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사 주차장 ㅡ정상 ㅡ망경사 ㅡ당골

새벽 어둠을 헤집고 하나둘 태화강 둔치에 모여든다.
6시30분 출발.

이틀간을 제법 많은량의 비가 내렸다.
그곳에는 눈이 왔을까?비가 왔을까?
"태백에 전화를 해봤더니 비가왔대."
일행중 누군가의 말이다.
그래도 정상 부근엔 눈이 왔을지도 모른다고 기대를 접지못한다.

동해안을 따라 국도를 달린다.
바다는 이틀간 불어친 비바람의 여파로 파고가 높다.
하얗게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로 해안이 눈밭처럼 새하얗게 눈부시다.
하늘은 더없이 높고 푸르고,대지는 해맑게 내려앉은 햇살로 평온하다.

서로들 주고받는 아이들의 진로 얘기며,결혼 얘기를 실고
버스는 북으로 북으로 달린다.

태백의 꼬부랑길로 들어서고부터 염치도 체면도 없이 멀미가 나기시작한다.
세원엄니가 옆에 앉은 죄로 손바닥에다 압봉을 붙여주고 등을 쓸어주고 쉼없이
보살펴준다.
"찔러도 피도 안나오는 여자네."
핏기 빠져 피도 나오지않는 창백한 손가락을 따주며 세원엄니가 중얼거린다.

덕분에 속이 가라앉아 좀 편안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죽은듯이 눈감고 엎드렸는데
"눈이다!눈이 하얗게왔네."하는 소리가 들린다.
머리를 쳐들어 보니 눈앞에 눈꽃이 만발한 산봉우리가 드러났다 숨었다한다.
"저 산에 눈꽃 좀봐!"하는데 또 사정없이 멀미가 밀려온다.
다시 또 눈 딱감고 엎드려 있자니 유일사 주차장까지의 멀고 멂이 기가 맥힌다.

11시30분경.
마침내 주차장의 눈밭을 딛고선다.

오오!!눈앞에 보이느니 전부가 눈꽃이다.
고개들어 올려다보니 온통 꽃피는 산골이고 꽃동네다.
울긋불긋 해야만이 꽃동네랴.

일행께서 사진을 찍어주신다.
"사진 많이 찍어놨다가 요담에 며느리 맞이한 뒤에 흉잡힌다."
"누구네 며느리는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사진 태우며,재물 문서는 안남겨주고 사진만 남겨놨다고 흉보더란다."
사진을 찍으며 한마디씩 한다.
요즘 세태를 단적으로 표현한 얘기인듯.
"갑자기 비명횡사 하지않는한, 어느 시기에 스스로 정리를 하지뭐."하는데 우리가 어느새 이토록 살았나 싶다.

하얀 눈꽃터널을 걸으며 모두들 하얗게 웃는다.
여우같던 여자들은 어느새 앙증맞은 토끼가되고,이리같고 늑대같던 남자들은 이순간 그림속의 사슴무리로 변모한다.

록색 산죽 이파리 위에 소복소복 피어난 또 한잎의 하얀 죽엽,
바늘잎 낱낱이 얼음꽃으로 뻗쳐, 푸른심으로 기운 돋운 솔잎의 고절이 귀하다.
탐스런꽃 휘어지게 담뿍 피운 주목나무는 그 가지 부러질까 조마조마하다.

표지기 리본이 하얀 튀김가루 곱게 묻혀 튀겨낸 정갈한 튀김같이 매달려있고,머리위엔 쑥갓튀김도 휘늘어져있다.
물기없는 파삭한 눈이 뽀드득 뽀드득 발밑에서 소리를내고,둘러보면 온통 하얗게 뻗고,휘늘어지고,뭉실 뭉실한게 숨이 멎도록 아름답다.
사진 촬영을 하고 내려오는 분들을 이따금 만난다.

고도가 높아지며
퐁당 빠질것같은 하늘바다를 배경으로 굵게,가늘게,섬세하게,힘차게,온갖 모양으로 뻗어 엉긴 순백의 가지들이 올려다 보인다.
그 아래를 걸으며 산호섬을 유영하는 느낌에 빠져든다.

멀리 거대하게 엎드린 백두대간의 산 봉우리들은 둥실둥실 꽃대궐에 꽃진치가 벌어졌고,북쪽 산 봉우리에서 뭉게뭉게 넘어온 구름은 맞은편 산허리를 휘감고
그보다 먼곳 아득히 내려앉은 구름띠 위로 파란 하늘이 열려 수평선 모양을 연출하고,수평선 너머로 봉우리 몇개가 섬인듯 떠있다.
"융프라우보다 훨씬났다!"
누군가의 탄성이다.
그저 거대 눈덩어리에 불과한 융프라우와는 비교할수 없는 아름다움이란다.

산마루에 올라서니 반대편 계곡이 뽀얀 안개로 가득하고, 거기서 솜타래처럼 피어나온 안개 기둥들이 하늘로 솟아오른다.
그러나 구름도 안개도 예사것이 아니라는것이 오랜 경험으로 아시는 어른의 말씀이시다.

얼굴을 때리던 미세 눈가루.지금도 눈이오나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게하던 그 눈가루.
산 봉우리를 넘어오는 구름도,계곡에서 피어나는 안개 기둥도, 모두가 바람에 실려온 그 눈가루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눈앞을 스치며 고개마루를 넘는것이 분명 눈가루다.
알고서 보니 더욱 아름답고 놀랍기도 하다.

이 구간은 옷을 잘 챙겨 입어야 된다는 어른의 말씀대로 오버트로우저까지 잘챙겨 입고 천제단까지의 능선을 걷는데 오른쪽 볼과 콧망울과 턱이 얼얼하다.

천제단.
온통 하얀 잎새로,꽃잎으로 단장을했다.
바람결을 따라 남쪽을 향해 수없이 돋아난 잎새,그리고 꽃잎.
하얀 천제단.

머리를 조아린다.
왠지 내 작은 소망을 빌기보단 국태민안을 빌어야 할것같은 생각이든다.

정상의, 키보다 조금 높은 나무,허리께에 미친 나무 군락이 모두 두툼하게 흰옷을 입었다.
산호 같다.청각,톳나물 같다,모두들 온갖것에 비유 하느라 입이 바쁘다.
설탕 시럽 하얗게 입은,동화 속에서나 있음직한 과자동산 같기도하다.

정상 아래 호젓이 서있는 단종비각.
기왓골에 소복히 눈이 쌓였다.
처마끝 고드름을 타고 떨어지는 낙숫물이 괜스레 서러워 보인다.

망경사에 들러 참배하고 햇살 아늑한 계단에서 점심을 먹은후, 하산길을 서두른다.

2004.2.3 운 좋게도 눈내린 다음날 태백산을 오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