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동강은 흐르고 있었습니다

버-스는 영월,고씨동굴등이 적혀있는 도로표지판을 지나 구불구불 험한 고갯길을 넘어 갑니다.
산 자락을 일궈 만든 비탈밭에는 보라빛 감자꽃이 만개하여 뭇 시선을 끌기도 하고 벌써 어른 키 만
큼이나 무성하게 자란 옥수수 밭의 녹색 물결이 이어지기도 합니다.
수도권 근처의 잡풀만 무성한채로 놀고있는 값 비싼 땅들과 비교되어 씁쓸합니다.

생태보존이냐 자원개발이냐 하는 논쟁에 휘말려 메스컴을 떠들석하게 했던 동강을 끼고 달리다
길이 좁아져 대형버-스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에서 하차했지요.
강 건너편  험상궂어 보이는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이 오늘 우리가 올라야 할 백운산이랍니다.

천천히 걸으며 즐기는 산행습관을 기르는 것이 좋다는 산행대장의 조언에 동감하면서 잘 만들어진
씨멘트 다리를 건너며 보니 강변에 초라한 나룻배 하나 한가로이 떠 있고 나룻배를 움직일때 잡아
당기는 줄이 아직도 메어져 있습니다.
아마도 저 나룻배가 끝발 날리며 낭만에 젖은 장면을 연출하곤 할 때에는 동강을 흐르는 물도 옥류
라 불리었을 테지요.



집이 너덧채 밖에 없는 점재마을에서 만난 일흔은 훌쩍 넘긴 듯한 할머니께서 걱정을 하십니다.
"저 쪽으로 넘어가면 않되는디..."
혼잣말 처럼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여 여쭸지요.
"무슨 말씀이세요? 위험하다는 말씀입니까?"
"지난 주에도 사람이 다쳤드래요."

백운산의 바위는 숫바위가 돼서 엄청 날카로워 조금만 넘어져도 큰 부상이 될 우려가 있으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는 대장의 당부 말이 엄포가 아닌 모양입니다.

그늘 속의 부드러운 흙길도 잠시,경사도가 높아지면서 앞으로 발을 떼지 않으면 주루룩 미끌어질 것
만 같은 산삐알을 쟁기질하는 황소 만큼이나 거친 숨을 내뿜으며 30여분 동안이나  안깐임을 하고
서야 능선에 다달았습니다.
백운산 2.6km 표지판을 보며 능선을 타고 1시간 쯤 동강의 굽은 흐름을 눈으로 즐기다 보면 정상이겠
지 하는 편안한 생각이 망상이었음이 금방 확인되더구만요.
물을 많이 준비하길 참 잘 했드라구요.

그래도 전망 좋은 바위에 걸터앉아 또아리 틀은 뱀 처럼 굽어 흐르는 동강의 모습과 첩첩이 이어진
산줄기 사이 골마다 반듯하게 밭을 가꾸어 놓은 자그마한 마을의 평화스러운 모습을 내려다보는 즐
거움으로 재충전하여 다시 바윗길을 기어 오르고는 했지요.



월드컵 축구 때문일겁니다.
밤새 중계방송이 이어지니 잠이 모자라고,정비가 덜 된 몸을 이끌고 험산을 오르다 보니 쉬 지칠밖에요.

왜, 무엇때문에 이리 힘든 산행을 계속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을 때가 있었습니다.

어디론가 끝없이 흐르는 능선,그리고 소리없이 다가오는 계절의 변화,늘 다르게 느껴지는 바람,수
많은 세월의 풍화작용을 거쳐온 기암괴석의 특이한 형상,굽고 비틀어진 늙은 소나무의 독특한 멋,
돌틈사이에 수줍게 피어난 들꽃,새소리,물소리 등등이 나를 흥분하게 하고 감동하게 합니다.
산에는 내 가슴을 흔들 수 있는 것이 항상 남아 있고 무언가에 흔들릴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한다는
것은 삶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백운산 정상(882.4m)을 넘어 철목령으로 가는 능선에는 위험표지판이 많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궁금해서 위험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곳으로 가 보았습니다.
아찔했습니다.
수백길 아래 동강의 시퍼런 물이 흐르고 있는 까마득한 절벽입니다.

뱀이 또아리를 튼 형상으로 몸통을 비틀며 자란 커다란 나무들이 눈에 자주 띱니다.
오랜동안 동강의 굽어진 모습을 보며 자라다 보니 이상항 형태로 몸통이 꼬인 모양입니다.



정상에서 철목령까지 약 2.5km 구간은 크고 작은 봉우리를 다섯개나 넘는 전체적으로는 내리막 길이지만
오름길도 심심치 않게 나타나는 정신 바짝 차려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급경사 나무게단을 만들어 산행을 쉽게 한 곳도 있지만 오름 내림에 스릴을 지나쳐 소름을 돋게하는
험상궂게 생긴 암릉에서는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위험표지판이 세워진 낭떠러지 옆 돌탑에 세워진 어느 젊은 여인의 추모비가 보는이의 가슴 저리게
만듭니다.

까맣게 익은 열매가 다닥다닥 달린 산뽕나무 아래에서 대장들이 흔들어 떨어뜨린 오디를 정신없이
주워 먹었습니다.
어릴 적 배고픈 시절 뒷뜰의 뽕나무에 올라 혓바닥이 까매질 때 까지 따 먹었던 오디만큼이나 달콤
새콤하여 소년시절의 고향생각에 젖기도 했습니다.

솔잎융단이 깔린 푹신푹신한 길을 밟으며 숲속을 빠져나와 약 4시간30분의 산행을 마쳤습니다.

동강의 차가운 물에 탁족을 하며 지나온 길을 바라보니 오늘 걸은 산길이 한 눈에 잡히며 바람 살랑
이던 녹색의 능선길과 산과 강이 부등켜 안고서 아우러지며 만들어 낸 멋들어진 경치가 파노라마 처
럼 머리를 스칩니다.



오늘도 흥분과 감동으로 가슴 뛰는 삶의 기쁨을 만끽한 하루였습니다.

참고로 동강은 남한강 수계에 속하며 정선, 평창 일대 깊은 골짜기를 흘러내린 물들이 정선읍내에
이르면 조양강이라 부르고, 이 조양강에 동남천 물줄기가  합해지는  정선읍 남쪽 가수리부터 영월
에 이르기까지의 51km 구간을 '동강'이라 부릅니다.
산자락을 굽이굽이 헤집고 흘러내리는 동강은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사행천(巳行川) 을 이루고
있으며, 전 구간에 걸쳐 깎아지른 듯한 절벽지형을 이루고 있지요.
백운산은 동강 중간 지점에 위치한 산으로 경관이 좋고 산행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산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