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 閑談 35

향수(鄕愁)의 갈증을 시원하게 달래줄 곳은 그래도 산(山)뿐이더라.
 


 


 

 오랜만에 무등산에 간다. 목포에서 갯바람에 부대끼며 살다보니 자주 찾지 못해 마치 고향에 가는 기분에 젖어든다. ‘고향’(故鄕)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나는 낱말이다. 소꿉친구들과 뛰놀던 옛 시절이 불현듯이 떠올라 진한 향수(鄕愁)를 일깨우기 때문일까?

 

 거친 세파를 헤쳐 나가다가 잠시 삶의 쉼표를 찍으면서 그윽한 고요함에 잠길 수 있는 곳이 고향이다. 그래서 항상 그 품에 안기기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다. 여우도 죽을 때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머리를 향한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가 있듯이 죽어서라도 고향에 묻히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본성임을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서산대사께서 “삼재불입지처 만고불파지지”(三災不入之處 萬古不破之地)“ 즉 "재난이 미치지 않고 오래도록 더렵혀지지 않을 만세(萬歲)의 땅“이라 하여 자신이 쓰시던 유품(遺品)을 보존토록 유언(遺言)한 천년고찰 대흥사(大興寺)가 지척인 두륜산(頭輪山)자락 산골마을이 내 고향이다.
 

 호남정맥(湖南正脈)에서 갈라진 한줄기 산세(山勢)가 강진 주작산(朱雀山)에서 한껏 거드름을 피우다가 두륜산 가련봉에서 절정(絶頂)을 이루고 다시 땅 끝 달마산(達摩山)으로 뻗어가기 직전에 또 한번 용트림한 도솔봉(兜率峰)이 우리 동네 진산(鎭山)이다.

 

 골짜기를 굽이쳐 흐르는 맑은 시냇물, 정겨움이 묻어나는 돌담으로 이어지는 고샅길 - - -  이맘때면 널찍한 들녘에서 보리 익어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노고지리 지저귐이 울려 퍼지는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곳이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 품에 파묻혀 살고 싶지만 현실의 벽을 쉽게 허물어버릴 수 없기에 자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가슴 깊숙이 간직한 고향의 정취는 그대론데 내 얼굴에 주름살이 늘어나듯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 어디에서 찾아봐도 부모님의 모습을 찾을 수 없고, 친구들과 일가친척들도 객지로 나가버려 마음 놓고 회포를 풀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명절에 선영(先塋)을 둘러보는 것으로 회향병(懷鄕病)을 달래고 있다. 그렇지만 찾을 때마다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감회가 새로워진다.
 

 예전에 살았던 집은 먼 친척이 살고 있기에 살며시 들어가면 감나무와 아름드리 모과나무, 탐스런 모란꽃 - - - 옛적 모습 그대로 길손을 반겨줘 가슴이 뭉클해진다. 금방이라도 어머니가 창문을 열고 반갑게 맞아줄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혀 한동안 발길을 멈춰보지만 모두가 헛된 꿈이기에 애련함이 밀려들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성묘를 마치고 조상받이 전답(田畓)을 둘러보면 부모님의 체취(體臭)가 느껴지기에 숙연함을 금할 수 없다. 자식들이 남에게 짐이 되지 않기를 일구월심(日久月深) 염원하면서 손발이 부르트도록 억센 삶을 일궈온 공간이었기에 자식된 도리를 다하려고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이 터전과 아낌없는 부모님의 희생이 있었기에 내가 있음을 잊지 않는다.
 

 모처럼 고향 나들이에 나서더라도 형편이 여의치 않아 오래 지체할 수 없기에 안쓰러움을 금치 못한다. 그렇지만 향수(鄕愁)에 대한 갈증을 속 시원히 해갈해주기에 항상 가고픔에 시달린다. 그래서 고향에 가고 싶어질 때면 산으로 간다. 귀성(歸省)길이 힘들어도 즐거움에 휩싸이듯 산행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뒤돌아볼 겨를 없이 바삐 살아왔기에 이곳으로 옮겨오면 조금은 한가로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많은 섬으로 형성된 지역적 특성 때문인지 뜻하지 않는 일들이 겹쳐 좀처럼 여유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을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니기에 더욱 겸손하게 자세를 낮춰나가면서 슬기롭게 풀어나가려고 애쓰고 있다.
 

 심신(心身)이 고달파 하루쯤 푹 쉬고 싶은데 고향 가고픔이 시나브로 펴오르기 산으로 달려간다. 언제나 포근함으로 감싸주면서 늘 내 곁에서 버팀목처럼 지켜주는 고향과 같은 무등산 품에 안긴다. 산길은 녹음이 무르익어 바람에 실려 온 향긋한 숲 향기가 고향 내음과 같아 흐뭇하기 그지없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