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제법 많은 강수량을 기록해 놓고도

온통 숯검뎅이가 된, 많은 사람(양양지역의 화재로 피해를 본 분)들의 눈물처럼

그렇게 계속 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리고 우연찮게 만나게 된 분과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산행약속이어서

조금은 설레이는 마음으로 좀 일찍 차비하여 집을 나섰는데

요즈음 대구지하철은 첫차가 좀 늦게 운행을 시작하여 약속을 어기게 될까봐

옛날에 중학교 첫 등교하던 것 같은 심정으로 지하철역으로 달려갔다.

 

대구 중앙로역이다.

겉모습은 돈 많이 들여서 치장을 새로 잘 해 놓았다.

나 역시 그러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다만, 오가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면서도

그 때 그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전동차가 동대구역에 다다를 무렵 어떤 아주머니 나를 건너다 보는데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한 부시시한 모습의 그 아주머니의 입가에

아주 가느다란 실소가 흐르는 것을 보고 나는 꿈(?)에서 깨어 혹시 내 옷에 뭐가 묻었나? 하고

살펴본 즉 옷은 깔끔 했는데.....

 

산에 간다는 작자가 그것도 비오시는 날에 구두를 신고 있으니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아니겠는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중앙로역으로 되돌아갔다.

산에서 가끔  알바를하는 경우는 있었으나 전철알바를 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인지라

주차장까지 도로 돌아가서 신발을 갈아신느라 좀 허둥댄 아침이었다.

 

자신을 하마라고 소개하셨던 그 분은  전국구인 그 명성답게

기다리는 시간도 푸짐하게 잡아두고 나를 기다려 주셨다.

산행 들머리에서 우의를 꺼내 입는데  동네 아주머니가 대문밖으로 나오시더니

 

아주머니 : "비가 이래 오는데 산은 웬 산잉교?"

하마 :  "아주머니는 비온다고 밥 안드세요?"

아주머니 : ......

나 : ......

 

오붓한 산행이 시작되었다. 인근 동네분들의 산책코스 같은 솔밭길을 지나  조금 올라가니

갖가지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솔직히 내가 보기에는 별로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있어서는 안될 무슨무슨 찻집라고 쓰인 간판이 걸려 있는, 

쥔장이 내 세우기로는  쉼터라고 하는 움막이 있었는데 비가와서 그런지 더 을씨년스럽고  

정말로 흉물스러웠다. 뭐 물론 먹고살자니...라고 하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런 저런 얘깃속에 분위기가 좀 무르익을 즈음에 봉우리 하나가 불쑥 끼어 들었는데

안개로 인해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어디가 어딘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곁에 이 산을 세 번이나 다녀가신 하마가 계시기도 했고 

나도 비록 야간이기는 했지만 한 번 지나간 경험이 있어서

길을 잃거나 하여 위험에 처할 그런 걱정은 없었으나

속으로는 개념도를 왜 안가져왔나 하는 아쉬운생각이 들었다.

 

어? 아니다!

 

다시 후진하여 조그마한 등성이를 올랐다가 한참을 내려가니

여름철에만 장사를 하는 무허가인듯한 식당집이 두어 채가 있었는데

우리를 본 개 세 마리가 반가워서 그런지 졸졸 따라다니면서 왕왕 짖어댄다.

 

하마가 산에 오니 길을 잘 모르겠지......

 

다시 "입산금지 -주인백-"이라고 쓴 팻말을 지나 한 참을 오르니

솔숲 사이로 제법 반듯한 산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마 : 거 참 이상하네?

나 : ....

하마 : 어? 또 아니다! 도로 가요.

나 : (속으로) "나야 오늘은 어차피 그대에게 맡긴 몸..."

 

슬슬 뭐가 알바고 뭐가 제대로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리 저리 여러 코스를  꽤나 긴 시간동안을 무아경속에서 산행을 마쳤는데 

내 생각엔 알바 중 잠시 남는 시간에 본래 원하던 코스를  양념으로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참 재미 있는 산행이었다.

 

우리네 인생이 그러하듯 남이 닦아놓은, 정해진 길만 따라 다니면 

그 무슨 재미와 의미가 있겠는가.

날마다 아침이면 그날의 새로움이 마음을 다잡게 하듯이

나는 이번 같은 산행을 무척 즐긴다.

한 번은 어느 안내산악회를 따라 갔다가

(대개는 엉망이라고 표현하는) 하루 일정에 나는 무척 즐거웠고

이를 솔직히 표현을 했다가 몰매 맞을 뻔한 적도 있었다.

 

좋은 코스를 잡아 산행을 도와주신 하마께 공개적인 지면으로 감사 드리며

근교산행에 있어서 더할 수 없는 기쁨을 가슴에 가득 채운 초례봉 산행이었다.

 

아침에 전철알바를 하면서

나는 오래 전에 유명을 달리하신 한 버스 기사님이 떠 올랐다.

그 아저씨는 항상 차 안에 다섯 켤레의 깨끗한등산화를 가지고 다니셨는데

세 결레는 남자신발이고 두 켤레는 여자 신발이었다.

멀리 가는 산행은 버스가 일찍 출발하는 관계로

대개 자기차로 집결지까지 와서 버스에 오르므로

좀 늦으면 이번의 나처럼 그냥 구두를 신고 타거나

어떤 경우는 슬리퍼(산악용 슬리퍼도 아닌...)를 신고 덜렁 차에 오른 사람도 있었는데

이럴 때 꼭 버스가 출발하여 한 참을 간 후에야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닫게된다.

이럴 때 그 아저씨는 "마 그냥 시원하게 맨발로 갔다 오소." 이러시면서

맞는거 있는지 한 번 보라고 하면서 가지고 다니시는 등산화를 내 놓으시곤 하셨다.

산할아버지에게서도 많으 것을 배우게 되지만

이 또한 생각을 키워주는 훌륭한 가르침이다.

 

산행일? : 2005년 4월 10일

일기 ?: 비가 많이 내렸으나 산행이 끝나니 비도 따라 그쳤음.

누구랑 어디로? : 하마님을 따라서 초례봉을 지나 환성산으로

                         (그런데 환성산은 구경도 못하고 내려왔음.)

시간은 얼마나? : 꼬박 9시간(휴식시간 없었음.)

나는 누구? : 대구 사는 김홍중입니다.

하마? : 하마에게 물어보세요.(하마이름은 제 이름이 아니라서 함부로 밝힐 수 없습니다.)

소감 : 세상을 살다가 이렇게 이쁜하마 처음 봤어요.

추천 : 하마와 산에 가면 초속 20m 범위내의 풍속까지는 안전한 산행을 보장 받을 수 있습니다.

          (보증서 써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리고 늘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