국의 양자강을 조망할 수 있는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는 누각도 황학루(黃鶴樓)다.
게다가 ‘黃’이란 한자는 누렇다는 뜻만이 아니다. 자전(字典)을 찾아보면 ‘山名 黃’, ‘地名 黃’, ‘馬名 黃’으로 산 이름, 땅 이름, 말 이름에도 黃(황)이란 글자가 쓰이고 있다. 산과 땅과 말의 색깔이 누레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신선 같은 학이 많이 찾아온 산'이라는 말로 유추해 볼 수가 있다.

*. 산상의 황홀한 음악 잔치
  직지사는 몇 번 왔으나 확악산은 처음이라서 정상을 욕심 내다가 운수봉을 지나 갈림길에서 식사하는 중간 탈출 팀과 합류하고 말았지만 그러나 새옹지마(塞翁之馬)라. 나는 두 가지 행복을 맛보게 되었다.
한국산하 운영자와 관리자와 함께 한 찬란한 성찬(聖餐)이 그 하나요, 산상(山上)에서 황홀한 음악을 만나게 해준 윤치술 실장과의 해후다.
배낭 속에 들어갈 크기의 장난감 같은 키타 모양의 우크렐레와 연주용 하모니카로 연주해 주던 음악의 잔치였다.

 50년대와 60년대를 유행하던 '로키의 봄이 오면', '홍하의 골짜기' '여행자' 등등 우리는 갑자기 나타난 그의 등장에 황홀하였다.
황악산은 무대가 되고, 정상을 향하던 산꾼은 관객이 되어 발이 묶이고, 혹은 춤으로, 박수로, 나는 맞추어 준비해간 보이스 펜(Voice Pen)으로 녹음을 하며 정상을 가지 못해서 조금은 섭섭해 하던 우리들의 마음을 행복으로 돌려 놓고 있었다.
남들이 부러워 하는 재주를 한 가지쯤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아낌없이 흔쾌히 나누어 준다는 것은 얼마나 부러운 일이냐.
하산하면서 녹음한 그분의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이 기회 그 분이 운영하는 백두산 닷컴(WWW.go2744.com)을 소개하고 싶다. 천지를 굽어 보며 백두산 서파에서 북파까지 백두산 종주도 하고, 산 상의 연주도 들어 보시라. 그때 행운이 있으시라. 천지를 왜 천지라 하는가. 천지를 보고 싶어 천지를 찾아가도 못본 사람이 천지라서 천지라 한단다.


*. 직지사 관람 정 코스
    먼저 간 팀은 정상까지 2.3km를 갔다가 다시 그 길로 되돌아 내려와야 하니 우리들보다 4.6km나 더 걸어야 하는 것이어서 나의 시간 여유는 작작하였다.
그래서 내려오다 만나는 많은 암자들을 다 들렸지만 중암이나 은선암 같이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는 곳도 있었다.
하산하면서 암자와 직지사를 거꾸로 들리다 보니 소설을 거꾸로 읽는 식이다.
그래서 여기서부터는 내가 본 차례보다 편의상 매표소부터 차례로 직지사 이야기를 풀어나가야겠다.
직지사 사찰 내에는 보물 급 문화재로 석조 약사여래좌상과 3층 석탑 셋 대웅전 내에 있다는 삼존불탱화 3폭등으로 많다. 가급적이면 요번 기회에 빼놓지 않고 보고 와야겠다.

ㅇ직지사 산내의 암자들(직지사 기점)
북암 : 0.9km/삼성암: 6km/ 백련암: 1.5km/ 운수암/ 1.9km 중암(화장암): 1.5km
ㅇ직지사 관람 코스
산문- 매표소- 일주문- 대양문- 금강문- 천왕문- 대웅전- 관음전- 명부전- 웅진전- 사명각- 비로전- 약사전- (조사전)- 성보박물관- (극락전)






 
백련암보궁명적암명적암전망중암 운수암 운수극락보전


*. 직지사 약수정 
  우리나라에는 생기처(生氣處)로 유명한 곳이 몇 군데 있다.
  '기(氣)'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만물생성의 기원이 되는 힘, 생활 활동의 힘이다. 원기, 정기, 생기, 기력을 총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 기(氣)가 퐁퐁 솟아 나온다는 곳을 생기처(生氣處)라고 하는데, 태백산 문수봉, 오대산 적멸보궁과 함께 황악산 직지사가 그 중에 하나다. 예로부터 말하기를 다친 짐승들이 와서 생명력을 충전하고 가는 곳이 직지사라 하였다.
  그래 그런가. 직지사의 약수정은 지리산 뱀사골, 강원도 황지못 등과 함께 한국의 명수로 유명한 곳이니 구기 한 잔은 빼놓지 말고 마시거나, 수통에 담아올 일이다.
그곳이 어딘가? 일주문 가기 전에 만나는 다리가 있으니 건너기 직전 왼쪽 '한국의 명수 직지사 약수정'이란 돌 이정표 따라 가시라.

*. 직지사(直指寺) 전설 

조선 8대 사찰 중에 하나인 직지사(直指寺)에는 세 가지 설의 유래담이 있다.
  - 아도화상이 경북 구미에 도리사를 지을 때였다. 손을 곧게 들어 손가락을 곧게 뻗어 황악산을 가리키며 '저 산 아래에 큰 절이 들어설 좋은 절터가 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 고려의 능여선사(能如禪師)가 직지사를 중창할 때에, 측량을 자로 하지 않고 손으로 쟀기 때문이다.
  - 불경 중 선종에서 나오는 말인 '直指人心 見性成佛‘(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위 세 가지 설 중에 손가락을 곧게 뻗어 가리켰다거나 자[尺] 대신 손의 뼘으로 쟀다거나 하는 말은 재미로 지어낸 말 같고, 그 중에 마음이 가는 것이 직지사 산문(山門) 앞의 직지사 소개 글에 있는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유래하였다는 어원이 정답인 것 같다.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란 교리(敎理)로나 계행(戒行)을 생각하거나 닦지 않아도 자기의 본성을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 고구려 스님 아도화상(阿道和尙)
직지사 산문 앞의 사기(寺記)에 의하면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AD 418)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그 걸 역사적인 면으로 보면 석연치가 않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누구인가.
  -위나라 아굴마 아버지와 고구려의 고도령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고구려 중으로 5세에 출가하여 어머니의 명에 따라 263년인 미추왕 2년에 신라에 와서 박해를 무릅쓰고 불교를 전파하던 스님이다.
신라 성국공주의 병을 고쳐 준 공으로 미추왕으로부터 불교 전도를 허가 받고 흥륜사를 지었다는 스님이다. 그러나 미추왕이 죽은 후 박해를 피해서 땅굴을 파고 살다가 죽은 스님이 아도화상이다. 불교를 신라에 전파하다가 죽은 순교자 이차돈보다 무려 160여 년 이전의 스님이다.

  그런 시대를 살다간 스님이 직지사까지 짓는데 관여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란 말이다. 그래서 직지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기를 살다간 능여선사가 중창하였다고도 하지만 창건하였다로 보는 이도 많다.

아도화상이 서산군 냉산에 아래 있는 모례집에 머물면서 포교를 하였는데 그 모례는 오늘날의 '절'의 어원 이라는 흥미있는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毛禮'(모례)는 이두식 한자로 털 '毛'(모) 자이니 '털례'였을 것이고 이것이 '털례-덜례-절례'로 '례'가 생략되면서 절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어로 절을 '데라'라고 하는데 이 역시 모례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라 한다.
나는 그동안 절에 가면 절을 많이 해서 절이라고 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 왕건과 능여선사(能如禪師)
능여선사(能如禪師)는 누구신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 패권을 다툴 때였다. 왕건이 팔공산전투에서 대패할 때 신숭겸이 태조의 의상으로 바꿔 입고 대신 전사하는 사이, 구사일생으로 직지사 근처에 이르러 팔공산 부근의 인심이 견훤에게 기운 것을 한탄할 때였다.
그때 이 산 중에 능여라는 도통한 선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능여대사는 당시의 軍靴에 해당하는 2,000 켤레의 집신을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삼아 전해 주며, 큰 집신 짝을 만들어 요해처(要害處)에 놓아 두어이를 밟고 가게 하여 태조를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면서, ‘말띠 해가 되면 큰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적인 덕담으로 위로 해준 스님이 능여선사다. 예언대로 8년 후 갑오년에 후백제를 제압하여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다.
이에 감사하는 뜻으로 능여대사를 왕사(王師)로 삼고 직지사를 크게 중수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직지사는 1,6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古刹) 중의 고찰(古刹)인 것을 생각하고 절을 둘러볼 일이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이다. 황악산은 학처럼 남북으로 형제봉(1035m)과 운수봉(735m) 능선을 날개로 펴고 있는데, 거기서 흘러내리는 물이 문바위골과 운수골로 둘이 합수하여 이 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능여계곡을 형성하며 흐르고 있다.
그 능여계곡의 ‘능여’는 물론 능여선사를 기려 명명한 골짜기인 것이다.

*. 직지사 산문(山門)
  직지사에서 대웅전까지 이르는 길에는 문이 많다. 그 문이 산문으로부터 시작된다.
매표소를 겸하여 있는 규모가 산문으로는 대형이다.
'東國第一伽藍黃嶽山門'이란 이 고장 출신 깅응현 서예가의 글씨가 멋으로 크기로 마음껏 직지사를 뽑내어 자랑하고 있다.
매표소 건너편에서 시조 한 수도 직지사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었다. 김천이 고향인 시조 시인 백수 정완영의 시비다.
 
                                                매양오던 그 산이오 매양 보던 그 길인데도 
                                                철따라 따로 보임은 한갓 마음의 탓이랄까 
                                                오늘은 외줄기 길을 낙엽마저 묻었고나

                                                뻐꾸기가 너무 울어싸 절터가 무겁더니
                                                꽃이며 잎이며 다 지고 산날아 적막해 좋아라
                                                허전한 먹을 장발을 입고 숲을 거닐재
                                                                                         -'직지사' 일부

다음 문이 대양문, 금강문, 천왕문으로 이어지는데 그 중 금강문의 전설이 유별나다.
  -옛날 합천 어느마을에 떠돌이 대처 승이 있었다. 촌장은 그를 탐하여 싫다는 그를 완력으로 사위를 삼아버렸다. 그리곤 장삼과 승복을 빼앗아 깊이 감추어 버렸다. 도망할까 두려워서였다. 그의 아내는 아들 낳은 3년 뒤라서 안심하고 장삼과 바랑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더니 다음 날 소식 없이 남편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남편을 찾아 헤메던 그의 아내는 남편과 비슷한 스님이 직지사에 있다는 말을 듣고 직지사 일주문을 지나 절에 들어가려다가 지금의 금강문 자리에서 갑자기 피를 토하여 죽어 버리고 말았다. 그후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부인이 죽은 날이되면 직지사 스님들이 부인이 죽은 자리로 누가 부른 듯이 달려나가 죽어 갔다. 그래서 직지사 스님들이 그 자리에 사당을 짓고 부인이 죽은 날이면 제를 지내며 원혼을 달랬다. 그러다가 어느 고승의 말에 따라 금강력사로 하여금 원귀를 막도록 지은 문이 지금의 금강문(金剛門)이다.

*. 사명대사(四溟大師)와 사명각(四溟閣)
직지사는 동국(東國) 굴지의 호국본산(護國本山)으로 수많은 고승 대덕을 배출해 내던 절이다. 따라서 그 많던 당시 43동(125동이라고도 함)의 건물이 임진왜란 때 다 불태워 버려서 천불전. 천왕문 자하문만 남았다. 그것은 임란 당시 승군대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 이가 바로 서산대사의 제자 사명당이었고, 그 사명당은 이 절에서 출가(出家)하고 주지를 역임한 스님이어서 왜놈들은 화풀이 삼아 적개심으로 방화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명각(四溟閣)이 직지사에 있는 것이니 둘러보되 꼭 사명대사의 영정을 보고 올 일이다. 사명각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직지사는 동국(東國) 굴지의 호국본산(護國本山)으로 수많은 고승 대덕을 배출해 내던 절이다.
사명대사(四溟大師)는 누구인가?
사(私)를 버리고 오직 나라와 계레를 위한 등불로, 호국불교의 화신이신 사명당에는 이런 전설이 전하여 온다.
  - 이조 명종 때 여름이었다. 이절의 주지 신묵(信黙) 스님이 공양을 들고 식곤증으로 잠깐 눈을 붙였을 때였다. 절 앞 큰 은행나무 밑에 누런 황룡(黃龍)이 서리고 있는 꿈을 꾸고 이상하여 나가보니 어떤 할아버지가 비범하게 생긴 아이를 대리고 있었다. 
그래서 절에서 하룻밤을 함께 묵게 된 이 아이는 15~6세에 부모를 다 여의고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던 속명이 임응규란 소년이었다.
신묵 스님은 응규를 상좌로 삼고 선(禪)을 주어 불법에 귀의 하게 하니 이 분의 법명이 유정(惟政)이요, 법호가 사명(四溟)이었다.
사명당은 그 후 3년 뒤인 18세에 승과(僧科)에 장원급제하고 30세에 돌아와 스승의 뒤를 이어 직지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의 고향인 경남 밀양군 무안면에 사명당영당비((四溟堂影堂碑)가 있는데 나라의 큰 일이 날 때마다 몇 말씩의 땀을 흘린다는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같은 이야기가 표충사비에도 전하여 오고 있다.
  그가 고향을 떠나올 때 지팡이를 꽂아 놓고 오면서,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나도 살아있으리라' 했다는데 지금도 그 나무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임란 후에는 국서를 가지고 왜왕을 만나 포로 3,500여 명과 약탈당한 문화재를 되 찾아와서 생불이란 칭송을 받는 스님이시다.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과의 일화로 이런 전설도 전하여 온다.
  -사명당이 왜장 가등청정을 만나러 진영으로 들어갈 때 위협하기 위해서 수리(數里)에 걸쳐 양쪽에 기치창검을 세워 놓았으나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다음은 그때 가등청정과 사명당이 주고받은 이야기다.
“귀국에 보물이 있는가?”
“그대 머리가 오직 보물이다.”
“왜 그런가?”
“너의 머리에 천금만호의 상이 걸려 있으니 어찌 보물이 아니겠는가?”

고대소설 ‘임진록’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사명당이 일본 사신으로 갔을 때 왜왕은 사명당을 큰 무쇠 막에 넣고 숯불을 피워 데워 죽이려 하였다. 한참 후 문을 열고 보니 사명당의 수염과 눈썹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하였다. 사명당은 얼음  ‘氷’(빙) 자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가 난 왜왕이 벌겋게 달군 무쇠로 된 말에 타라고 요구하였다. 사명당이 요술로 마른하늘에 비를 오게 하여 식히고 앉았다. 그 비가 그치지 않고 오는 바람에 왜국이 다 물에 잠기려 함에 할 수없이 왜왕이 항복을 하였다. 사명당은 매년 사람 가죽 3백장과 불알 서 말씩을 조공으로 바치도록 하고 전승장군이 되어 돌아왔다.
  황당무계한 이야기 같지만 우리 민중들이 임진왜란 때에 오직 고생을 하였으면 이런 이야기를 지어냈겠는가. 그 적개심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 대웅전 후불 탱화
큰 大(대), 영웅 웅(雄), 말 그대로 불교의 큰 영웅이신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신 법당이다. 대웅전 내에는 주불 석가모니불과 좌우에 협시 보살로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지만, 직지사 대웅전은 직지사대웅전삼존불탱화로 더욱 유명하다.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족자나 액자를 만들어서 거는 불화(佛畵)다.
초파일에 달아놓은 연등으로 전체를 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법당을 나오는데 대웅전 앞에 커다란 동상이 시선을 잡는다. 달마대사가 왜 여기에 있는가.

*. 포대화상(布袋和尙) 이야기
대웅전 뜨락 왼 편에 달마대사 같이 생긴 커다란 동상이 모금함 앞에 웃으며 앉아 있다. 늘어진 젖통에 불뚝한 배로 활짝 웃고 있는 그 유명한 포대화상이었다.
 
-중국 후량 때 절강성 명주 봉화현에 선승이 한 분 있었다. 체구가 큰, 배불뚝이 스님으로 큰 지팡이를 짚고 큰 자루를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무엇이든지 보기만 하면 달래서 포대에 담으면서 때로는 길흉을 점쳐 주기도 하였다. 포대에 모은 물건들은 그것이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스님을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 하였다.
그가 주워 담는 것은 인간의 고통이요, 그가 나누어 주는 것들은 웃음과 기쁨이었다.  그래서 노란 안내판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
  "남을 위해 살다간 포대화상처럼 작은 정성을 모아서 불우이웃을 돕는데 쓰입니다."
여기 모인 불전으로는 복지관 치매 노인을 위해서 쓰이는 모양이니 종교가 다르더라도 시주하고 올 일이다. 
포대화상이 열반할 때 반석에 앉은체로 '진짜 미륵이 왔다 가지만 아무도 모른다.'는 계송을 남기고 입적하여 이후 후세 사람들이 포대화상을 미륵보살의 현신이라고 하였다.
  
*. 사람 죽어 천도시키는 명부전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 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죽으면 49일 되는 날까지 7일마다 명부의 세계에 있는 시왕(十王) 에게 심판을 받는다.
그 죽은 이를 천도시키는 곳이 명부전이다.
천도란 망자의 영혼을 극락까지 인도시킨다는 말이다.
명부전 한 가운데에는 지장보살, 그 좌우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서 있고 그 양쪽으로 시왕들이 서 있다.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지옥에 가면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며 중생을 구제한다는 분이 지장보살이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신 곳이라서 지장전이라 하고,  시왕을 모신 곳이라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다음은  내 친구를 통하여 들은 이병철 회장과 관련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여승의 이야기다.
  -죽어서 저승 길인가를 가는 길에 논두랑에 앉아 있는 이병철 회장을 봤어요.
'왜 여기 계신가.'하고 물었더니,' 살아 생전 돈을 너무 버느라 무리를 해서 이렇게 떠돌고 있다오.'
이 말이 세간에 떠 돌다가 아들 이건희 회장의 귀에까지 들려서, 직지사에 대불사를 하여 아버지 이병철 회장의 명복을 빌었다는 이야기다.

*. 천불전의 탄생불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건물이라는 직지사 대웅전을 돌아보고 왼편으로 사명각(四溟閣)을 지나면 비로전(毘盧殿)이 나온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소실 되지않은 유일의 목조 건물이다. 비로전(毘盧殿)이란 비로자나불을 봉안한 전각이다. 비로자나불은을 화엄종에서는 석가모니불, 천태종에서는 법신불로 불리는 부처로 그 몸이 법계(法界)에 두루 차서 큰 광명을 내 비춘다는 부처지만, 이 비로전은 모신 천 개의 불상을 모신 것으로 더욱 유명하여서 천불전(千佛殿)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이 천불상은 잠대화상이 경주에서 나오는 옥석(玉石)으로 만든 것으로 옛날에 왔을 때는 모두 흰 색인데 모두 금색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1,000 개의 불상 가운데서 벌거벗고 꼬치를 드러내고 있는 동자상 입상을 먼저 보는 사람은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전하여 오고 있다.
  아들 낳기를 고소원 하는 아낙네가 마음 설레이며 찾아와서 먼저 보라고, 탄생불을 중앙에 그것도 세워 놓은 것만으로도 불심이 부족해서인가. 그걸 쉽게 찾으라고 금색으로 바꾸고 흰 색으로 구별하여 동상을 세워 둔 것은 대자대비한 부처의 마음이라 생각게 하는데, 공사 중이어서 그걸 못보고 발길을 되돌릴 수 밖에 없었다.
요번이 마지막 직지사 방문이라고 생각하는 이 사람에게 다시 또 오라는 화두이신가.
  
   감정이 매마르다는 이 나이에, 나는 왜 이렇게 아름다움에 목말라 하는 것일까?  금년 초에도 북아프리카를 넘나들었고, 지금까지 서울에서도 먼 산을 20 개 정도를 다녀와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니-. 그런데 이번 글은 왜 이렇게 힘이드는 것일까?
 
만약에 내 마음 열어볼 수 있다면
아름다움 가득 찬 모습을 발견할 거다.
그래도
시장한 여정에
텅 빈 마음에 놀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