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 閑談 6

봄꽃향기에 취해버린 어느 하루

 

 

 

  J형!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소식 전해드리지 못한 시간이 꽤 길어져 송구스러운 마음을 부여안고 이 편지를 씁니다. 오늘도 무등산에 갑니다. 언제고 틈나면 친구 집에 찾아가듯 가는 산이지만 모처럼 옛 동지들과 다시 뭉친 동반산행이기에 색다른 감회를 안고 떠납니다. 한동안 성깔을 부리던 날씨도 축 늘어져 완연한 봄기운이 코끝을 맴돌아 발걸음도 무척 가볍습니다. 이런 기분에 취해보려고 산에 가고 또 가겠지요.
 

 오를 때마다 힘들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 토끼등을 오늘도 힘겹게 오릅니다. 산행에 입문할 무렵, 이 길을 오르면서 몹시 힘들어하시던 형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산행의 달인(達人)이 되셨다하니 산에 흠뻑 취해버린 뜨거운 열정이 한없이 부럽습니다.
 

 약수터 쉼터는 오늘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올라오는 사람 내려가는 사람들이 어우러져 시끌벅적해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동화사터를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여러 갈래로 나눠진 길목에 서서 흐르는 땀을 훔치고 숨고르기에 들어갑니다. 어쩌다 산행하면서 길을 잘못 들면 고생하듯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겠지요. 빨리 가려고 나름대로 지름길이라 판단했다가 오히려 역경에 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형도 잘 알다시피 지난 변혁기에 하필이면 회오리가 몰아치는 길목에 서있었기에 피할 수 없는 숙명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안길에는 지울 수 없는 생채기를 안겨주었습니다. 헛되게 보낸 지난 세월의 무게가 양 어깨를 짓눌러 숨이 막힐 지경으로 시간이 흐르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슴을 옥죄올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좌절감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리지 않았기에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지난 시간들은 질곡의 연속이었기에 지금도 가끔 강박관념에 시달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나치게 앞만 보고 질주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 생각하니 쓴웃음만 터져 나옵니다. 이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려고 발버둥치다가 도중에 털썩 주저앉아 포기하는 것보다 목표하는 곳을 향해 천천히 꾸준하게 나아가는 것이 승자의 길이라는 평범한 이치를 되새기면서 가파른 산길을 쉬엄쉬엄 올라갑니다. 
 

 J형!

 동화사 쉼터에 앉아 형을 생각합니다. 수많은 담소를 나눴던 그 자리에 다시 서니 새삼 감개무량합니다. 그러나 사람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외면하듯 살아온 것이 참으로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耳順의 길목을 넘긴 듯한 산행객들이 쉼터 한편에서 도시락을 펴놓고 봄의 향기에 취해 구성진 육자배기를 恨을 삭이듯 애끊게 불러 젖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고단한 삶의 질곡에서 잠시 벗어나는 여유를 가져봅니다. 
 

 몇 일전 서울의 어느 주상복합아파트 청약에 무려 25만여 명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투기자금이 몰려든 것은 물질적 욕구를 억제하지 못한 우리의 독특한 문화적 관습에서 기인된다고 생각합니다. 부동산에 투자하면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뿌리 깊은 사회적 불패신화가 깨지지 않고서는 이런 과열현상은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투명하고 건강한 사회가 이룩될 것 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려 보통사람 그 누가 물질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스럽겠습니까. 그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그러나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자위하기에는 뭔가 개운치 않아 곰곰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질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몫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을 도외시하고 이익에 급급하다면 탐욕의 늪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겠지요. 이제부터라도 주어진 것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고착되고 부동산 투기, 로또 열풍 등으로 일확천금,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로 들끓어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서글프게 합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구(三垢) 즉 탐욕(貪慾), 진에(嗔恚), 우치(愚癡)에서 벗어나기 위해 산에 오르고 오른다는 어느 산사람의 얘기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J형!

 무등산은 오밀조밀하거나 아기자기하지 않고 이름대로 무던하게 번번해서 미련스럽게 비춰지기에 한결 여유로움을 안겨줍니다. 지나치게 있는 척하고, 아는 척하고, 잘난척하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깨우쳐주는 지혜의 산이 바로 무등산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러기에 무등산 품에 안기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기분이 좋아집니다.
 

 산자락 곳곳에서 봄의 정취가 물씬 배어나옵니다. 봄은 어김없이 이곳에 찾아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봄의 향연을 만끽하면서 자연의 순리를 되새겨봅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젖혀 무엇인가를 기다리게 하고 무엇인가를 생각게 하는 계절이 봄인가 봅니다. 
 

 자연의 이치는 이처럼 어김없건만 우린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자신의 터전을 소중하고 알차게 가꾸려고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마음이 교통하는 것은 기도이기에 언제나 행복한 나날이 되시고 즐거운 산행이어가시기를 간구합니다. 
 

 되돌아오는 길목의 식당들은 어느 곳을 불쑥 들어가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 마음이 편합니다. 오랜만에 향긋한 봄나물로 버물린 보리밥에 막걸리 한잔을 걸치고 나니 온 세상이 내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쩌면 알싸하고 향긋한 봄꽃향기에 취한 탓도 있겠지만 - - -

 

 형의 건승과 행운을 기원 드리면서 또다시 연락드릴 것을 약속하고 이만 줄이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