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봉 가는 길에 눈은 내리고 

언제 : 12월 25일

어디로: 백화사--의상능선--대서문--국녕사--의상봉--가사당암문--백화사 (4시간)

누구랑 : 나와 그림자.


 

을유년도 저물어간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아쉬운 일들을 되씹어 보며 을유년을 반성하고, 병술년 계획을 세우는 일이 산꾼들에게도 예외는 아닐 듯 싶다.

나 역시 정초에 설악의 공룡능선과 지리산 종주 계획을 세웠는데 설악은 품에 안았지만 지리산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자리잡아 앙금가라 앉아 작은 바람만 불어도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반복만 할 따름이다.

새해에는 또 어떤 계획을 세워우고 실천해야 할지 혼란스러움 마져 일어난다.

주말마다 배낭을 꾸리고 산으로 가지만 아직도 산을 알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이제 겨우 하찮은 나무뿌리나 이름모를  풀 한포기의 자태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나와같이 호흡하는 수준이니 언제 확연히 깨치고 심안의 눈으로 산을 보게 될까?

그런 기대치를 안고 오늘도 배낭을 짊어지고 길을 나섰다.

 

짙게 깔린 구름은 금방이라도 눈을 뿌릴 것 같았다.

올 겨울 남도에는 잦은 눈으로 인해 피해가 속출했다고 연일 메스컴에서 떠드는데 겨울 산행을 즐기려는 나에겐 즐거운 소리로 들렸으니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이란 말인가?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 집을 나서 백화사로 향했다.

구름에 가린 해님 탓일까? 아직 따라나서는 그림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럴땐 혼자라 쓸쓸 할 수도 있지만 특별히  마음속에 그림자를 만들어 동행하기로 했다.

산으로 가는 차에 오르면 즐거운 맘에 힘든 줄 모른다.

오늘 산행 기점인 백화사 입구는 집 짓는 망치소리가 요란하다.

그 집들이 완성되고 나면 북한산 전망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까페가 들어설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산행 기점에 도달한다.

 

양지바른 곳에 누워 있는 무명 묘에 문인석만 낙엽에 묻혀져 가고 있는 곳이 내가 즐겨 오르는 시발점이다.

북한산은 어제 저녁 내린 눈으로 온통 하얀 천으로 휘감아 놓은 듯 하다. 바위를 벗 삼아 서 있는 소나무는 하얀 갓을 쓰고, 나목의 가지에도 눈이 얹혀 있다.

아무래도 의상능선은 바로 오르는 것은 다리가 완쾌되지 않아 무리가 따를 것 같아 국녕사로 해서 돌아 오르기로 맘먹고 갈림길까지 올라간다.

 

등산로에는 앞서간 산꾼들의 발자욱이 정겹게 느껴졌다.

나와 그림자는 그 길을 따라 우리의 흔적을 남기며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었을까?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갈증이 오려는데 북한산 초등학교에서 쉬는 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린다.

배낭에서 따듯한 물을 꺼내 한잔 들이키며 휴식을 취했다.

건너편 원효봉 너머 백운대는 짙은 운무에 쌓인 채 仙境(선경)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쉬는 시간이 끝이 났는지 다시 벨소리가 들린다.

가야한다. 나는 그림자의 손을 잡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한발짝의 착오도 없이 따라 오는 그림자.

대서문을 지나는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길가에 늘어선 상가들의 호객 행위를 뿌리치지 못하고 은박지에 싼 군고구마를 사서 호주머니에 넣고 국녕사 입구로 접어들었다.

 

국녕사 가는 길이 오늘은 처녀지 같다.  눈위에 아무도 지나간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눈발이 더욱 거세게 날렸다. 얼굴에 부딪히는 눈발로 인해 차다 못해 시리기까지 한다.

겨울산행의 맛이라 생각하니 달게 맞고 싶었다. 간간이 시려오는 손을 호주머니에 넣으면 채 식지 않은군 고구마의 따스한 체온이 손끝을 타고 전해 왔다.

이렇게 따뜻한 것을! 

‘고구마 싸 가세요’ 라고 외치는 말을 헛듣고 지났으면 후회 할 뻔 했다.

능선을 오라서서 솔가지 지붕삼아 휴식을 취하며 고구마 껍질을 벗겼다.

껍질이 벗겨지니 속살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아 오른다.

눈 내리는 산길에서 먹어보는 고구마의 맛은 동화 속 얘기 같이 감미로웠다.

그림자도 나도 맛에 취하고 있었다.

 

시장기를 달래고나니 발길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아직 아이젠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국녕사 입구에 다다랐을때 눈이 그치고 거대한 좌불이 나를 맞는다.

서둘러 구름 옷을 벗어 던지는 하늘엔 금방 해님이 얼굴을 드러났고, 보이지 않던 그림자가 내 곁에 서 있었다.

의상봉보다 더 커 보이는 불상에  맘이 편치 않다.

의상과 원효가 마주하고 있으면 그만이지 작은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도 남을 불상을 만들어 세운 의미를 알 길이 묘연했다. 그저 지형에 어울린 아담한 불상이었으면 좋으련만....

반배를 올리고 서둘러 산길로 접어들었다.

바람이 거세지고 눈쌓인 길이 미끄러웠다.

아이젠의 착용해야 했다.

한층 안정감이 생겼다. 가사 당암문에 다다르니 의상봉에서 내려오는 산꾼들로 부산하다. 

 

눈이 녹지 않은 바위 길은 미끄럽고 위험스러웠다.

나와 그림자는 서로를 의지하며 의상봉 정상으로 올라섰다.

의상봉으로 해서 대서문 성벽능선을 타고 내려가려고 능선을 접어드니 도저히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다시 발길을 돌려 가사 당암문으로 내려서는데 건너편 용출 능선 릿지에 산꾼들이 엉금엉금 기고 있다.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 장비도 없이 내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등골이 저려왔다.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파랗게 구름 한점없이 펼쳐져 있다.

흰눈을 자리삼아 산자락에 누워 맘껏 하늘을 감상하고 싶었다.

 

용출봉으로 향하려던 맘을 접고 백화사 계곡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제 밤 내린눈과 아침에 내린눈이 쌓여 쉽지만 않은 길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림자가 곁에서 따라 오고 있어 한층 힘이 되었다.

미끄러지고 자빠지고...‘뭐! 이런 길이 있어’ 중얼거리면서도 하산 길을 재촉했다.

이번 겨울 들어 3번째의 눈 산행은 끝이 났다.

아직도 완쾌되지 않은 오른발목과 나를 믿고 무작정 따라다니는 그림자에 고마울 따름이다.

백화사 앞마당에서 바라보니 의상봉이 빙그레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