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위에 넘치는 그리움 - 설악산

현관문에 열쇠를 꽂는다. 철커덩...현관문이 열리고 집안의 냉기가 몸을 휘감는다. 이제야 실감이 난다.. 다시 서울로 돌아왔음을...다시 혼자라는 사실을...또 다시 일상을 견디어 내며 살아가야 할 시간임을... 짐을 풀기 위해 배낭을 펼친다.. 순간...설악에서 담아온 수많은 별들이 내방으로 쏟아진다..설악산으로 쏟아지던 별들을 배낭 가득히 짊어지고 왔음에 생각이 미친다... 쏟아지는 별빛에 눈이 부시다... 별이 물기를 머금는다..이내 별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진다....

설악의 눈만큼이나 하이얀 백지를 펼쳐든다.. 그 안으로 설악산이 불쑥 솟구쳐 오른다.. 그리움이 한움큼 떨어진다... 이 살찐 그리움을 어쩌란 말인가...

1월 23일 금요일

05: 30 기상

3시간 밖에 못 잤음에도 눈이 저절로 떠진다. 설악산에 가려 마음먹은 지 몇 주만에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는데...가족들의 걱정스런 말 한마디가 이어진다... 하필이면 이렇게 추운데..하지만 아무도 날 보고 가지 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얼마나 행복해하는지를 알기에 엄하디 엄한 아빠조차 말리지 않는다...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바라다 주며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아빠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더 맘에 걸린다.. 평소 같으면 그냥 내려주고 갈 참인데 굳이 따라 내려 버스에 올라타는 내 모습을 확인하고 돌아서는 아빠의 뒷모습에 가슴이 뭉클하다.. 항상 거대한 산처럼 내 옆에 든든하게 지켜주시는 아빠...그 거대한 카리스마에 이제껏 의지하며 살았는데...비록 육체적으로는 예전의 젊고 건장한 모습은 아니지만 여전히 아빠는 아니 아버지는 그렇게 내 안의 중심으로 우뚝 솟아있다.. 내가 흔들릴 때마다 붙잡아 주는..의지할 수 있는...그런 거대한 산...나의 아버지....

07: 15 남부터미널

새벽녘에는 도로가 한산하다... 연휴 내내 몸살을 앓았을 도로가 편히 자고 있다. 서울이 조용하다...이렇게 한산한 서울은 신기하다..

남부 터미널 대기실로 들어서니 이미 현철이 도착해 있다.. 연휴동안 어떻게 지냈을지 짐작케하는 얼굴을 해가지고서(한마디로 술독에 빠졌다 나온 사람의 몰골?? ^^).....이때 오세천님 등장...이분도 역시나....(다들 연휴에 무리하셨군요....^__^)

07: 35 설악산을 향해~~

수임언니 도착...베낭을 오세천님 차에 싣고 자리를 잡는다... 시동이 걸리고...우리는 드디어 설악산을 향해 출발!!...설악아!! 드디어 너를 보러 간다.. 산꾼들이 그토록 열중하는 너! 너를 보러 내가 간다....너에게 푹 빠져들고 싶다...너의 품에 안기고 싶다.....

07: 40 도로위로 떠오르는 태양...

영동고속도로를 질주한다.. 말 그대로의 질주....끝없이 뻗어 있을 것 같은 아스팔트...그 너머로 온기 없는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마치 황량한 사막에 떠오르는 해처럼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게 한다...붉은 기운이 가슴에 맺힌다...쳐다 볼 수 없다.. 아니 더 이상 바라보기 싫다...더 바라보면 참을 수 없을거 같다...뛰어내리고 싶어진다...그러니...

08: 20 여주 휴게소

차 문을 연다. 차가운 바람이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찬바람에 잠시 몸서리가 쳐진다. 뜨거운 국물이 저절로 먹고 싶어진다. 수임언니, 현철...아침식사로 우동 한 그릇...난 커피한잔....우동그릇에서 올라오는 김.. 후후 불어가며 먹는 두 사람의 모습이 참 따뜻해 보인다. 물끄러미 바라본다. 우동 그릇을 집어들고 후룩 후룩 국물을 마시며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두 사람이 문득 아름답단 생각이 든다.

09: 10 둔내 터널

저 멀리 둔내 터널이 보인다.. 그 위로 설산이 다가온다.. 저만치 있던 산이 어느덧 다가온다. 그 밑으로 뚫린 둔내 터널을 지나간다... 3300m..길지 않은 터널을 지나는데도..꽤나 오랜시간 터널을 지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마치 새로운 세계를 지나기 위한 하나의 의식과도 같은 시간이.... 해탈의 세계에 들어서기 위해 일주문과 해탈문을 지나야 하듯 설악에 들어가기 위한 관문 같은 터널....

09: 50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다.

예전의 대관령 꼬부랑 길을 넘는 재미가 없어져 아쉽긴 하지만 대신에 바다가 그런 서운함을 위로해 준다.. 희미하게 수평선이 보이기 시작한다.. 강풍에 차체가 흔들거린다... ♪♬ 바람 불어와 내 몸이 날려도♩♪♬ (날릴 턱이 있나 @@;) 노래 가사 한 구절이 절로 떠오른다. 아직 감탄하기엔 이르다.. 조금만 더 있다가 조금만 더 있다가....

10: 00 해안도로를 달리기 시작하다.

주문진을 지난 지점에서 해안도로와 만나 해안가를 달린다. 깊고 푸른 바다.... 해안에서 멀어질수록 그 푸르름이 더욱 깊어지고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의 바다는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모든 것의 심연이 갖는 공통의 색,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색..

끝없이 밀려왔다 이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푸른 바다 위의 파도들.. 푸른 들판에 백마들이 뛰노는 것처럼 강렬하게 다가온다.. 하이얀 입김을 몰아대며 달려가는 생명력 넘치는 백마들의 힘찬 기운들...그 기운을 마음속 호수에 담아내어 그 생명력 짙은 향기에 흠뻣 취하고 싶다.

11: 00 설악동 매표소 도착

주차장 입구가 가까워지자 차가 밀리기 시작한다.. 연휴를 맞아 가족들과 함께 설악동으로 나들이 온 이들로 북새통이다.. 하지만 어느 선까지 가면 이들 모두를 뒤로 한 채 설악과 조용히 대화할 시간이 있겠지...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준비해 온 것이 하나도 없다... 먹거리도..개인 준비물도....어찌나 널널한 생각을 하고 왔는지...내가 왜 이러지....나에게 맡긴 이들에게 미안해 진다.... 매표소앞 매점을 이리저리 뛰어 겨우 쌀과 라면, 건전지, 행동식을 구한다.. 수임언니의 말이 머릿속에 와서 박힌다.. '모든 준비는 철저히..가능하면 서울에서 다 해가지고 내려와야 한다'.. 내려와서 사면 되겠지 했던 안이한 생각...햇반도 없는 동네가 있다.. 라면 구하기 어려운 동네도 있다... 스패츠도 겨우 하나 남은 걸 장만할 수 있었당... 정말 다시는 이렇게 생각없이 산행시작하지 않으리 ^^; 큰 경험 하나! 현철이 조난을 대비해 비상 식량을 가져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현철아! 고맙다.. 너 덕분에 내가 조금 덜 미안해 졌당..)

신흥사 바로 앞 한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시작한다. 오세천님과 나는 우거지 해장국, 현철과 수임언니는 산채돌솥비빔밥....머리속이 복잡해서인지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준비를 제대로 해 오지 않는 자책감 때문인지 입맛이 없다. 입안이 깔끌하다. 이런 내 맘을 알아챘는지 다들 '괜찮다' 한마디씩 위로의 말을 건네지만.. 머릿속에서는 계속에서 '바보팅이~~ 바보팅이~~'란 소리가 메아리 친다.. 아~~`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철면피~~!! 작전 구사~~

12: 00 설악으로의 첫발

산행시작이다. 드디어 설악으로의 첫발을 내딛는다. 식당에서 아이젠과 스패츠 모두 착용하고 장갑끼고 모자쓰고 윈드스토퍼에 오버자켓..덕 다운은 차마 민망(?)해서 입지는 못하고..^^비선대까지 난 빙판길을 자신있게 걸어간다... 음 아이젠 착용 안한 양반들 무지 고생하는군..아하..가진자(?)의 여유를 한껏 뽐내며 걷.는.데.... 너무 자만한 탓일까...헉~~ 악~~~~~!! 쿵!!! 내 아이젠에 걸려 길바닥 아니 얼음바닥에 大자로~~ 이 때 내 앞에 오던 양반들 曰, "10발짜리 아이젠 차도 별 수 없구만!!" 이때 나의 궁색한 변명.."미끄러진게 아니라 스탭이 엉킨거라니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그 양반들 지나가 버린다... 버둥버둥...마치 뒤집어진 거북이마냥 버둥대다 겨우 일어난다... 머리가 얼굴을 온통 가려 귀신같다. 앞으로 확 쏠려 있는 머리를 일단 정리하고 민망한 기분을 수습하려 성큼성큼 걸어간다... 넘어진 공간에서 어느 정도 지나쳐 왔단 생각이 드니 그때부터 무릎이 아프다. 으~~ 하필이면 얼마 전 넘어져 다친 그 자리군....당장 확인하고 싶었으나...스패츠와 아이젠을 풀렀다가 다시 할 자신이 없다. 뭔가가 바지속으로 흐르는 것 같은데 확인할 길 없음..'에이 몰러! 그냥 갈껴~!!' ㅜㅜ

12: 40 비선대
여기까지다. 벅적대던 사람들의 목적지....상가안으로 난 길을 지나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계단을 오르니 작은 안내판 하나 눈에 띈다. 대청 8km..예상 산행시간 6시간 30분...

앞서간 이들의 발자취가 순백지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눈(雪)에 반사되는 희푸른 빛에 눈(目)이 부시다. 그 백지 위를 힘주어 걷기 시작한다. 뽀득뽀득...간지럼 타는 웃음 소리.

13: 10 귀면암

비명처럼 긴 울음소리를 내는 계단을 올라선다. 그 끝에 포진한 귀면암...귀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그 귀면암 위로 서늘하고 푸른 하늘.. 바람에 흩어져 가는 흰구름... 머뭇거리거나 우회하지 않는, 직선으로 날아와 꽂히는 태양의 시선...새삼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

13: 40 바위 아래 첫 휴식처

보일 듯 말 듯 앞서가던 오세천님 계단옆 한 바위위에 배낭을 내려 놓는다.. 핵핵대며 따라가던 나머지 세명~~ 휴~~ 살았다.^^ 오세천님 생물학적 나이는 오십대요 마음의 나이는 30대..몸의 나이는 10대의 팔팔한 청춘!! 산행내내 오세천님 따라가다 죽는줄 알았답니당!!..^^

14: 20 양폭 산장

한 잔의 막걸리.. 입안에 퍼지는 싸한 향...위에 도달할때의 짜릿함....세상에서 가장 맛난 막걸리 한잔을 걸치고 나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군..(한맥이 나로 하여금 곡차의 깊은 맛을 알게 하였군!! @.^)

내려 놓았던 베낭을 다시금 메고 대청으로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길을 걷다보면 그곳에 갈 수 있겠지...

끝도 없어 보이는 계단이 내 앞에 서 있다... 그뒤로 설악의 바위들이 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저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옴을 느낀다...

15: 00 용이 승천한 계곡...

마치 용이 천년간을 머물다가 승천한 것 같은 계곡이 눈에 들어온다.. 회색의 암벽 사이를 지나는 계곡...설악의 맑은 물들과 기운이 이곳으로 모일 것 같은 곳...마치 지금이라도 꿈틀거리며 용이 천년의 잠에서 깨어날 것 같은 침묵....

15: 40 희운각 산장

양폭 산장부터 오르막의 계속이다. 이제야 설악에 온 듯한 느낌이다.. 발밑으로 뽀드득 거리는 눈소리가 계속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뽀득뽀득~ 뽀드득....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본다.. 설악을 이루고 있는 작은 돌멩이들...깊은잠에 빠져 있는 나무들... 보잘 것 없지만 천상의 위안이 될 수 있는 삶에서 만나는 이 모든 돌멩이와 나무들..

꼬로록~~~ 아~~ 배고프다.. 몸에서 김이 올라온다. 대피소 앞 천막으로 들어서니 빙벽을 타고 내려오는 듯한 사람들이 난로 주변에 둘러 앉아 있다. 천막에서 나온다.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눠도 좋으련만... 수임언니가 건네는 초코파이를 먹는다. 냉장고에서 막꺼낸 듯 초코빵 사이의 매시맬로우가 살짝 얼어있다. 한 입 베어 무는데...달콤한 맛이 입안 전체에 녹아든다.. 아~~ 초코파이가 이렇게까지 맛있었나? 새삼스럽다... 한 개 더.....

눈을 들어 대청봉을 올려다 본다.. 근데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대청봉 맞남? 우리 4명 아무도 모른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대청인지 중청인지 소청인지...어리버리 설악 초보 4명..보이는 것 중 젤 높으니까 대청 맞을껴~~...(알고 보니 맞긴 맞었다...^^)

언몸이 녹을 사이도 없이 배낭을 둘러메고 다시금 대청을 향해....완전한 오르막이다. 이 오르막이 고비란다. 이곳만 넘으면....사람들이 걸어서 내려온게 아니라 다들 엉덩이로 내려왔는지 발자국은 몇 개 안되고 온통 엉덩이로 내려온 자취뿐이다.. 한발 한발 내딛기 시작한다..

아~~ 얼마쯤 왔을까...저 위로 온통 하얀 눈만이 보인다. 손바닥만한 하늘 조차 보이지 않고 오로지 위로 솟아 있는 눈에 덮힌 길...간간히 나 있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조금스럽게 되짚으며 간다. 머릿속도 점점 하얀 백지가 되어간다. 오랜만이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 머릿속이 먹지가 되어 아무것도 쓸 수도 그릴수도 없더니...

눈속으로 나 있는 발자국...우리의 이정표가 되는 그 자취들을 따라가며 눈 덮인 이 길을 처음 밟고 지나갔을 사람을 생각해 본다.. 그 사람은 이 백지위에다 무엇을 쓰면서 길을 걸었을까? 침묵이란 놈을 툭 던져 놓고 갔을까?

쌓인눈을 밟을때마다 허공을 디디는 듯한 느낌이 든다. 휭하니 어지럽다...

이제는 더 이상 헐떡이지 않는다. 호흡이 안정되어 헐떡인다는 사실조차 잊는다. 한 능선에 잠시 서서 설악을 다시금 찬찬히 바라본다. 한층 서늘한 모습..어떤 대상을 향해 욕망을 키우고 목표를 향해 안간힘을 쓰다가 힘의 정점에서 문득 의미 없을 느끼며 욕심을 놓아버릴때의 눈빛이 이런 것일까...지금 설악이 내게 보내는 눈빛이...

17:00 중청

이제 조금씩 푸른 얼굴을 한 하늘이 길위로 보이기 시작한다.. 한걸음만 더! 한걸음만 더!!
점점 커지는 하늘...바람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흐느낌이 아니라 아예 마당에 질펀하게 퍼질러 앉아 우는 듯한 통곡소리다.

드디어 능선에 올라선다. 바람에 몸이 순간 휘청 거린다. 흘렸던 땀들이 순식간에 얼음이 되어버리고 몸도 얼어버린다...... 드디어...구스다운이 제 몫을 할 시간이 되었군....우리의 혈기왕성한 10대 오세천님 씩씩하게 대청을 향해 행군...나머지 노인네들(?) 옷입느라 난리~~!!

마치 눈보라 치듯 바람에 눈들이 날린다. 얼굴에 와서 부딪치는 촉감이 부드러움이 아니라 날카로움이다..그런 날카로운 눈들이 내 귓가를 스치며 하는 말 '슬픔은 눈물이 아니라 칼이란다....' 중청대피소에 도착할때까지 그말이 귓전을 맴돈다..

17: 30 중청 대피소 도착

아~~ 드디어 소청(?) 대피소가 눈앞에 보이는군...수임언니 우리 오늘은 추운데 여기까지만 가면 안될까요...수임언니 왈...아니된단다... 중청까지는 가야 한다.. 눈앞에 보이는 대피소를 놓고 수임언니와 옥신각신....귀숙이..보이는 대피소에서 자야한다.. 수임언니 중청 대피소까지 가야 한다.. 그런데...알고 보니 보이는 대피소가 소청 대피소가 아니라 중청 대피소였던 것이다.. 그럼 소청 대피소 어디갔어? 알고보니 우리의 산행 코스엔 소청 대피소가 없었던 것을...두사람 모두 같은 곳에서 1박 하자는 얘기였군...0.0;

나무로 지어진 대피소가 아늑하게 보인다. 얼른 문 열고 그안으로 들어가고 싶군..너무 춥다.. 따뜻한 라면 국물이 간절하다...아이젠과 스패츠를 벗는다. 대피소 문을 연다.. 안경에 김이 서린다.....

17: 35 중청 대피소 안

안경에 서린 김을 등산복에 쓰욱~ 대강 문지르고 배낭을 집어 던지듯 내려 놓는다. 모자 벗고 장갑 빼고 겉옷을 하나 둘 벗어 놓고.. 산장지기에게로 직행!! "저기요..인터넷으로 예약했는데...이름은 ***. 근데요..실은 3명이 더 왔거든요".. 산장지기 난색을 표한다. 입구에 버글거리는 이들 모두 대기자들이란다.. 이쁜척 하며 웃음을 날린다. "에이 그러지 말구 자리 3개 더주세용!"...이 엄동설한에 어디로 가오리까~~......친한척, 예쁜척, 불쌍한척....^^
결국 우리는 자리를 얻고야 말았당...(아~~ 이 넘치는 인기를 어찌하리오!! 산아래에서나 산위에서나!! ㅋㅋㅋ) 그런데 알고보니...날씨가 추워 예약 부도자가 많았던 것이였당!! 치~이~

잠자리가 해결되고 나니 배꼽시계가 울리고 야단법석이다..꼬록~ 꼬록~~ 꼬로록~~~~~..
취사장으로 내려가니 발디딜틈이 없다. 준비해 온 것이 없이 먹을 것도 별로 없군..별 수 없이 라면에 밥 말아 먹기...근데 생쌀 밖에 없당..ㅜㅜ 슬퍼라 하고 있는데 옆에서 밥을 왕창하고 있던 한 사람..밥이 남는다면 무지 많이 밥을 준다.. 우히히 행복해라...

우리의 현철군은 산위에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산장지기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동안 라면죽(?)을 끓여낸다. 김이 모락모락...꿀꿀이 죽이면 어떠하리...시장이 반찬인 것을...
정신없이 꿀꿀이 죽을 먹고 있는데 어디선가 삼겹살 냄새가 진동을 한다. 아~~먹고 싶다. 순간 오세천님, 현철, 수임언니..나를 야리며 쳐다본다.... 민망...뒤꼭지에서 땀 한방울 쭈룩~

19: 00 바람과 별과 야경과 그리고 나..

침상에 짐을 풀고 담요를 펼쳐놓는다. 대피소 안에 있는데도 추워서 나도 모르게 온몸이 떨린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밖에 나갈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 그래도 생리적 욕구는 참을 수 없는법..추우니 더 가고 싶군.... 대피소 문을 연다. 찬 바람이 뺨을 마구 갈겨댄다. 화장실로 급히 달려가는데 화장실에서 거사를 치르고 나오는 한 남정네 하는 말..."%고 얼겠네.."^^ 정말 실감나는 표현이다. 얼면 어떻하지? 히히히

화장실에서 나와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려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동쪽으로 속초 시내 야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런~~!! 이런 황홀한 광경을 놓칠뻔 하다니... 잠시 추위도 잊은채 넋을 놓고 산 아래 펼쳐진 불빛 가득한 세상을 내려다 본다..... 해안가 쯤인 듯한 곳까지 가로등들이 서 있고 그 이후부터는 아무런 불빛도 없다. 고기 잡으러 나가는 배들의 행렬도...밤바다를 지키는 외로운 등대 불빛도...'저 곳부터는 바다겠군' 바다와 육지를 가르고 지나가는 가로등이 마치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충돌하여 일으키는 불꽃같다.

저 안에서 일렁이고 있을 바다.. 빛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많은 사람...언제나 화두는 사람...
사라졌다 솟구치는 우리들의 生...파도처럼 밀려왔던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生...과연 그것이 무엇일까...항상 生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 알 수 없다니 참 역설적인 일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쏟아지는 별빛들이 바람에 날리며 내 머리위로 내려앉는다. 어둠이 깊어갈수록 희미했던 별빛들조차 자신의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별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하고 어둠뿐일 것 같은 하늘에는 수없이 많은 별들로 반짝거린다. 어둠이 깊어갈수록 별들이 선명해 지는 것처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본 사람만이, 인생의 어둠을 온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만이 어쩌면 삶의 가장 밝은 면을 볼 수 있고 삶과 내 주위의 작은 돌멩이..계절의 변화...이런 모든 것들에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서쪽 산자락을 바라본다. 어렴풋하게 거대한 산들의 윤곽이 보인다. 보고 있으나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지금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몽한적 분위기의 삶..전생과 이생, 다음생의 연속성을 믿는다면서 현생에 더 이상 연연해 하고 싶지 않다며 내 가슴에 기대 울던 친구의 흐느낌.... 왜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아니 물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오랫동안 내 가슴에 그냥 기대어 울게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다.

산에게 소리쳐 묻고 싶다. 전생에도 있었고 이생에도 이렇게 존재하고 다음생에도 여전히 이런 모습으로 그렇게 서 있을 설악에게 '사는게 정말 꿈이냐고..'

몽한적 삶

용이 꿈틀거리며
승천을 시작한다.
하늘로의
비상을 꿈꾸며
천년동안을
버티어 내어...

천상의 삶이
좋더냐?
견딜만 하더냐?

용이 승천한
자리를 걷는
내가...

지금의 나인지
전생의 나였는지
다음생의 나인지...


19: 30 침상속으로

아직도 이른 시간인데 산속의 밤은 깊어만 간다. 있는 대로 옷을 잔뜩 입었지만 추위가 가시질 않는다. 마루바닥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뼈 속까지 스며들고 라디에이터는 점점 그 온기를 잃어간다. 밤이 깊어갈수록 바람의 울음도 더욱 깊어진다... 몸을 뒤척거린다..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그런데...사람들의 말소리가 점점 흐릿해진다....

끝없이 아래로 아래로 가라 앉는 느낌이다....

1월 24일 토요일

06: 15 기상

자기 전에 아프기 시작했던 다리 때문에 걱정했는데 자고 나니 거짓말 같이 멀쩡하다..아직은 짱짱하군..이런 생각이 드니 기분이 괜시리 좋아진다..역시 체질이여~~ 스스로 감탄, 흐뭇!! 아침부터 혼자 북치고 장구치구....역시 난 혼자도 잘 놀아!! ^^

침낭을 뒤집어쓰고 앉았는데 침낭 밖으로 나오기가 싫다. 라디에이터는 완전히 온기를 잃어버렸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부스스 일어나고 벌써 산행할 채비를 갖춘 이들도 있군... 옆을 본다. 옆자리에 누웠던 수임언니와 오세천님...얼굴이 푸석푸석해 보인다. 밤새 잠 한 숨 못잔 사람들 마냥...수임언니..밤새도록 추위와 옆사 람 코고는 소리와 한바탕 전쟁을 치르느라 잠 한 숨 못 잤단다. 그 옆에서 걱정하던 우리의 gentleman 오세천님 또한 걱정하고 보듬어 주느라 잠을 못 이룬 모양이다. 나만 정신 없이 코까지 골면서 잤다는군 ^^;;

아침을 먹어야 하지만 너무 춥게 자서 그런지 입맛이 없다. 산장지기의 방송..현재 기온 영하 17도, 체감온도 영하 27-8도.. 허걱~~!! 나가서 추위에 버티려면 뭔가를 먹어야 할 것 같은데..영 입맛이 없군.. 우리의 비상 식량...초코파이... 침상을 싸맨 채로 앉아 초코파이를 한입 베어 문다. 희운각에서 먹었던 달콤했던 초코파이가 아니다. 초코맛이 씁쓸하다.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씻지도 않아서 그야말로 괴물이 따로 없다. 입안이 까끌하다. 최소한 이는 닦아야지....

예상 일출 시간 07시 38분...주섬주섬 짐을 다시금 챙기기 시작한다. 추워서 그런지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느릿느릿 짐을 챙기다 보니 어느덧 7시 10분...대청까지 예상 소요시간 20분..어여어여...일출을 놓치면 안되리~~~

07: 20 대청을 향해~~

아이젠과 스패츠를 다시 착용하고 대피소 문을 여는 순간.....아~~~ 영하 27-8도의 체감온도 확실하군....몇 발짝 걷지도 않았는데 볼이 얼얼하다 못해 아프기 시작한다.. 장갑을 3개나 끼었는데도 새끼 손가락에 감각이 없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걷다보면 체열에 얼었던 몸이 녹겠지...

먼저 출발한 수임언니와 오세천님이 아득하다. 보이지 않는다. 현철과 나..일출을 놓칠세라 발걸음을 재촉하나 몸이 굳어서인지 힘들기만 할뿐 속도가 나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오르막 길이 참 예쁘다. 어제 밤 어둠에 잠겨 있던 바다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다..

07: 36 대청봉 - 드디어 일출을 보다!

동쪽 바다와 하늘에 여명이 움터오기 시작한다...점차 회색빛 하늘과 바다가 짙붉은색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한다. 바다에서 꿈틀거리며 태양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가슴속에서 설렘도 아니고 두근거림도 아닌 표현할 수 없는 뭔가가 출렁이고 저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와 몸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균열을 일으키며 몸을 타고 올라오고 있다. 하복부에서 시작되어 가슴 중앙을 관통하는 뜨겁게 꿈틀거리며 솟구치는 어떤 힘이 있다.
태양이 밀려 올라온다. 그와 더불어 내부에서도 뭔가가 밀려오고 동시에 '하'..절로 한숨이 토해진다..

완전히 바다위로 올라온 태양에 붉은 기운에 더해진다... 점점 밝아지면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밝은 빛을 발한다.. 일출을 사랑하는 이유.....맑고 붉은 기운으로 충만한 태양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발하는 빛에 감춰진 태양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맑은 얼굴을.. 깨끗하고 순수하고 정제된 그 태양의 모습을 사랑한다...

활달하고 적극적인 모습 뒤에 깃들어 있는 위태롭고 어두운 모습, 어떤 상황이건 벼랑끝까지 스스로를 밀어 붙이는 습성, 극단적인 감정 사이를 마치 한발짝 건너듯 오가는 감정의 변화, 가끔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빠져드는 절망의 나락, 스스로 자초한 고립과 외로움의 벽을 깨버리고 저 떠오르는 태양처럼 맑은 영혼을, 어떤 것에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하지만 삶과 사람에 대한 여지를 남겨 놓는 영혼의 소유자로 거듭나고 싶다.

내 앞에 수임언니와 오세천님이 일출을 말없이 바라보고 서 있다. 저들에게 말을 시켜면 안될 것 같다... 뒤를 돌아본다.. 수임언니의 눈빛, 오세천님의 눈빛..현철의 눈빛....설악을 하나가득 담은 눈들이 맑고 깊다...

07: 50 오색으로 하산 시작

오색으로 내려가는 길을 아시나요? ^^; 우리 넷 모두 오색으로 가는 길을 모른다.. 대청에서 물어 물어 오색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고서 하산 시작...수임언니 왈 '세천 오라버니! 내려가기 싫어~~잉!' 정말 내려가기 싫다... 그 어느때보다 더....걷기 싫을정도로...

남북으로 뻗어진 산줄기들 위로 막 피어오른 햇살이 내려 앉는다. 서리발 내려 앉은 산줄기를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손길에 마음이 시리도록...

동서로 뻗어 있는 산줄기 사이로는 햇살이 골마다 스며들어 마치 산의 기운이 태양의 기운과 결합하여 새 생명이 창조되는 듯 하다.

골골이 찾아드는 햇살에 산이 기지개를 켠다...
오래 울고 난 뒤의 서러운 평화 같은 것이 깃든다.


09: 00 설악폭포

오세천님과 수임언니가 보이지 않는다. 내려오기 싫은 마음에 좀 더 설악에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천천히 하산한다.. 바로 앞서가던 현철이와의 거리도 멀어지고 이내 혼자가 되었다. 잠시동안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아주 천천히 걷는다... 나만 생각하면서....

산위에서, 산아래서 해 왔던 말들이 뜻하지 않게 머릿속에 하나 둘씩 맴돌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한 두마디에 지나지 않더니 점점 더 많은 말들이 지나간다. '왜 내가 그렇게 쓸데 없는 말들을 지껄였을까' 침묵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침묵이 주는 어떤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끝임 없이 말들을 뱉어낸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침묵...내부의 공허와 자신 없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말을 아끼는 자와 말의 허무함과 의미 없음을 뼛속 깊이 아는 자들이 가질 수 있는 것!

10: 20 남설악 매표소

앞으로 자주 찾게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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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경선 - 잘 읽었습니다. 장자의 호접몽이 생각 납니다. 산은 누구나 오르지만 느끼는 감정은 각자 다르고 남과는 다른 자기내면의 세계를 찿아 산으로 향하는 것은 아닐지.....두번 읽게 되더군요.^.^
▣ 포도사랑 - 그날...무지하게 추웠습니다. 여장부의 기상이 몸에 와 닿는 글입니다. 근데 붙여넣기를 두번하신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