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부부산악회」절경의 설악산 단풍 산행기 -

최절정의 봉정암-오세암 산길, 설악 단풍의 진수를 느끼다 

【 산  행  개  요 】

□ 간  곳 : 설악산 대청봉 (1,708m, 강원도 속초시, 인제군, 양양군)


□ 일  시 : 2012.10.12(금)~10.13(토) (무박산행)

<날씨>: 쾌청, 전형적 가을 날씨, 파란 하늘은 높고 맑다. 간간이 뭉게구름


□ 간사람 : 우리집 부부산악회 2인 (회장 집사람, 등반대장 필자)


□ 교통편 : 우리집 2022호 승용차, 백담사→한계령은 현지택시 이용


□ 준비물 : 산행식(현미 맨 김밥, 떡, 오이, 초코렡, 과일 등), 물, 카메라 등


□ 주요 산행코스 : 한계령-서북능선-대청봉-봉정암-오세암-영시암-백담사


□ 총 산행거리 및 소요시간 : 20.6km, 15시간 16분 (휴식시간 포함)


□ 세부 산행코스 거리 및 소요시간

한계령-(2.3km,1:43)-서북능선삼거리-(6.0km,3:55)-대청봉-(2.3km,2:15)-봉정암-(4.0km,3:51)-오세암-(2.5km,1:52)-영시암-(3.5km,1:40)-백담사 



【 산 행  후 기 】



푸르른 녹음으로 싱싱했던 성하의 여름이 지나가고 살랑대는 바람에 옷깃이 여미어지는 만산홍엽의 가을이 찾아오면, 금수강산 온 산하는 울긋불긋한 오색물결 단풍과 오곡이 무르익는 황금빛 들판으로 들뜬다.

이맘 때쯤 되면, 누구나 그러하듯 평화스럽던 내 가슴은 또 다시 불타오르는 단풍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뛰어 오르기 시작하고, 어디든 산이나 들로 나서지 않으면 답답함 때문에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우리집 부부산악회는 이번 가을에는 좀 기억에 남을 만한 조금은 거창한(?) 단풍산행을 다녀오기로 하였다.


우리집 부부산악회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멤버는 단 두 사람, 집사람이 회장이고 내가 등반대장인데, 사실 이렇게 이름을 걸고 산행에 나선 것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지금은 성장한 두 애들이 대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는 거의 모든 대한민국의 어머니들이 그렇듯이 회장은 애들 키우고 공부 뒷바라지 하느라 자신을 돌보고 즐기는 일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러하다가 몇 년 전, 큰 애에 이어 막내가 대학교에 들어가자 회장은 갑자기 온 정신을 쏟고 매달리던 목표가 없어져 버린 탓에 정신적으로 공허감을 맛보게 되고, 또한 자신을 뒤돌아보니 무상한 세월의 흔적만이 곳곳에 배어있어 내적인 갈등으로 말미암아 자칫 어려움에 봉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불현듯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것으로 느껴져 건강에도 좋고 경제적 부담도 적어 손쉬운 산행을 같이 나서기로 한 것이 우리집 부부산악회의 효시이다. 그러니까 그 역사가 지금부터 약 6~7년 정도 된 것 같다.

물론 나는 그 전에도 산을 좋아했기 때문에 주말이면 직장 동호회나 산악회를 따라 가거나 나 혼자 배낭을 메고 근교 산행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집사람과 둘이 산행에 나서면서부터는 가끔 원거리에 산악회를 따라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번 둘이서 같이 산행을 다녀왔다. 주로 토요일을 이용해서 승용차로 근교로 이동한 후 산행을 하고 돌아오곤 하였는데, 그 바람에 서울 주변이나 가평 등 수도권 근교의 크고 작은 산들은 거의 다 다녀왔다.


그 전에는 등산 간다면 산을 조금 올라 가다가 중턱이나 산 아래 계곡에서 놀다오곤 했다던 우리 회장도 산행을 제대로 적응하기까지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부부산악회 초기 시절의 어느 봄날, 양평 서종면에 있는 그리 높지 않은 삼태봉으로 산행을 갔었는데, 회장은 곧 숨이 넘어갈 정도로 헉헉거리며 가슴이 터질 것 같다고 호소를 해서 무슨 잘못된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지 산행 내내 큰 걱정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큰 산을 다녀와도 될 만큼 적응이 되었고, 덕분에 여러모로 건강해졌다.

무슨 일이든 그러하지만, 등산도 처음 할 때는 무척 힘이 들고 당장 그만두고 싶지만, 차츰 횟수가 늘어날수록 적응이 되어 숨도 덜 차게 되고 육체적 피로도도 낮아지게 될뿐더러 조금 지나면 주말이면 어디든지 배낭을 메고 나서야 직성이 풀릴 만큼 중독성을 지니는 묘한 데가 있다.

날씨 좋은 주말에 다른 특별한 일 없이 갑갑한 방안에서 지내게 되는 날에는 가슴 탁 트인 산등성이를 타고 넘는 호쾌함과 폐부를 찌르는 맑고 시원한 공기, 진한 땀 흘린 뒤의 상쾌한 기분, 이런 것들이 아른거려 또 다시 배낭을 메고 나서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애들을 다 키우고 난 후 나이가 들어서는 적어도 주말에 한 번쯤은 부부가 같이 산행에 나서기를 적극 권하는 바이다.

부부산행의 가장 큰 장점은 적은 비용으로 건강 유지에 큰 도움이 되고, 오롯한 숲속 길에서 부부간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새들이 지저귀는 산길을 걷다보면 서로를 위하는 마음, 즉 애정이 깊어진다는 점이다. 물론 얘기를 나누다보면 간간이 언성이 높아져 말다툼으로 번지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그것은 지루한 여정의 양념으로서 오히려 가끔씩은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온 종일 자연에 묻혀 자연과 함께하게 되는 등산은 일상의 스트레스에 찌든 현대인에게 여러모로 좋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좋다고 느끼는 점은, 사람은 나이가 들어 중년이 되면 혈관에 기름끼가 끼거나 몸에 불순물이 많이 축적되게 마련인데, 등산을 하게 되면 경사길을 오르느라 헉헉거리며 맑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 마시면서 심장을 격하게 뛰게 하고 땀을 많이 흘림으로써 이러한 불순물들을 제거한다는 점이다.

또한, 능선에 올라서면 주변의 자연 경관에 흠뻑 취해 머릿속의 스트레스가 확 쓸려 없어지고 정신은 잡념이 없는 맑은 상태가 된다. 바로 이 점은 등산만이 가지는 최고의 장점이고, 조상들로부터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물러 받은 우리들에게 내려진 큰 축복인 것이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쯤은 맑고 상쾌한 공기를 마시면서 심장을 강력하게 펌프질하여 온 몸에 피를 힘차게 돌게 함으로써 혈관 속의 찌꺼기들을 씻어냄과 동시에 온 몸의 노폐물들을 악취가 나는 진한 땀을 통해 몸 밖으로 배출함으로써 산행이 끝난 후에 느끼게 되는 그 상쾌함이란 정말로 최고의 보약이다.


나는 여럿이 같이하는 자리가 있으면 우스갯소리로 이런 애기를 종종 한다. 대한민국 국민이 세계에서 제일 오래 살 거라고. 

왜냐하면, 그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되는데,

첫째, 우리 국민은 전 국토의 70%가 산으로 둘러싸인 금수강산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데, 주말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배낭하나 달랑 메고 근교 산행에 나서서 운동과 함께 산자수명의 아름다운 절경까지 마음에 담는 여유를 가지니 심신단련에 최고의 보약이 될 것이고,

둘째,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머리 좋은 사람들이 의대에 진학해서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있으니 어지간한 병쯤은 병원에 가면 쉽게 낮게 될 것이며,

셋째,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삶에 여유가 없어 긴장감이 생활 속 내내 유지된다는 점이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여기에서 떨어지면 절벽이다. 한번 떨어지면 다시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살아 남아야한다’ 라는 단호한 생각과 각오를 지니고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강한 정신으로 살아간다. 팍팍한 우리의 삶에게는 늘 여유보다는 긴장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단점으로 보이는 것들, 예를 들면 국토에 산이 너무 많다는 점, 우수한 인재들이 과학 같은 분야에 뛰어들지 않고 의사가 되기를 원한다는 점, 열악한 사회보장 때문에 먹고 살기 힘들어 늘 긴장 속에 생활하고 있다는 점,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들이 우리들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큰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를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물론 사람마다 생각과 보는 시각의 차이는 있겠지만, 무엇이든 긍정적인 마인드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를 가진다면 이 어려운 세상도 오히려 기회로 바꾸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옛말에 난세에 영웅이 나고, 위기에서 기회가 생기고, 절박감에서 성취가 일어난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그동안 한라산이며, 오대산, 내장산, 주왕산 등 가을 단풍이 고운 여러 명산들에 단풍산행을 다녀왔지만, 그래도 꼭 한번 명산대찰을 품고 있는 설악산의 단풍 진수를 제대로 한번 맛보고 싶어 벼루어 왔는데, 아직도 대청봉을 밟아보지 못해 한번 가보기를 갈망하던 회장이 더 나이들기 전에 가보자고 강권하였다. 이번 기회에 단풍철을 맞아 설악산 대청봉에 한번 올라보고  또 단풍구경도 실컷 하고, 가능하면 대피소에 묵어가면서 우리나라 모든 산행인들의 로망인 공룡능선도 한번 타보자고 하였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중청과 희운각 대피소 예약을 몇 번이고 시도해 보았지만, 성수기인지라 도저히 예약이 성사되지 않아 대피소 1박은 포기하고 아쉽지만 무박으로 산행을 다녀오기로 결정하였다.


3년 전에도 단풍 시즌인 10월 9일에 회장과 같이 대청봉에 올라 보려고 산악회에 신청을 하여 새벽 5시 반에 관광버스를 타고 일산을 출발하여 한계령으로 갔었는데, 산행을 온 승용차와 관광버스들이 엄청나게 몰려와 좁은 도로에 차량들이 서로 뒤엉켜 지체하는 바람에 당초 계획보다 훨씬 늦게 11시경에나 한계령 휴게소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늦게 산행을 시작하는 바람에 서북능 삼거리에 이르러서는 원래 우측으로 돌아 대청봉으로 가야하지만, 시간상 너무 늦어 대청봉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좌측 길로 접어들어 험한 너덜지대가 많고 가파른 바위길이 이어지는 서북능선을 타고 귀떼기청봉과 대승령을 거쳐 어둑해질 무렵 장수대로 내려 온 경험이 있다. 그 때 서북능선 상에는 단풍이 벌써 졌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설악산 단풍산행의 시기를 택함에 있어서도 고민을 조금 했다. 명산의 가을 단풍산행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가고자 하는 산의 단풍 절정시기에 맞춰 가야 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직접 경험을 통해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료수집과 분석에 신경을 썼다. 그것은 불과 일주일 사이로 큰 차이가 나는데, 그 이유는 하루에 단풍이 물들어 내려오는 거리가 약 50~70m가 되기 때문에 일주일이면 거의 400여 미터나 되고, 높이가 1,708m인 설악산의 경우에도 일주일이면 위치에 따라 단풍 경치가 크게 바뀔 수밖에 없다.

원래 설악산 주능선의 단풍구경은 통상적으로 10월 첫째주 주말이 절경이다. 그런데 설악산과 단풍시기가 비슷한 오대산에 작년 10월 8일에 산악회를 따라 단풍 산행을 갔었는데, 정상인 비로봉과 능선에는 단풍이 제법 들었지만 그 아래쪽에는 잎이 푸른 상태여서 단풍 명산으로 이름난 오대산에 대해 조금 실망을 한 기억이 난다.

그래서 당초에는 한 주일 전인 지난 10월 6일 첫째주 토요일에 산행을 할까 생각을 했었는데, 공룡능선 등 주능선에는 단풍 구경이 볼만하겠지만, 그 아래 계곡 쪽이나 산허리 쪽에는 아무래도 푸른 잎 상태로 조금 이른 감이 있을 것이고, 어차피 1박하며 공룡능선을 타지 않을 바에야 용아장성 등 아래쪽 산들과 계곡 쪽 단풍 구경이 훨씬 큰 감동을 줄 것 같아 한 주일 뒤로 늦춰 산행에 나서기로 하였다.


설악산은 큰 산이기 때문에 단풍시기가 정상과 아래쪽 간에 큰 차이가 있다. 통상 공룡능선이나 주능선 쪽은 10월 첫째주가 절경이고, 그 아래 부분인 산언저리나 용아장성 능선, 계곡 등은 10월 15일을 최절정으로 치고 있다.

그래서, 12일(금) 밤 8시경에 승용차로 일산 집을 나서서 한계령 휴게소에 도착, 주차를 하고 산행객들이 본격적으로 붐비기 전에 가능한 새벽 일찍 산행을 나서기로 하였다.

산행코스는 한계령으로 올라가서 서북능을 타고 끝청과 중청을 거쳐 대청봉에 올라 아침식사를 하고, 내려 올 때는 봉정암에서 구곡담 계곡으로 가지 않고 전설의 향기가 아름다운 오세암과 영시암을 거쳐 백담사에 이르는 코스를 택했다.

물론 이렇게 잡은 코스는 내 스스로도 가을 단풍 구경을 하기에는 환상적인 코스가 되리라 생각되었다. 특히, 용아장성 능선 아래 자리 잡은 봉정암에서 오세암에 이르는 구간에서는 지금은 생태보호를 위해 휴식기간으로 정해 출입이 금지된 그 유명한 가야동 계곡을 지나게 되어 있어 멋진 절경을 구경할 기회가 되기 때문에 가슴이 설레었다.

사계절 언제나 그 위용과 아름다움을 뽐내는, 특히 기기묘묘한 거대한 암봉들과 옥수 같이 깨끗한 물이 흐르는 수많은 계곡들, 그리고 전설과 은은한 역사의 향기가 흐르는 고찰들은 설악산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찬탄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직장 동호회나 산악회 등을 따라 산행을 즐겨해 온 나로서는 설악산은 몇 번이나 찾았던 곳이다. 오래 전 가을 단풍철에 직장 동료들과 함께 한계령에서 출발해서 대청봉을 올라 오색으로 내려 온 적이 있고, 직장 산악회 동호회를 따라 무박으로 한계령에서 출발해서 대청봉을 거쳐 공룡능선을 타고 마등령을 넘어 설악동으로 간 적도 있다.

또한, 직장상사 한 분과는 둘이서 봄에 오색에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에 출발해서 대청봉을 넘어 구곡담 계곡을 거쳐 백담사로 내려온 기억이 있다.

애들이 아주 어렸을 때에 온 가족이 설악동에 머물며 금강굴이며 권금성을 올랐었고, 그 외에도 직장에서 속초로 워크숍을 가거나 각종 모임을 통해 지인들과 속초에 올 때면 설악동이나 울산바위를 여러 번 올랐던 적은 있지만, 우리 부부산악회가 대청봉을 함께 오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 더 나이가 들기 전에, 그것도 이왕이면 단풍이 절정인 시기에 대청봉에 한번 오르고 싶었는데, 드디어 결행의 때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설악산은 높고 큰 산으로서, 대청봉은 그 중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대청봉을 거쳐 오른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내려간다. 초행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비교적 힘이 덜 들고 짧은 코스인 한계령에서 올라와 오색으로 내려가는 코스를 선호하고 있고, 동쪽의 설악동 소공원이나 북쪽의 백담사로 가는 코스는 절경으로 환상적인 코스이지만 거리가 멀고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선택을 함에 있어서는 산행 가능 시간이나 체력 등 여러 가지 고려가 필요하다.

조금 여유 있게 갈려면 대청봉 부근에 있는 중청대피소(120명)나 희운각대피소(35명)를 이용하면 되지만, 수요에 비해서 공급이 턱없이 부족해 성수기에는 15일전에 인터넷으로 실시하는 예약을 따내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승용차를 몰고 가서 산행기점에 주차시키고, 산행 후에는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산악회에 신청을 해서 관광버스를 타고 와서 산행 후 하산지점에 미리 도착해 기다리고 있는 관광버스를 타고 다시 돌아오지만, 일부러 멀리 경치 좋은 절경을 찾아와서 산악회의 단체 행동과 정해진 시간에 얽매이면서 쫓기듯 산행을 해야 한다는 것은 마음에 내키지 않아 부득이 승용차를 이용해 가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승용차를 가지고 가면 주차와 원점 회귀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염두에 두고 가야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전에 인터넷을 뒤져 하산 예정지점에서 연결되는 시외버스 시간이며, 택시요금과 연락처 등 여러 참고자료들을 수집, 준비해 두었다. 요즈음은 인터넷 만능시대로서, 인터넷을 거치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 아닌가.

그리고, 몇 년 전, 북한산 송추계곡 송추폭포에서 미끄러져 발목이 좋지 않은 회장을 위해 비교적 가볍고 고가인 스틱 2개를 준비하여 장시간의 장거리 산행에 대비하였다.  

나아가, 최근에 구입한 스마트 TV 대형화면으로 설악산의 황홀한 단풍 절경을 두고두고 감상하기 위해 양질의 큰 용량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는 성능 좋은 미러리스 카메라에 예비 배터리와 8기가짜리 대용량 메모리를 추가로 준비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음은 시간대별 세부 산행여록이다.


2012.10.12(금)


20:30 : 우리집 2022호를 타고 일산집 출발. 집사람과 둘이서. 주유 79,000원.

외곽순환고속도로를 이용해 사패산 터널을 거쳐 강일IC로 내려감

21:25 : 남양주의 경춘고속도로 톨게이트로 들어섬. 밤길을 질주.

동홍천에서 고속도로를 내려와 44번 국도를 타고감.

인제, 원통을 지남

23:30 : 한계령 휴게소 도착. 휴게소 주차장 폐쇄, 도로옆 공간에 차를 세움. 승용차 몇 대가 주차되어 있음. 휴게소에는 10여명의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 따끈한 어묵을 들거나 등산로 입구 쪽에 앉아 떠들고 있음. 매점에서 따끈한 어묵 2개를 삼. 등산로 입구 계단을 나무로 된 문으로 막고 폐쇄하였음. 입산불가. 매점 여주인의 말에 의하면 국립공원관리공단 측에서 평상시에는 3시에 문을 열어주는데 오늘은 2시 반에 열어준다고 함. 승용차로 돌아와 어묵을 먹고 잠을 청하나 잠이 안 옴. 수많은 별들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다.


2012.10.13(토)


01:30 : 관광버스들이 연이어 몰려오고 많은 산행객들을 내려놓음. 승용차 안에서 뒤척거림. 칠흑 같은 백두대간 산 고개 마루의 밤하늘엔 별빛이 초롱초롱. 그 옛날 어린 시절 시골에서 친구들과 뛰어 놀며 바라본 밤하늘 그대로다. 깨알같이 쏟아지는 별들, 왜 이런 아름다운 밤하늘을 여지껏 잊고 살았을까? 그립다. 여름날 해변의 모래처럼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이 꽃잎처럼 허옇게 뿌려진 가슴 속 밤하늘 풍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고, 너무나 가깝게 내려앉은 아름다운 밤하늘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02:30 : 회장과 함께 산행장비를 차리고 차를 떠나 등산로 입구로 감. 휴게소의 등산로 입구와 주차장에는 산행객들로 만원. 아마 1~2천명은 될 듯. 깜깜한 밤중에 머리에는 헤드랜턴을 달고 희뿌연 LED 불빛을 비추고 있음. 빨리 문을 열어 달라면서 웅성 웅성. 도로 쪽에서는 관광버스가 연신 멈추어 서서 원색의 산행객들을 토해낸다.

 

 

02:40 : 등산로 입구 위쪽에서 후래쉬 불빛이 비추어지고 인기척이 나더니 공단직원이 내려와서 나무문을 열어준다. 산행객들이 폭 2~3미터 되는 계단을 빼곡히 올라 입산하기 시작. 조금 올라가니 공단의 관리소가 있고 철망으로 울타리가 쳐진 곳에 또 하나의 문을 통해 입산.

칠흑같이 어두운 깜깜한 밤.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할 수가 없고 앞사람의 꽁무니만 뒤쫓아 간다. 길게 끝없이 이어지는 헤드랜턴 행렬은 가관이다. 깜깜한 산길을 헤드랜턴에 의지해서 오로지 앞사람의 발길만 쳐다보며 걸어감. 몇 개의 산등성이를 넘어 감

04:23 : 서북능선 삼거리 도착. 좌측으로 가면 귀떼기청봉, 우측으로 가면 대청봉. 잠시 쉬었다가 우측으로 들어서 나아감.

조금 가니 바윗길 시작. 심하지 않은 너덜지대. 산행객들이 많아 진행속도가 느려짐. 가다가 지체되기를 반복. 상큼한 설악산 밤공기가 면전을 때린다.   

사방은 암흑인데 파란 하늘에는 별들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멀리 대청봉쪽 산마루에는 초승달이 산마루를 타고 걸터앉아 있고, 초롱초롱한 별 하나가 초승달 어깨 너머로 말똥말똥 내려다보고 있다.  

뒤를 돌아보니 꾸불꾸불 길게 이어지는 밝고 허연 LED 헤드랜턴 불빛 행렬이 장관이다. 꼭 동화속의 도깨비 불빛 같다.

가파른 바위의 너덜지대는 계속 이어진다. 

05:56 : 표지판에 한계령 4.1km, 중청대피소 3.6km.

동쪽 하늘에 붉은 빛줄기의 일출 해무리가 비치기 시작함.

급경사의 오르막길도 어느새 끝나감. 회장이 힘들어 함. 스틱을 2개 새로 준비해서 도움이 많이 됨

06:10 : 날이 점차 밝아옴. 주위의 산줄기가 모습을 드러냄. 키가 작은 나무들로 덮여 있음. 랜턴을 끔. 백두대간의 빼어난 산줄기와 산언저리를 덮고 있는 갈색 빛깔의 고운 단풍으로 경치가 뛰어남.

주 능선상의 단풍은 이미 졌음. 마른 낙엽이 길 위에 구름.

바윗돌 너덜지대가 끝남. 능선을 따라 걸어감.

멀리 귀떼기청봉이 우뚝 서 있음. 북쪽 아래로 아름다운 자태의 용아장성능이 보임

07:20 : 끝청. 지치기 시작함. 옅은 안개가 끼어 있음

 

 

07:56 : 산 정상에 둥근 공 모양의 흰색 시설물이 설치된 중청봉 아래. 대청봉과 중청봉의 능선 중간에 중청대피소가 보임. 대피소 마당과 주변에는 빨강,파랑 등 원색의 등산복을 차려입은 산행객들로 인산인해. 동쪽 방향에는 삼각봉처럼 거대하게 하늘로 우뚝 솟은 대청봉으로 오르는 길이 허옇게 드러나 보이고, 그 길로 많은 산행객들이 줄을 지어 오르내리고 있다.

대피소 쪽으로 능선길을 타고 내려오는데 왼쪽 아래로 그 유명한 공룡능선이 보임. 능선의 맨 앞에는 신선대가 맨살을 드러내고 대장처럼 턱 버티며 서 있고, 오른쪽 뒤 계곡 너머로는 천 개의 불상으로 이루어졌다는 천불동 계곡이 허연 속살을 보이며 바라보고 있음.

중청대피소를 지나면서 문득 아쉬운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원래 이곳 설악산 단풍 산행계획을 짤 때에는 여기 중청대피소나 희운각대피소에 예약을 해서 회장과 같이 하룻밤을 산중에서 묵으면서 여유를 가지고 공룡능선을 타기로 하고 15일전에 인터넷으로 중청대피소(120명)와 희운각대피소(35명)에 예약을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지만 아침 10시에 시작되는 인터넷 예약은 수많은 산행객들이 접속, 예약신청을 하는 바람에 컴퓨터가 멈춰버려 도저히 예약을 할 수가 없어 조금은 무리한 듯하지만 차선책으로 무박산행을 택하게 된 것이다.

대청봉을 오르는 길가에는 공단에서 복원 조성해 놓은 키가 작은 푸른 눈잣나무 군락이 펼쳐져 있다.

 

 

 

08:18 : 대청봉. 인산인해. 높이 1m 정도 되는 “대청봉” 표지석 옆에 서서 인증샷을 찍는 사람들로 북새통. 멀리 보이는 백두대간의 능선들이 장관. 공룡능선이 코앞에 펼쳐져 있는데, 맨 앞의 신선대를 필두로 그 뒤 능선을 따라 우측 아래로 거대하게 허옇게 쑥 뽑아 올린 왕관봉, 또 그 뒤 능선으로 이어지다가 우뚝 솟은 나한봉 등 공룡의 빼어난 암봉군들이 위세를 뽐내고 있다.

오른쪽 천불동 계곡 건너에는 허연 천불동 암봉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또 그 뒤로는 화채봉이 우뚝 서 버티고 있다. 북쪽으로는 능선 중간에 중청대피소를 사이에 놓고 흰 구체 몇 개를 머리에 이고 있는 중청봉이 마주보고 있다. 남쪽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 쪽에는 이미 단풍의 열기가 지나갔고 연한 갈색 빛깔의 잡목들이 융단처럼 깔려 있는데, 곳곳에는 자작나무와 비슷한 줄기가 하얀 사스레나무들이 드문드문 열병하듯 서 있다. 지대가 높은 곳이라 큰 나무들이 없고 잡목들만 나지막히 깔려 있어 사방으로 바라보는 조망이 절경이다. 북새통을 이루는 사람들 틈에 끼어 회장과 교대로 간신히 대청봉 인증샷을 찍었다. 중청쪽 반대방향인 동쪽에는 오색에서 올라오는 산행객들이 계속 정상으로 발을 내딛고 있다.

꼭 시장바닥같이 북적이는 산행객들 속에 묻혀 한참동안 설악의 진수 절경을 감상하고 난 후에 중청대피소 쪽으로 하산 시작   

 

09:05 : 중청대피소에는 산행객들이 너무 많아 자리를 잡을 수 없어 등산길 부근에 자리를 잡고 싸가지고 온 김밥으로 늦은 아침식사. 쉴까봐 현미 맨밥에 참기름과 간장으로 간을 하고 비벼 김으로 말이를 한 김밥. 역시 시장이 반찬이라더니 맛있다.

 

 

09:23 : 식사를 끝내고 출발. 중청봉 아래 산언저리, 끝청과 소청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우측 길로 들어서서 소청봉 쪽으로 나아감. 끝청으로 가면 올라왔던 한계령이고, 소청 쪽으로 가면 백담사와 설악동 소공원으로 가는 길. 많은 사람들이 우측 길로 감. 주 능선 서쪽으로는 귀떼귀청봉이, 북쪽 아래로는 용아장성 능선이, 동쪽으로는 공룡능선과 천불동 계곡이 보임. 환상적임.

소청봉 능선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용아장성 능선의 삐쭉 삐죽 솟은 암봉들이 주변의 울긋불긋한 단풍들과 어우러져 절경을 빚어내고 있음. 대청봉 백두대간의 능선은 큰 나무들이 없고 나지막한 잡목들로 깔려 있어 환상적인 주변의 절경들을 조망을 하기에 정말 좋다. 사방으로 발아래로 우뚝 솟은 기기형형 아름다운 암봉들과 온 산 언저리를 뒤덮은 형형색색의 단풍, 거기에 높고 파란 가을 하늘은 설악산의 진경을 빚어내어 탄성을 자아내고 있다. 이래서 사람들은 설악산을 한번쯤 오르려고 그렇게 난리인가?    

        

 

 

09:49 : 소청봉 능선 삼거리. 곧장 나아가면 희운각 대피소, 왼쪽으로 빠져 내려가면 봉정암과 백담사.

큰 나무들이 없어 일망대해로 시야가 확 트인 능선의 길 아래로 천하일경 용아장성의 암봉들이 손에 잡힐 듯, 눈에 밟힐 듯 가까이 다가온다.

서쪽으로는 멀리 귀떼기청봉이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솟아 있고, 북동쪽 방면에는 공룡능선의 나한봉이 맨몸을 드러낸 채 우뚝 솟아 있다.   

멀리 정면 쪽 절경의 공룡능선을 뒤로 한 채, 몸을 뒤로 돌리니 대청봉과 신선대, 천불동 계곡, 화채봉이 보임. 절경을 뒤로 한 채 아쉬운 마음으로 능선에서 내려와 봉정암을 향해 왼쪽 길로 내려감.

 

 

 

 

 10:00 : 소청봉 능선에서 관목 숲길을 따라 조금 내려오니 산언저리에 덩그렇게 얹힌 소청대피소 리모델링 현장. 연미색 지붕공사가 한창. 갑자기 한 현장 직원이 지금 헬기가 저 아래에서 자재를 싣고 출발을 했다는 연락이 왔으니 금방 여기에 도착을 하므로 빨리 대피해 달라는 고함소리. 그 순간 저기 아래 백담사 쪽에서 헬기 한 대가 창공의 바람을 가르는 기운찬 소리를 내면서 건축자재 덩어리를 로프에 길게 매달고 이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 금방 여기 하늘에 도착한 헬기의 몸체 외부에는 크게 “산불예방”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고, 헬기는 바로 머리 위에서 “쉭쉭쉭쉭...” 창공 가르는 소리를 연신 숨가쁘게 내뿜으면서 가을 하늘의 잠자리처럼 한 곳에 잠시 머물더니 건축자재를 내려놓고 또 다시 어디론가 날아간다.

이곳의 대피소 건축공사는 차가 닿지 않는 워낙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헬기를 이용해 자재를 운반할 수밖에 없는 점이 이해가 되지만, 오히려 이 문명의 이기로 인해 심산유곡의 자연이 인간의 손을 더 많이 타게 되고 그 만큼 훼손이 더 심해지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본다.

어쨌든 얼마 후면 여기 소청대피소도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설악산을 찾는 산행객들에게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하게 되겠지. 

멀리 발 아래로 용아장성 능선에는 산마루를 타고앉아 금방이라도 솟구쳐 오를 듯 우뚝우뚝 늘어선 기기묘묘한 암봉들이 산언저리의 형형색색 단풍들과 어우러져 절경을 빚어내고 있어 절로 탄성이 나온다. 

멀리 능선의 암봉군 앞 바로 아래에 산마루를 평평하게 깎아 놓은 좁은 마당 끄트머리에 그 유명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봉정암 사리탑이 위엄스런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솟아 조그맣게 보이고, 사리탑 주위에는 참배객들의 움직이는 모습이 조그맣게 보임.

 

 

  

10:33 : 봉정암. 암봉 아래 아늑하게 자리 잡은 봉정암은 절집이 여러 채 있는 규모가 큰 사찰이다. 봉정암은 해발 1,244m에 위치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절로서, 절에는 많은 전설이 서려 있어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다. 신라 선덕여왕 13년(644년)에 자장율사가 중국 청량산에 가서 기도를 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와서 봉안할 곳을 찾던 중에 아름다운 빛을 내는 봉황이 나타나 이를 며칠 동안 쫓아다닌 끝에 이곳에 도착하여 봉황이 부처님 모양 바위의 이마에서 사라져 이곳에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바위 앞 능선에는 사리탑을, 바위 아래 평평한 곳에 절을 세우니 바로 봉정암(즉, 봉황 鳳, 꼭대기 頂)이다.

그 옛날 기계장비도 없던 시절에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이렇게 높고 험한 곳까지 와서 절을 지으려고 마음먹었을까? 또 그것을 이루어 냈을까? 아마 그것은 당시의 불교라는 것은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서 나라의 흥망성쇠 자체를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겨 국가의 온 역량을 결집하여 이루어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용아장성 능선을 따라 줄지어 늘어선 암봉군이 둘러싸고 있는 능선 바로 아래 아늑한 곳에 봉정암이 자리 잡고 있고, 용아의 주능선에 늘어선 7개의 암봉 아래쪽 끄트머리 평지의 바위에 자리 잡은 5층 석탑인 사리탑은 바위 위에 단정히 꼿꼿하게 서 있어 바위에서 솟아오른 것만 같다.

그 옛날 선조들께서 이렇게 험준한 곳까지 찾아와서 사리를 모시고 절을 지었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 분들의 믿음에 대한 열정과 진리에 대한 향심만은 여기에 선 순간 몸으로 느낄 수 있었고, 한편으론 경외로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산마루의 사리탑에서 절을 바라보면, 용아장성의 빼어난 암봉들과 아름다운 단풍으로 뒤덮힌 산에 둘러싸여 범상치 않은 기가 흐르는 천하제일의 명당임과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절경임을 금방 알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의 여러 산들을 곳곳마다 찾아다니면서 산행을 할 때마다, 특히 큰 산을 산행할 때면 크게 느끼는 바가 있는데, 그것은 산에서 아늑한 곳이나 아름다운 계곡 부근 등 명당이라고 느껴지는 곳에는 거의 어김없이 명승대찰이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어 산의 품격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여기 봉정암은 대표적이고 또 으뜸인 것 같다. 옛날 선조들은 풍수지리에 밝아 큰 산의 양지바르고 아늑하게 위치 좋은 곳이나 전망이 뛰어 난 곳에 절터를 잡아 거대한 성스러운 공사를 수행하여 주변의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사찰을 세웠다.

곳곳의 수려한 명산들은 고즈넉한 여러 대찰들을 아늑한 품에 깊숙이 품음으로써 명산들이 인간의 생활 속에 친근하게 스며들어 인간과 산이 하나가 되어 명산을 더욱 더 돋보이게 하고, 사람들이 세속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 즐기는 아름다운 공간이 된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유사한 사례를 유럽의 이름난 관광지인 성이나 수도원에서도 볼 수 있다. 성이나 수도원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기능을 높이기 위해 대부분 암벽 위나 강가 언덕 위 등에 높다랗게 건설해 놓아 접근을 어렵게 하기도 하지만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때때로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피 흘리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테지만 지금은 그 후손들이 문화유산으로 물려받아 관광지화 함으로써 굴뚝 없는 공장, 즉 관광 산업화되어 세계 곳곳의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곳에 오래된 아름다운 성이나 수도원이 없었다면 하나의 볼품없는 절벽이나 언덕에 불과했을 곳을 유명한 명승지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경우 명산의 절이 있는 곳에는 전통미가 흘러넘치는 사찰 건물들이 주위의 산하 자연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데다가, 바람소리만 스치는 고요함 속에 스님들의 목탁 두드리는 소리와 불경 읊는 소리가 흘러나오면 그야말로 속세에서 벗어난 별세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요즈음 우리는 “개발”을 자연에 대한 훼손 내지는 도전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인 시각이다. 만약 지금 이 시기에 그러한 위치 좋은 곳에, 단적인 예로서 용아장성능 아래에, 큰 사찰을 짓겠다고 하면 자연과 환경 파괴로 난리가 날 것이다. 현 시점에서는 그러한 가정들이 지극히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됨을 고려한다면, 전국 방방곡곡 명산의 명당터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오랜 전통의 수많은 고찰들은 선조들께서 내려 주신 귀한 보배나 다름없으며, 이처럼 조화로운 명산대찰은 금수강산 우리의 산하에 싱싱한 생기를 불어넣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파에 찌든 이 시대 사람들에게 좋은 의탁처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래서 나름대로 개인적인 이론으로 주장하고 싶은 것은, 모든 사물에 ‘세월’이라는 자연의 시간적 흐름에 의해 ‘역사성’이 씌워지면 그것은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자체도 형성된 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이 되었고 또한 ‘환경’이 되었듯이, 인간이 만든 여러 사물들도 그 어떠한 것이든 간에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 사람들 눈에는 ‘자연과 환경’으로 동일시되어진다는 것이다.

금수강산 산하 곳곳의 자연 속에 묻힌 고색창연한 사찰들, 그것은 이미 인조물이 아니고 세월의 힘에 의해 ‘자연’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눈앞에 펼쳐진 용아장성의 아름다운 암봉 능선아래 포근히 안기어 절경을 빚어내고 있는, 우리 선조들이 굳은 신심으로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웠을 봉정암은 이미 용아장성의 한 부분으로 자연이 되어 버렸다. 그 어떤 자연보다도 더 아름다운 자연으로...

사찰 뒤와 옆으로 용아장성의 멋스러운 7개 암봉들이 우뚝 서 있음으로 인해 봉정암 절집은 아름다움과 위엄을 동시에 갖춘 기품어린 사찰이 되었고, 또 암봉이 뾰죽뾰죽 솟아올라 능선을 이루는 절경의 용아장성은 아늑한 품안에 봉정암을 품음으로 인해 생명력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고개를 숙이고 낮은 자세로 경외심을 솟구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암봉 아래 제법 널찍하게 터 잡은 봉정암에는 많은 산행객들과 참배객들로 북적였다. 마당 한쪽에 있는 약수터에 가서 약수를 한 모금 마시니 그 맛이 기가 막히다. 이렇게 깨끗하고 순수한 물맛은 여지껏 본적이 없다. 그야말로 최고의 달콤한 감로수다. 집에 있는 애들에게 약수 맛을 보여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조그만 수통에 약수를 담아 배낭 깊숙이 넣어 두었다. 절 구석구석 흐르는 영롱한 기운까지도...

이 절에는 여자 신도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숙소 같은 큰 법당이 있는 것을 보면 험한 산중임에도 불구하고 여자 신도들이 많이 오는 것 같다. 얘기를 들어보면, 사시사철 많은 여자 신도들이 사전에 미리 예약을 하고 깊은 산중인 이곳까지 올라와서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고 묵고 간다고 한다.     

봉정암 본절에서 사리탑 쪽으로 산기슭을 타고 오르는 길옆에는 붉고 아름다운  단풍이 군락을 이루어 불타고 있다. 지금까지 거쳐온데는 지대가 높아 단풍이 이미 지고 없었는데, 봉정암 아래쪽에는 단풍이 이제 한창 절정에 이른 듯한 느낌이다. 정말 단풍 빛깔이 설악산의 명성에 걸맞게 유난히도 곱다. 이제부터 카메라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적지 않은 투자를 해서 구득한 16백만 화소의 자연 화질을 자랑하는 최신형 미러리스 카메라인데, 이제 그 진가를 발휘할 때가 됐다. 거기에다가 10여년 이상 된 구형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속을 썩이는 바람에 큰 맘 먹고 새로 할부로 대형 HD 스마트 TV를 구입했는데, 지금 이 절경의 장관들을 두고두고 스마트 TV 화면으로 감상하고 싶다.

그 전에는 경치 좋은 곳에 구경을 가면 필름으로 사진을 찍어 인화하여 앨범에 꽂아두고 보아왔지만, 얼마 전까지는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해서 영상을 컴퓨터에 저장해두고 보다 큰 화면으로 감상을 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47~55인치에 이르는 대형화면을 가지고 화질이 뛰어난 스마트 LED TV가 대세다. 16백만~2천만 화소에 이르는 고화질의 디카로 촬영을 해서 대용량 메모리를 가지고 있는 외장하드에 저장해 두었다가 대형 스마트 LED TV로 감상하면 정말 좋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IT기술의 눈부신 발달을 직접 몸으로 느끼며 그 혜택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하여튼, 단풍이 곱게 물들어 암봉들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설악의 장관들을 가급적 많이 카메라에 담아가 두고두고 감상해 봐야겠다.  

 

             

 

 

11:01 : 사리탑. 참배로서 경의를 표함.

용아장성 능선 산마루에 오르자 마당 넓이만한 평평한 곳에 암봉들을 뒤로하고 앞쪽 끄트머리에 5층 사리석탑이 수많은 세월의 흔적을 몸에 두른 채 날카롭게 오똑 서있다. 이곳은 용아장성 능선상으로 앞이 탁 트여 있어 이승과 하늘을 잇는 승천대 같았는데, 하늘을 향해 기도하면 금방이라도 하늘로 솟구쳐오를 것 같은 영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아마 그래서 옛날에 이곳에 터를 잡고 부처님 사리탑을 세웠나 보다.

용아장성 능선 암봉 아래 고갯마루. 여기를 넘어가면 오세암으로 가고, 그렇지않고 다시 절로 내려가서 계곡 쪽으로 가면 구곡담계곡으로 내려가서 수렴동대피소를 거쳐 백담사로 가게 된다. 말하자면 갈림길이다. 오세암으로 가면 구곡담계곡으로 내려가는 것보다 한 시간이나 더 걸리고 험하다. 그래서 슬쩍 회장한테 의사를 물어보았다. 회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오세암으로 갑시다. 이런 기회에 가지 않으면 언제 또다시 기회가 오겠어요?” 예상 밖이다. 무릎 관절이 안 좋아 다리를 아파 하길래 빠르고 쉬운 쪽을 택할 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험하고 먼 길을 택했다. 물론 나로서야 역사와 전설의 향기가 배어 있는 오세암을 거쳐 백담사로 내려가고 싶었지만, 산행이란 더군다나 설악산 같이 큰 산에서 장시간 하는 산행에서는 무리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회장이 다리를 아파하는데 무리하게 더 길고 험한 길을 택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회장이 괜찮다하니 조금은 걱정이 되고 미안한 마음으로 발길을 오세암을 돌렸다.

용아장성 주능선에 늘어선 7개 암봉의 마지막 암봉이 서있는 바로 아래에 오세암으로 가는 길이 있었는데, 고갯마루를 넘어 오세암으로 향한다. 급경사. 가야동 계곡 쪽으로 내려감. 용아장성능의 암봉들이 단풍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룸. 이 코스는 험해서인지 산행객들이 많지 않음.

멀리 정면으로 공룡능선의 나한봉이 훤한 상체를 드러낸 채 내려다보고 있고, 왼쪽은 용아장성의 암봉군들. 최고의 전망대. 암봉과 단풍이 어우러진 환상적 절경. 그 아래로 가을 단풍이 유명한 가야동 계곡.

집사람이 왼쪽 무릎이 아파서 잘 걸을 수가 없다고 함. 걱정이다.

봉정암으로 오르는 중년의 여자 신도들을 만남. 평상복에 등산화. 오세암에서 2시간에 주파한다고 함. 대단한 분들이다.

봉정암에는 여자 신도들이 와서 불공을 드리고 절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험한 산길인데도 불구하고 전국 곳곳에서 많은 여자 신도들이 다녀가는 것 같다.   

가야동계곡의 구름다리를 지나감. 계곡의 물은 많지 않지만 나무데크로 된 계곡길 주변의 단풍이 그 명성에 걸맞게 환상적임. 불타는 단풍에 내 마음이 붉게 물들다.

가야동계곡은 대청봉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희운각대피소 앞에서 시작하여 내설악의 수렴동대피소 앞의 구곡담계곡과 만나 수렴동계곡으로 합수되는 곳까지의 약 6km의 부드럽고 완만한 계곡으로, 특히 지리산의 피아골과 견줄만한 설악 최고의 단풍 절경지이다. 지금은 계곡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자연 휴식년제.

 

 

 

 

 11:53 : 표지판에 봉점암 0.8km, 오세암 3.2km

길가에 다람쥐들이 놀고 있음.

급경사길에 철계단이 이어진다. 주변의 단풍은 단연 최고. 단풍이 불탄다.

지금 이곳은 최고의 단풍 경치를 빚어내고 있다. 아마 이 시기가 이곳의 단풍 절정기인가 보다. 잘 놓여진 철계단은 바닥을 폐타이어 조각으로 덮어 감촉이 좋은 나무데크로 만들어져 있고, 철계단 길옆의 산기슭에는 울긋불긋한 단풍이 너무나 아름답다. 청명하고 따뜻한 가을 햇빛이 붉은 단풍을 내리쬐니 붉은색이 투명한 느낌마저 든다. 숲속에는 빨간색, 연노란색, 연한 연두색 등 형형색색의  단풍잎들이 어우러져 환상적.

백담사로 내려가는 코스중 이 구간이 최고의 단풍 절경이다. 산행객들이 말하는 봉정암-오세암 구간의 설악산 진수, 절경 단풍은 아마 이곳을 일컬음이리라.

 

 

 

12:50 : 환상적인 단풍 속에 파묻힌 고갯마루. 표지판에 봉정암 2.1km, 오세암 1.9km.

아! 여기는 별천지다. 숲속마다, 골짜기마다, 산기슭마다 곱게 물든 빠알간 단풍과, 연노란색과 연한 연두색 파스텔톤으로 물든 이파리들이 한데 어우러져 환상적인 절경을 빚어내고 있다. 그런 절경들이 한두 군데가 아니고 사방이 온통 초절정 단풍의 향연이다. 머리위의 사금파리처럼 파란 하늘마저 이 단풍 향연에 기꺼이 초대되었다. 황홀한 절경에 탄성이 연방 절로 터진다. 위대한 자연의 신비한 조화로움에 새삼 경외감마저 든다. 어느새 뭉툭한 내 마음마저 단풍 빛깔로 빨갛게 물들어 홍주라도 몇 잔 마신양 전신을 몽롱한 기분으로 취하게 한다. 이 아름다운 별천지를 스치듯 지나가는 발걸음 곁에 그냥 두고 가기가 아까워 자꾸 가슴 속에 꾸역꾸역 주워 담는다. 사방 어디 한 곳도 빠지지 않도록 연신 고개를 돌려가며 바라보다가 이내 내가 산이 되어 버린다. 산이 내가 되고 내가 산이 된다. 온 천지가 곱게 차려 입은 가을의 정령이 된 듯, 세상 풍상을 초월한 신선이 된 듯 한참 동안을 무아지경에 빠져 있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미러리스 카메라를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코스는 다른 대안의 산행길(구곡담계곡 코스)이 있고 험해서인지 산행객들이 그다지 많지 않고 호젓해서 좋다. 그렇지만 단풍 경치만큼은 최고다. 밤을 새워 한걸음에 달려온 수고가 조금도 아깝지 않다. 때를 맞춰 잘 왔다는 생각에 기분조차 치솟는다. 저 파란 가을 하늘만큼이나 높이 솟아오른다.   

지금 숲에선 가을이 영글어가는 아우성으로 가득하다. 신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마지막 광란의 파티가 벌어지고 있다. 그들은 향긋한 양주에 취해 붉어진 볼처럼 그것을 울긋불긋 온 몸으로 나타내고 있다.

아아!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못 견디게 서럽도록 아름다운 가을이여, 설악의 마지막 정열이여! 아무도 그대들에게 다가올 이별에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하여도 내가 그대들과 함께 함이니 결코 외롭지 않으리라! 

많은 사람들은 가을 단풍구경하면 내장산을 떠올린다. 그 이유는, 내장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입구부터 온 산이 빨갛게 단풍으로 물들면 연봉들과 어우러져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온통 붉은 빛 천지다. 아기자기한 단풍의 맛을 마음껏 즐길 수 있어 단풍철이면 전국에서 단풍객들이 몰려들어 만원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설악산 같은 큰 산은 같은 단풍이라도 그 멋이 크게 다르다. 설악산의 단풍은 장엄하게 솟아오른 멋진 암봉들과 함께 어우러진다. 그 자체만으로도 비경인 암봉들의 주위에는 붉은 색의 단풍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대자연의 다양한 주체들이 화합하여 연노랑, 진한 노랑, 초록빛, 연두색, 연한 연두색 등 갖가지의 파스텔톤 빛깔들이 조화를 이루는 수채화 같은 질박한 아름다움이다. 바로 그것이 큰 산과 함께 어우러지는 단풍인 것이다.

아무나 함부로 범접하기 힘든, 심산유곡의 깊은 산 중에서 맛보는 이 설악의 단풍 진경을 함부로 얘기하지 않으리라. 아무리 설명한들 그들은 결코 이 비경을 제대로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테니까.  

 

 

          

 

 

13:33 : 또 고갯마루. 봉정암에서 내려와 가야동 계곡을 건너면서부터는 몇 개의 고개(공룡능선에 뻗어 나온 작은 능선들)를 넘어야 오세암에 다다른다. 표지판에 봉정암 2.9km, 오세암 1.1km.

봉정암에서 오세암으로 가는 길은 호젓한 산행길이지만 많은 신도들이 다녀서 인지 잘 다듬어져 있고, 길옆에는 눈이 왔을 때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홍색 나일론 노끈을 군데군데 걸쳐 놓았다. 워낙 깊고 험한 산중이라 눈이 오면 길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아 위험한 상태에 놓이기 쉬울 것이다. 또한 험한 경사길에는 바닥에 목재가 깔린 철사다리를 놓아 비교적 다니기에는 편한 길이었다.

대부분 숲 속을 지나는 길이지만, 멀리 대청봉 쪽을 바라보면 주봉에서 서쪽으로 서북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심산유곡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여전히 길옆에는 붉게 물든 고운 단풍으로 아름다운 절경이다.

 13:57 : 고갯마루에서 여자 스님 두 분을 만남, 오세암이 앞으로 30분 남았다고 함.

이 산길에는 여자 스님들과 여자 신도들을 자주 만난다. 아마 불공을 드리러 오세암에서 봉정암으로 가거나 그 반대의 행로를 가는 중일 것이다. 그들은 깊고 험한 산길임에도 불구하고 설악의 영험한 정기를 품고 있는 사찰에서 부처님의 자비를 구하고자 할 것이다. 

벌써 몇 개의 고개를 넘었다.  

 

  

14:14 : 오세암 뒤 마지막 고갯마루. 뒤를 돌아보니 멀리 중청이 보임. 원경의 능선 경치가 환상적. 소청능선 아래에는 공사 중인 소청대피소가 보이고, 백두대간 서북능선이 한 폭의 병풍처럼 늘어서 있음. 가까이에는 용아장능선의 끄트머리인 옥녀봉의 암봉과 단풍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는 대청봉 쪽을 바라보는 큰 조망을 하기에 최적의 위치이다. 지금까지는 원경의 조망보다는 계곡과 산언저리의 단풍 절경 속에 묻혀 지나왔다면, 이곳은 설악의 주능선과 영봉들이 어우러져 한 폭의 진경 동양화를 그려내고 있는 원경 조망터이다. 어느 곳보다도 특별한 설악의 아름다운 능선 비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하늘을 찌를 듯한 위세로 아름다움을 뽐내던 설악의 이미지와는 달리 수평으로 이어지는 영봉들은 여지껏 보아온 설악의 어느 모습보다도 웅장하고 호쾌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또 한번 다른 면모로 설악의 진수를 느끼다.

 

 

  

14:24 : 오세암. 오세암만의 특별한 동자전 불당 구경. 유서 깊은 애틋한 설화를 담고 있는 아담한 절집은 앞쪽에만 조금 트여 있을 뿐 사방에는 허연 암봉들을 품은 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아늑한 품에 안기어 있고, 주위의 산들은 형형색색 단풍으로 물들어 한 폭의 화려한 병풍을 두른 듯하였다. 오세암은 바로 앞쪽에 우뚝 솟은 만경대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일품이리라.  남쪽 방향으로 위치한 사찰의 중앙 위쪽으로 동자전이 자리 잡고, 양 옆으로 다른 절집들이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오세암에만 있는 동자전의 위상을 짐작케 할 수 있다.

오세암은 643년(선덕여왕 12)에 창건하여 처음에는 관음암이라 하였으며, 1548년(명종 3)에 보우 스님이 중건하였다. 이 암자를 오세암이라고 한 것은 1643년(인조 21)에 설정스님이 중건한 다음부터이며, 독특한 절의 이름과 역사와 관련하여 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가슴시린 유명한 관음 영험설화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설정스님은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이 절에 데려다 키우고 있었는데, 하루는 월동 준비 관계로 양양의 물치 장터로 떠나게 되었다. 이틀 동안 혼자 있을 네 살짜리 조카를 위해서 며칠 먹을 밥을 지어 놓고는, “이 밥을 먹고 저 어머니(법당 안의 관세음보살상)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부르면 잘 보살펴 주실 것이다.”고 하는 말을 남기고 절을 떠났다.

스님은 장을 본 뒤 신흥사까지 왔는데 밤새 폭설이 내려 키가 넘도록 눈이 쌓였으므로 혼자 속을 태우다가 이듬해 3월에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법당 안에서 목탁소리가 은은히 들려 달려가 보니, 죽은 줄만 알았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고, 방 안은 훈훈한 기운과 함께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이는 관세음보살이 밥을 주고 같이 자고 놀아 주었다고 하였다. 다섯 살의 동자가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관음암을 오세암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동자전의 애틋한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옷깃을 여미며 부처님의 자비가 온 누리 구석구석에 비추어지기를 빌어본다. 비교적 깔끔한 절집들의 중앙 마당가에 위치한 약수터에서 약수를 한 바가지 받아 마시니 가슴 속까지 시원하다. 

 14:41 : 휴식을 마치고 오세암 출발.

절 마당에서 우측으로 난 좁은 산길을 따라 고개를 올라감.

 

 

15:23 : 고갯마루, 표지판에 오세암 1.1km, 영시암 1.4km.

여기의 길옆 주변 숲은 아직 푸르다. 단풍이 아직 이곳까지는 미치지 않았나 보다. 파스텔톤의 연한 연두색. 잎에 햇빛이 비추어져 빛깔이 더욱 아름답다. 간간이 원시림 속에 빨간 단풍이 연두색 잎들과 어울려 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시기의 단풍은 봉정암과 오세암 구간이 절정인데, 그 위는 이미 졌고 그 아래는 아직 단풍이 덜든 상태로서, 확연하게 구분이 된다.   

 

 

  

16:11 : 수렴동대피소에서 나오는 길과 백담사에서 올라오는 길, 그리고 오세암에서 내려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 길. 갑자기 산행객들로 좁은 산길이 붐빈다.

단풍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수렴동 계곡. 계곡가로 이어지는 단풍이 환상적. 계곡가는 숲속보다 단풍이 조금 빨리 드는 것 같다. 계곡에 흐르는 계곡수는 많지 않으나 투명해서 청옥처럼 맑다. 계곡 바닥에 깔린 동글동글한 돌들은 스님의 장삼처럼 흰색에 가까운 회색으로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다. 계곡수가 흐르다 머무는 곳곳에는 크고 작은 담(웅덩이)이 형성되어 있고, 이곳에 고인 물은 예쁜 청록색의 에머럴드 빛깔.

중청 쪽의 구곡담 계곡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폭이 수 십 미터쯤 되는 수렴동 계곡은 산행길이 계곡 바로 옆으로 나 있어 계곡과 계곡가의 아름다운 단풍을 구경하기에 썩 좋다. 스님의 회색 빛 가사장삼처럼 눈이 부시는 계곡의 허연 자갈과 바윗돌들, 그리고 푸르고 투명한 담소의 계곡수, 이에 더해 빨간 단풍잎 군락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조화는 숲 속의 풍경과는 또 다른 한 폭의 절경 산수화를 그려내고 있다.

계곡 건너편으로 멀리 우뚝 솟은 작은 감투봉과 대승령 쪽으로 올라가는 흑선동 계곡에는 조금 이르지만 지금 한창 단풍이 물들어가고 있다.

계곡가를 지나는 평평한 숲속길 주변에는 단풍이 빨갛게 익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원시림의 울창한 숲은 파스텔톤의 연한 연두색과 갈색, 자홍색 이파리들과 빨간 단풍나무 잎이 어우러져 울긋불긋하게 수놓으며 아름다운 가을의 흥취를 돋우고 있다.

오고가는 산행객들로 좁은 산행길이 붐빈다. 등산복이라기보다는 간편 복장을 하고 봉정암이나 오세암 절에 가는 것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네들과 젊은 단체 산행객들이 특히 많이 보인다.

 

 

  

16:16 : 영시암. 서거나 탁자에 앉아 국수를 먹는 산행객들로 북적임. 아마 절에서 산행객들에게 점심으로 국수를 주는 시간인가 보다.

처음에는 국수를 먹을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우물가에서 물을 받는데 어느 여자 신도분이 회장에게 “보살님은 왜 국수를 한 그릇 먹지 않느냐?” 하고 권하는 바람에 마침 시장하기도 해서 국수를 한 그릇씩 먹기로 하고 회장과 둘이서 많은 산행객들 틈에 줄을 섰다.

먼저 빈 그릇에 국수를 한 사래 받아 가지고 잘게 썬 김치를 그 위에 담았다. 그리고 따끈한 국물을 받아 탁자에 앉아 맛있게 먹었다. 식당에서 파는 잔치국수처럼 맛을 내는 다양한 식재료가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고 때마침 장시간 산행으로 심신이 지치고 시장기가 발동한터라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웠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고마운 마음에 앞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한 것처럼 지폐 몇 장을 우물가의 조그만 불상조각 아래에 넣어 두었다.

서울 근교에서도 관악산 연주암이나 많은 절에서 점심때가 되면 산행객이나 신도들에게 국수 등으로 무료로 식사를 제공해 주는 것을 보아왔지만, 여기 설악산에 와서까지 절집의 국수를 먹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따뜻한 국수 한 그릇에 생기가 나고 힘이 솟는 것 같아 또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영시암 바로 앞의 계곡에는 유난히도 빨갛게 고운 많은 단풍잎들이 계곡에 드리워져 허연 돌맹이와 바위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절경을 빚어내고 있다.    

한참 동안 계곡의 단풍 절경을 구경했다.

 

 

  

16:35 : 영시암 출발. 계곡 옆으로 평지로 된 숲길이 이어지고, 많은 산행객들과 신도들로 좁은 산행길이 붐빈다. 늦은 이 시간에도 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아마 중간에 절집이나 수렴동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산을 오르거나 오세암․봉정암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리라.  

계속 이어지는 계곡의 양옆에는 고운 단풍들로 절경을 이루고 있고, 주변의 산에도 단풍들로 뒤덮여 있음.

문득 하늘을 바라보니 해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서쪽으로 작은 감투봉과 서북능선의 준봉들이 우뚝 솟아 있어 계곡 쪽에는 해가 일찍 진다. 발길을 재촉한다.  

 

  

 

17:56 : 백담사. 드디어 긴 산행이 종료되었다. 새벽에 한계령을 출발한 지 15시간 16분만에 우리 부부산악회의 설악산 단풍 비경 산행이 마무리 되었다. 설악산의 아름다운 단풍 절경에 묻혀 버렸던, 설악산의 단풍 진수를 원도 한도 없이 맛 본 길이 추억에 남을 산행이었다. 날씨도 전형적인 가을 날씨로 화창했고, 봉정암-오세암 구간의 단풍이 최절정에 달한 기가 막힌 시기에 결행한 정말 최고의 감동적인 단풍 산행이었다.     

폭이 수십 미터에  이르는 백담사 앞 계곡에는 흐르는 물은 조금 밖에 없어 계곡 바닥에는 유난히도 허연 동그란 자갈들과 조금 큰 돌들, 그리고 군데군데 박혀 있는 바위들이 어우러져 계곡이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자그마한 하얀 돌맹이들로 정성들여 쌓은 무릎 높이 쯤 되는 수많은 소망 돌탑들이 다정하게 맞아 준다. 그 숫자가 아마 몇 백 개는 될 성싶은 많은 돌탑들이 계곡 바닥에 여기저기 오똑오똑 솟아있다. 돌탑 하나하나마다에는 누군가의 애절한 소망과 정성이 깃들어 있으리라.

백담사 쪽을 바라보니 많은 사람들이 계곡 위 다리와 백담사앞 마당을 지나 계곡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2백여 미터는 될 정도로 길게 줄을 지어 서 있었는데, 알고 보니 백담사에서 용대리까지 가는 셔틀버스를 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설악에서 뻗어 나온 능선 밑 계곡가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유서 깊은 백담사는 어느 전직 대통령 부부가 피난처 삼아 한동안 머물면서 세상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백담사라는 이름은 대청봉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작은 담이 백 개에 이르는 곳에 절을 세워 유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절집이 그리 웅장한 규모는 아니지만 한 쪽에 만해 한용운 선생의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만해 선생은 1905년 이 곳에서 머리를 깎고 입산수도하여 불교 개혁과 민족 독립운동을 펼쳤는데, 학교에 다닐 때 배운 “님의 침묵”이라는 시가 더 기억에 남는다.

기념관 입구 마당 한켠에는 만해의 흉상이 서 있었고, 검은색 기와와 흰색의 회벽으로 깔끔하게 단장된 한옥 형태의 기념관 안에는 만해 선생에 관한 여러 가지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구한말 어지러운 세상에서 선각자로서 민족의 앞날에 대한 걱정과 민족정신을 일깨우려고 애쓴 선생의 큰 업적에 고개가 숙연해 진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함에 따라 회장과 함께 서둘러 백담사 구경을 마치고 행렬의 맨 뒤에 줄지어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원래 버스는 막차가 오후 7시인데 오늘같이 사람들이 많은 날에는 일단 줄을 지어 선 사람들이 다 탈 때까지 버스를 운행한다고 한다.

백담사에서 용대리까지 가는 길은 약 6km 정도 되는데, 좁고 험해 일반 차량들은 용대리에서 출입금지 시키고 오직 셔틀버스를 이용해서 오고가야 한다. 도로 사정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만약 이 곳 백담사까지 일반 차량 출입을 허용한다면 좁은 도로나 주차장 때문에 차량들이 엉켜 엉망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버스요금이었다. 편도 2천원씩을 받는데, 불과 15분여를 가는 거리에 비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셔틀버스는 원래 그전에는 백담사에서 신도용으로 운영을 했었는데 ― 그래서 오래 전에 오색에서 백담사로 넘어 산행을 왔을 때는 산행객들을 위한 교통수단이 없어 지친 몸을 이끌고 용대리까지 걸어 나온 기억이 난다 ― 지금은 백담사에서 용대리 주민들에게 운영권을 넘겨주어 주민들이 출자를 해서 버스를 여러 대 구입, 독점으로 운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시사철 많은 사람들이 백담사와 계곡을 찾는다는 점을 감안해서 버스요금을 적정 수준으로 낮추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런데,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버스회사 직원 얘기로는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의 40~50%는 봉정암이나 오세암에 다녀오는 신도들이란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정말 그런지는 모르지만, 생각보다 엄청 많은 신도들이 멀고 험한 봉정암이나 오세암을 다녀온다는데 다시 한번 놀랐다.

어느새 해가져서 주위는 어두워져 깜깜하고, 길게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떠들면서 밤중의 어두운 백담사 계곡을 시끄러운 소음으로 채우고 있다.

산중의 어둠 속에서도 바쁘게 오가는 셔틀버스들의 전조등 불빛이 연신 빛난다.

 19:25 : 거의 한 시간 반을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드디어 셔틀버스(정원 37명, 꼭 정원만 태움)에 승차. 용대리로 이동. 버스는 길이 좁아 아무데서나 교행이 안 되기 때문에 교행하는 장소가 정해져 있고, 운전기사들끼리 수시로 운행상태를 무전으로 연락을 취하면서 교행시기와 장소를 정하고 있었다. 물론 도로를 2차선으로 확장할 수 도 있겠지만, 도로 옆의 백담사 계곡 보호를 위해서는 도로확장을 반대한다는 생각이고, 필요하다면 터널을 뚫어 해결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19:49 : 용대리 버스 승차장에 하차. 주변은 깜깜하다. 한계령에 세워 놓은 승용차로 돌아가야 하는데, 당초 계획한대로 군내버스나 시외버스를 이용해서 갈수 있을런 지 모르겠다. 시외버스 정류소를 찾아가려고 하는데, 택시 서 너 대가 줄을 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택시기사는 한계령까지 3만5천원을 달라고 한다. 마침 오색으로 가는 부부 한 팀이 있어 동행을 제의하자 택시기사는 두 팀이 6만원을 맞춰 달란다. 오색으로 간다는 부부 산행객과 각각 3만원씩 부담하기로 하고 택시를 타고 용대리를 떠나 한계령으로 향함. 주위는 칠흑 같이 깜깜하다.

20:20 : 한계령 휴게소 앞 도착, 택시에서 하차.

새벽에 산에 올라갈 때는 주변에 도로를 따라 공지에 차량들이 여러 대 주차되어 있었는데, 다를 떠나가고 우리집 2022호를 비롯하여 듬성듬성 몇 대만 남아있다. 또 다시 몇 시간 후면 이곳은 어제 밤, 오늘 새벽처럼 등산객들을 태우고 온 차량들과 산행객들로 시끌벅적해 지겠지.

2022호에 승차. 뿌듯한 성취감과 아쉬운 마음이 교차하는 가운데 집으로 출발

21:20 : 철정휴게소에 들름. 황태 해장국으로 저녁식사.

21:55 : 철정휴게소 출발.

44번 국도를 타고 가다 동홍천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무박산행을 한 때문인지 운전대를 잡은 상태인데도 졸음이 엄습해 온다. 옆 자리에 탄 회장은 피곤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졸음을 참다가 어느새 잠이 들어 버렸다.

나도 모르게 차의 달리는 속도가 60km까지 내려 왔다가 다시 올라가곤 하기를 반복한다.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지만 그렇다고 이 한밤중에 졸음을 쫓겠다고 갓길에 주차를 해놓고 쉬는 것도 위험천만하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 깜깜한 고속도로를 달려간다. 잠깐씩 졸다가 다시 깨어나 달리기를 반복하니 어느새 남양주의 경춘고속도로 톨게이트에 다다랐다.       

22:50 : 미사리에서 경춘고속도로를 내려섬. 올림픽대로를 타고 감.

23:47 : 일산 집에 도착. 드디어 대장정 종료.

정말로 아름다운 설악의 가을 단풍비경을 만끽한 두고두고 잊지 못할 가슴 뿌듯한 여정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