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만에 다시 찿은 덕유산    (2006. 1. 22. 일)

 

(황점-삿갓골재대피소-무룡산-동엽령-송계삼거리-덕유평전-중봉-송계삼거리-송계사매표소)

 

덕유산행을 위해 워밍업겸 어제(21일 토요일) 언니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팔공산 서봉을 올랐다  몸 상태도 썩 좋지 않은데 두 혹을 달고 가자니 여간 신경쓰이는게
아니었다  누구 말처럼 열받다 못해 두껑 열릴 정도로...  동서봉 갈림길에서 오도재로 올라서자
서봉 주위로 눈꽃이 만발했다  "쓰스쓱..투두툭.." 비듣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렸다
햇살을 못이겨 나무가 흰옷을 벗는 소리... 눈꽃이 지는 아쉬움의 소리였다
 
다행히 아이들은 미끄러운 바위와 눈길을 의외로 잘 통과하고 실력을 발휘했다 
요즘같은 날씨에 눈꽃을 만나는 것도 행운이다  팔공산의 눈꽃도 이런데 덕유산은 오죽
아름다울까..  지난번의 산행을 떠올리며 그리움과 기대로 부풀었다
아이들을 동반한 네 시간 여의 피곤한 산행에서 돌아와 오후늦게 그만 한시간 낮잠을
자고 말았다  서방님은 용케도 저녁 아홉시쯤 수면에 들어갔는데  낮잠 한시간의 후유증인가
멀뚱멀뚱 잠이 오질 않았다 그렇게 새벽 세시까지 꼴딱 세웠다 
 
까짓거 뭐...  가면서 차안에서 대충 좀 자면 되겠지... 위안을 하며 베낭을 꾸려 세시 반에
집을 나선다   새벽에 집을 나서는게 얼마만인가?  일년 반 전 지리산을 향해 꼭두새벽에
출발하던 때가 생생하다   하늘엔 별도 총총하고 반달(하현달) 까지 반듯하게 떠 있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고 '페이지'의 음악은 한바퀴 돌아 유난히 가사가 귀에 들어오는 '길'
이 두번째 흐르고 있다 ( "~~그대가 가야할 길과 내가 가야할 길이 서로 다름을 난 알아요"~~)
 
다섯시에 황점에 도착해 창문을 여니 세찬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잠 한 숨 못자고 과연 오늘 산행이 가능할 것인가? 
불안과 기대를 안고 5시 15분에 대장정(?)의 길에 오른다
새벽 하늘엔 찬 별이 쏟아질듯 반짝이고 고마운 반달은 등로를 비춰준다
계곡으로 접어들자 바람도 잦아들었다  삿갓골재대피소를 향해 오르는 길엔
남편과 둘 뿐이다  분위기가 딱이다(^^)  전날 잠을 잘 잔 사람도 못 잔 사람도
마음만은 흐뭇하다  거기다 내일은 결혼 12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시간여 정답게 올랐다
달그림자가 희미해지고 별빛의 총기가 약해질 즈음 등로는 조금씩 드러나는데
걸음의 속도는 오히려 느려진다   답답해 하던 남편은 앞서 걷기 시작한다 시력이
형편없는 난 밤눈은 더 쥐약(?)이다  발걸음도 헤메고 생각도 헤메다 돌부리에 
걸려 엉금엉금 기다시피 오른다  아무려면 어떠랴...  오르다 보면 고개에도 이르고
봉우리에도 닿겠지...  이상하다  불그레한 무언가 자꾸 뒤따라오는 느낌이다
무시하고 걷는데 느낌은 더 강렬하다  뒤돌아보니 맞은편 멀리 산능선이 길게 검붉은
색이 퍼지더니 신비한 보라색까지 뒤섞여 오묘한 붉은 색감을 띠고 있다
드디어 산꼭대기에서 나도 일출을 볼 수 있겠구나!...
 
뒤돌아보며 한 발 한 발 드디게 나무계단을  올라서니 삿갓골대피소가 보인다
거북이 걸음에 두시간 십분이나 걸렸다  무룡산을 향하다 걱정이 된 남편은
대피소로 되돌아와 기다리다 마나님이 무사히 도착하는걸 확인하곤 잰걸음으로
산마루로 내달린다   대피소에서 밤을 세운 산님들도 하나둘씩 능선을 오르기
시작한다  십여분 오르자 전망 좋은 안부에 남편이 일출을 기다리고 있다
바람이 세차다  손이 시려워 카메라를 잡기도 힘들다  보온병의 물을 꺼내 커피
한 잔을 탔다  가장 행복한 시간...   아쉽게도 금방 식어버린다  
 
대피소에서 올라온 산님들이 모두 도착하니 한팀이 일곱명이다  수런거리던
소리는 붉게 뜸들이던 태양이 살짝 고개를 내밀자 드디어 환호성으로 바뀐다 
아홉명이 같은 곳에서 일출을 맞이한다  동편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티없이 맑고 
바알간 태양이 떠오른다  바닷가의 일출은 더러 보았지만 높은 산마루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난생 처음이다  떠오르는 태양이 저렇게 해맑은 줄 몰랐다   일출을 많이 보아온
남편은 오늘 같은 날은 드물다고 한다  순식간에 해가 떠올랐다  붉은 기운이 서서히
감돌아 그렇게 뜸들이더니 떠오르는 순간은 너무 짧다  둥근 태양이 떠 올랐건만 허탈한
기분마저 든다  모든 것이 순간이란 생각이 든다  해가 뜨는 것도, 꽃이 피는 것도, 사랑도,...  
태양은 이미 떠 올랐고 떠오른 태양이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듯 우리도 가야한다  걸어야 한다  
흐르는 능선따라 무룡산을 향해, 동엽령을 지나 백암봉, 덕유평전, 중봉까지 ...
 
떠오른 태양은 새벽의 푸른 산능선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박남수의 '아침 이미지'를 떠올리며 걷는다 
- ...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을 한다. -
깨어난 산마루 능선을 하염없이 걷는다   내 발걸음도 즐거운 울림이다
유명한 덕유산의 눈꽃은 어디에도 없다  세찬 바람에 나목의 가지들이 떨고 있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차다   가슴팍까지 파고드는 이 차고 시원함이야 말로 겨울산행의
진수다 
 
향적에서 남덕유까지 긴 능선의 중간쯤 유독 우뚝 솟아 반듯하게 잘 생긴 봉우리 '무룡산' 
을 향해 오른다  칼바람이 분다  소백산 비로봉만큼은 아닐지라도 무룡산의 움푹 패인 
목책의 오름길은 부는 바람에 몸이 날릴 듯 위태롭다  내딛는 한 걸음 걸음이 고역이다
무룡산 꼭대기에 서니 조망이 시원스럽다  남덕유와 서봉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멀리 지리산 주능선도 일렬로 하늘금으로 선명하고 가야산의 정상부는 언제 보아도
꽃봉오리처럼 아름답고 신비스럽다  향적으로 향한 능선은 백암봉에서 대간길의
머리를 우측으로 돌려 내달리고 있다  산사람들은 조금씩 불어나기 시작한다  지나치기
아쉬워 옆산님에게 부탁해 남편과 정상석을 사이에 두고 사진을 찍는다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몇이나 지났던가  8시 30분에 무룡산에서 출발했는데
동엽령에 도착하니 아침 10시다  어느듯 다섯시간여 걸었다  조금씩 몸이 지친다
10시간은 끄떡없다고 큰소리 쳐 놓곤 겨우 반을 지났는데 자꾸 쳐지기 시작한다
뒷사람이 지치면 그만큼 앞사람은 기다려야 한다  춥고 답답한 가운데...
어쩌면 어제 내가 아이들의 걸음에 열을 받았듯이 남편도 속으론 열 좀 받을까?
아님  부글부글 끓을까?  저 속을 내가 어이 알리...  모든걸 그냥 못 잔 잠 탓으로 돌린다 
잠을 안 자 핑계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송계사 삼거리에 먼저 도착한 남편이 제안을 한다
덕유평전과 중봉을 갔다 올 것인가 바로 송계사로 하산할 것인가를... 한참을 서서
중봉쪽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여기서 포기하면 언제 다시 올 것인가  힘은 들더라도
원래의 계획대로 중봉을 가기로 한다
 
덕유평전엔 마른 풀과 철쭉나무들 사이로 키 큰 수리취가 비쩍 마른 열매를 그대로
달고 바람에 흔들린다   눈이라도 내렸으면 솔나루님의 표현대로 하얀 솜방망이를
마구 흔들어댈텐데...  수리취를 볼 때마다 우엉이 생각난다
붉은 철쭉이 피고 야생화와 풀이 어우러진  푸른 초원을 그려본다
그 속에 좋아라 뛰어다니는 내 모습도...
 
중봉의 오름길은 고도도 적당하고 보기에도 푸근한 봉우리인데 지친 우리에겐 고행이
따로 없다  모든 산님들이 우리를 앞서 간다  30분이면 충분할 거리를 40분만에 힘겹게
중봉에 도착했다  비탈진 양지쪽에서 점심을 먹는다  에너지를 보충한다고 초콜릿을
너무 많이 먹어 입맛이 없어 밥맛으로 먹는다   소백산 비로봉에서 바람을 맞으며 양지쪽에
앉아 밥 먹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20분만에 후다닥 식사를 끝내고 또 그렇게 후다닥
송계사 삼거리에 다시 오니 12시 20분이다  
 
좋은 길이라지만 횡경재까지 남편의 걸음을 뒤쫓느라 정신없이 걸었다 
한시간여만에 횡경재에 도착했다 송계사 주차장까지 버스시간을 맞추느라
사정도 봐주지 않는 심한 급경사의 내리막을 또 얼마나 내리꽂아 달렸던가...
눈길이 끝나고 낙엽길에서 아이젠을 벗어 손에 들고 터덜터덜 내려오니 바람에 얼굴은
상기되고 헝컬어진 머리와 절뚝이는 내 모습은 패잔병이 따로 없다 
 
서두르는 남편 덕분에 송계사 매표소에 도착하니 북상으로 가는 버스시간 15분 전이다
북상에 내려 운좋게 황점으로 가는 관광버스를 얻어탔다  10시간여의(9시간40분) 산행에
무릎이 완전히 맛이(?) 간 것 같이 아프다 
아!~~  다시 산행을 할 수 있을까...
오늘 하루가 무지 길게 느껴진다
두시간 동안 운전하는 사람 옆에서 정신없이 잠에 취했다
 
 
 
***
하루밤 자고 나니 다시 다리가 멀쩡하다
남편은 오히려 아프다고 하는데...
역시...  난 체질인가 보다^^
덕유산이 또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