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봉산 높이는 990m 이며 행정구역으로는 전북 진안군 주천면과 정천면 사이에 있는 산이며 구봉산은 운장산 동쪽능선에 위취 한 산이고 구봉산은 산의 남쪽에있는 천황사 에서 바라보면 아홉개의 봉우리가 뚜렷하게 있어 구봉산이라 부른다고한다.

구봉산 산줄기 북쪽에서 흘러내린 물이 금강 상류인 주자천을 이루는데 명도봉과 명덕봉 사이의 계곡이 그유명한 운일암 반일암 계곡이다 .

구봉산 특징은 햇빛이 반나절 밖에 들지 않는다는 계곡이 열두굴 삼형제 바위 대불바위 보살암 비석바위 용소동 기암 괴석이줄비하며 석계의 경관이 수려하여 여름 피서지로 많은 사람들 각광을 받는곳이다.

구봉산 동남쪽 산기슭에 위취한 천황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무염국사가 창건 하였으며 고찰로 처음에는 승암사라 했는데 언재부터인가 천황사로 개침되어 지금까지 부르고있다

운일암 반일암 계곡은 주자천 계곡에서 가장 협곡을 이루는 길이가 3 키로 나 이르는데 일조시간이 짧아 그 계곡안은 항상 한기가 서린 천혜의 피서지로 유명한 곳이다.

무진 장이라면 강원도의 영평정과 함깨 우리나라 두메산골 대명사로 알려진곳이다.
곧 무주 진안 장수의 지붕이라고도 한다.
소백산맥과 노령산맥 중간에 위치한 진안에 마이산 이승에서 추락한 신선부부 늦잠자다 들킨 아내 신선 내력을 보면 한신선 부부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진안 이곳 인간 세상에 내려와 살았는데 두사람은 사랑의 도피 행인지 아니면 죄를지어 귀양온것인지 알수 없으나

어떻든 이들부부는 이곳에서 행복하게 나날을 보냈는데 행복과 꿈 같은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둘이나생겨 이들부부는 다시 하늘 나라로 올라갈 생각을 하던끝에 떠날때는 말없이 그리고
흔적없이 사라지는 것이 신선 세게의 불문율인 것 이들 부부도 소리없이 떠나기위해 세상 사람이 모두잠든  밤중을 택했는데 아내 신선이 그날밤따라
피곤하다면서 출발을 지체하는 바람에 새벽에서야 하늘로 올랐으나 그만 인간에게 들키고 말았다.


부지런한 아낙네가 우물에 물 길러 나왔다가 거대한 두산이 공중에 둥둥 떠 오르는 광경을보고 놀라서 큰소리로 비명을 지르니 천기를 노출시킨 이들은 두번다시 승천할 기회를
가질수 없이 진안군 진안읍과 마령군에 걸처 솟아 있는 마이산으로 변한것이다.

 

그때 남편 신선은 폭력으로 아내 양 겨드랑에
끼었던 두아이를 빼앗으며 아내의 옆구리를 걷어 찬것이며 싸우면서 땅으로 떨어진 신선 일가족은 서서히 바위 산으로 굳어져 동쪽에 떨어진 수마이봉은 화가 가시지 않은 남편의 형상이며 등을 맞댄채 서편으로 돌아앉은

암마이봉은 한대 맞고 토라진 아내 모습이며 수마이봉 밑에 덩치는 적으나 오뚝하게 솟은 두 봉우리는 두아들 형상이라고 한다
이 봉우리 속칭을보면 나도 산이라 부르는데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너만 마이산이냐 나도 마이산이다

하면서 마이산과 더불어 전설상 대청구조를 보여준 우화산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사는 진안읍에 위치에 있는 산인데 이곳 선비의 행실이 너무착해 하늘이 감복해서 하루는 앞산 기슭에서 명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번개가 치면서 한 선여가 나타 났다고한다

이선비는 나타난 선녀를 아내로 맞아드리면서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그 장면을두고 세상에서는 우화 이등선이라고 했다
마이산은 오르기 보다 바라보는 산이라고하며 수마이봉 암 마이봉을 보면서  

 

 산악인 웃음 질퍽한 웃음속으로 가보자... 

 


진안 어느 고을에 노처녀가 시집온지 열흘만에 서방이 죽어 십년 가까이 수절해온 젉은 과부가 있었느데 무슨까닭인지 몸이 쇠약해지고 자꾸만 이름모를 병이 깊어가는데 어느날 과부는 이웃 동내에 있는 의원 집을 찾아 갔다

의원은 과부를 요모저모 진맥을 하더니 무슨 짐작이 갔던지 과부에게 말했다 과부님 병은 조용히 보아야 할병이니 모래 내가 과부님 집으로 가서 고쳐드리겠습니다 . 날이 닭아오자 의원은 과부 집으로 찾아갔다 .

 

과부 진맥을 짚어본다면서 과부의 몸을 이리주무르고 저리주무르고 하더니 증세가 심상치 않은 것 같으니 아무래도 아래를 보아야 할 병이니 부끄러워 하시지 말고 옷을 벗으시요 여기서 부끄럽다고
옷을 벗지 않으면 과부님은 앞으로 한달 몾넘기고 죽을수 있으니 알아서 하십시요 .하는말에 과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옷을 벗었다
그러자 의원은 과부 음부 질을보면서 이제야 알았소 병명을 무릎을 치며 말했다 이 때문에 병이 났군 과부님은 음부아래 질속을 들어가는 길이 둘이군요 그래서 몸온도가 새어버려 몸이 쇠약해지고 병이들게 되었습니다.

의원은 말했다 과부님 질 들어가는 큰 길을 아무래도 막아야 겠습니다 그말을 듣던 과부는 질 속에 들어가는 큰 길을 막아 병이 나을수만 있다면 하고
두말없이 의원 말에 딸았고 승락을 했다.

의원은 옷을 벗고 과부 질속 큰 길을 막겠다며 자신 양물을 과부 질속에 넣으니 두사람은 한몸이되고  과부는 생에 처음 삶의 보람을 느껴 그날부터 밤이면 의원은 과부길을 막아준다는 핑계로 과부와 온우에 정을 나는데 과부는 의원 치로한 덕분에 과부 혈색이 좋아지고 날이 하루하루 지나자 배가 날마다 다르게 부려오르는데.

진안 이웃 여편네들이 과부에게 까닭을묻자 과부는 이웃 의원님이  바람 새는 길을 밤마다 틀어 막아 주셨기 때문에 몸의 온도가 모여서 이렇게 혈색이 좋아지고 배가 이처럼 부르게 되었다고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했는데 그후 과부는 의원님과 아들딸 많이 낳아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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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물결위에 붉은 마음 의암 주 노개 과연 어떤 여성이 그렇게 살았을까 세월이흐르면 언잰가는 흔적조차 사라진 인생 그러나 그는 갈수록 더욱 붉은 마음 빛나고있다
의암의 붉은꽃 아리땁던 그아미 흔들리우며 그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남꽃보다도 더푸른 그물결위에 양귀비 꽃보다더붉은 그마음 흘러라
(변영로 시 논개중에서)

장수.주논개. 함주령 육십령 고개아래 전북 장수군 장계면주촌 마을에서
주달문과 밀양박씨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주달문은 서당 훈장을 하며생계를 이어 갔다 논개는 머리가 영특했고 어렸을때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는데 남달리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뜨자 두모녀는 성질이 포악하고 술을좋아하는
작은 아버지 주달무에게 얹혀 살았다

주달무는 논개를 혼인 약속을하고 돈을 받아 문서까지 작성하여 받고는 받은돈은 주달무가 계략을 꾸몄다 이사실을 전혀 몰랐던 논개 모녀에게는 청천 벽력 같은 일이였다 마침내 사주단지를 보내오자 논개 모녀는 함안 친정으로 도망을 갔는데 주달무와 약속한 문서를 근거로 돈을준사람이 두모녀를
관가에 고발을 하고 말았다.

결국 논개 모녀는 장수로 잡혀와서 문초를 받았는데 이때 장수 현감은 육십을 바라보는 무과출신 최경회였다 . 돈을준 김풍현을 만난적도없고 김풍현이준 돈은 주달무가 중간에서 가로채 모두탕진 했다는 사실이 낱낱이 들어나자 현감 최경회는 이두모녀를 불쌍히여겨

최경회 집에서 일할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 논개는 최경회 부인을 정성껏 보살피고 집안일을 빈틈없이 처리해 신임을 얻었다 논개가 18세 되던해 현감부인은 자식이 없음을 탓하며 논개를 현감 최경회 부실로 맞아들여 행복하게 살것을 권유해 살았는데 1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그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위기에 몰리자 최경회는

진안 무주 장수 등지를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집하고 김천일 의병대장과도 긴밀히 열락하여 호남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최경회를 경상우병사로 임명하여 진주성을 지키던 김시민 장군이 죽자 최경회를 김천일 장군과 함깨 응원군으로 파견하여 진주성을 사수토록 어명이 내려졌다
그래서 장수에서 최경회가 진주로 떠나자 논개도 소백산맥 태산준령을 넘어
진주성으로 찿아갔다
최경회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전의를 상실해 북쪽에 두번 절하고 김천일장군과 함깨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 하였다.
이소식을 들은 논개는 부끄러움을 씻고 남편의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던중 6월 29일 진주성을 합락시키고 7월7일 촉석루에서 승전 축하 잔치를 벌렸는데 이때 논개는 기생임을 자청하여 연회석에 참석하고 복수 칼날을 세웠다

논개가 적장게다니무라에게 접근 온갖 교태로 그를 취하게 만든 다음 남강 기슭으로 유인했다
논개는 먼저간 남편 명복을 빌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비통한 눈물을 흘린 다음 적장의 허리를 껴안은채 도도히 흐르는 남강으로 뛰어들었는데 그때 논개 나이가 19세였다

논개의 이의로운 충절이 세상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의암이란 호를 임금이 직접내리고 촉석루 곁에 사당을 지어 그넋을 추모 하도록 하였으며 이사당을 1824년 관찰사 이지연이 세웠으나 6.25 로 인해 불타버린 것을 1960년에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당안에는 김은호가 그린 논개 영정이있는데 19세 꽃다운 자태 앵두보다 붉은 입술 반달과 같은 눈썹 연분홍 저고리에 자주색 고름을 매고 남색 치마를 입고 있다

논개는 장수 고을 자랑으로 해마다 남강에 몸을던지던날 7월7일을 기려 제사를 지낸다.


누가 이땅 여성중 가장 대접받는 여성은 아마도 의암에서 순절한 주논개일것이다. 반만년 역사속에 후세 사람에 의해 사랑까지 지어받은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매우 드물며 여성의 경우 남원에 있는 춘향과 논개 뿐인데 춘향이는 실존 인물이 아닌 춘향이를 제외하면 논개의 사당이 유일한 하나일뿐이다 .

의암 푸른 물결위의 붉은 마음 당당히 자기무덤을 갖고 있는 논개 논개 묘는 경남함양 방지 마을오른쪽에 위치하고있는데 산자락 아래 잘정비되어있어 상당히 규모가크다 멀리서보면 마치 왕릉처럼 위엄있게보인다.

우리는 의암의 붉은꽃 주논개 출생지 무진장 고을 산행을 가면서 나뭇잎새 들이 깊은 밤을호젓이 무엇을 속삭이고 있을까 한번생각 해봄직도하다..

누구나 사람은 불꽃을 지니고 살아감니다 잔잔한 수면과 검푸른 숲그늘 그림 같은 석양이 그위에 걸려 있을 때 인생이 살아가면서 오늘과 내일이 즐겁고 명쾌한 일로만 짜여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어지는 이야기는 .산하 게시판 메아리에서이어지고있습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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