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 閑談 22

오늘같이 좋은날


  


 

 J형!

 을유년(乙酉年) 설날입니다.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는 하루가 시작되지만 원단(元旦)은 분명 또 다른 의미를 안겨줍니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 설빔을 사다놓고 손꼽아 기다렸던 명절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어느덧 이순(耳順)의 고갯마루에서 맞이하는 설날은 그런 감흥은 메말라버리고 만사가 귀찮아 심통만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니 이모든 것이 나이 듦에서 오는 삶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한 까닭일까요? 
 

 솔직히 자신의 손바닥으로 덮어버리면 그저 그만일 그리 넓지 않는 얼굴값 노릇에 동분서주하다보니 무척이나 고달픈 것이 명절입니다. 그럭저럭 체면치레에 급급하다보니 혹시라도 결례된 곳이 없었는지 괜스레 마음이 한구석에 허전함이 남는 것을 보니 역시 얼굴값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합니다. 
 

 그동안 쉼 없이 숨 가쁘게 달려왔건만 무엇 하나 번듯하게 이루지 못하고 의미 없는 주름살과 한숨만이 부쩍 늘어나고 돌아갈 그날은 저 멀리서 손짓해오기에 쓸쓸함이 국화 향기처럼 배어나 조바심이 불길처럼 일어나기에 마음의 안식을 찾아 산으로 갑니다. 산길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고향처럼 포근하게 길손을 맞아줍니다. 
 

 J형!

 싫든 좋든 지금껏 운명적으로 살아온 여정의 한 페이지에 어떤 흔적(痕迹)이라도 남겨보려고 무던히도 애써봤지만 물위에 글씨 쓰듯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허망함은 시나브로 메마른 가슴을 더욱 애틋하게 조여 옵니다. 그러나 올해는 조금 더 나은 나날이 이어지리라는 기대감으로 가파른 산길을 쉼 없이 오르면서 울적함을 삭혀봅니다. 
 

 결코 많은 것을 이루기에는 버겁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마음만 앞서다보니 성급함이 더해집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헛된 욕심을 버리지 못해 오르막처럼 힘든 고단한 삶이 연속적으로 펼쳐지고 있으니 이제부터라도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잡동사니들을 던져버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남은 여정을 꾸려가는 지혜를 터득하렵니다. 
 

 J형!

 무작정 높은 곳에 도달하려고 발버둥치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어리석음 을 범하기에는 너무도 어중간한 나이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매사에 감사하고 작은 것에 만족하는 비움을 실천해야합니다. 지나치게 비교하는 삶으로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오늘에 만족하는 소심(素心)의 싹을 틔워야합니다. 그 싹을 틔우지 못하면 황량한 터전을 방황하는 나그네 신세로 전락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충실하려면 왕년(往年)의식을 버려야합니다. 지나치게 과거에 집착하면 현실을 직시하는 혜안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긍정적인 자세로 유연성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능동적인 자세를 유지하려면 관습적 사고에서 벗어나 기득권을 과감하게 버리는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기득권에 안주하면 앞을 정확히 분간하지 못합니다. 정시(正視), 정념(正念), 정행(正行)하려면 끊임없는 성찰(省察)이 필요합니다. 지내온 하루를 반성하고 무엇을 잘하고 잘못했는지를 돌아봐야 자신이 지금쯤 어디에 서있는지를 가늠하는 예지력(叡智力)이 길러집니다. 이런 능력을 겸비하지 못하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살이가 아니겠습니까? 
 

 J형!

 설날이 되면 의례적으로 떡국을 먹고 먹기 싫은 나이도 한살 더 먹어야합니다. 젊은 시절 호기를 부리면서 한살이라도 더 올려보려고 얼마나 애썼든지 지금 생각하면 쓴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흔히들 나이는 숫자와 상관없다고 하지만 늘어나는 숫자만큼 짓누르는 연륜(年輪)의 무게는 지친 산길에서 배낭 무게만큼 무척이나 힘겹기에 마음이 무거워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어김없이 시작되는 시간의 의미는 분명코 어제와 오늘이 확연하게 다릅니다. 그러나 어둔한 탓인지 아직도 그 차이를 분간하지 못하고 있으니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지나가버린 과거에 집착하고 다가오는 내일에 두려움을 가진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오늘이 주는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현실에 최선을 다하렵니다. 
 

 J형!

 입춘이 지났지만 산정에 올라서니 바람 끝이 차갑습니다. 그러나 저 멀리서 봄기운이 꿈틀거리면서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니 상쾌하기 그지없습니다. 산길을 걸어가다가 힘들다고 포기하면 정상(頂上)에 오를 수 없다는 산행의 이치를 거울삼아 다가오는 내일을 더 알차게 맞이하기 위해서 하루하루가 고달파도 굳건히 견뎌내는 인내심을 기르렵니다. 
 

 설 쇠느라 지친 탓인지 오늘 산행이 무척이나 힘들어 중도에서 포기하고 싶었지만 좌절하지 않았기에 오랜만에 희열을 느낄 수 있어 가슴이 뿌듯합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슬러 희망찬 내일을 맞이할 수 있도록 차분하게 자신을 되돌아보고 소심의 터전을 일구기 위해 다시는 오지 않을 오늘에 최선을 다하렵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