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자령에 갔더니' 산행 /Photo 에세이  
(2008. 1. 4/ 대관령휴게소- 선자령-초막교/한뫼산악회 따라)
 

*. 선자령에 가고 싶다

 계절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산(山)이라면, 그 산 중에서 겨울을 겨울답게 가장 잘 표현하는
산이 겨울산 선자령(1,157.1m)이다.
겨울철이 다가 오면 영서지방의 대륙 편서풍과 영동지방의 습기 많은 해풍이 부딪쳐서
우리나라
에서 눈이 가장 많이 내리는 곳이 선자령이다.
그 선자령은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비산비야(非山非野)다.  그러나 그 능선 길에는 산도 있고 들도
있는 재산재야(在山在野)의 고개가 바로 선자령이다.
산을 그리워하면서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에게나, 산에 가서도 산이 두려운 나이에 사는
사람들에게 눈과 바람과 추위와 그리고 초원을 가득 덮은 민둥산의 설원(雪原)을 열어줄 것이다.
선자령 정상을 본 후 하산길은 어린아이들처럼 마포대에 엉둥이를 얹고 미끄러 내려오다 보면 잊었던 
동심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고개로 치면 한국에서 제일 높다는 고한에서 태백시를 이어주는 1,133m의 만항재가 있고, 설악산의

 관문인 935m의 한계령도 있지만, 그건 차로 넘는 고개다. 그러나 선자령은 구름처럼 걸어 넘는 낭만
의 
 고개 길 위에 있다.
한국에서 가장 겨울이 먼저오고 그 겨울에 1m 이상의 눈이 3월 늦게까지 머무는 곳이 선자령이다.
선자령은 마을과 마을을 넘어가는 재가 아니고, 백두대간을 탐하는 이가 북으로 향하는 대관령과

오대산  노인봉 능선 상의 길 위에 있는 산이다.
대관령 구 휴게소에서 6km 내의 거리에 있는 곳이 선자령이지만, 832m 대관령휴게소와 1,157m의
선자령
과는 325m의 표고 차밖에 되지 않는데다가 그 길은 완만한 긴 능선 오름길이기 때문에 등산
이라고 하기
다는 트레킹이라고도 하는 산이 선자령이다.
그래서 민둥민둥한 산이라 해서 1,157m의 높이를 가지고도 '산'이나 '봉'(峰)이란 이름 대신에 '령(嶺)'
으로 만족해야 하는 산이 '선자령'이다.
선자령에는 이름도 많다.  
'대관산(大關山)', '보현산(普賢山)', '만월산(滿月山)' 등등. 이름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유명하
다는 말도 된다.
대관산(大關山)은 대관령과 연관된 이름일 것이고,'보현산普賢山)은 이 산의 동쪽 기슭에 
있는
보현사(普賢寺)로  인하여 생긴 말이다. 그 보현사 쪽에서 이 산을 우러러 보면 두루
뭉실한 보름달 같다해서 '만월산(滿月
山)'이라 이름한 것 같다.
그런데 그 이름이 왜 선자령(仙子嶺)인가. 
'선자'는 한자로 ‘仙子’라 쓰던 ‘仙者’라 쓰던 신선(神仙)이란 말이다.

*. 동화의 나라 속으로 떠나는 산행 같더니-
   2년 전 선자령으로 떠나기 전날 TV에서 뉴스를 시청하던 아내가 급히 나를 부른다.
 '여보, 저렇게 눈 내리는데 어떻게 가려고 해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有朋이自遠方來(유붕이자원방래)하니 不亦說乎
(불역열호)아" 그걸 보러
가는 건데 얼마나 반가운 손님인가.
차가 강원도에 들어서니 차 안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었다. 어제 내린 눈이 길가의 논밭, 길과 집들을
온통 흰눈으로 덮어 버린 것이다.
"어마, 크리스마스 엽서 속의 그림 같네!"
"그래, 그 엽서의 동화 속을 차가 달리는 것 같아!"
"저것 봐, 시(詩) 속의 세상 같이 아름다워!" 
  그 선자령이 다시 보고 싶어 일산 한뫼산악회 따라 선자령을 향하는데 우울한
소식이 들려온다.
영동지방은 요즈음 겨울 가뭄이 한창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던데, 설마 겨울산 선자령에
설마 눈이 없을까? ' 반신반의 하였다.

*. 대관령 이야기 
  옛날 사람들에게는 당시 대관령에는 길도 오솔길 뿐인데다가 험준하기 짝이 없는 곳이라서
" 대관령을 평생에 한 번도 넘지 않고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다."
라고 강릉 지역
사람들이  말할 정도로 대관령은  험준하기 이 없는 곳이었다. 
풍수가들이 '자물쇠 형국'이라고 말하던 대관령은 영동의 진산(鎭山)으로서 예로부터 영동, 영서를
구분하는 방어적인 관문(關門)이었다.  
  -고려 시인 김극기는 이 고개를 험한 요새의 큰 관문이란 뜻으로 '대관(大關)'이라  불렀다.
  -왕 건을 도우려 출병한 강릉의 김순식 장군이 대관령에 이르러 승전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이로 보면 대관령은 '영동권의 방어 요새'로서 이 지방의  산신(山神)과 성황신(城隍神)과 같은 수호신이  머물러
거처하던 곳으로 옛사람은 믿어왔다.
그뿐인가 대관령은 시인 묵객이 넘나들며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주고받던 낭만적인 곳이기도 하였으나,
오늘날의 대관령은 겨울 일기예보 시에 가장 추운 곳으로 소개되는 곳이요, 정월 초하루 새해가 떠오를 
때에 맞추어 선자산은 해맞이의 명소가 되어 왔다. 
 
신사임당이 아들 율곡을 대리고 이 고개를 넘으면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신 오죽헌을 바라
보며 눈물로 쓴 ‘大關嶺’이란 시는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어온 유명한 한시다.

慈親鶴髮在臨瀛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身向長安獨去情 외로이 서울 길로 가는 이 마음

回首北村時一望 돌아보니 경포는 아득도 한데

白雲飛下暮山靑 흰 구름만 저녁 산을 흘러 내리네
 

*. 풍력발전소  

 옛날에 대관령이 그 이름처럼 영동지역의 요새였듯이
대관령은 우리 국방에도 대대급이 주둔하였던 대형
지하벙커가 있던 곳이다. 
과거 50년대 말 구축한 지하 유류저장고 및 탄약고 등 3
2개의 군부대 시설이 은폐, 엄폐되어 있던 군영 터를 
백두대간을 복원하기 위해서 작년 2007년 봄부터 여름까지
철거 복원한 곳이다.
그도 그렇지만 도중도중 목책(木柵)이 있어 궁금해 하다가 
이 고장 분인 듯한 분에게 물었다.
 '저거요, 방풍(防風) 목책이 아니라 ,우사(牛舍)로 지은 거예요."
 


이 우사를 오르다가 뒤돌아 대관령 넘어에 있는 뾰죽한 능경봉
쪽으로 시선을 돌려 보면, 마치 비행접시 착륙장 같은 멋진 시설

물이 있다. 항공무선표지소였다. 
옛날 강릉에서 몇 년 간 살 때 대관령에 공군부대가 있다고 들
었는데 그 공군의 시설물이었다.
이 우사(牛舍)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이 있다. KT통신탑이다.



그 통신탑보다 더 많은 시선을 빼앗아 가는 것이 풍력발전기였다.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내는 이 풍력발전기는 허브 높이 46m로 3.5km의 풍속에서 돌기 시작한다는 직경
48m나 되는 거대한 세 개의 날개 달린 풍력발전기였다.
한 대가 연간 2,000m wh의 전기를 생산한다는 영구자석 동기발전기다.
그 발전기는 몇 기나 될까? 내 눈에 보이는 것들만도 50개가 훨씬 더 넘는 것 같다.
풍력발전기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이 고장이 전국에서 가장 바람이 많고 따라서 추운 고장이란 말도 된다.
전에 왔을 때 그 밑을 지나다 보면 소리가 요란하던데 오늘은 조용하다. 어떤 것은 아예 돌기를 멈춘 것도
있다.
전국에서도 가장 바람이 세게 분다는 곳에 바람이 없고, 전국에서 가장 많은 눈이 내린다는 선자령에
눈이 없다니. 그 눈이 다 작년 세모에 호남에 가서 다 내리는 바람에 호남의 농사가 억망이 된 모양이다.
풍력발전기 옆에 입간판이 있어 내용을 보니 마음이 으시시해 진다.

위험! 동절기에는 발전기 날개의 빙설이 떨어져 사고위험이 높으니 발전기 부지 내 접근을 금지
합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이 풍력발전기 시설 관리와 옛날 군부대 때문에 산 깊숙한 대관령서 2km 거리
까지 아스팔트가 뻗어있는 것이다.

*. 대관령국사성황사(大關嶺國師城隍堂)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구대관령 주차장에 '大關嶺國師城隍堂' 입구란 거창한
안내석이 있다. 그
대관령에서 1.4km 지점에 이르면 거기에
'국사성황당'이 1.3km라는 이정표가 있다.
이곳은 대관령 산신을 모시는 곳으로 5평 정도의 작은 당우를
말한다.
활과 화살을 메고 말을 탄 장군의 말고삐를 잡고 있는 시중의
좌우에 
호랑이가 호위를 하고 있는 모습의 국사서낭신을 모신
곳이다.
이 신은 강원도 강릉시와 명주군에서 대관령 산신과 강릉
단오제의
주신으로 모시는 대관령국사서낭신이다.

그 대관령국사성황신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신라 시절 강릉의 한 어머니가 샘물에 뜬 해를 마시고
범일(泛日)을 잉태하였다.   범일은 자라서 고승이 되어 불법을 전파시키고,  
임진왜란 때에 이 고장을

처들어온 왜군을 술법으로 격퇴시키매 사람들이 그 후부터 이 고장 수호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泛日’란 이름을 가만히 살펴 보면 뜰 ‘범(泛)’,해 ‘일(日)’로 해를 떴다는 위 전설 그대로
가 이름 속에 들었다. 사가(史家)들의 말을 빌면 범일(泛日)은 신라 고승 범일(梵日)스님일
것이라는 하는 설이 있는데, 그것은 그 전설이 같고
이름이 한자음으로 같기 때문인 것 같다


*. 백두대간 길
선자령은 백두대간 길에 있다.
이 길은 백두산 장군봉(2,749.6m)에서 지리산 천왕봉(1,915.4m)에 이르는 백두대간 1,400km 길
구간 내의
일부분인 선자령(1,157m)과 능경봉(1,123m) 구간 길이다.
선자령은 오대산국립공원에 속한 위치로, 북으로는 노인봉(1,338.4)과
남쪽으로는 능경봉(1,123m) 과
연결되는 주요
등산로로 선자령 능선 왼쪽이 우리나라 대표적인 산림지역인 'Hapy 700 평창군' 이고, 
오른쪽이 강릉시요 ,
그 너머가 청정해역인 동해바다이다. 
-강릉시와 동해
북쪽으로 더 가면 노인봉이 있고, 남쪽으로 뒤돌아 가면
제왕산(840.7m)과
능경봉과 만나는 등산로다.

 






*.'새봉'을 지나서 
    요번 겨울 들어 한 번도 못 밟은 눈 덥힌 산길을 마음껏

밟아보고 싶어 벼르다가 온 선자령이, 눈을 볼 수 없는 곳으로
만나게 되어서 눈덮힌
2년 전의 선자령 모습이 눈에 밟혔다.
-
그 눈 덮인 광활한 초원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는 겹겹

의 산에 어울려 한 바탕 꿈꾸는 듯하였다. 
  드디어 바라만 보던 광활한 눈 덮인 초원에 나는 서 있었다.
도시에서 태어나서 즐비한 회색의 상자곽 같은 아파트만

보고 살다가, 탁- 트인 그 광활한 초원이 온통 눈으로 덮혀 
마음까지 시원하게 열어주는 설원을 보니 그리던 세상을 품에 안은 듯한 호연지기를 느끼었다.
아름다움을 멀리 보면 풍경이 되지만 가까이서 보면 나도 그 경치 중의 하나가 된다. 
나무에 덕지덕지 흰눈이
얼어붙은 나무에 가까이 서니 더욱 그러하였다.

*. 선자령 정상에서
 
 

 나는 대관령에서 선자령 정상까지 오는 도중에 한 구루의 큰 나무는 물론

바위 하나를 보지 못하였을 정도로 선자령은 육산(肉山)이었다.
 민둥산이라는 선자령(仙子嶺)도 그래도 이름값을 하는가.
그 정상까지는 팍팍하고 지루한 길을 한동안이나 올라야 그 얼굴을 드러내어

 주었다.
정상에는 2년 전에 왔을 때보다 풍력발전기가 더 많았고, 그때 없던 '백두대간

선자령' 정상석이 원래 있던 정상석을 초라하게 보이게 하도록 우람하였다.

*. '강릉 대공산성'에서
 
 정상은 대관령에서 5km 거리였지만 
여기서 계속 직진하면 곤신봉( 1,127m)이요, 거기서 더 가면 
노인봉(1,148m)이다. 
전에 왔을 때는 정상서 더 가 근신봉 못미쳐에 있는 낮은목으로 해서 보현사계곡으로 하산하였었다.
그 길로 가다보면 
하산길의 좌측에 비석이 선 고개가 있다.
여기가 '강릉대공산성'(강원도 기념물 제28호)이 있는 곳으로 1895년에는 을미 의병의 항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 전설에 의하면 이 산성은 백제 온조왕이 군사를 훈련 시키기 위해 축조했다고도 하고, 발해 왕이
쌓았다고도 하는 곳인데, 길이 약 4km, 높이는 2.4 m 내외의 산성이다.
치성(雉城, 성가퀴)의 흔적도 보이고 성내에 건물터, 우물터, 토기 조각 등이 발견 되었다는데 눈처럼
역사에 깊이 묻히고만 신비의 산성이 되고 말았다.
오늘 우리들의 일정은 정상에서 다시 내려와서 680m 봉을
지나 2.5m의 초막골로 하산하여 초막교에 와 있는 우리들의

산악회 버스로 향하는 것이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와서 간단히 식사를 끝내고 아니젠을 하였다.  
궁둥이 썰매를 타지 않고는 내려갈 수 없는 무서운 비탈 길이었음
을  생각하고 그 초막골 길에는 눈이 있겠지 해서였다.
그러나 가파른 내리막길에도 눈은 거의없었다. 그래도 육산
이라서 아이젠은 내림길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다 모처럼만에 만난 바위를 기념 삼아 사진을 찍었더니 산이 노여워 하였는가. 거기서부터는 위험한
돌길이라서 정상서 '대관령으로  원점회귀할껄-' 하는 후회까지 할 정도로 가파른 돌길이 계속 되었다.
그동안 나는 '선자령에 다시 오고 싶다' 고 겨울을 기다리고 살았는데 그 선자령에 눈이 없으니, 선자령은
모래 없는 해수욕장 같이, 소
없는 송편 같이 무미건조하여 다시는 '선자령에 오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계절로는 겨울이나 날씨는 가을이었고, 바람은 없었으나 전망을 열어 주어 육안만으로도 주위의 산은 물론

멀리 강릉 경포호를 굽어볼 수 있는데다가 등산객도 드물어 등산 내내 맛있는 공기를 코로 입으로 한껏 마실
수 있었던 새해의 첫 산행이었다.
금년에 나는 그동안의 산행기를 정리하여 '한국 국립 산악공원 Photo 에세이' 를 내려고 편집 중에 있다.
그리고 그 속편으로 '한국 도립 산악공원 Photo에세이' 속편을 쓰기 위해서 전국의 산을 찾아 나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