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月山 산행기




일시 : 2003년 7월 13일 비/ 흐림. [출발예정시간 07시 20분이었음].

행정구역 : 全南 潭陽郡 龍面 月桂里, 全北 淳昌郡 復興面 大榜里.

총 산행거리 : 약 5km.

총 산행시간 : 약 4시간(11 : 30 - 15 : 30) * 통상 일반인 기준으로 3시간 40분 정도 소요.

산행인원 : 총 38명(이용석 기사 포함)

산행구간 :

추월산 주차장(0.8km) → 보리암(0.5km ; 30분) → 보리암 정상[상봉 ; 691.9m봉](1.2km ; 50분) → 정상(약2 .5km; 1시간) → 월계리 월계마을


지형도 : 1/5만 담양[2002. 3. 인쇄].


산행후기 :

오늘은 서울산사람들이 7월 첫째 주 정기 산행일로서 전라남도 담양의 진산인 추월산을 간다고 한다. 나는 호남정맥을 할 때와 그 외 단독산행시에 여러 번 가 본 추월산이라서 이번 산행에 참가하지 않고, 탐진기맥을 산행하기로 하였었다. 그리고 나서 서울산사람들이 하산한 시간에 맞춰 당도하여 합류하기로 마음을 굳혔었다. 그러나 요즘같이 장마철에는 일기예보에 주의하여야 한다. 그런데 일기예보에 의하면 남부지방은 장마전선의 영향을 받아 전라보와 경상도 등 남부지방에 호우주의보까지 발령되었다고 한다. 불의의 사고를 방지하고, 산행의 효과도 별로라고 판단하여 나의 계획을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루 전인 어제 7월 12일 탐진기맥을 종주하고 나서 서울산사람들이 추월산을 하산하는 시간대에 추월산 주차장으로 합류하기로 했었는데, 부득이 탐진기맥 종주를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 서울산사람들에 합류하여 4번째 추월산 산행에 임하게 된 것이다. 사실 지난 6월 3째 주에 철원 복계산 산행에 참가하지 못한 미안감도 조금은 작용하기는 하였다. 사실 비가 오더라도 기맥 주변의 명승지를 답사하면 산행만큼 유익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추월산 산행은 주차장에서 보리암 입구까지는 가파르게 계속 오름길이고 길에 물이 흐르며, 돌도 많아서 미끄러울 뿐만 아니라 암반 지대도 지나야 하므로 매우 위험하고, 실족 추락에 주의해야 하며, 땀 한 번 흥건히 제대로 흘러야 했다. 보리암에서 잠시 약수로 목을 축이고, 풍광을 즐기고 역사 공부를 하면서 숙연함을 느낀 뒤에 보리암 정상[상봉, 추월암)까지 오르는데, 역시 오름길이 가파르고 암반도 나오나, 위험구간 요소요소에 난간과 로프가 적절히 되어 있어 안전하게 오를 수 있었다. 방심하지 않는 한 비록 비가 와서 미끄러웠지만, 실족의 염려는 없었다. 보리암 정상에서 추월산 정상까지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조금의 오르내림이 있어 지루하기가 덜하였다. 이어 내려올 때는 제 4등산로를 택했다. 비가 많이 와서 이 쪽이 덜 위험할 것 같아서이다. 보리암이란 암자까지는 제법 경사가 심하였으나 나머지 구간은 별로 힘들지 않았고, 장마철이라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명산인데도 불구하고 가을에 비해서 정말 여유롭고 호젓하고, 몇 번째 오른 산이었으나 역시 신비를 간직한 산이라서 그런지 아름다운 산행을 한 것이어서 더욱 추억에 남는다. 그래서 추월산이 가을 산행지로 좋다고 하지만 꼭 가을에만 가라는 법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이렇게 여름에 갔어도 많은 것을 가슴 가득 담아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임진왜란시의 의병장 김덕령 장군의 처 흥양이씨의 순절처가 있는 보리암을 겸하여 답사할 수 있어 역사와 반공의식의 공부에도 도움이 많이 되는 곳이다.
추월산의 산림 분포도 이채롭다. 산 하부에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장송들이 울창하게 들어차 있어 지금과 같은 여름이면 가족을 동반한 관광객들에게 더 없는 휴식처가 될 것 같다. 산 중부에는 잡목숲이 울창하다. 그리고 정상에는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 산 아래에 시원하게 넓게 펼쳐지는 담양호의 푸른 물과 숲이 조화되어 절경을 연출하고 있으니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준다. 그래서 한 번 쯤은 꼭 가보아야 할 산인 것이다. 담양호의 물이 항상 가득한 것은 지역의 지명과도 연유가 있는데, 담양이 한자로 못담(潭)자를 쓰듯이 옛부터 이 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강우량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다. 고려 성종 때의 지명도 담주(潭州)였다고 한다. 나도 오늘 4번째로 오른 산이긴 하지만 아직도 이 추월산에 대해 숙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하늘이 높고 오곡이 무르익는 단풍의 계절인 가을철에 보름달이 뜨는 날 새벽에 올라 고고히 높이 떠있는 달과 빼어난 절경을 감상하고 정상에서 지리산으로 떠오르는 일출을 맞는 일이다. 그러면 우리 나라에 산이 많아 그 이름도 부지기수이지만 추월산 만큼 아름다운 이름도 드문 것 같은 추월산의 진수를 흠뻑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이러한 빼어난 절경에 둘러싸인 보리암, 수려한 추월암에서 수리바위로 이어진 능선의 형상이 엎드린 용의 모습과 흡사할 것 같고, 달과 같이 맑고 맑은 담양호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추색을 상상되지 아니하는가!!!

쉬운 길이 아닌데 통나무 또는 침목으로 만든 계단과 흰색의 굵은 밧줄과 가는 로프, 그리고 쇠파이프로 만든 손잡이가 설치되어 있어 옛날보다 산행객의 안전을 위하여 많이 배려한 것이 보인다. 따라서 등산로중 위험한 곳은 거의 없는 편이다. 만약을 위해 낫을 준비해 올라갔으나, 낫을 사용할 정도의 걸리적거리는 가지와 잡목은 없을 정도로 등산로도 잘 정비되어 있다, 그러나 보다 환경친화적인 시설이 좋을 듯 싶다. 그리고 이번 산행은 담양호의 넉넉하고 시원스런 모습을 조망하지 못하였고, 지리산을 위시하여 무등산, 내장산, 입암산 등 호남의 명산들을 두루 조망하지 못한 것이 우리 회원님들은 몹시 안타까울 것이리라. 이 안타까움이 언제까지 그 분들의 뇌리에 자리할런지 모르지만, 나는 먼젓번 산행할 때의 다 보았기에 큰 아쉬움은 크지 않으나, 그 때의 흥분을 아직도 느낄 수 있어 다행이다. 그러나 오늘도 또 보고 싶음은 과욕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것은 솔직한 심정이다.

참고로 혹시 추월산 산행을 하시려는 후답자들게 권하고 싶다. 등산시기는 가을, 봄, 여름, 겨울 순으로 좋은 듯하다. 그리고 가급적 상봉에서 무능기재까지 종주를 하거나, 바윗길로 이어지는 깃대봉까지 종주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담양읍에서 꼭 한번 올려다 보아서 대머리의 남자가 누워 있는 형상도 한번 느껴 보시기 바란다. 암벽 사이사이로 절묘하게 등산로가 나있어 산행의 멋과 스릴을 느끼고 싶으면 꼭 한 번 산행하라고 권하고 싶다. 아마 산행 후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감동을 가슴속에 오랫동안 남기게 될 것이다. 추월산은 담양호로 인해 항상 습기가 많다. 때문에 바윗길이 미끄러워 실족하여 추락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특히 겨울철 산행을 할 때는 등산장비를 철저히 갖추어야 할 것이다.

★ 서울에서 산행기점까지

버스 출발지인 서울 종로구 종각옆 2번 출구 제일은행 본점 앞에 약 6시 50분 경에 나가니 안전하게 잘 운전하시는 이용석 기사의 현대 관광버스는 벌써 도착해 있다. 문대장님과 고래 부대장, 정상윤, 김재국, 임영택 리더분들은 벌써 도착하여 준비에 바쁘다. 이어서 멋진넘 부부가 이북의 괴뢰군 모자를 형상화한 모자를 쓰고 나타나 입방아에 오른다. 오랜만에 쩡애님이 나타났는데 의외로 놀랐다. 그간 이리저리, 요리조리, 바쁘다는 핑계로 근 3년여 동안이나 산행에 빠진 분이라서 더욱 그러했다. 어머님이 우환에 계셔서 늘 신경을 써야 하는 약장수님도 새로 장만한 카메라를 지참한 채 아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리고 오랫삼에 동순갑씨가 얼굴을 보여 반갑다. 그러나 큰형님 및 포천사장님과 제기동 사장님, 박수환 리더 등 자주 나오던 분들이 빠져 조금은 섭섭했다. 그리고 약장수님의 아드님도 양재역에서 도중 하차하여 아쉬웠다.

서울산사람들 소속의 많은 회원님들을 태우고 07 : 30 경 종각을 출발한 후 서울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달려 간다. 이어 휴게소에 들러서 아침과 볼일을 본 다음 정읍을 지나 담양읍을 지난다. 이어 산과 담양호를 끼고 달리고, 고개도 지나더니 이윽고 추월산 산행 들머리인 월계리 담양호 관광단지 추월산 주차장이 나타났다.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은 역 11시 30분경. 거의 약 4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장마철이라 차 몇 대가 보일 뿐이고 사람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스산한 상가옆 주차장에 주차한다. 月桂里라. . . 이름만 들어도 아름다운 고장임이 짐작되는 지명이다. 추월산 임시파출소가 보인다. 고래 부대장은 출발 전부터 오늘 점심 메뉴인 홍탁삼합 요리를 챙기느라 분주하다.

(1) 월계리 추월산 주차장 - 보리암

버스가 출발할 때 이미 문대장님으로부터 추월산의 산행 개요에 대해서 들어서 알고 있는 사항을 머리에 담은 채, 문대장의 힘있는 산행 시작이라는 말과 함께 모두들 준비를 갖추어 버스에서 내려 시간관계상 서둘러 출발한다. 먼저 화장실에 먼저 들른다. 이어 광주식당(061-383-5233) 우측 포장도로로 오르면서 산으로 진입을 서두른다. 그런데, 오늘도 역시 산행을 땡땡이 치는 분들이 있다. 영택씨야 발을 다쳐 그렇다 치더라도, 나도 몇 번 째 가는 산이지만 산행에 참여했는데, 안 올라가는 분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해당 분들의 체면을 위하여 거명하지 않으련다. 오늘만은 특별히 말이다.
등산로는 월계리 담양호 주차장과 야영장 그리고 샘터를 지나 추월산 입구 서남쪽으로 트인 넓은 신작로 같은 길로 이어진다. 등산로를 잘 정비해 두어서 혹자들에게 환경훼손이라고 주장할 빌미를 줄 정도였다. 주변은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적송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숲인데, 시원한 느낌을 준다. 겨울철에 눈이라도 쌓이면 그 경치가 더 좋을 것 같다. 그토록 염원하던 사진기를 새로 장만하신 약장수님의 표정은 만족 그 자체였고, 초입부터 야생화 등을 사진기 앵글에 담기에 여념이 없다. 약장수님의 전문가적인 집념을 보이는 자세가 부럽다. 며칠 있으면 멋있고 재미있는 사진들이 우리 서울산사람들의 사이트에 넘쳐날 것으로 기대가 잔뜩 된다. 그만큼 풍부해지는 사이트가 될 것이리라. 이내 3거리가 나오면서 보리암 안내목과 추월산 소개문, 입산객 감시 초소와 등산안내도가 있다. 추월산 소개문에는 전라남도 담양군 용면과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의 경계에 위치하는 산으로서 1972. 1. 29. 전라남도기념물 제 4호로 지정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산이 기념물이라니 다소 의아했다. 추월산처럼 산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된 경우는 전남에서 영암 월출산과 추월산 두곳뿐이라니 대단한 일인 것이다. 이어 거북 등에 얹힌 '壬辰倭亂勤王倡義將 淸溪 언양金公응회 母夫人 창녕성씨 순절비가 의연하게 서 있다.

등산로는 초입부터 가파른 오름길이다. 이처럼 경사가 만만치 않게 가파르다 보니 오랫동안 산행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웠던 쩡애님이나 초보자들은 이내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는지 힘들어하는 눈치이다. 그러나 쩡애님이야 산행 경력이 어지간하니 곧 좋아지리라 믿는다. 이번에 힘들고 나면 농땡이를 치지 않고 열심히 산행하리라 믿는다. 등로 자체가 제법 잘 정비되어 있어 예전보다는 오르기가 무척 편하게 되어 있다. 외길이라 과외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보리암으로 오르는 제 1 등산로는 힘들기는 하였지만, 뒤돌아 보면 시원한 담양호와 탁트인 공간으로 멀리까지 조망되는 맑은 하늘, 그리고 무등산, 내장산, 입암산 등 호남의 명산들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보며 힘든 것을 잊어가며 올랐던 기억이 아직도 새삼스럽다. 그러나 오늘은 비가 오므로 이런 것들의 보상을 아예 기대하지 않고 착실히 오름길과 주변의 나무들과 풒, 새, 바위, 비와 빗방울과의 대화를 나누며 올랐다. 돌탑들이 보이는 3거리에서 좌측으로 오른다. 싱그러운 장송숲 냄새가 좋다. 좌측에는 계곡 물소리가 제법 크다. 이어 돌탑들도 가끔 나타난다. 이어 토사 유출 방지용 통나무가 설치된 것이 보인다.

5분여 정도 올랐을까? 1등산로와 2등산로 갈림길이 나오는 3거리다. 벤취 등 쉼터가 조성되어 있고 등산안내도와 돌탑들이 있다. 어느 길로 오르든지 간에 보리암 정상에 이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좌측의 제 2 등산로는 경사가 완만하고 양지여서 거리가 조금 더 멀더라도 동절기 등산로로 애용된다고 한다. 벌써 쩡애님이 잠시 벤취에 앉아 쉰다. 우리는 우측의 직진코스인 제 1 등산로를 오른다. 여기서부터 보리암 정상까지 급경사지역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돌탑이 보이고 흙 유출 방지용 통나무들이 계속된다. 바위들도 많이 보이고, 길에 돌도 많이 박혀 있어 지루감은 없어서 좋다. 길로는 물이 흐르고 있는데, 장마철이라 그런가 보다. 복남씨가 나물 전을 꺼내 나누어 준다. 얇게 잘 부쳐서 맛이 있다. 음식 솜씨는 대단한 것 같다. 이어 큰 키의 잡목숲으로 된다. 길도 점점 가팔라진다. 돌이 많이 길에 박힌 지역이 나온다. 한 돌탑에는 누군가가 발복을 기원했는 흔적이 있다. 촛대 같은 것이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어서이다. 하기야 이런 상황의 숲에서라면 누구라도 신심이 절로 일어날 것 같기는 하다.

이어 우측에 하산로가 있는데, 출입을 방지하기 위해서 철조망을 쳐 놓아서 경관을 헤치고 영 어울리지 않는다. 다른 친환경적인 것으로 변경해 줄 것을 제언한다. 다시 통나무 계단을 지나니 침목으로 된 계단이 나온다. 잠시 후 쉼터가 나오는데, 그 옆에 큰 소나무가 쓰러져 있다. 안타깝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방치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에 제거해 줄 것을 권한다. 다시 통나무 계단을 오른다. 길로 물이 넘쳐 흘러내려 미끄럽다. 이어 우측으로 휘어지며 너덜지대같은 돌지대가 나온다. 여기서도 좌측의 계곡물 소리는 계속 들린다. 안개가 끼어 얼마나 아쉬운지.... 그리고 안개비가 계속해서 내리는지, 나뭇잎에 괸 물이 떨어지는 것인지 여하간 비 같은 것이 내린다. 이어 우측으로 휘어 오른다. 조릿대숲이 나온다. 돌길이다.

이어 쉼터에 이른다. 넓은 공터가 있는데, "추월산보리암중수공덕비"가 서 있고, 우측에는 15m 정도 되는 벼랑이 있는데, 그 밑에는 길이가 7∼8m 쯤 되는 얕은 동굴이 있다. 치성을 드린 흔적이 있다. 어두컴컴하다. 여려 명이 비박할 정도의 공간은 된다. 바위가 새는지 중간쯤에 물이 스며들어 흘러내리고 있다. 여기 쉼터에서 좌측으로 오른다. 길에는 온통 돌이 박혀 있고, 경사는 가파르다. 물도 길로 흘러 넘치고 있다. 힘들어 하는 분들이 있다. 한참 후에 우측으로 휘어 오른다. 역시 길에는 돌이 많고 흘러 넘치는 물도 많아진다. 이어 좌측 위로 수직의 암벽들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오른쪽 갈림길이 있으나 좌측으로 오르는 것이 편하다. 주변의 숲과 조화됨어 좋다. 풍화에 깨진 바위들이 진행을 더디게 만드는 지역이다. 이어 돌탑이 나오면 우측으로 휘어 나아간다. 능선마루에 이르면 좌측으로 오른다. 복남씨가 아침을 먹지 않아서 몹시 힘들어한다. 밥으로 힘을 얻는다면서 오늘은 입맛이 없어 먹지를 못했단다. 안스럽다. 이어 바위 좌측으로 손잡이와 로프를 설치한 곳으로 바위를 우회하여 오른다. 로프와 은색 칠을 한 철계단을 올라선다. 주위는 온통 바위절벽이다. 여기서부터 담양호가 내려다보이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뒤돌아보면 담양호가 보일텐데, 안개가 끼어 허사다. 우리들에게 누군가가 마음이 고약한 자가 있는 지 산을 절경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다시 철계단을 오른다. 이 담양호는 1976년에 완공된 것으로 영산강 상류를 막아 이룬 호수로서 우리 나라에서 제일 깨끗한 물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 한 30여명 정도 앉아서 쉴 수 있는 널찍한 사면 바위가 있다. 멋진넘씨와 오승렬씨, 멋진넘씨 친구 부부가 있다. 여기서 잠시 아쉬운 것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멋진넘씨의 친구 부부는 여러 차례 산행에서 만나 얘기도 나눈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부부는 언젠가부터 안면을 몰수하고 있다.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이다. 나보다는 나이가 적은 듯한데 그렇다고 내가 먼저 인사하고 아양을 떨 필요는 없다. 나는 그렇게 인사성이 없는 사람은 아주 경멸한다. 그래서 산행 내내 여러 번 마주쳤으나 의식적으로 외면해 버렸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문제점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멋진넘님에게는 이 글을 통해서, 이를 공개한 것에 대해 죄송[미안이 아니고 몇 단계 높은 죄송이란 단어를 씀}하다고 양해를 부탁드린다. 좋은 친구 사이라면 그러한 단점을 그 사람에게 충고하여 바로 잡아 주시는 것이 좋을 듯하다. 같이 있기가 싫어서 그냥 오른다.

바위 사이로 난 길을 이리저리 휘어져 가며 오른다. 물론 가파르다. 철계단을 지나니 큰 바위 좌측으로 침목 계단이 있다. 이를 오르는데, 위쪽에서 인기척들이 많이 나더니 일단의 산행객들이 내려온다. 물어보니 광주에서 온 분들이다. 큰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라 산행 매녀가 아주 좋다. 올라오는 사람이 힘들다고 옆으로 비켜 대기하면서 인사는 물론이고, 힘들어 하는 분을 위하여 박수까지 쳐 준다. 흐뭇한 광경이다. 영원히 안전산행과 건강과 행운과 산운이 함께 하기를 기원드린다.

이어 굉장히 넓은 전망대 바위에 이른다. 조금 과장한다면 약 200여명이 앉을 수 있을 것 같다. 벤취도 있다. 이슬비가 내린다. 뒤돌아 북동 방향으로는 시야가 확 트이며 담양호가 이 산의 숲과 온갖 바위들과 어울려 멋지고 꿈결같은 풍광을 연출할 것 같은데, 안개와 비로 인하여 보이지 않으니 안타깝다. 전번에 왔을 때 겹겹이 개켜진 산들과 그 아래 넓은 담양호가 은빛으로 빛나고 있는 것을 보고 멋있고 아름답다는 단어만 생각나고, 달리 표현하기가 난망했던 기억이 새롭다. 다만 다시 한 번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이어 산길로 접어들어 조금 오른다. 이정표가 있다. 좌측 보리암 100m, 직진 방향 정상 500m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의 정상은 보리암 정상을 의미한다. 여기가 바로 보리암 입구인데, 주차장을 출발한 지 1시간여가 지난 시간이다.

(2) 菩提菴 입구 - 보리암 정상

잠시 보리암 암자에 다녀오기로 하고, 좌측 보리암으로 향했다. 좌측으로 잠시 오른다. 좁은 철계단을 지나 능선을 넘어 철계단을 내려간다. 우측 바위에 흰색의 한자 글씨들이 무수히 쓰여져 있어 분위기가 예사롭지가 않다. 이어 "충장공 김덕령장군 배 정경부인 흥양이씨 순절비"가 크게 서 있고 그 좌측에는 조그만 비석 2개가 서 있다. 바로 여기가 김덕령 임진왜란 의병장이었던 김덕령의 부인이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여기서 아래 쪽으로 까마득한 바위 절벽으로 몸을 던져 아까운 일생을 마감한 곳이다. 어찌 아깝지 않으리요? 주변의 분위기가 숙연하다. 아직도 서슬퍼런 혼이 깃들어 있어 속절없는 우리를 크게 꾸짖는 것 같다. 저 아래 수직의 절벽에서 올라오는 바람 소리는 그 분의 고귀한 숨결인 듯하다. 그 좌측의 바위 절벽에는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이어 좌측으로 완만히 오른다. 보리암 안내문이 나온다. 그런데 한자는 왜 보제암(菩提庵)으로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기서 잠시 그 내용을 옮겨 놓기로 한다.

" 1984. 2. 29. 문화재 자료 제 19호로 지정. 담양군 용면 월계리 산 81-1 소재.
湖南邑誌 潭陽佛宇條에 ' 在府北二十里秋月山上峰 '이라 되어 있고, 동국여지지에서도 추월산의 뛰어난 경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 누가 여기에 절을 창건한 데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전설에 의하면 보조국사가 나무로 매를 만들어 남도 明地에 날려보냈더니 그중 한 마리는 순천 송광사 터에, 또 한 마리는 장성 백양사 터에 그리고 한 마 리는 추월산 보리암터에 앉으므로 이곳에 절을 짓게 되었다고 하는데, 터가 워낙 좁아 암자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법당 안에 1694(숙종 20)년에 쓰여진 '보리암 중수기'가 전해지고 있어, 미미하게나마 보리암의 창건 내용을 미루어 짐작케 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송광사에서 정혜결사를 일으킨 고려때 普照國師가 창건했고, 조선시대 정유재란시 소실된 후, 1607(선조40)년 僧 신찬이 중수하였다. 이로부터 40년이 지난 1650(효종1)년에 다시 여러 스님들이 힘을 모아 재건하였다고 한다. 보조국사가 수선사에게 정혜결사를 하기 전에 지리산의 상무주암에 주석했다는 사실로 보아 이곳 추월산의 경관을 보고 아담한 암자를 짓고 머물렀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보리암은 백양사의 말사로 1984년 주지 성묵스님이 현 법당을 복원하였다. 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8작 지붕이고, 부연을 단 겹처마이다. 중앙 3칸은 전퇴를 두고 마루를 깔았으며 양협칸으로는 중방을 높여 방으로 사용하였다. 기둥은 원주이며, 그 위에는 창방과 장혀 도리로 연결하였다. 공포는 기중 위에만 쇠서가 달린 초익공식이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때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처 흥양이씨의 순절처로 유명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그녀는 왜적에게 쫒기자 이곳 절벽에서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지금도 이 암벽에는 담양부사 조철영이 1840(헌종6)년에 새겨 놓은 '金忠壯公 德齡夫人 興陽李氏萬曆丁酉罵[꾸짖을 매]왜적순절처ㅁ 潭陽秋月山'이라는 명문이 남아 있다. "

다시 잠시 김덕령 장군에 대하여 잠깐 서술해 놓고 싶다.
金德齡 장군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서 1567(선조 원년)∼1596(선조 29)년간 사셨다. 본관은 광산. 자는 景樹로서 광주 출신이다. 아버지는 鵬(붕)燮, 어머니는 直長 繼(계)宗의 딸南平潘(반)氏이다. 20세에 형 德弘과 함께 成渾(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高敬命의 막하에서 전라도 경내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에 이르렀을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1593년 어머니 상중에 담양부사 李景麟(린), 장성현감 李貴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세력이 크게 떨치자, 선조가 직함 형조좌랑과 군호 忠勇將을 수여한다. 1594년 세자의 分朝로 세워진 撫(무)軍司에 지략과 용맹이 알려져 세자로부터 翼虎將軍의 칭호를 받고 이어서 선조로부터 다시 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그뒤 崔聃(담)年을 별장으로 하여 남원에 머물다가 다시 진주로 옮겼다. 이때 조정에서는 작전상의 통솔과 군량조달의 문제로 각처의 의병을 통합, 충용군에 속하도록 하였으며, 이로써 의병장이 되어 郭再祐와 함께 權慄(율)의 막하에서 영남서부지역의 방어임무를 맡았다. 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하여 진해·고성 사이에 주둔하며 적과 대치하였으나 이때 강화회담이 진행중이어서 별다른 전투상황도 없고, 또 군량의 부족으로 그 예하 3천여명 가운데 호남 출신 5백여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 동년 10월 거제도의 왜적을 수륙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하여 이를 크게 무찌르고 이어서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 격퇴하였다. 그뒤 진주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하여 출전의 차비를 갖추었지만,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울화가 생겨 과음을 하고 군법을 엄하게 하자, 막료·군졸간에 불평의 소리가 높았고, 조정에서도 실망한 나머지 그에 대한 논의가 빈번히 제기되었다. 1596년에는 도체찰사 尹根壽의 노복을 장살하여 투옥되었으나 영남유생들의 상소와 鄭琢(탁)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다. 그해 7월 鴻山에서 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雲峯까지 진군하였다가, 난이 이미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로 돌아왔다. 이때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辛景行과 募粟(속)官 韓絢(현)의 무고로 최담년·곽재우·高彦伯·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金應(응)南 등이 그의 무관함을 힘써 변명하였다. 고서화연구가인 최효삼씨(서울 거주)가 최근 안동에서 발굴해 공개한 경북 예천 출신으로서 대사헌과 좌찬성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던 당대의 명재상이었던 名儒 정간공 정탁(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고, 1594년에는 김덕령·곽재우등의 명장을 천거했으며 이순신 장군이 옥에 갇히자 무고함을 극력 주장해 백의종군토록 하는등 뛰어난 학문과 강직한 성품으로 명성이 높았다)이 선조 29년인 1596년 올린 상소문 초본을 보면 충장공의 무고함을 주장하고 있다. " 김덕령의 명성은 우리 나라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역모에 가담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데다 왜적들이 퍼뜨린 것이다. 아직도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이때 한 이름난 장수를 죽인다면 남쪽 지방의 장군과 장수들이 불안에 떨게 돼 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다. 충장공의 죽음이 의병과 관군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게 될 것이 우려된다. "이라고 하고 있어 더더욱 장군의 죽음이 애석하게 생각된다. 가로 51cm 세로 69cm인 이 상소문은 중간중간에 고쳐 쓴 흔적이 보이는 등 충장공 구명을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20일 동안에 6차례나 되는 혹독한 고문으로 인하여 무고한 누명을 쓴 채로 김덕령은 아깝게도 장독으로 옥사하고 말았다. 그를 무고한 신경행과 한현이 저주스럽다. 그 무고자들의 자손들은 지금 잘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추적해 보고 싶지만 당분간 참는다. 김덕령은 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며 神勇이 있었는데, 그의 용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1661년(현종 2)에 伸寃(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에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10년에 奉祀(사)孫인 守信도 녹용되었다. 1788년(정조 12) 의정부 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不#조47特命)이 내려졌다. 장군이 이몽학의 모방군을 토벌하러 갔다가 무고를 받아 옥에 갇혀 죽기 전에 억울함을 토로하여 지었다는 春山曲[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 이 몸에 내 없은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시조 한 수가 전한다. 귀가 막히는 시다. 이를 새긴 김덕령 장군의 시비는 광주 사직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碧津書院에 제향되었는데 이듬해 義烈祠로 사액되었다. 시호는 忠壯이다.


이어 수도가 나온다. 먼저 도착한 복남씨는 수도가에서 물을 받아 나뭇잎을 띄워 맛보라고 한다. 그 마음이 몹시 따사하다. 목이 말라 빨리 마시다가 체할 수도 있으니 속도를 조절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어 보리암 입구에는 승복이 아니라 이상한 간단한 옷을 입고, 양말도 신지 않은 복장이 불량한 땡중이 불사를 위하여 시주를 받고 있었다. 시주를 낼 눈치가 아닌 것을 알았는지 말씨조차 아주 기분 나쁘다. 시커먼스님이 진돗개 등 개가 많다고 하고 또 전에 왔을 때는 진돗개가 많았기에 일부러 개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개를 가두어 두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오면 자꾸 짖고 하여 귀챦아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좀 볼 수 없냐고 하니 대답은 '안 된다'이다. 복장이나 하는 행동거지를 보니 시주하려고 돈을 꺼내다가도 도로 넣고 싶은 심정이 들게 하는 사람이다. 암자에서 왜 개를 키우는지 이해가 안 간다. 이 첩첩산중에 개를 키우니, 조용히 들러보고 갈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닐는지. . . . . .이어 보리암 정문에 이른다. 보제암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어 질문하고 싶었으나 땡중이라 신뢰가 도대체 가지 않아 포기하여 버렸다. 암자 바로 밑에는 동굴이 있다. 사바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가는 길은 험한 바위를 넘어 걸어서 온 형국이 되었다. 물그릇을 건네주니 복남씨는 이리저리 둘러보고는 별 관심도 없는 듯 그냥 먼저 가 버린다.

이어 아슬아슬한 벼랑에 위치한 보리암이 담양호를 내려다보며 울창한 숲속에 살포시 수줍은 듯이 청정무구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 가파른 바위 벼랑지대에 어떻게 절을 건설하였는지가 자못 신비하기만 하다. 마치 추녀 끝에 붙어있는 제비집 마냥 아슬해 보인다. 암자 왼편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사천왕을 대신하여 절을 지키고 서 있다. 그 외에도 수백년 묵은 고목들이 보인다. 암자 앞 돌그릇에는 맑은 물이 연방 흘러나오고 있다. 이 물이 나오는 곳이 상봉 아래 있는 것으로서 맑은 물이 항상 흘러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약수터인가 보다. 사위는 무척 조용하다. 좌측 위 사면에는 절집을 더 지을 것인지 무척 어지러운 모습이 보인다. 이 암자에서 식수 보충이 가능하나 가물 때에는 수도승들의 식수용으로 물보충이 어려움이 있음을 주의하여야 한다. 여하튼 보리암은 암자도 둘러보면서 땀도 식히고, 사진도 몇 컷 남기고, 역사 공부도 할 수 있어서 좋다. 한참 지나면 범벅이 되어 흐르는 땀에 흠뻑 젖고 힘들던 산행이 이렇게 개운한 것임을 말이다. 비록 비가 와서 안개가 끼여 담양호의 시원한 풍경이 보이지 않더라도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된다. 보리암에서의 조망이 그렇게 좋았었는데... 비가 오니 멋진 조망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글렀다. 보리암은 멀리서 보면 제비처럼 보이는데, 풍수지리적으로 제비혈이라고 한다. 보리암에서 바라보는 가을달과 호수, 담양 들녘 역시 말로 형언키 어려운 정취를 전해줄 것 같다. 암자가 자리잡고 있는 절 주위는 천길 벼랑인데, 해발 600m의 이런 절벽에 어렵게 매달려 있는 보리암은 그 위치만으로도 부처님의 원력(願力)이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보리암 건너편 전북 순창을 경계로 한 산록에는 용추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절에는 담양 출신이며 임란시 서산대사의 법도를 계승하여 그의 법력을 떨친 소요대사가 노년에 주신했던 유서깊은 사찰이다.


다시 보리암 입구 능선으로 되돌아나왔다. 보리암을 감상하고 보리암 안내문을 옮겨 적느라고 젖지 않게 비를 막아가며 웅크리고 앉아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내가 제일 후미가 되어 버렸다. 복남씨가 가 버린 시간도 꽤나 흘렀다. 다른 분들은 보리암을 보지도 않고 가버리는 듯하다. 그리고 아마 양인호씨 등 선두 그룹은 이미 추월산 정상을 넘고 있으리라. 나도 일일이 메모하고 느끼지 말고, 산행만 한다면 벌써 내려갔을 수도 있으련만. . . . . 그렇게 산행을 하니 나중에 남는 게 없어서 기록을 남기기로 하다 보니 시간이 지체된다. 그래서 잘 모르는 분들은 아주 형편없는 산행객 쯤으로 치부한다. 이어 좌측으로 오른다. 조금 후에 쇠파이프 난간과 로프가 설치된 가파른 지대를 오른다. 이만큼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험하고 곳곳에 낭떠러지가 있어 유의하여야 한다. 암벽 군데군데에 쇠사슬파이프와 굵은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힘이 든다 생각하면 우회로로 돌아가야 한다. 보리암 정상을 오르는 내내 힘이 드는데, 담양호 전망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보상이 될 텐데, 아쉽다. 이어 좌측으로 시야가 트이며 바위길이 이어진다. 다시 쇠파이프 난간과 로프가 설치된 지대를 오른다. 철계단을 오른다. 다시 좌측으로 시야가 트이나 안개 때문에 조망은 제로이다. 절경을 못봐서 아쉬울 뿐인 것이다.

우측으로 휘어 바위지대를 또 가파르게 오른다. 또 쇠파이프 난간과 로프를 설치한 지역이 나온다. 좋은 길이 나오고. 이내 쇠파이프 난간과 로프를 설치한 지역 2곳을 연이어 지나, 바위지대에서 우측으로 오른다. 산길이 나온다. 이어 가파르게 오른다. 쇠파이프 난간과 로프를 설치한 지역이다. 다시 일반 산길이 된다. 그런데 제일 후미에 오르던 약장수님을 만난다. 힘들어 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얼굴에는 생기가 돌며 산행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안개가 안 끼었으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을텐데, 본인은 얼마나 안타까울까?
다시 쇠파이프 난간과 로프를 설치한 지역으로 오른다. 암반지대이다. 미끄럽다. 추락에 주의해야 한다. 추락시에는 최소한 중상일 것 같다. 이어 미끄럼, 추락 주의 경고판이 나온다. 좌측으로 오른다. 또 암반지대이다. 이어 우측으로 휘어 철계단을 오르고 이내 조금 오른다.
땀과 빗물로 범벅이 될 무렵 보리암 상봉에 이른다.

(3) 보리암 정상 - 추월산 정상

보리암 정상이라고 이정표에 되어 있는데, 해발 691.9m로서 상봉 또는 추월암이라고도 한다. 이정표에는 해발 610m로 되어 있는데, 잘못되었다. 조속히 시정하기를 제언한다. 지형도상에는 삼각점이 표시되어 있으나, 경황중에 확인하지 못하여 못내 아쉽다. 깃대와 깃발은 보이지 않는다. 지난 번 상봉에 올랐을 때 좌측으로 절경의 조망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는데 오늘은 비가 와서 시계가 영 별로이다. 멀리 무등산과 내장산 연릉도 시야에 들어왔었는데, 하얀 안개만 앞을 가릴 뿐이다. 그런데 오늘은 안개도 또하나의 아름다움을 선사해 주는 것 같다. 주의할 것은 추월산 정상은 여기서 30분 정도 더 가야 한다. 정상을 가는 코스가 다소 만만치 않으므로 또는 여기가 정상인 줄로 착각한 초보 등산객들은 여기까지만 등산한 후 하산하기도 한다. 보리암 정상에는 바위로 되어 있는 넓은 공터가 있어 쉬기에 좋다. 주변은 잡목 숲이다. 이정표에는 남쪽 용면소재지(3.5km ; 80분), 제 2 등산로 1.6km(40분)[추월산 주차장], 북쪽 추월산(견양동) 1.2km(30분), 동쪽 담양호 1.3km(40분)"으로 되어 있다. 추월산 등산안내도도 있다. 좌측에 전망이 좋은 바위가 있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 소용이 없다. 이미 먼저 올라온 matroos님, 문대장님, 쩡애님, 복남님, 멋진넘 부부와 그 친구 부부 등이 있다, 배낭에 먹고 마실 것이 많지만 비가 와서 꺼내기가 귀챦다. 그런데 쩡애님이 준 당근 1조각이 입안을 상큼하게 해 준다. 문대장이 얼음이 둥둥 떠 있는 얼린 맥주를 건넨다. 다 마시란다. 그러나 약장수님이 아직 올라오지 않아서 아쉽지만 남겨서 약장수님에게 넘기라고 했다. 약장수님이 맨 나중에 도착한다. 양은 적지만 시원한 맥주를 마신 약장수님의 얼굴에는 동료애를 진하게 느끼는 모습이 스쳐간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쉬움을 달래며, 제3등산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북서 방향이다. 여기에서 추월산 정상까지는 줄곧 오르기만 한 지금까지의 등산로와는 달리 능선을 타고 오르내리기를 25분 정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초원길이 많은 편이라 좋다. 그리고 이 능선 길은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제법 운치있는 오솔길을 이루고 있고, 거기에 가끔 바위들이 나타나 신선함을 더해 주어 좋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아랫쪽 월계리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 심지어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까지 들리니 심심하지도 않다.
잠시 완만하게 내려간다. 2개의 바위 둔덕을 연속으로 넘어 내려간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반 산길이다. 로프가 매여 있는 바위가 나온다. 좌측으로 우회하여 로프를 잡고 통과한다. 미끄럼, 추락 방지 경고문이 나오고, 이를 지나 바위에 오르고, 산길이 잠시 이어진다. 물론 오르막이다. 조릿대도 나타난다. 이어 평탄한 곳을 지나 내려간다. 좌측으로 계곡이 깊고 물소리가 듣기 좋게 들려오지만 온통 안개 바다이라 조망은 안 된다. 아쉬울 뿐이다. 마치 우리는 구름 위를 유유히 활보하는 살아있는 신선이 된 기분을 만끽하며 진행한다. 둔덕을 넘어 내려가다가 오른다. 완만한 안부에 이른다. 이어 오르막이다. 암반 지대도 지난다. 이어 평탄한 곳에 올라선 후 좌측으로 진행한다.

잠시 둔덕에 이르니 바위봉이다. 우측 아래로 시야가 트인 것이 절경이 조망할 수 있는데, 안개로 인하여 아쉬움만 남는다. 암반지대를 완만히 내려간다. 가는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조금 더 내려간다. 이어 평탄한 곳에 헬기장이 있다. 공터가 넓어 쉬기에 좋다. 관리는 잘 되지 않는 듯, 잡초가 수북히 자라고 있다. 이어 평탄하게 진행한다. 조릿대와 잡목이 무성하다. 얕은 둔덕을 지나 완만하게 내려간다. 조릿대가 지천이다. 우측으로 휘어 오르막을 진행한다. 좌측에 묘 1기가 나온다. 이런 곳에 묘를 쓴 후손들은 누구일까? 제대로 산수를 아는 사람들인가 보다. 죽어서도 멋진 절경을 보면서 누워 있으면 얼마나 좋을꼬? 여기서 좌측으로 평탄하게 진행한다. 여기도 조릿대가 무척 무성하다. 다시 묘 1기가 나온다. 잘 관리되어 있고, 잔디도 좋으며, 공터가 있어 쉬기에 좋을 듯한 묘이다. 이정표에는 여기를 "헬기장 부근 해발 670m"라고 하고 있다. 이정표에는 뒤로 보리암 정상 0.8km(20분), 우측 추월산(견양동) 0.4km(20분)"으로 되어 있다. 좌측(남)으로 하산로가 내려가고 있다.

여기서 잠시 완만하게 진행한다. 이어 아주 넓은 공터가 나온다. 의외이다. 이런 곳에 이렇게 평탄한 곳이 있다니 말이다. 여기에는 큰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다. 정대현 대장이 고사리 순을 채취하고 있다. 한 집안의 장남으로써 조상에게 드릴 제물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참으로 알뜰해 보이고 순수해 보여 좋다. 우측으로 휘어 오른다. 둔덕에 이른다. 수염같은 풀로 덮인 공터가 있어 쉬기에 좋다. 주변은 참나무숲이다. 조망은 되지 않아 아쉽다. 잠시 내려가다가 오른다, 둔덕에 다시 이른다. 이름모를 새가 반겨 준다. 울음 소리가 매우 경쾌하고 곱다. 이렇게 장마철에 멀리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셨나며 반기는 듯하다. 이어 가파르게 내려간다. 안부에 이르니 공터가 있는데 텐트 3동 정도는 억지로 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다.

이어 우측으로 휘어 오른다. 가파르다. 잡목숲이다. 로프가 2개나 설치되어 있다. 좌측에는 가파른 절벽이다. 왼쪽 건너편에는 있는 커다란 바위가 추월바위던가!!! 하여튼 녹음에 가려진 채 검은색을 띠고 우람하게도 서 있다.
이어 둔덕에 이른다. 돌과 공터가 있어 쉬기에는 좋다. 좌우측으로 조망이 아주 좋았는데 오늘은 비와 안개로 인하여 보지 못하여 아쉽다. 주변에는 신갈나무, 조릿대, 진달래와 철쭉 등이 보인다. 다시 좌측으로 내려간다. 잠시 로프를 지나 오나만하게 진행한다. 이어 오른다, 완연한 산길이다. 시커먼스님의 부인이 우산을 쓰고 가고 있다. 산행에서 우산을 쓰고 가니 색달라 보인다. 무엇인가를 깊이 사색하는 표정인데, 무얼까? 앞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과거의 추억에 잠겨 있는 것일까? 현재를 만끽하면서 가는 걸까? 아마 소시적에는 산을 날라 다녔는데, 지금은 여의치가 못하다고 생각하기도 할 것 같다.

이어 능선마루에 이른다. 우측(동)으로 제 4등산로가 표시되어 있다. 그리 가면 추월산 주차장과 태웅산장으로 하산하게 된다. 서울산사람들 표지기가 있다. 조망은 정상보다는 바로 전의 봉우리인 여기가 더 좋았던 것 같다. 그러나 안개와 비로 인하여 보지 못하니 아쉽다. 좌측으로 잠시 내려가다가 오른다. 이어 추월산 정상에 도착했다.

(4) 추월산 정상 - 태웅민박 아래 월계리 마을 주차장

추월산은 해발 731m로 가을의 보름달이 추월산에 닿을 것같이 드높은 산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호남의 5대 명산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추월산 암봉 아래에는 단풍나무가 매우 많아 가을이면 이 풍경을 감상하러 온 등산객들로 만원을 이룬다. 좌측(남서)으로 밀재, 도장봉(△429m), 대각산(△528.1m), 감상굴재를 거쳐 내장산 연릉으로 이어지고, 우측(북)으로 수리봉(726m), 깃대봉(710.1m)를 거쳐 강천산, 무등산으로 이어지는 장쾌한 호남정맥이 용틀임하고 있어 호남정맥상에 우뚝 솟아 있다. 광주에서도 가까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담양읍에서도 14Km 정도의 거리에 있는데, 전라남도 담양군과 전라북도 순창군을 가르면서 道界를 이루고 있는 의미가 깊은 산이기도 하다. 서쪽은 전북 순창군 복흥면 대방리, 동쪽은 전남 담양군 용면 월계리이다. 울창한 수림으로 숲이 유난히 깊고 경치가 아름다우며, 약초가 많을 뿐 아니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산의 정상 일대는 깍아 세운 듯한 바위 절벽이 마치 성을 쌓은 듯이 차지하고 있으며, 오직 서쪽에 겨우 사람하나 통행할 정도의 길이 트여 있다. 골마다 약수와 맑은 물줄기가 솟는다. 무엇보다도 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담양호의 넘실대는 물결과 산이 조화를 이루어 다른 산에서는 맛볼 수 없는 신선한과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주변에는 내장산, 방장산, 금성산이 있고, 북으로는 호남정맥의 지맥에 속한 소주령이 있어 꽤나 높은 산이다. 약초가 많으며, 진귀종인 추월난이 자생하고, 물이 맑고 샘이 많은 산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추월산은 계절마다 다른 계절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만만치 않은 특색이 있다. 봄에는 진달래와 개나리가 산자락을 덮으면서 만개하여 하나의 거대한 꽃마차의 행렬을 보는 것 같다. 여름엔 울창한 숲의 짙게 물든 녹음이 원시적 느낌을 가지게 하는데, 이 녹음과 발아래 펼쳐지는 담양호의 푸른 물결이 조화를 이루어 마음을 시원하게 매혹시킨다. 특히 가을엔 숲이 단풍이 물들어 온통 붉은 색을 띄는데, 그래서 이름에 걸맞게 가을산으로 많이 알려져 있고 또 그렇게 유명하다. 산정상에 올라가면 형형색색의 모습으로 단장한 산과 호수가 어우러지며,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담양호와 주변경치가 일대장관일 정도로 조화를 이룬다. 올라 본 사람이면 누구나 빛깔 좋은 단풍이 달빛에 젖어드는 이 산의 가을 풍경은 가히 선경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임을 스스로 느낄 것이다. 가을에 단풍이 좋은 이유는 산 곳곳에 단풍나무가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겨울에는 눈 덮인 나무숲에 가려 있던 바위의 자태가 독특한 풍광을 자아내는데, 나목에 쌓인 눈들이 웅장한 바위와 어울려 경쾌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겨울에는 설경 외에도 암벽에 매달린 고드름이 매우 인상깊다고 한다.
추월산은 평야지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나 일단 들어가 보니 호남정맥상의 산답게 첩첩산중이다. 지형이 이렇게 험하고, 산이 깊어 오지인 관계로 6.25 때는 전남 빨치산 노령병단의 주요 이동로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우리 나라의 여느 산도 해방 직후 좌우대립과 6?25 당시 동족상쟁의 와중에서 상처받고 고통받았지만, 순창 회문산을 중심으로 한 이 추월산 일대의 산은 지리산, 광양 백운산, 장흥 유치의 가지산과 함께 빨치산 활동이 특히 심했던 오점을 지닌 곳이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이 벼슬길에서 물러난 뒤 이 추월산에 들러 부귀영화의 허망함과 물욕만을 탐하는 세속의 우둔함을 한탄하며 한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금성산성과 함께 임진왜란 때 치열한 격전지이었음은 물론이고, 동학농민운동 때에도 동학군이 마지막으로 항거한 곳이기도 하다.
가까이 있는 용치리 견양동에는 석기시대의 유물인 쟁기와 보습 등이 발굴되어 현재 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기도 하다.

추월산 정상에서 지난 번에는 멀리로는 노고단을 시작으로 반야봉, 천왕봉에 이르는 너무나 늠름하고 웅장하게 서 있는 지리산 연릉이 뚜렷하게 조망되었으며, 고만고만한 높이의 능선들과 동쪽 담양호 건너 산성산과 강천산이 손에 잡힐 듯 했고, 서쪽으로는 장성호, 백암산, 내장산이 근접해 있은 것을 조망하였었다. 그 때 그 감격이 아직도 가슴에 살아 있어 오늘 다시 오르니 감개가 무량하다. 호남정맥을 종주할 때가 아스라이 먼 과거의 시간으로 자리잡고 있으니 말이다. 정상에는 이정표가 있다. "호남정맥 추월산 729m. 밀재(서) 2.1km, 천치재 0.8km, 보리암 1.3km"라고 되어 있다. 정상은 이름 및 유명세에 비하여 너무나 보잘 것 없다. 바위만 몇 개 삐죽 있으니 말이다. 단독으로 쉬기에는 좋다. 주변은 신갈나무들이 보인다. 지난 번에 산행 때 정상 주변의 나무에 핀 흰 꽃들에서 나는 향기가 매우 좋아서 오늘도 코가 그 쪽으로 향한다. 여하튼 정상에 이르니 시장기가 조금 감지된다. 사실 아침을 먹지 않고 싸 가지고 왔으나 그리고 맥주도 2캔이나 있었으나, 지금 배낭 속에 들어 있으나 비가 와서 꺼내기가 귀챦아 포기하고 있는 중이니 그러했다. 버스에서 총무가 준 감자 한 알, 복남씨에게 얻어먹은 부침개 몇 조각, 쩡애씨가 건네 준 당근 1조각, 문대장님이 건네 준 맥주 한 입 등이 전부이었으니까. 정상에는 삼각점이 없다. 깃대와 깃발도 없다. 정상은 뾰족한 바위로 되어 있어 단체로 쉬기에는 별로이다. 그래서 좌측(남서)으로 몇 발자국 내려가면 조그만 공터가 있다. 이미 먼저 올라온 측들은 거기에서 옹기종기 모여 정상주까지 나눈 눈치이다. 멋진넘씨가 건네 준 비맞은 수박 1조각으로 대신 만족하였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는 듯하여 우리는 하산을 서둘러 준비했다. 본래는 월계마을 위쪽으로 하산할 계획이었으나 선두를 따라 내려간 김재국 리더가 무전으로 그쪽으로는 물이 많이 불었으며 길이 미끄러우므로 제 4등산로를 이용하여 하산하는 것이 나으리라는 건의함에 따라 문대장의 결단으로 처음 예정과는 달리 제4등산로로 하산하기로 했다. 나도 지난 번에 그 길로 가 본 적이 있어 다른 길로 내려가 보는 것도 괜챦아 보여 이의가 없다. 추월산 정상에서 조금 전의 봉우리로 되내려와 좌측(동)으로 내려간다. 완만한 산길이다. 이어 평탄하게 나아가다가 "제 4등산로" 팻말이 나오면 이를 따라 우측으로 내려간다. 로프가 쳐져 있고, 제법 가파르고 조망은 없었으나 지금까지 줄곧 바윗길만 진행했던 후라 숲길로 내려가는 것도 좋았다. 청아하게 들려오는 계곡의 물소리도 좋았다. 조릿대와 잡목숲이다.

어느 틈에 김재국 리더가 따라 붙는다. 빠르기도 하다. 그래서 지난 번 백적산인가 답사할 때 조우한 독사 얘기를 물어보았더니 재미있게 실감나게 설명해 준다. 길을 찾느라고 마구 헤쳐 나가는데, 좌측으로 풀을 헤치고 몸을 앞으로 내미려고 하는데, 바로 눈앞에 물려고 목을 뒤로 뺀 채 독을 쓰고 있는 조그만 독사가 칡잎 위에 있더란다, 실로 찰나의 순간이었다고 한다. 그대로 나갔다면 얼굴에 물렸을 것이라며 몸서리를 치면서 말한다. 팔이나 다리가 물렸다면 어떻게 손을 써 볼 수 있지만, 얼굴이나 몸뚱이를 물리면 대책이 없는 것이다. 참으로 다행이다. 우리 서울산사람들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우리 산악계를 위해서다 다행이다. 앞으로 큰 일을 할 사람이라는 신뢰가 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두고두고 큰 추억거리가 됨은 물론이고, 이야기 화제로도 떠올릴 것이다. 비가 개이면 이제는 바위나 흙 등만 독사가 나와 있는 게 아니고, 이와같이 나무 위에나 칡덩굴 위에도 또아리를 치고 있으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이어 정대현 대장의 산삼 얘기도 재미있었다. 내가 산삼을 캐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본인은 그런 경험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동생이 캔 산삼 얘기를 들려주었다. 동생이 공군 장교로 있는데, 올해 산삼을 3번이나 캤다고 한다. 백년 근 정도 되는 것도 캤는데, 부모님께 드렸다고 한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마도 부대장에게 진상하여 1계급 특진이나 노려볼 만한 것인데도 부모님께 드렸으니 그 효심이 가상치 아니한가!! 여하튼 꿈에서 길과 장소까지 현몽을 받아 캔 것이라니 놀랍다. 분명 왕기가 서린 집안임이 분명하다. 짜야님이 큰 인물을 낳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러한 좋은 일은 당사자 본인에게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가까운 주변 인물에게 현몽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기야 마음씨가 고운 두 사람이 만났으니 그 시너지 효과는 무척 클 것이라 믿는다.

이어 뿌리가 드러난 소나무들, 로프가 있고, 길에는 돌이 많다. 굴참나무도 보이고, 박달나무도 보인다. 이어 총무가 엉덩방아를 찧는다. 길이 미끄러우니 그렇다. 조금 창피한지 얼른 일어선다. 그러나 신랑인 정대현 대장이 뒤를 바짝 따르고 있으니 얼굴 한켠에 스치는 행복감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행복은 바로 저 두분의 것과 같은 것이리라!!!! 이어 좌측 계곡의 물소리가 더 가까이 크게 들려온다. 이어 흙무덤이 나온다. 보기 흉하다. 드디어 우측 계곡물 가에 내려선다. 장마철인데도 물은 정말 깨끗하여, 그대로 빠져서 목욕이나 해보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 정도로 엄습해 온다. 체면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참으려니 스트레스가 오는 것 같다. 약장수님이 회원들의 사진을 찍어 준다. 한껏 폼을 잡는 사람들.... 이어 좌측으로 내려간다. 장마철이라서 수량은 많은 듯하다. 산님들이 도란도란 얘기를 하면서 천천히 내려가는 모습들이 몹시도 정겹게 보인다. 좌측으로 웬 석축이 보이고, 이어 큰 도랑이 나온다. 좌측에서 물소리를 내던 도랑이 여기서는 제법 크게 발달되어 있었다. 오승렬씨가 있었다. 이어 내리막이다. 물이 길로 흘러넘치고 있다. 다시 작은 도랑을 건너 평탄하게 나아간다. 이어 우측으로 내려간다. 좌측에 또 묘지가 나온다. 이어 좌측으로 진행하는데 여기도 길에 물이 많이 넘치고 있다. 이어 다시 큰 냇가에 이른다. 수량이 많아 빠질 수 밖에 없다. 신을 벗기가 귀챦아서 그대로 재빠른 동작으로 물을 튀기며 건넜다. 다행히 신발 속까지 물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어린이와 여자분들을 정상윤씨와 김재국씨가 업어 건네주는 봉사를 자청한다. 참으로 신사도다운 분이다.

다시 평탄하게 진행한다. 온통 길에 물이 넘친다. 물을 건너는 기분이다. 조그만 개울을 지나니 양호한 길이 이어진다. 왕대나무밭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마을이 가까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어 좌측으로 휘어 내려서니 시야가 트이며 넓은 공터로 내려선다. 그 좌측 아래에는 태웅민박이 있다. 개가 몇 마리 있는데, 제일 작은 놈이 시끄럽게 짖고, 사람에게 덤빌려고까지 하기에 지팡이로 혼을 내려다가 참는다. 여기서 콘크리트 포장도로로 내려간다. 태웅산장 주차장이 나온다. 대형 관광버스 2대와 승용차들이 주차되어 있다. 사람들도 더러 보인다. 이어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내려간다. 이어 월계리마을이 나온다. 추월산 정상에서 하산을 시작한 지 거의 1시간 정도 내려온 셈이다. 빈 집도 보여 안타깝다. 그러나 담장, 감나무, 밤나무, 호박넝쿨, 각종 곡식 등 모두 향수를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한 그리운 것들이다. 이어 다리를 건너니 월계리 경노당이 있고, 그 안에서 해소에 걸린 노인들의 기침소리가 애처로이 울려나온다. 다시 마을을 지나니 은송회관(?)이 나온다. 여기에 우리가 타고 온 버스가 와 있다. 일단 승차를 하고 나니 버스가 태웅산장에까지 가서 회원들을 모두 태워 주차장으로 가서 합류하였다.

★ 성대한 뒤풀이

모든 분들이 무사히 산행을 완료하시고 주차장 한쪽 켠에서 성대하게 홍탁삼합을 안주로 오랜만에 보는 막걸리 통에 담은 동동주로 산행뒤풀이를 치름으로서 오늘 산행이 막을 내린다. 끝으로 문대장님과 산행을 리드하시느라 애쓰신 리더진들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아울러 앞으로 더 좋은 산행을 준비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 . .
담양호 옆 추월산 주차장 한 켠에 벤취가 설치되어 있고, 그 위로 엉성하게 서까래가 있는 공터에서 임시로 비를 막을 수 있도록 판쵸 우의와 비닐 등을 덮어서 비를 막는 임기응변 조치가 솜씨좋게 끝난 후 펼쳐진 홍탁삼합의 요리를 곁들인 뒤풀이는 하나의 작품이었다. 장마비를 흔쾌히 맞으며 바위와 흙이 미끄러워 힘든 것을 감수하며 명산을 산행한 후 느끼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우리는 허겁지겁 먹었고 또 마셨다. 오래 전에 사라진 막걸리용 큰 플라스틱 통에 막걸 리가 담겨져 나왔다. 비까지 내리니 옛 생각에 잠기게 한다. 비가 오는 날씨였지만 엄청난 양의 막걸리가 그대로 넘어간다. 마치 폭포가 흐르는 소리를 낸다. 홍탁삼합 요리는 고래 부대장의 광주 누님이 손수 장만하여, 고래 부대장의 친구들이 공수해 준 것이다. 일품요리 다름 아니었다. 독특한 음식이어서 평야 지방의 풍요함에서 우러나오는 멋과 맛을 느낄 수 있었음은 물론이지만, 나아가 동생을 생각하는 누님의 동기애와 친구를 위하여 비오는 휴일을 아낌없이 할애하여 멀리까지 공수해 준 고래씨의 친구들의 우정이 너무나 정겹고 도타와 보여서 정말 눈물이 찡하였다. 훌륭한 조망을 못한 데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었고, 모두들 즐거운 식사를 즐기었다. 고래 부대장과 누님, 그리고 친구분들에게 감사드린다. 또한번 빚을 지게 된 것이다.
본인도 동순갑씨가 약 2리터나 됨직한 큰 그릇에 막걸리를 가득 넘치게 담아 권하는 손길을 차마 뿌리칠 수 없어 그대로 마셔버렸다. 그리고는 한쪽 켠에 matroos님과 마주보고 앉아서 싸온 도시락으로 민생고를 해결한다. 맛이 너무 좋다. 모두들 이야기꽃을 피우며 권커니 잣커니 하면서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들이 너무나 보기에 좋다. 이어서 양인호씨와 임영택씨가 권하는 술잔도 받아 마시다 보니 이내 알딸딸해지면서 기분이 좋다. 구름 위에 둥둥 뜨는 기분이다. 고래 부대장이 손수 싼 홍탁삼합을 입에 기어코 넣어준단다. 어색하게 얻어먹었다. 모두들 산우애를 깊이 풍기는 현장이다. 약장수님은 재미있는 사진을 찍기 위하여 그 와중에서도 순간을 포착하기에 애쓰시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다.

어느 정도 민생고가 해결되자 나는 고래씨의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며 있었는데, 어느덧 자리를 정돈하기 시작한다. 나는 내가 가지고 온 도시락이락 컵이랑, 수저랑 잠시 몽땅 잊어버린 채 대화에 몰두하다가 그냥 버스에 올랐다. 한참 후에 그 물건들을 챙기지 않은 것을 알고 문대장에게 이야기하였더니 누군가가 챙겼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배낭을 열어보니 정말로 하나도 없어진 것이 없이 챙겨져 있었다. 누군가 귀신같이 챙겨 주셨다. matroos님인지, 쩡애님인지, 아니면 리더진인지 모른다. 아무튼 누구든지 간에 깊이 감사를 드린다.
자리에 앉아서 노트가 비에 젖었길래 잘 마르게 하기 위하여 젖은 부분을 펴 놓은 채 운전석 옆으로 가 통로에 앉아서 여러 산님들과 술을 나누며 대화를 나누었다. 좋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자리에 와보니 노트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황당하다. 거기에는 아직 올리지 못한 영산남기맥과 한북산줄기 산행기 초안이 적혀 있는데, 없어지면 큰 일이다. 또다시 산행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잔뜩 긴장이 되어 의자 밑을 찾고 당황을 하자 문대장이 이유를 묻는다. 사유를 말하자 문대장이 알아보겠다 하더니 의자 위 짐칸에 얹어놓았다고 하였다. 실제로 거기를 찾아보니 그대로 있어 안도의 숨을 쉬었다. 다만 유성 필기구가 없어진 것 외에는 노트도 잘 말라 있어 자료가 소실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어느 휴게소에서 짜야님이 사 주신 산딸기 음료가 무척 맛있다. 다음에는 내가 직접 사야겠다. 아무튼 고맙다.


대중교통

광주나 담양으로 가서 추월산행 버스로 갈아탄다. 광주-담양-추월산(07시 45분부터 1시간여 간격/ 40분 소요). 담양은 광주로 가서 담양행 버스로 갈아탄다. 담양-추월산(40분 간격. 20분 소요). 문의처는 담양 터미널 061-382-6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