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변산 산행기

2004. 10. 9

   변산반도. 내변산. 채석강.  그곳을 다녀온 저녁 침대에 쓰러져 울었다.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면서, 눈감으면 주루루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지도 못하였다. 얼굴을 베개에 묻고 울고 또 울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 깨어나 보니 긴 몸살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 치고 채석강의 푸른 바다에 답답한 가슴을 내동뎅이 쳐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느 날 갑자기 차머리를 돌려 캄캄한 어둠을 뚫고 달려가서는 바다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지르거나, 얼굴을 가슴에 묻고 하루종일 바다만을 바라보거나, 살아 꿈틀대는 낙지에 쓴소주를 털어 넣으며 머리카락 분분히 휘날리던 날이 어디 한 두 번이었을까. 그렇다고 정리되는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삶이 변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징그럽게 시퍼랬던 청춘의 시절부터 왜 우리는 채석강의 캄캄한 절벽 앞으로 달려갔는지. 왜 우리는 채석강의 푸른 물결 앞에서 목놓아 울어야 했는지--
   그 후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그를 잊고 산지 몇 년이 지나고, 나는 오늘 또 네 앞에 섰다. 네 앞에 서서 쓴소주를 사정없이 마셨다.

  

   변산반도를 알고 지낸지 20여년이 지났지만 변산반도에 등산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니 알고는 있었더라도 발길이 쉬이 옮겨지지가 않았다. 변산반도 하면 채석강, 모항 등을 품고 있는 바다가 너무나 아름다워 산쪽으로 발길이 옮겨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5시30분에 대전을 출발. 정읍I.C에서 나와 줄포쪽으로 내달리자 코스모스가 만발하다. 길 양옆으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코스모스에 회원들의 환호성이 대단하다. 코스모스는 언제보아도 표현하지 못할 묘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안단테 톤으로 흔들리는 저 사뿐한 하늘거림 속으로 그리움을 실어 나르고 추억을 실어 나르고 가을을 실어 나르고----
   원암매표소에 도착하자 내변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낮지만 깊어 보이는 산. 곳곳에 절벽을 이루고 있는 바위들. 결코 만만치 않은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매표소에 도착하자 회원들의 손길이 바쁘다. 아직 매표원이 없는 틈을 타서 공짜로 차까지 주차시킨 후 얼른 원암재를 넘어 직소폭포로 향한다. 길은 넓고 한적하다. 어느 유원지의 산책로를 걷는 기분이다. 다들 산행하는 기분이 나지 않는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40분여 갔을까. 먼저 가던 회원들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먼가를 본 모양이다. 무슨 소리도 들린다. 그러다 전부 발길을 멈춰 세운다.
   직소폭포다. 소로 직접 떨어지는 폭포. 한마디로 장엄하고 웅장하다. 깎아 세운 절벽. 시원한 물줄기. 바위틈에 밀려 졸졸졸 흐르는 폭포수가 아니다. 골짜기도, 바위도 시원하게 밀어붙이고는 당당하게 흐르는 폭포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도 않는다. 얼마든지 와서 보라고 폭포 밑에까지 길을 내준다. 이곳의 해발이 100여미터 밖에 되지 않는데 저렇게 높은 폭포가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폭포 앞에서 한참을 감탄하다 회원들이 한 명 한 명 폭포 속에 자신을 새겨 넣는다. 그리고는 깜짝 이벤트로 준비했다며 회원들 몰래 준비한 막걸리를 대장이 슬쩍 꺼내놓자 모두들 난리가 난다. 직소폭포 앞에서 마시는 막걸리 한잔. 정말이지 그 풍경에 그 술맛이다.
   직소폭포 밑으로 몇 번의 절경이 이어지고, 풍경에 대한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저수지가 나타난다. 미동도 하지 않는 고요한 아침 물결. 그 물결에 깊숙이 자리 잡고 앉아 있는 관음봉. 희미하게 관음봉의 절벽을 비추는 햇살. 이것은 풍경이 아니라 한 폭의 그림이다. 물과 산. 이 둘을 한 곳에 모아 놓으면 그 멋스러움은 왜 그렇게 한없이 증폭되어 버리는지!! 회원들의 발길이 한없이 느리기만 하다.
   저수지를 지나며 회원들은 잠시 고민에 빠진다. 월명암쪽으로 산행을 잡을지, 내소사로 회귀하는 코스를 택할지. 분분한 의논 끝에 차편이 불편한 월명암쪽 길을 버린다. 누군가의 말처럼 가지 못한 길은 내내 아쉽고 미련을 갖게 한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가 보리라는 희망도 품게 한다. 힐끗 월명암 가는 길로 눈길을 주다 실상사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발길을 옮기며 잠시 생각에 젖는다. 길이란 무엇인가. 선택이란 무엇인가. 갈림길마다에서 어떠한 기준으로 어떠한 방향을 향해 길머리를 잡아 왔는가. 생각해 보면 후회가 많다. 꼭 한번 가보고 싶었으나 갈 수 없었던 길도 있었고, 죽어도 가고 싶지 않았으나 가야 했던 길도 있었다. 때론 한곳에 머물러 있고 싶었지만 사정없이 등짝을 떠밀며 어디로든지 떠나라고 다그치던 것이 길이기도 하였다. 그 길이 이 깊은 산중에까지 따라와 선택을 강요하는데---언제쯤이면 길이 아닌 길과 참다운 길을 알아볼 수 있는 해맑은 눈을 가질 수 있을지. 언제쯤이면 그 참다운 길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걸어 갈 수 있는 발걸음을 가질 수 있을지---가야할 길이 멀고도 멀다----
  햇살 많고 앞산의 바위가 이국스러운 실상사 앞을 지나 내변산 매표소로 들어선다. 내변산 매표소에서 가마소 삼거리로 향하는 등산로를 찾지 못하여 잠시 헤매다 시냇물을 건너서 길을 잡는다. 이제까지 평탄한 길을 지나온 회원들이 드디어 산행다운 산행길을 만났다며 부지런히 오름질을 한다. 오름질을 시작하자 비로소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하는 회원들. 산사람이 다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마소 삼거리까지의 길은 주등산로가 아니어서 그런지 산행의 흔적이 드물고 길도 자칫하면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중간중간 어느 산악회의 리본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산행은 분명 실패하고 말았으리라. 그렇지만 그렇게 인적이 뜸한 길이었기에 다른 어느 곳에서도 체험하지 못했던 체험도 하게 되었다. 아마 처음 보는 회원들도 있을테고 나처럼 산골소년도 한 30여년 만에 다시 보는 것 같다. 한차례 오름질을 끝낸 후 한참을 내려가는데 길가에 먹음직스러운 열매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딱 먹기 좋게 입을 벌리고-- 아니 저게 뭐야 이름조차 가물가물하지만 먹는 것만은 틀림없는데--- 아름 비름 한국바나나 으스름 깨금 등등 이름을 대다 그래 으름이다 으름. 먹는 것이라고 했더니 따 달라고 난리다. 그러나 어디 나같이 둔한 몸이 오를 수 있으랴 우리의 날쌘돌이 학이가 죽을힘을 다해 으름 몇 개를 따는데 성공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으름. 맛이 좋다. 곁들이는 말이지만 바로 옆 개울가에서는 가재도 구경했다. 1급수중에서도 1급수에서만 산다는 가재, 그것도 여러 마리가 시냇물 속에서 한가하게 거닐고 있는 것을---
   세봉삼거리로 오르는 길은 마지막 오름질의 절정을 보여준다. 1시간여 오름질에 숨이 꼴딱 넘어간다. 그러나 멀리 보이는 의상봉, 옥녀봉, 그 사이에 자리 잡은 부안댐은 내변산 조망의 절정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높지는 않지만 골짜기가 깊은 산들. 절벽을 이루고 있는 바위들. 고만 고만한 높이의 봉우리들이 눈앞 가득 펼쳐진다. 그러고 보니 이 산은 주봉이 없다. 어느 산을 올라도 모든 산의 정수리를 살펴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주종이 없는 산. 군신이 없는 산. 어느 골짜기도 커다란 산의 골짜기에 종속되지 않는 산. 어느 봉우리도 낮은 봉우리 위에 군림하지 않는 산. 아!! 저 평등의 산봉우리들. 우리가 끝내 가야 할 길이 내변산 저 봉우리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세봉삼거리에서 내소사로 내려오는 길은 절경이다. 조망이 최고조에 이른다. 멀리 변산의 앞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고, 오른쪽으로는 관음봉의 자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위들로 성곽을 두르고 아늑하게 들어앉은 내소사. 회원들의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뒤돌아보고 뒤돌아보다 내려오니 어느새 내소사다.
   내소사. 전나무 숲길. 그런데 회원들이 내소사행을 주저한다. 입장료가 3,200원이나 한다나. 나 참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3,200원이 아까워 저 아름다운 풍경을 놓치고 말아야 한단 말인가!!! 혼자라도 표를 끊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겠고--- 가족과의 산행 때 들러보기로 마음을 추스르고 막걸리에 도토리묵으로 하산주를 마시며 아쉬운 마음을 달랜다.
   대략 5시간의 산행을 마치고 이번에는 바다로 향한다. 잠시 아름다운 모항에 들러 눈을 씻고, 20여분 차를 몰아 도착한 채석강. 회원들의 탄성이 절로 나온다. 한 두 번 와본 것도 아닌데 볼 때마다 멋지고 가슴이 트인다. 즉석 회 한 접시에 쓴소주 한잔. 캬--소리가 절로 나온다.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보는 채석강이다. 수억의 세월을 딛고 솟아 있는 저 퇴적암의 절벽. 하늘보다도 더 짙푸르게 출렁이는 저 바닷물. 그리고 넓고 넓은 서해의 바다를 한번도 쉬지 않고 달려왔을 저 바람. 눈이 부시게 투명하고 깨끗한 저 가을햇살. 아!!그런데 그 속에서 너가 보인다. 수년을 잊고 살아온 너가 보인다. 이제와서 어떻게 하라고---이제와서 어떻게 하라고---저 시퍼런 바닷물은 되살아나는 것이냐!!!  
 
  새는 제 가슴을 치어 바다를 날아간다지만, 제 가슴을 치는 바닷물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직소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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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