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 閑談 41

행복의 조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더라.

 

 

 

 

 엊그제부터 궁상맞게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더니 을씨년스런 날씨가 이어진다. 오랜만에 영화나 볼까? 아니면 바쁘다는 핑계로 덮어뒀던 책이나 읽을까? 요모조모 궁리하다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잠시 내 스스로 내 자신마저 잊어버릴 수 있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섭리에 따르고 싶어 산으로 간다.

 

 창(窓)을 열면 계절에 맞춰 변하는 무등(無等)의 자태가 한눈에 펼쳐져 맘만 먹으면 그 품에 안길 수 있다. 이런 묘미에 빠져 이곳을 떠나지 못한지 어느덧 강산(江山)이 한번 바뀌고 또 다시 반환점을 돌아가고 있다. 초창기에는 내가 살던 아파트만 덩그렇게 서있었는데, 지금은 숲을 이루고 있으니 창상지변(滄桑之變)을 실감케 한다.

 

 암자(庵子) 뒤란으로 이어진 길목에 얼마 전까지 낙엽이 수북이 쌓여 바삭거림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몸부림쳤었는데, 오늘은 물기를 흠뻑 먹은 탓인지 별다른 저항 없이 길손의 발길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겨울은 이렇게 우리 곁으로 한걸음 성큼 다가서고 있다. 마른 잎새들의 부대끼는 소리에 귀를 기우리며 산과의 만남을 이뤄간다.

 

 이곳에서 팔각정을 거쳐 바람재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아기자기해 재미가 쏠쏠하다. 산객(山客)들의 왕래가 빈번하지 않아 느긋하게 걸으면서 심수(深愁)를 풀어놓기에 아주 좋다. 이번에 내린 겨울비로 온갖 티끌들을 말끔히 씻어낸 송림(松林)이 푸르름을 더하고 향긋한 솔 향이 물씬 배어나 코끝이 찡하다. 세상의 벽에 부딪치며 울부짖는 바람소리를 벗 삼아 해찰을 부리지 않고 오르내림을 거듭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기에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행복을 추구해나간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얼마만큼 행복함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현재 생활에 만족을 느끼고 있느냐”는 설문조사에 10명 중 3명만이 만족하고 있다는 통계청의 사회통계 결과를 접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세계 12~13위를 넘나드는 국가 경제력을 가질 만큼 엄청난 고도성장을 이뤄내 이만큼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삶에 만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갈수록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청년실업이 증가되고 있는 판국에 좋은 결과를 기대한 것이 오히려 지나친 과욕이었을까?

 

 영국의 여성 심리학자 캐럴 로스웰과 인생상담사 피트 코언은 지난 2002년 '행복지수'를 발표했는데, 놀랍게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방글라데시가 1위를 차지했다. 또한 저명한 경제학자 리처드 레이야드 교수는 이렇게 못사는 나라가 행복지수(幸福指數) 상위권에 속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첫째, 사람들이 너무 쉽게 좋은 여건에 적응해버린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 손에 들고 있는 부채만 있을 때는 선풍기가 아쉽지만 선풍기가 생기면 이번에는 에어컨이 없으면 불만이 생긴다는 것이다.

 

 둘째, 상대적 소득수준과의 대비의식(對比意識)이다. 미국 하버드 대학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남들이 연봉 2만 달러 받을 때 5만 달러 받는 것이, 남들이 20만 달러 받을 때 10만 달러 받는 것보다 더 좋다는 대답이 나왔다.

 

 행복은 풍부한 물질과는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욕심내지 않고 긍정적인 사고로 자신에게 주워진 현실에 만족하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마음에서 벗어나 박수를 쳐주는 미덕을 쌓아나가는 마음가짐을 길러야한다. 이렇게 사노라면 어느새 흡족함에 휩싸일 것이다. 이것이 곧 행복이 아닐까?

 

 중머리재에서 잠시 숨을 고르면서 머지않아 펼쳐질 겨울 연가를 꿈꿔본다. 새인봉을 거쳐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말굽(∩)코스를 더듬으면서 행복의 조건이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내 맘을 다스리는데 있음을 깨달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산과의 만남을 이뤄가는 희망 충전이 행복의 문으로 한 발짝 다가서는 첩로(捷路)임을 잊지 않으련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