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皇寺址에서 色을보고 道甲寺에서 空을보네-영암 월출산

산행일시 : 2004년4월3일(토)-4월4일(일)
산행지   : 전라남도 영암 월출산
산행자   : 성당교우부부 4팀
산행코스 : 매표소-천황사지-구름다리-통천문-천황봉-베틀굴-
           구정봉-억새밭-미왕재-홍계골-도선수미비-도갑사
산행시간 : 06:30 천황사 매표소 출발 - 14:30 도갑사 도착


반야심경입니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화재로 폐허가 되어 空으로 되돌아간 월출산 天皇寺 빈터에서
역설적이게도 色을 봅니다
우주의 삼라만상조차 諸行無常 변하지 않는 것이 없거늘
하물며 사람이 만든 것 色임에랴.

色은 空으로 돌아가고 空은 다시 새로운 色을 위해 자리바꿈을 합니다.
空이 절대진리의 한 자락이라면 色은 상대진리의 한 자락.

꽃도 피었다가는 사그러지고 또 다시 사라졌다간 피어납니다.
월출산 자락에 피어나는 연두빛 새 봄도 진록의 여름을 지나 홍엽의 가을을
마친 후 다시 침묵의 겨울을 맞습니다.
그리고 또 새 봄. 이것이 바로 諸行無常

장자의 꿈이 아니더라도 폐허가 되어버린 天皇寺址엔 또 다른 새로운
色이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그리곤 또 다시 절대진리 空으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空으로 돌아감이 비록 화재로 인한 것이던 파괴로 인한 것이던
그것 모두가 空과 色의 무한한 변화 諸行無常의 수레바퀴입니다.
아플 것도 없고 안타까울 것도 없습니다.

色은 空이라는 절대진리 속에 존재하며
空은 色이라는 상대진리를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色卽是空 空卽是色

天皇寺址의 空은 그래서 空이 아니라 色이며 그 色 또한
色이 아니라 空입니다.
화재로 空이 되어버린 天皇寺에서 色을 볼 수 있음이
바로 그 까닭입니다.

 폐허지 天皇寺址 공터 투명비닐로 얼기설기 지어진 비닐막 안엔
금박 부처님이 빙긋이 웃고 계십니다.


지독한 감기 몸살을 앓은 후 오랜만에 먼 곳의 산을 찾아갑니다.
전라남도 영암 월출산.
바위산.

2001년 화재로 天皇寺가 天皇寺址로 변하여 문화재관람료도 받지
못하는 사찰을 지닌 월출산을 찾습니다.

4월3일(토) 밤 열시 가느다란 빗줄기 속에 15인승 전세버스로 서울을 출발,
전라도 땅에 드니 보름을 하루 앞둔 둥근 달이 검은 하늘에 두둥실
떠올라 있습니다.

차창 곁으로 계속 따라오는 둥근달과 함께 목포를 지나 월출산을 찾느라
강진까지 알바를 한 후 차를 되돌려 천황사 입구에 도착하니 둥근달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사위가 훤해진 새벽 06:00.

월출산에서의 달 보기와 월출산에서의 해 오름 보기
두 가지를 한꺼번에 놓쳐 버립니다.
아쉽지만 마주 뵈는 월출산의 웅장한 암벽으로 만족합니다.

라면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한 후
키를 훨씬 넘는 細竹밭 사이로 길게 뻗은 예쁜 오솔길을 오릅니다.
천황사가 아닌 천황사지로 오르는 길.

대나무사이로 흐르는 새벽 바람소리는 한 음 피리소리처럼 청량하고
대나무밭 저 곳 깊은 곳을 흐르는 계곡 물소리는 돌돌돌.
푸른 세죽과 어우러져 신비스러운 녹색의 화음을 연출합니다.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주문은 없으되 피안의 세계로 안내하는
화음은 천상의 소리인 듯 들려 옵니다.

갈림길에서 왼편 세죽 오솔길 둔덕을 오르니 天皇寺址.

넓지 않은 공터엔 불에 그슬려 한켠이 함몰된 청동 범종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고 투명비닐로 얼기설기 역은 비닐 천막 안엔
금박 부처님과 금박 보살님 두 분이 모셔져 있어 이 곳이 한 때
天皇寺였으나 지금은 天皇寺址임을 알게 합니다.

부처님께 3배 합장 예를 올리고 天皇寺址를 어슬렁거린 후 
연이어지는 가파른 철 계단과 발 받침에 의지하여 조금씩 오르니  
드디어 월츨산의 기기묘묘한 암봉들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무슨 바위 무슨 바위 제 각각 유별난 이름을 갖고 있겠지만 굳이
알고자 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보이는 아름다움, 기묘함, 웅장함만을 그저 눈으로 즐길 뿐
천지조화의 변화무쌍함만을 가슴에 담습니다.

아찔한 구름다리를 건너고 사자봉을 지나 하늘로 이어진 통천문을
지나면 월출산 천황봉.
동판에 새겨진 방위에 따라 봉우리들을 찾아봅니다.

천황사지를 지나며 올려다 보이던 바위 봉우리들이 모두 눈 아래 깔려
옵니다. 이렇게 바위만으로 이루어진 산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온통
거대한 덩어리바위투성이 뿐인 월출산입니다.

바위만으로도 이러한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자연의 신묘함에 그저
넋을 놓아 버리고 맙니다.
기상천외한 바위들이 곳곳에 불쑥 불쑥 솟아있음에 마치 기암괴석의
전시장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 십상입니다.

밀어보고 싶을 정도로 아슬아슬 걸려 있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가 하면
장대한 바위가 받침도 없이 암봉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곁을 지나기 두려운 바위가 있기도 합니다.

짓궂은 마음에 두 손으로 밀면 와르르 무너져 월출산 오름길을 온통
메워버릴 듯한 돌무더기 암봉들과 바위와 바위가 서로 의지하여 
기울어져 그 사이로 파란 하늘을 품고 있는 바위도 있습니다.

온갖 기묘한 바위들에 눈을 떼지 못하며 천황봉을 지나 베틀굴에 닿으면
바위로 연출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과연 자연의 오묘함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9개의 마르지 않는 우물을 얹고 있는 구정봉을 오른 후 억세 밭
미왕재를 지나 붉은 동백꽃이 뚝뚝 떨어져 슬프도록 아름다운
홍계골을 지루하게 내려오면 도선수미비를 지나 도갑사에 이릅니다.

보이지않는 세죽밭 샘터에서 흐르는 생수는 대나무관을 통해 석조를
채웁니다. 대나무의 곧디 곧은 품성을 한잔 생수로 대신하고

도갑사.
色의 세상을 한차례 거친 후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아 空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옛 사찰터 곁엔 새로운 불사로 새로운 色의 세상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空과 色이 함께 어울려 있는 곳 도갑사입니다.
그러나 空보다도 色이 먼저 눈길을 끄니 도갑사는 色의 사찰입니다.
 
도갑사의 새로운 色 역시 空으로 돌아가야 할 諸行無常의
수레바퀴에 얹혀진 겨자씨 한 알.
이미 空으로 돌아간 도갑사의 주춧돌을 보며 새로운 色의 空을 봅니다.

도갑사의 色에서 空을 보는 연유입니다.

아함경은 말합니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써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진다"

色이고 空이고 모두 만들어 낸 말장난인가.
부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호화스러운 도갑사 법당안의 부처님도 그저 빙긋이 웃고 계십니다.

왜 하필이면 폐허가 된 천황사지에서 올라 화려한 도갑사로 내려 왔을까.
영암 월출산에서 마음 한 자락 붙잡고 내려옵니다.

도갑사를 나와 서울로 돌아오는 길
왕인박사 축제로 복잡한 영암읍내를 지나 목포를 거쳐 제 멋대로 밀리는
고속도로를 통해 집으로 돌아오니 오니 4월5일 밤 12:35분입니다.

멀고도 긴 영암 월출산이었습니다.

 

 




▣ 권경선 - 색과 공을 보시고 온 월출산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선배님의 말씀처럼 불교초기경전은 너무도 쉽고 명료한데 중국을 거쳐 오면서 조금은 난해 해진것 같습니다. 수따니빠따야를 읽고 싶어 집니다. 마음으로 보고 오시는 선배님의 감성을 우러르며 잘 다녀갑니다.
▣ 산초스 - 심오한 불교를 논하시고 월출산의 장관을 말씀하시니 , 사실 박종태님이 4.3 월출산 가자고 하는데 안가고 부부만 다녀오고 저는 북한산 작은노적봉 다녀왔는데 마치 다녀온듯 잘 읽었습니다.시원시원하고 호탕하신 선배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