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여 있는 눈을 보려거든, 계방산∼소계방산 종주

 

 

 


  깜짝 놀랄 지진발생 뉴스
 
  지루한 겨울가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경기침체에 이은 이상난동현상으로 겨울용품이 제대로 팔리지 않는다고 상인들도 울상입니다. 정치권의 동향을 보면 집권여당은 곧 이합집산(離合集散)할 태세고, 제1야당은 벌써부터 담지도 않은 김칫국을 마시려는지 경쟁후보검증문제로 시끄러워 김칫독을 깨지나 않을지 걱정스럽습니다. 흡사 타이틀매치를 앞둔 권투선수가 결승 링에 오르기도 전에 스파링파트너와 연습하다가 코뼈가 부러진 형국입니다. 언론에서는 왜 이런 정치권의 이전투구(泥田鬪狗)를 연일 대서특필하여 보통사람들을 짜증나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한 줄도 보도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 저녁 뜻하지 않은 지진이 발생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습니다. 필자는 그 날 저녁 9시 뉴스를 시청하기 위해 자리에 비스듬히 누워있었는데 갑자기 방바닥이 순간적으로 흔들리는(shaking) 느낌을 받았습니다. 부엌에 서서 설거지를 하던 아내에게 물어보니 느끼지 못했다고 합니다. 뉴스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강원도에서 진도 4.8의 지진이 발생했음을 알려줍니다. 지진의 진원지인 평창군 도암면은 황병산이 위치한 곳인데, 다음날 가야할 계방산과는 오대산 줄기를 중간에 두고 있는 거리여서 산행이 안전할지 다소 걱정이 되었습니다.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고갯마루인 운두령

 

  계방산의 산행들머리로 자주 이용되는 운두령으로 접근하는 길은 이외로 매우 편리합니다. 영동고속국도 속사나들목을 빠져나와 31번 국도를 타고 홍천방면인 북쪽으로 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2007년 1월 21일 아침, 가이드의 좌석이 없을 정도로 등산객을 가득 태운 O산악회 버스가 양의 창자처럼 꼬부라진 오르막을 천천히 기어오르자 곧 운두령(1,089m)에 도착합니다(09:50).


  아침 10시전인데도 이미 7∼8대의 버스가 좁은 공간에 주차해 있는데, 좌측의 보래봉(1,324m)과 회령봉(1,309m)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은 소수이고, 대부분 오른쪽의 계방산으로 줄지어 오릅니다. 


 

   <운두령의 계방산 등산안내도> 

 

 


   남한 제5고봉으로 가는 길

 

  해발 1,577m인 계방산은 남한에서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 설악산(1,708m), 덕유산(1,614m)에 이어 다섯 번 째로 높은 산입니다. 그러나 산행기점인 운두령의 해발이 높아 실제로 오르는 높이는 500여 미터도 채 안됩니다. 서울의 북한산(837m)보다도 오히려 낮은 고도를 오르면 장쾌한 전망이 펼쳐지는 정상에 이릅니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아이젠을 착용하지만 O산악회의 P대장은 가급적이면 이를 착용하지 말도록 지시합니다. 아이젠은 단순히 길바닥이 조금 미끄럽다고 착용하는 장비가 아닙니다. 이를 착용하면 발과 다리에 부담을 주게 되어 다리가 쉽게 피로해지므로 장거리 산행을 할 경우 꼭 필요할 때 착용하는 것입니다. 1,166봉에서 고도를 잠시 낮춘 등산로는 그 후부터는 거의 오르막으로 이어지고 또 스틱을 가지고 있으니 아이젠 없이도 걷는데 불편함이 없습니다.


  조망이 훤히 트이는 1,492봉에 이를 때까지 한번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오릅니다(11:08). 동쪽으로는 가야할 계방산과 북쪽으로 이어진 능선이 선명합니다. 서쪽으로는 보래봉과 회령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이 꿈틀거리는데 무엇보다도 조망의 압권은 남쪽의 산그리메입니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오늘은 날씨가 흐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반공소년 이승복 생가터가 위치한 골짜기 너머 늘어선 산 줄기사이로 희뿌연 안개가 드리워져 있는데, 신기하게도 산의 능선은 선명하게 드러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느낌입니다.


  그동안 지리산이나 덕유산의 사진으로는 이런 경치를 여러 번 감상하였는데, 계방산에 올라 이런 절경을 보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기에 그 기쁨은 두 배입니다.  

 

  <1,492봉에 올라 바라본 계방산(우)과 소계방산(좌)>

 

   <남서쪽 조망> 

 

   <남쪽으로 바라본 지나온 능선>

 

  <남쪽으로 끝없이 펼쳐진 산그리메>

 

 


    계방산 정상의 황홀한 조망

 

  계방산은 태백산과 마찬가지로 높이에 비해 산세가 두루뭉실하여 산 그 자체만으로는 별로 볼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앞에서 언급한 데로 남쪽자락에는 반공소년 이승복 생가터가 자리잡고 있어 제법 알려진 산입니다. 그러나 겨울이면 많은 적설량으로 인하여 설경산행의 대표적인 명산이 되었습니다.


  1,492봉에서 다리에 조금만 힘을 쓰면 계방산 정상입니다(11:28). 몇 년 전에는 삼각점과 손바닥만한 표석뿐이었으나 지금은 제법 그럴듯한 표석을 세워놓아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습니다. 필자도 겨우 증명사진 한 장을 확보합니다. 주변에 사람들만 없으면 운치 있는 표석을 카메라에 잘 담을 수 있을 텐데 아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계방산 정상>

 

     <겨우 확보한 증명사진>

 

    <정상에 운집한 인파>

 

    <정상의 남쪽 경관>

 


   정상에서 바라보는 남쪽과 서쪽의 조망은 1,492봉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북쪽으로는 가야할 소계방산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드러누워 있고, 북동쪽으로는 오대산의 비로봉(1,561m)을 비롯한 연봉들이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습니다. 동쪽으로는 소백산 줄기너머 흰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황병산(1,407m)과 노인봉(1,338m), 그 밑으로는 선자령(1,157m)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유난히도 하얗게 빛납니다. 이들 산줄기들은 지난밤 황병산일대를 진원지로 하여 발생했던 지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아름다움을 산에 오른 사람들에게 뽐내고 있습니다.

 

 

 <서쪽으로 바라본 지나온 1,492봉>

 

   <남남서쪽으로 바라본 지나온 능선>

 

   <북쪽으로 바라본 소계방산 능선>

 

  <뒤로 보이는 노인봉과 황병산 그리고 선자령>

 

   <남쪽 조망> 

 

 

   또한 남동쪽으로는 발왕산(1,458m)의 용평스키장이 아련하게 조망됩니다. 다만 북북서쪽으로 하얗게 눈을 이고 있는 산 이름을 헤아릴 수 없는 게 안타깝습니다(산행후기를 쓰면서 지도를 확인해 보니 방태산 같은데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멀리 아련하게 조망되는 용평스키장> 

 

 

 


    무릎까지 빠지는 눈

 

  계방산에서 환상적인 주변의 조망에 넋을 잠깐 잃었다가 다시 정신을 차려 소계방산 방면으로 진행합니다. 첫 번 째 마루금에 올라 비로소 아이젠을 착용합니다. 주목 삼거리를 지나 자 급격한 내리막으로 이어지는데 응달이라 엄청나게 많은 눈이 쌓여 있습니다. 계방산에 적설량이 많은 이유는 바다바람과 대륙의 편서풍이 부딪쳐 눈이 쏟아지듯 내리고, 매서운 바람과 낮은 기온으로 내린 눈이 녹지 않는 지형적 특성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산행을 하며 설화나 상고대가 하나도 없어 섭섭했는데 이곳에서 지천으로 쌓인 눈을 보니 생기가 돕니다. 먼저 지나간 팀이 있는 듯 눈길에 러셀이 되어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두 다리에 힘을 쓰면서 눈 구간을 빠져 나옵니다. 이제부터는 밋밋한 오르내림이 한동안 이어지니 등산로가 꽤 지루합니다. 지난번 얼마나 많은 눈이 왔기에 영상의 기온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이토록 녹지 않고 쌓여있는 눈이 많은 지 모르겠습니다.


  길을 걸으며 내 그림자를 카메라에 담기도 하고, 눈꽃이 하나도 없는 황량한 겨울나무들을 원망하기도 하면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니 드디어 소계방산(1,490m)에 도착합니다(13:25).

 

 

   <뒤돌아본 지나온 계방산>

 

   <급경사 내리막 중간의 거대한 주목>

 

   <무릎까지 빠지는 눈>

 

    <필자의 그림자와 동행>

 

 


    쓸쓸한 소계방산 정상

 

  그러나 힘들여 이곳을 찾은 이방인에게 반겨주는 것이라고는 초라한 돌무덤뿐입니다. 아담한 표석이라도 하나 세워져 있었더라면 이렇게 서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북동쪽으로는 오대산의 연봉들이 더욱 가까이 보이고 지나온 남쪽으로는 계방산과 1,492봉이 성벽을 쌓은 듯 둘러쳐져 있습니다. 배낭을 내려놓고 간식을 먹으며 약 10분간 지체하다가 다시금 일어섭니다.  

 

   <소계방산 정상>

 

   <지나온 계방산 능선>

 

   <북동쪽의 소백산 비로봉을 비롯한 연봉들>

 

  

 


    눈이 쌓인 하산 길

 

  소계방산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1,388봉을 지나 1,270봉이 이르기 직전 좌측으로 사면으로 몸을 돌려세웁니다. 또 다시 시작되는 눈의 홍수입니다. 러셀은 되어 있지만 지나간 사람들이 많지 않은 듯 역시 눈은 무릎까지 빠질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눈의 상태와 경사의 기울기가 계방산 북쪽 능선을 내려올 때와 비교할 때 훨씬 안전합니다.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포근함을 느낄 정도입니다. 앞서가는 사람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고, 한없이 부드러운 눈의 촉감을 두 다리로 느끼면서 동심의 세계에 빠져보기도 합니다.

 

    <고사목위에 남아 있는 눈>

 


 


  때로는 딱딱한 지면이 아이젠을 착용한 발을 불편하게 하지만 이를 벗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두 다리가 뻐근할 정도로 힘을 쓰자 계곡에 다다릅니다. 하루 종일 햇볕을 볼 수 없는 심산유곡은 그야말로 하얀 백설의 세계입니다. 수정같이 맑은 물이 계곡사이를 흐르며 얼음을 녹이고 있습니다. 눈이 내린 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티끌하나 없는 순백의 눈을 보며 속세에 찌든 내 마음의 묵은 때를 날려버리고 싶습니다.

 


 


 


 


 

 

 


    애처로운 농심(農心)

 

  큰 도로에 도착합니다. 등산객이외에는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호젓한 길을 걸어갑니다. 넓은 개울에 쌓인 눈의 모습을 보면 흰색으로 온 세상을 도배를 해 놓은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그런데 도로의 오른편 넓은 밭에는 사람들의 김장독에 넣어져 있어야 할 배추가 눈을 머금은 채 그대로 버려져 있습니다. 지난해 가을 배추의 공급과잉으로 말미암아 값이 폭락하자 이를 내다 팔 경우 인건비도 건지기 힘들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난 농부들이 배추밭을 갈아엎었다고 했습니다. 이곳의 배추는 비록 그대로 밭에 방치돼 있지만 이를 바라보는 농심은 크게 상심하였을 것입니다. 수요와 공급을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농부들의 시름을 달래 줄 수 있는 좋은 대책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흰 도화지같은 눈>

 

  <버려진 배추>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식사

 

  자그마한 마을에 도착해 창촌1리경노당을 지나갑니다. 담장 너머 눈을 소복이 이고 있는 장독대를 카메라에 담으려고 몇 걸음 안으로 들어가자 인기척을 느낀 집주인이 방문을 열고 나옵니다. 오늘 처음으로 만난 마을 주민입니다. 처마 밑의 긴 고드름도 따스한 날씨에 많이 녹아 내렸습니다. 다리를 건너니 등산버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16:00). 오늘 산행에 6시간 10분이 소요되었습니다. 별로 쉬지도 않고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했는데 이미 절반 이상의 등산객이 하산한 듯 합니다. 이 산악회 회원들도 준족이 많기로 이름나 앞으로 또 참여하기가 두렵습니다.

   <경노당>

 

   <장독대>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국밥 한 그릇을 비우니 배가 든든합니다. 그런데 등산버스를 타고 귀가하면서 지리산을 700회 이상 올랐다는 한 등산고수가 하는 말이 자꾸만 뇌리를 스칩니다. 과거에는 안내산악회를 따라 가더라도 식사는 등산객 본인이 직접 싸 가지고 가거나 현지에서 매식(買食)을 했는데, 오래 전 한 산악회에서 식사를 제공하는 바람에 일이 꼬였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산악회에서 식사를 제공하는 산악회를 비난했지만 그쪽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본 산악회들이 너도나도 식사를 제공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제공하는 않는 산악회가 극소수뿐이라고 합니다.


  이 고수는 식사제공의 폐해로 두 가지를 들었습니다. 첫째는 등산객들이 그 지방의 향토 음식문화를 접할 기회를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각 고장마다 독특한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 도시사람들인 등산객들이 산행을 와서 현지의 토속음식을 사서 먹으면 시골음식점주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상부상조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안내산악회도 돈벌이가 되어야 좋은 가이드를 확보하여 성실한 안내를 할 텐데, 하산 후 식사(심지어 아침까지 제공하는 산악회도 있음)까지 제공하고 나면 남는 게 없는 장사라는 것입니다.


  이 분의 이야기는 일리가 있지만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하는데 길들여진 사람들의  마음을 원점으로 되돌리기에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에필로그 

 

  겨울 산행은 산행 그 자체보다도 환상적인 눈꽃과 상고대(바람서리꽃)를 보러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있는 것과 같이 눈꽃 대신에 대지에 쌓인 눈을 보는 재미도 상당히 쏠쏠합니다.


  계방산 등산로는 워낙 사람들이 많이 찾아 길이 신작로 수준으로 변해있어 겨울 가뭄 시 적설량을 만끽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계방산에서 북쪽 소계방산으로 연결되는 등산로와 소계방산 북쪽의 서쪽 하산로에는 많은 눈이 쌓여 있어 눈을 좋아하는 매니아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추억거리를 제공해줄 것입니다.  끝.     


펜펜의 나홀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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