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智異山) 무박2일 종주기

天王峰은 비를 내려 나를 반기고....

[정정균]


식사를 하지 않고 종주(縱走)는 불가합니다

‘04.7.2 23:00 버스가 함양휴게소에 도착하며 산행(山行)가이드의 멘트가 시작된다.
“휴게소에서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반드시 식사를 하십시오. 식사를 하지 않고 종주(縱走)는 불가합니다.”“23:30분에 출발합니다.”
저녁식사 한지 고작 세시간 밖에 되지 않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가이드의 말을 흘릴 수 없어 새우죽을 시켜서 먹는다.

버스가 2차선의 국도보다 못한 88고속도로를 올라서고 지리산 휴게소를 지나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원-구례간 국도에 들어선다. 7월3일 0시를 지나고 있다. 구례읍을 오른쪽에 두고 천은사(泉隱寺) 입구 도로로 들어선다.

여기서 10여분 만 달리면 본가(本家)인데......어머님이 계시지 않는 고향(故鄕)이라 허전한 마음이 든다. “성삼재 오르는 급커브 때문에 버스가 좌우로 많이 흔들립니다” 가이드의 멘트가 고향 생각에 빠진 나를 깨운다. 천은사입구 매표소는 무사 통과 하나보다. 입장료는 산악회에서 부담한다더니.........

01시15분 성삼재에 도착한다.
랜턴을 이마에 차고, 스틱 높이를 조절하고 배낭을 확인해 본다. 생각보다 춥지는 않다. 보름 인데도 잔뜩 찌푸린 날씨 때문에 랜턴 없이는 간신히 도로 윤곽만 보인다. 다행히 우려했던 비는 흔적도 없다. 우리 일행 35명이 전부인가 보다.

저기 반딧불이....

01시 25분 드디어 성삼재를 출발한다.
발끝의 랜턴 불빛만 보고 넓직한 도로를 부지런히 걷는다. 뒤돌아 보니 랜턴 불빛만 좌우로 움직이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인다. “하! 저기 반딧불이다!” 여기 저기서 탄성(歎聲)이 들려온다. 찌든 수도권(首都圈)에 살면서 반딧불 구경을 했을리 없으니.........갑자기 오른쪽이 툭 터지면서 시원한 바람과 함께 멀리 구례읍의 야경(夜景)이 눈에 잡힌다.

백두대간의 마지막 자락으로 백두에서 흘러왔다 해서 두류산(頭流山), 또는 옛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으로도 불렸다는 지리산(智異山) 천왕봉(天王峰/1915m)을 향한 33.5㎞ 종주를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한마음으로 나아간다.

습한 날씨 때문인지 벌써 땀이 온몸을 적시기 시작한다. 노고단(老姑壇) 산장(山莊)을 오르는 샛길이 눈에 잡히고 도로를 벗어나 가파른 산길로 들어선다. 01시 57분 노고단 산장에 도착한다. 산장은 아무도 없는 듯 조용하다. 곧장 노고단 고개로 내쳐 올라 뒤이어 오르는 동료들을 기다린다. 안개가 휘감고 있어 시계(視界) 확보가 어렵다. “출발합시다” 소리치면서 번호를 외쳐본다. “하나” 뒤이어 번호가 길게 이어진다. “둘, 셋, 넷.......” 랜턴 불빛에 의지해 바지런히 걸어본다.

좁은 길을 쉼없이 지쳐나간다. 낮에는 비가 왔었나 보다, 여기 저기 물웅덩이가 나타나고, 밟고 지나가는 돌들이 모두 젖어있다. 미끄러질까봐 조심스레 발을 디딘다. 새로 장만한 등산화 덕을 보는 것 같다. 얼굴을 때리는 풀을 스틱으로 헤치며 나간다. 어디가 어딘지 가늠 할 수 가 없다. 랜턴 불빛만 길게 이어진다. 특수훈련하는 모습이다.
평편한 곳이 나오면서 길이 분간이 안된다. 이쪽 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돼지령 안내판이 불빛에 잡힌다. “아! 여기가 돼지령이다” 뒤따르던 동료들이 길을 찾아 앞서 나간다.

1개월전쯤 ,주5일 근무와 신사옥(新社屋) 입주(入住) 기념, 지리산(智異山) 종주(縱走) 얘기가 나오고, 검토를 거듭하다가 무박 2일 종주로 계획을 확정하고 나서도, 며칠전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 때문에 논란을 거듭하다가, “비가와도 출발”이라는 초강수(?)의 결정을 했지만, 출발일 아침부터 비가 주적주적 내리니 마음은 다시 산란스러워지고.......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걷다보니 임걸령이다. 말로만 듣던 임걸령 샘물을 들이킨다. 아! 시원하다. 피로가 확 풀리는 기분이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깜깜해 볼 수 없는게 아쉽기만하다. 다시 출발이다.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며 어두운 밤길을 묵묵히 걷는다. 아직 컨디션은 전혀 문제가 없는 것 같다. 잠을 거의 자지 못했는데도 정신이 말짱하다. 이마에 찬 랜턴 때문인지 목이 조금 뻐근한 느낌이다.

선두(先頭)는 속보(速步)!

반야봉을 그냥 지나쳐 삼도봉(三道峰)에 도착한다. 경남 함양·산청·하동군, 전남 구례군, 전북 남원시 등 3개도 5개 시·군에 걸쳐 있는 지리산의 중심 삼도봉(三道峰)이다. 랜턴 불빛으로 삼도봉 표식을 확인하고 떡을 꺼내 허기를 달랜다. 인원을 파악하니 22명이다. 13명은 뒤쳐졌나보다.

배낭을 추스르고 다시 출발이다. 다시 선두에 나선다. 이어서 화개재라는 표식이 보이고 가파른 오르막이 지겹게 이어진다. 상당히 가파르다. 안개가 심해지면서 시계(視界)가 미쳐 2미터도 못되는 것 같다. 안개 때문인가? 몽롱한 꿈속에서 걷는 듯한 기분이다.

땀이 비오듯 흘러내린다. 누가 이기나 보자. 오기가 발동한다. 오히려 걷는 속도를 올린다. “선두(先頭) 속보(速步)!”라고 스스로에게 크게 소리치면서 고개를 내쳐 오른다. 뒤에서 너무 빠르다고 불평하는 소리가 들린다. “정상(頂上)에서 쉽시다”하고 계속 오른다. 아직 어둠은 거칠줄 모른다. 시계(時計)를 보니 4시를 훌쩍 넘었다. 날씨가 흐려서 날이 늦게 새나보다. 오르막이 끝나자 잠시 걸음을 멈춘다. 일행이 반토막나 버렸다.

새벽 산행(山行)의 참맛을 온몸으로.....

날이 밝아 온다. 여기 저기서 새 지져귀는 소리가 들린다. 안개에 함초롬히 젖은 새벽 산(山)의 모습은, 물기 가득한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목욕탕을 나서는 건강한 아가씨의 자태(姿態)같다. 새벽산의 포근함에 빠져드는 기분이다.

나무로 잘 다듬어진 완만한 계단이 나타난다. 숲과 어울려 너무 아름답다. 윤총무에게 사진을 부탁한다. 어디선가? 향긋한 내음이 느껴진다. 산장(山莊)에서 끓이는 차(茶) 내음인가? 아니 무슨 나무 향(香)인가? 향긋함이 지나쳐 달콤한 맛이 느껴지는 구상나무 향(香)이란다. 새벽 산행의 참맛을 온몸으로 음미하며 연하천(煙霞泉)산장(山莊)에 도착한다. 06시3분이다.

산장(山莊)에는 꽤 많은 등산객이 한가하게 아침을 시작하고 있다. 벌써 아침을 먹는 사람, 찌개를 준비하는 사람, 세면하는 사람...... 우리 일행도 벌써 배가 고픈가보다. 단무지만 들어있는 김밥 2줄을 꺼내서 포장 김치와 함께 먹는다. 김치가 맛있다. 김밥보다 김치를 더 먹는다. 뒤쳐졋던 일행이 속속 도착한다. 모두가 벌써 많이 피곤한 모습이다. 07시가 다되어간다. 너무 오래 쉬었다. 아직 몇 명이 도착하지 못했다.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하면 안된다는 생각에 프랭카드를 펼치고 기념사진 촬영을 한다.

07시 3분. 자! 다시 출발이다.
세석산장에 11시전에는 도착해야 천왕봉을 오를 수 있다는데.... 푹 쉬어서 인지? 아침을 먹어서 인지? 발걸음이 가뿐한 느낌이다. 형제봉을 지나 벽소령산장에 이르니 안개가 산장을 뒤덮고 있다. 그대로 지나친다.

숲을 빠져나가니 넓찍한 곳에 등산객이 많이 모여있다. 선비샘이다. 배낭을 내리고 잠시 호흡을 골라본다, 물을 마시고 머리에도 한바가지 껴붓는다. 으! 시원하다. 다들 힘든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물파스를 바르고 양말을 바꿔신기도한다.

다시 배낭을 추스르고 출발이다.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고, 갑자기 안개가 걷히면서 시야가 탁트인다. 저만큼 구름이 산허리에 걸려있는 모습이 더없이 아름답다. 잠시 걸음을 멈취 프랭카드를 펼치고 기념촬영을 한다. 굿이다. 굿!

안개속의 세석산장

다시 출발이다. 저만큼 산장의 모습이 보인다. 세석산장이 1.3키로(?) 남았다는 팻말을 금방 지나친 것 같은데 산장은 왜 저리 멀리 보이는 걸까? 거의 수직계단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래 누가 이기나보자하는 마음으로 쉬지 않고 내쳐오른다. 얼굴에는 땀이 비오듯 흐른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누군가(?) 우리 모습을 촬영하고 있다. “일단 먼저 찍습니다”하고 소리치면서........ 힘들어 그냥 지나친다. 뒤 일행은 인터뷰를 하나보다. “VJ특공대”란다.

널따란 세석평전이 눈에 잡힌다. 저만큼 안개에 휩싸인 세석산장이 보인다. 10시50분이다. 힘들더라도 산장에는 들려야지.... 월산악회회장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거림에서 올라와 천왕봉을 갈 수 없는 뒤쳐진 그룹을 세석에서 거림으로 하산시키기 위함이다. 물을 보충하고, 장터목을 향해 다시 배낭을 챙겨서, 11시5분 세석산장을 출발한다. 피로감이 서서히 밀려오는 느낌이다. 거의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을 샌 영향인가 보다. 오르막이 힘에 부친다. 오른쪽 무릎에 불편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힘든 생각을 떨치고 좌우로 시야를 던져본다. 안개가 걷히고 하늘이 밝아온다. 드넓은 평전이 펼쳐진다. 그래, 지금부터 이 아름다운 모습들을 만끽하는 거다. 피로감이 멀리 사라지는 느낌이다. 삼신봉(三神峰)을 지나자 환상적인 장관이 펼쳐진다. 이 높은 고지(高地)에.......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죽어서도 천년(千年)이라더니 고사목(枯死木)들이 보란 듯이 버티고 있는 듯하다. 세석에서 거림으로 탈출하게 될 후위 그룹의 동료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이 멋들어진 모습을 함께 보아야 하는데......

지리산(智異山)에서 3일째란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한가롭게 걷는 몇분과 조우한다. 카메라 셔터 터트리느라 여념이 없다. 언제 출발하셨나요? 말을 건네자. 지리산(智異山)에서 3일째란다. 여행은 이렇게 여유롭게 하는거란다. 내 말문이 닫힌다. 깜깜한 밤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길을 발밑만 보고 걸었으니......... 나도 아들녀석하고 2박 3일의 여유로운 지리산 종주를 한번 그려본다. 연하봉(煙霞峰)의 아름다움에 빠져 힘든줄 모르고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한다. 12시45분이다.

점심을 먹기로 한다. 식탁에는 파리들이 진을 치고 앉아서 음식 펼치기만 기다리는 듯하다. 김밥 두줄을 김치에 해치운다. 물을 채워야 하는데 샘이 저 밑에....... 아 너무 멀게 느껴진다. 이과장이 내것까지 채워오겠단다. 염치 불구하고 부탁한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다. 너무 반갑다. 일부는 세석에서 탈출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35명이 출발을 함께 했는데 15명이 장터목에서 다시 만났다. 나머지는 모두 세석에서 하산할 수 밖에 없을 듯하다. “천왕봉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점심을 먹으려는 일행에게 얘기하고 먼저 출발한다. 13시 정각이다.

天王峰은 비를 내려 우리를 반기고......

제석봉을 오르는 가파른 길이 버티고 있다. 고사목(枯死木)이 전신(全身)을 드러내고 자태를 뽐내는 듯하다. 힘겨웁게 한발 한발 거리를 줄여본다. 제석봉에서 호흡을 다듬으며 뒤를 돌아본다. 시야가 길게 내닫는다. 날씨가 맑으면 노고단도 볼 수 있다는데 아쉬운 생각이 든다.

철제 보조난간에 의지하며 통천문(通天門)을 지난다.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손살같이 구름이 머리위를 덮친다. 후두둑 빗소리가 들린다. 13시 45분, 지리산(智異山) 천왕봉(天王峰) 정상(頂上)이다. 천왕봉(天王峰) 표지석(標識石)을 매만져본다.
표지석에는 빗물이, 가슴에는 종주(縱走)의 기쁨이 흘러 내린다...........


天王峰은 비를 내려 우리를 반겨 주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