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의 혼이 살아 숨쉬는 보길도 격자봉(적자봉) 산행


산행일 : 2004. 9. 19(日). 맑음

산행코스 및 소요시간

  ☞보옥리 (09:50)

  ☞보죽산 정상(10:20~10:46. 195m)

  ☞보옥리 (11:04)

  ☞뽀래기재 오르는 들머리 (11:11)

  ☞백련사지로 가는 갈림길 (11:35) 

  ☞뽀래기재 (12:08) 

  ☞회양목 군락지옆 점심바위 (12:20~12:54) 

  ☞부용동 내려가는 삼거리 (13:15)

  ☞누룩바위 (13:19~13:27)

  ☞격자봉 (13:33~13:45. 430m)

  ☞수리봉(14:04~14:16. 406m)

  ☞큰길재 (14:38)

  ☞부용동 곡수당지 안내도  (14:56)

총 산행시간 : 5시간 6분 (정상적인 산행을 하면 4시간 30분이면 충분함.) 

구간별 거리 :

 뽀래기재 오르는 들머리→(0.7km)→백련사지가는 갈림길→(0.96km)→뽀래기재→(1.02km)→부용동 내려가는 갈림길→(0.16km)→누룩바위→(0.38km)→격자봉→(0.96km)→수리봉→(0.86km)→큰길재→(0.9km)→부용동

산행거리 : 약 5.94km (보죽산 구간은 정확한 거리를 모르나 왕복 약1.5km정도로 추측됨. 두 산을 합하면 총 산행거리는 약7.44km로 추정)

산행지도


1500산님이 땅끝마을에서 사서 건네준 보길도 지도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생애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작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唯幾)의 양자이다.

유기는 유심의 동생으로 큰댁에 입양되었고, 선도는 유기에게 입양되어 가게를 이었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에 1등하였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30세 때인 1616년(광해군 8) 성균관 유생 신분이었던 고산은 광해군의 총애를 입고 비행으로써 세도를 부리던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당시 집권세력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병진소(丙辰疏)〉를 올려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그 내용이 아주 격렬하여 대신이 모두 두려워했고 이이첨도 감히 발언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것은 공의 충직한 마음을 표출한 것이었으나 이로 인해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당했고, 부친도 관찰사 직에서 파면되고 말았다.

그곳에서〈견회요 (遣懷謠)〉5수와〈우후요(雨後謠)〉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 뒤 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28년(인조 6)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되었다.


 

  그 이듬해 치욕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직의 위급함을 보고 우국충정에 불타던 공은 곧 향리 자제와 의병을 모집하고 가복들을 거느리고 군량과 전함을 준비하여 불철주야 배를 타고 강화로 향했다. 익년 1월 29일에 강도 앞 바다에 도착하니 강도는 이미 침략된 뒤였다. 분노를 참지 못한 공은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일단 귀향했다. 다시 대가의 세상 살아갈 의욕을 잃고 은둔생활을 결심하고 바로 배를 탐라로 향하게 했다. 항해 중에 심한 풍랑으로 제주를 가지 못하고 보길도에 상륙했다.


 

  보길도에 정착한 고산은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여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 등을 지어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638년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이때 금쇄동을 배경으로〈산중신곡 山中新曲〉·〈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고금영 古今詠〉·<증반금 贈伴琴〉등을 지었다. 그 뒤 1651년(효종 2)에는 정신적 안정 속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었다.


 

  다음해 효종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 땅 고산(孤山)에 은거하였다.

마지막 작품인〈몽천요夢天謠〉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1654년에는 막대한 사재를 투입하여 완도군 노화읍 석중리에 60정보,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 200정보의 간척지를 제방 농토로 개척하여 양 군 10개 농어업인에게 무상 배여하기로 하였다.


 

  1657년,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서인 송시열(宋時烈)일파와 맞서다가 삭탈관직 되었다. 이 무렵〈시무팔조소 時務八條疏〉와〈논원두표소 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문제 禮論問題〉로 서인파와 맞서다가 패배하여 삼수에 유배되었다가, 1667년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가 그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가문에 태어나서 집권세력인 서인 일파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년의 유배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화려한 생활을 은거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되었다.


 

  그는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는데, 그 특징은 자연을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상하기 위하여 그것을 임으로 선택하기도 한데에 있다.

또,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엄격히 유교적인 윤리세계와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연과 직립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유족한 삶만을 누렸기 때문이다.


 

  문집《고산선생유고 孤山先生遺稿》에 한시문(漢詩文)이 실려 있으며, 별집(別集)에도 한시문과 35수의 시조, 40수의 단가(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또, 친필로된 가첩(歌帖)으로〈산중신곡〉,〈금쇄동집고 金鎖洞集古〉2책이 전한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삼대가인(三大歌人)으로 불리는데,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고산의 보길도 생활은 정축년(공 51세, 인조 15, 1637년)2월 입도한 이래 85세 6월 부용동 낙서재에서 장구한 생을 마감할 때까지 7차<1차(51세 2월 ~ 52세 6월, 1년 5개월), 2차(56세, 잠시유람), 3차(60세~62세, 3년), 4차(64세~6세 1월, 2년 1개월), 5차(67세 2월 ~ 68세, 23개월), 6차(71세 2월 ~ 8월, 7개월), 7차(81세 9월 ~ 85세 6월, 3년 10개월)> 에 걸쳐 총 12년 11개월 정도이다

       ------인터넷사이트 보길도의 아침(http://www.bogilisland.co.kr)에서------  


 

산행기

  감기가 다 낫지 않은 아내의 기침소리를 뒤로하고 아이들과 기적의 도서관으로 향한다.

큰 맘 먹고 가는 보길도인데 아내만 남겨놓고 가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최선호 선배님을 옆에 모시고 백운산님의 가족과 두 대의 차는 어둠 속을 뚫고 해남 땅끝 마을로 내달린다.


 

  땅끝 마을 들어가는 입구삼거리에서 웬 남자가 우리의 차를 제지한다. 깜짝 놀라 차를 세우고보니 1500산님이다. 아침을 안 먹고 왔을 것이라고 예상했는지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모두의 손에 들려준다. 고마운 분.....

그러나 최선호님만 아침을 안드셨을뿐 두 가족 모두다 아침을 배불리 먹고 출발(5시 조금 넘어서 출발, 7시 40분쯤 토말 도착했으니 두 시간 반 정도 걸렸다.)한지라 남기는 아이도 있다.

뱃시간이 한참이나 남았다.

땅끝마을입구 삼거리에서 1500산님이 주전자에 물을 끓여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건네준 컵라면을 먹으며....

오른쪽 위에 갈두산 땅끝 전망대가 보인다.

 

  8시 20분, 호기심으로 가득한 관광객들을 태운 장보고호는 신비의 섬 보길도를 향하여 뱃고동을 울리며 출항을 한다.

아름다운 다도해를 항해하는 장보고는 거칠 것이 없다.

넙도에 잠깐 들리고 노화도와 보길도사이로 배는 미끄러져 들어간다.

노화도에 들릴 줄 알았던 장보고는 곧바로 보길도 청별 선착장에 접안을 하며 관광객들을 쏟아낸다.

8시 20분 장보고호에 오르면서

 

보길도가 다가오고 있다. 오른쪽 긴 능선이 격자봉 주능선.

 


보길도 청별 선착장에 접안중인 장보고호

 

친절한 택시 기사 아저씨가 북바위를 지나며 사진촬영하라며 차를 세워주었다.

 

땅끝(망끝)전망대를 막 돌아서니 보죽산(뾰죽산)이 나타난다.

 

엄청 친절한 보길도 관광가이드 택시(무쏘) 기사 아저씨.

 

보죽산 아래에서 단체사진 한 컷. 산행 들머리는 안내판따라 가면 안되고, 사진의 왼쪽으로 가야만 한다.

 

  미리 전화로 예약한 보길택시에 몸을 싣고 보옥리 보죽산으로 향하는데, 미남 기사아저씨가 어찌나 친절히 보길도를 소개해 주는지 모두들 칭찬, 감탄, 감동으로 환상의 드라이브를 만끽한다. 아무런 시설물도 없는 망끝 전망대를 지나니 오른쪽으로 추자도가 보이고 희미하게 제주도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제주도 삼방산을 쏙 빼닮은 보죽산(뾰족산)이 눈앞에 펼쳐진다.

 

  보죽산 북쪽에 우릴 내려놓은 택시는 아쉬운 작별을 한다. 지나가는 동네사람에게 사진을 부탁하고 보죽산으로 올라간다. 산행 들머리는 보죽산 동쪽의 한 민가 담을 왼쪽으로 끼고 오르는데 곧바로 울창한 동백숲으로 들어간다. 동백숲은 보죽산오르는 동안 거의 절반을 지나가야한다. 해발 195m밖에 안되는 낮은 산이지만 경사가 급해 오르기가 약간 힘이 든다.

  남쪽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작은 암반에서 환상의 남쪽 바다를 보여주고 잠시 오르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뽀래기 갯솔밭을 보여주는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암릉을 지나 남쪽으로 십여 미터를 가니 사진 찍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비좁은 뾰족산 정상이 나타난다.

멀리 제주도가 희미하게 보여 디카로 찍어봤자 안나올게 뻔하지만 혹시나 해서 줌으로 당겨 찍어본다. 한달에 사나흘 정도만 제주도가 보인다는데, 우린 그런 행운의 날에 올라온 셈이다.

빨간 벽돌집을 따라 올라야 들머리가 나온다.
 

들머리에 있는 울창한 동백숲

 

동백숲을 빠져나오면 남쪽으로 조망이 탁 트이면서 넓은 암릉이 나온다.  이곳의 조망이 일품이다.

 

보죽산 북쪽 암릉에서 내려다 본 뽀래기 갯돌밭.

 

보죽산 정상에서

 

보죽산 북쪽 암릉 위에서 휴식 중에, 왼쪽에 망월봉(망뫼봉. 364m)이 보인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다시 북쪽의 넓은 암릉으로 돌아가 간식들을 쏟아내는데, 어찌나 많이들 싸가지고 왔는지 내것은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산행 내내 무거운 배낭은 좀처럼 줄어들지를 않았다.

아이들은 방아깨비와 야생꽃들을 가지고 노느라 정신이 없다.

하산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사진을 찍다보면 아무도 없어서 항상 일행들을 뒤따라가기 바쁘다.


 

  보옥리 마을에서 뽀래기갯돌밭쪽으로 가다보면 작은 개울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는데, 뽀래기재를 오르려면 여기서 다리를 건너지 말고 계곡을 따라 50m쯤 오르면 산행들머리가 나온다.

이곳의 지명들(대풍구미, 뾰족산, 뽀래기재, 큰기미, 작은기미, 애들기미, 샛바우재, 샛담...) 이 참 재미있다. 대부분 고산 윤선도가 이름을 지었다고 하니 보길도는 고산의 채취가 곳곳에 배어있어 어느곳 하나라도 빠트리고 싶지 않은 신비의 섬이다.

뽀래기재와 격자봉으로 오르는 산행 들머리.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등로가 나온다.
 

  작은 다리를 건너 산으로 오른다. 오르는 길은 개울인지 등로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등로는 물길이 되어 흘러 내려간다.

막내 녀석이 수없이 물에 빠지면서 넘어진다. 어제까지 비가 왔다지만 등로에 물이 흐르는 구간은 끝없이 이어지며 막내를 괴롭힌다. 왼쪽으로 계곡의 물소리가 힘차게 들린다. 물이 참 많은 산이다.

작은 계곡인지 등산로인지 모를 정도로 등로에만 물이 넘쳐 흐른다. 좌우로 사람키보다 더 큰 양치식물들이 있어서 열대지방에 온듯한 착각에 빠진다.

 

백련사지로 가는 갈림길

 

 뽀래기재로 오르는 등로는 전혀 정비가 되어있지 않아(잡목이 우거진 것이 아니고, 물길이 되어버려서 때론 물에 빠지면서 올라야한다.) 아이들에겐 무척 힘든 구간이다. 뽀래기재에서부터 시작된 주능선과 하산하기까지의 길은 대체로 잘 정비가 되어있고, 갈림길에선 어김없이 이정표가 잘 세워져 있어서 등산하기에는 편한 산이다.

 

  뽀래기재에서 능선을 타기 시작한 산행은 그다지 힘든 급경사가 없어서인지 속도가 빨라진다.

사람 키보다 훨씬 큰 야생 회양목 군락지옆 점심바위에서 각자의 도시락을 펼친다. 여기서 나의 김밥은 반이나 남아 또 다시 배낭 속으로 들어가는 수모를 겪는다.

뽀래기재

 

뽀래기재의 등산 안내도. 남북이 바뀌어져 그려 있어 약간 헷갈린다. (부용동쪽이 북쪽)

 

주능선 점심바위 위에서 내려다 본 보죽산.

 

점심바위에서 내려다 본 야생 회양목 군락지. 키가 3m는 족히 된다.

 

엄청 큰 나무 아랫부분을 온통 휘감고 오르는 콩짜개란.

 

  425봉을 지나 부용동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지나자마자 곧이어 누룩바위가 주능선 남쪽에 나타난다. 누룩바위는 잠시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해 시끌벅적하다.

사방이 막힌 격자봉 정상에 오르니 오른쪽으로 시원하게 조망이 터진 곳이 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수리봉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번 산행 최고의 화려한 조망을 보여주는 수리봉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멀리 제주도를 비롯하여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예작도, 기도, 당사도, 소안도, 노화도등 점점이 떠있는 아름다운 섬, 섬, 섬들.....

부용동(왼쪽) 내려가는 갈림길

 

누룩바위

 

누룩바위와  아이들

 

누룩바위에서 바라 본 격자봉(오른쪽)과 수리봉(왼쪽 뾰족한 봉)

 

뒤돌아 본 누룩바위

 


격(적)자봉 정상. 잡목으로 조망은 없다. 오른쪽으로 몇 m만 가면 아래사진의 조망좋은 곳이 나온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1500산 김정길님과 히어리

 

수리봉에서 내려다 본 예작도(바로 앞 섬)와 당사도(오른쪽)

 

수리봉에서 보이는 제주도(사진 윗부분 공중에 떠있는 듯한 검은 띠)

 

이번 산행 최고의 조망을 선보이는 수리봉에서의 멋진 풍경. 오른쪽 마을이 예송마을, 그위로 예송 깻돌밭 해수욕장, 그 위로 노화도, 안도등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의 수많은 섬들이 보인다.

 

수리봉에서 내려다 본 부황리 세연정쪽 모습.

 

  큰길재로 내려가는 하산길은 약간의 급경사구간을 지나, 완만하고 널찍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억새 우거진 큰길재에 이른다.

큰길재에서 부용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완만한 경사와 함께 콧노래를 부르며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좋다.

억새로 뒤덮힌 큰길재
 

비비추 같기도 하고, 산옥잠화 같기도하고...

 

  곡수당지 발굴조사 안내도에서 산행은 마무리를 짓는다.

여기서부터는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풍성한 수확을 기다리는 가을 농촌 들녘을 지나간다. 부용동 경로당앞 벤치에서 아이들과 백운산 곁님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성인남자들과 백운산님 큰딸 화정이(아빠 닮아서 산을 무지 잘탄다.)는 바로 앞 안산 중턱에 있는 동천석실에 오른다.

개울 징검다리를 건너 컴컴한 동백숲으로 들어가면서 작은 산행이 시작된다.

고산이 세운 듯한 담양소쇄원 스타일의 정원을 오른쪽으로 끼고 오르니 소박한 동천석실이 나타난다.

산행 날머리인 곡우당지 안내도가 있는 시멘트 도로.

 

 

동천석실 가는 길

 

도로에서 올려다보며 줌으로 당겨 본 동천석실.

 

방 한 칸의 정자. 고산이 격자봉과 부용동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시인이자 정치가인 고산 윤선도.

잠시 나는 고산이 되어 동천석실앞 바위에 올라 부용동을 내려다본다.

동천석실
 

동천석실에서 내려다본 부용동과 격자봉 능선.

 

동천석실 바위위의 1500산님과 백운산님 큰딸 화정이.

 

동천석실 서쪽에 있는 정원.

 

  평화로운 농촌 마을의 담장 옆에 석산이 무리를 지어 피어있어, 지나는 이의 눈을 사로  잡는다.

코스모스 하늘거리는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한참을 걸으니 보길초등학교가 나오고, 그 옆에 세연정이 있다.

매표소는 있지만 입장료를 받지도 않는다.

  고산이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 만든 연못과 정자가 있어 유명한 곳이지만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실망이 크다. 규모가 조금만 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궁금한 것은 옛날에 저 큰 돌들을 어떻게 이곳에 옮겨놓았느냐는 것이다.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상사화로 잘못 알고 있는 석산.

 

노화영황천. 이 물이 세연정으로 흘러 들어간다.

 

 

세연정


   또다시 아스팔트길을 걷는다.

전혀 우리 것 같지 않은 열녀숙인김씨비각을 마지막으로 보길도의 맞춤산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아이들의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빼앗아 먹으며, 고개 넘어 청별선착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힘이 실린다.

코스모스(구자숙님?)


특이한 건축물인 열녀 숙인 김씨 비각

 

보길도발 땅끝착 배시간표

 

땅끝가는 해광훼리5호

 

땅끝가는 배위에서 멀리 보이는 횡간도 사자바위에 네남자가 감탄사를 뿜어낸다. 줌으로 당겨 촬영.

 

 

에필로그

 그 후 1500산 김정길님은 해남 북평면 사거리에서 완도군 소안도 가학산에 오르기 위하여 우리와 헤어져 완도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