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산 송년 산행기


일시 : 2003. 12. 25. 목/ 아침에 안개 끼었으나 맑아짐, 비교적 포근함.

행정구역 : 京畿道 東豆川市 ; 抱川郡 新北面.

출발 예정 시간/장소 : 2003. 12. 25. 09 : 00 의정부역.

산행거리 : 총 9km.

산행시간 : 총 5시간 30분(10 : 00 ~ 15 : 30).

산행구간 :
    [소요산역(27분) - ] 매표소(11분) - 일주문(0.6km) - 自在庵(0.7km) - 下白雲臺(0.4km) – 中白雲臺(0.5km) –上白雲臺(1.2km) - 羅漢臺(0.3km) - 義湘臺(1.1km) - 공주봉(1.5km) - 일주문(11분) - 매표소[ - 만성기사식당]


지형도 :
- 1/2만 5천 東豆川[‘ 95. 12. 인쇄] * 참고 新邑[‘ 96. 4. 인쇄]
- 1/5만 抱川


회비 : 금15,000원. 참가 인원 총 16명.



산행후기 :


자신을 소요시키기 위한 소요, 무엇을 소유하기 위한 소요... 정말 운치가 있는 소요산을 잠시 그 족보부터 더듬어 본다. 한북정맥이 축석령을 지나면서 천보산맥을 일으키고, 천보산맥에서 서북쪽으로 빠지며 불곡산 등을 일으키며 한강봉에서 파주 오두산으로 달린다[혹자는 파주 장명산으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다]. 천보산맥은 서쪽으로는 천보산을 일으키고 의정부 중랑천에서 그 맥을 다하고, 북쪽으로는 칠봉산을 일으키고 송내동 화양천에 이르러 그 맥을 다하며, 또 한줄기는 동북쪽을 향하여 “해룡산 - 왕방산 - 국사봉 - 소요산”을 분기시키고, 동두천시와 연천군의 경계선인 말턱고개에서 화양천에 이르러 그 맥을 다하고 있다.

위와 같은 족보를 가진 逍遙山은 지형도상은 높이 535.6m 정도이나, 등산로에 서 있는 이정표에는 587m로 표기되어 있다. 이 산은 서울 북쪽 42km, 의정부역에서 철길로 약 24.4km 지점에 있다. 서울근교에 위치하여 접근하기가 쉽고, 동두천시 소요산역 북동쪽을 성곽처럼 에워싸고 있는 탐스러운 산으로서 사계절 내내 인기가 있기 때문에 휴일이면 서울 및 경기 일원의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오는 바람에 등산길이 매우 “騷擾”스럽게 된 것이 아이러니하다. 참으로 서울근교의 산행지로 전혀 손색이 없었다. 승용차로도 갈 수 있으며, 거의 중복없이 원점회귀형 산행을 즐길 수 있었다. 원형 성벽을 한바퀴 휘돌아 온 듯하다. 적당한 운동 적당한 주말 산행지로 양호해 보인다. 40 내지 50대의 사람이라면 학창시절에 단골 소풍지로 가 보았던 유명한 유원지였던 산이어서 서울시민이라면 대부분의 사람이 가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을에는 당단풍 나무 등이 연출해 내는 단풍이 유별나게 요란해서 좋으며, 천년을 넘게 자리해 온 사찰과 여러 유적지, 폭포 등이 조화를 이루어 “경기 소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경치가 아름다와서 명산답다. 그만큼 운치가 금강산에 비하여 손색이 없다는 말일 것이나 조금은 과장된 듯도 하다. 어떤 곳에는 경기도립공원이라고도 하는데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찌기 동국명산기에도 “골짜기와 봉우리가 모두 돌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을 정도이다. 과연 산 전체가 거대한 수석 덩어리처럼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래서 아기자기한 암릉도 경험할 수 있어서 아주 그만이었다. 처녀들의 긴 머리를 묶는 리본의 주름처럼 계곡과 능선이 차곡차곡 포개져 붙어있는 모습도 이채롭다. 경원선 철길을 이용해서 다녀올 수 있는 산이어서 교통도 편리하고, 더구나 기차역에서 다른 대중교통편으로 갈아타지 않고 곧바로 산행에 들어갈 수 있어서 좋을 듯하다. 1981년 국민관광지로 지정, 야외공연장, 자동차 극장, 주차장, 식당가, 각종 휴식공간 등이 잘 되어 있으며, 특히 등산로 내내 안내판이 잘 설치되어 있어 초보자나 노약자들도 안전하고 안심하게 산행할 수 있을 것 같다.
新羅의 元曉大師가 1,360여년전 이곳에 소요사라는 암자를 開山한데서 소요산이란 이름이 유래하였다고도 하고, 원효대사가 自在庵을 세운 이후 974(고려 광종 25)년 逍遙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어떤 곳에서는 서화담(서경덕), 양봉래(양사언)와 매월당(김시습)이 이곳을 자주 찾아와 소요를 했다고 해서 소요산이라고 하였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소요산에는 中臺庵 · 小雲庵 · 逍遙庵 · 靈源寺 등의 사찰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逍遙山에 들어서면 비록 북한산이나 도봉산보다도 더 조그마한 산이지만 산세가 수려하고, 폭포가 많으며, 골짜기는 협곡을 이루고, 많은 수림과 자연경관이 어우러져 기암괴석이 절묘하게 봉우리를 이루어 만물상을 연상케 하는 등 조화되어 있어서 마치 화려하고 심오한 심산유곡을 연상케 하였다. 군사요충지에 위치하여 조금은 서글픈 감을 주기도 하지만 위용만큼은 당당하였다. 그리하여 좀 한적하고, 호젓하고 조용하고, 유유자적하며 깨끗한 산행을 즐기면서 자연과 한 몸이 되어 명상을 즐기려는 사람에게 이 소요산은 아주 안성맞춤이라도 생각이 드는 것이다. 멀리 가지 않고 돈이 적게 들면서 연인끼리 데이트하기에도 아주 그만일 것 같다. 소요산은 의상대를 중심으로 양팔을 벌린 듯한 동그란 반원형의 능선에는 노송과 기암으로 이루어진 하백운대, 중백운대, 상백운대를 비롯하여 나한대, 의상대, 공주봉 등 6개의 봉우리가 있고, 품안인 계곡에는 자재암, 금송굴 등 명소와 원효폭포, 淸凉瀑布, 선녀폭포와 선녀탕 등 아담한 물줄기의 선경지대가 널려 있다. 원효폭포의 장관에 부딪치다가, 그 오른쪽에 元曉臺가 솟아 있고 元曉大師가 수도한 곳이라고 전하는 玉露峰을 넘어 북동쪽으로 羅漢臺 · 義湘臺가 나온다. 또 元曉臺에서 약 30m쯤 되는 절벽 밑으로 仙女湯을 볼 수 있다. 자연석굴인 원효굴, 나한굴, 금송굴이 있다. 바위와 돌은 운모가 섞인 검고, 붉은 빛을 띠고 있었으며,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몇 군데 급경사 내리막길은 너덜지대가 이어져서 겨울철에는 다소 미끄러워 주의해야 할 곳도 있다.

의정부역에 도착하니 8시 30분경이다. 문대장이 먼저 와서 스포츠 서울을 정독하고 있다. 이어 다음으로 8시 45분경 뽁남님 , 민들레님과 후배분이 오시고, 또 푸른하늘님 부부, 이영주 사장님 내외분이 오시고, 마지막으로 멋진넘님과 도치님이 도착한다. 정순진 동기와 박후배가 오기로 했는데 시간을 지키지 않아서 부득이 11명이서 일단은 기차로 오르기로 한다. 먼저 가서 혹시나 다른 분들이 늦게라도 오실까 여유 있게 자리를 잡아 놓기 위해서다. 차에 오르니 승객이 많은 편이다. 서 있는 사람들도 다수 눈에 띤다. 겨울철인데도 이 정도인데, 봄가을에는 엄청나게 복잡할 것 같다. 그 시기에는 철도당국에서는 증량이라도 하여 수요에 대응해야 할 것 같다. 수년이 흘러도 열차운행 계획표가 변모를 하지 않고 있는 안이한 자세가 수정되어야 함을 미리 제언해 두고 싶다. 출발 시간이 가까워지자 동순갑님이 의정부역에 내렸다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먼저 왔다고 하지만 서로 어긋나서 만나지 못했다가 기차가 가는 와중에 정순진 동기와 박후배가 다른 칸에 있다가 합류하여 총14명으로 불어났다. 기차는 매우 깨끗하여 기분이 좋았다. 다른 노선의 통일호 열차랑 차이가 나는 것이다. 정시에 열차가 출발한다. 열차 바퀴와 레일이 부딪쳐서 나는 소음도 오늘따라 그렇게 아름답게 들린다. 이렇게 우리는 경원선 열차의 한모퉁이를 차지하고 주고받는 대화 속에 내가 아닌 우리가 된다. 그래서 소요산역이 의정부역에서 몇 번째 역인지, 소요산역 바로 전의 역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러던 중 어느덧 소요산역에 이른다.

성탄절 이브의 요란스런 밤이 지나고 오늘은 서울산사람들의 송년산행차 소요산에 들른 것이다. 아침에는 날씨가 흐려 있고, 오후부터는 날씨가 추워진다는 예보가 있어 다소 걱정이 되었으나, 오후 들어 날씨도 쾌청해지고, 겨울답지 않게 포근하기도 하였으며, 시야가 좋아 조망을 즐길 수 있어 즐거운 송년 산행이었다. 모처럼 세속의 번뇌를 떨쳐 버리고 자연과 하나가 되었고, 사랑하는 서울산사람들과 함께였기 때문이리라. 더구나 정동기와 박후배까지 참가하여 더욱 그러했다. 오후 들면서 다소 싸늘한 기운이 느껴지기는 했었으나 별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답게 눈이라도 내리든가, 눈이라도 쌓여 있었다든가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나는 정순진 동기와 박형석 후배와 같이 산행하게 되어 여간 다행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원효대사, 요석공주, 설총, 서화담, 양봉래, 매월당이 되어 여유롭게 소요산을 소요했으니 무척 좋았다. 그렇지만 일 또는 근무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많은 분들이 참여하지 못하여 몹시 아쉬웠다. 그분들의 연말연시의 파이팅을 기원드리면서 내년 신년 산행 때나 얼굴을 보아야 하겠다. 공주봉에서 하산할 때는 이미 산 사이로 빠져드는 해를 아쉬워하며, 서울산사람들과의 만나고 있는 이 아름다운 순간이 정지해 주기를 희망해 보기도 하였다. 돌이켜 보면 올 한해도 우리 서울산사람들으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았으나, 받은 만큼 돌려주지 못해 아쉽다. 인생을 많이 살았다고는 하나 그렇게 돌려주는 법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보이다. 빨리 배워야 주고받고 그렇게 어우러져 한 세상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소요산은 소요산만을 일주할 수도 있으나, 상백운대와 중백운대의 중간 530m봉 3거리에서 감투봉을 경유하여 신북온천으로 내려가는 산행코스도 좋아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없어 다음으로 미룬다. 소요산은 등산로 중 별로 위험한 곳은 없었고, 등산로도 우회길, 직등길, 험난로 등 다양하여 체력에 따라 여러 가지로 조합할 수 있어 좋았으며, 여느 산이 갖출 것은 다 구비하고 있었다. 이 소요산의 종주코스에는 중간 중간에 원점으로 회귀하는 부채의 빗살에 해당하는 하산 코스가 정상이나 안부에서 모두 5내지 6개가 되는 듯하다. 진달래가 필 무렵에서 단풍이 드는 가을까지가 등산시기에 특히 좋을 듯하다. 봄에는 철쭉, 진달래가, 여름에는 짙은 녹음과 폭포, 계곡미가 좋을 듯하고, 가을에는 계곡의 붉은 단풍이 좋아 그 장관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광을 올 것이기 때문이다. 가을의 단풍은 소요산 입구의 약 2km 구간에 좌우로 줄지어 늘어선 단풍나무의 단풍이 가장 정취가 있고, 다음으로 일주문 부근, 자재암 약수터 사이,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단풍, 공주봉에서 하산하는 코스, 의상대 직코스 등의 단풍은 전국 어디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의 송년산행은 겨울철이라서 호젓한 분위기가 마냥 좋았다. 여하튼간에 소요산의 계곡, 조망미, 가파른 암릉, 수백년된 노송, 아기자기한 산세 등을 다 감상하려면 각 계절에 한 번씩 총 4번은 가보아야 진면목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수 이북의 최고의 명산이랄 수 있는 이 소요산은 높지도 웅장하지도 않아 규모는 작았지만, 산세가 특이하였다. 마치 말굽모양(반원형) 혹은 은행잎 모양이나 부채꼴 모양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말이 달려나올 것만 같았다. 산행의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산은 각각의 의미와 비밀이 어떤 경우에도 대소, 고저의 일방적인 잣대에 의하여 보아서는 안되는 것인데, 소요산이 바로 거기에 해당되었다. 그리고 소요산 곳곳에는 요석공주 별궁터와 원효대, 공주봉 등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김춘추의 둘째 딸)의 이야기가 어려 있어 가슴이 아련해지며, 내 마음에 의미를 더하여지기도 하였다. 상백운대에서 정상인 의상대까지는 좌우로 예술의 극치인 듯이 절묘하게 이어놓은 만물상을 연상케 하는 뾰족뾰족한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있고, 심연의 계곡에는 수목이 가득하여 기를 발산하는 듯하여 경기의 소금강의 정취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더구나 밑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시원하여 땀을 식히기에 아주 그만이었다.

(1) [소요산역(27분) - ] 매표소(11분) - 일주문(0.6km) - 自在庵

소요산역을 나와 역 광장에 선다. 해발 약 50m. 그러나 당연히 오시리라 기대했던 김종복 사장님 내외분이 보이지 않는다. 등산준비와 용변을 위하여 잠시 둘러서고, 새로 온 분들의 소개가 있었다. 정순진 동기와 박형석 후배도, 그리고 민들레님(사실 민들레님으로 불리운다는 사실을 약장수님의 글을 보고 알았음을 고백함)의 후배가 새로 환영을 받으며 단체로 인사를 나눈다. 여기서 문대장에게 제1차 항명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본래의 코스를 180도로 변경하기로 한 것을 말한다. 우리 서울산사람들에서도 민주화의 물결이 거세어진 탓이다. 그 사이 문대장은 김종복 사장님에게 전화로 연락하나 연결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잠시 오늘의 등산코스에 대해 의논이 오갔는데, 이어 역광장 우측으로 가다가 횡단보도를 건넌다. 이어 우측으로 진행한다. 수퍼를 지나고 소요산 입구를 지나 소요산 사거리에서 좌측으로 오른다. 그 유명세에 비하여 입구는 조촐해 보였다. 더구나 우측에는 여름철에 성황을 이루던 장소들이 마구 방치되어 있어 조금은 을씨년스런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소요산 쪽을 올려다보니 여름의 그 푸르던 나뭇잎도, 가을의 고운 색동옷 단풍도 모두 벗어버린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이 긴 겨울잠을 청하고 있었지만, 주변의 잔설과 바위들과 조화를 이루어 보기에 좋았다.

이어 삼거리에 이른다. 좌측 도로는 소요산 입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삼거리에는 OOO 전적비가 있다. 이어 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여기서 원효폭포까지는 도로 양편의 붉나무, 당단풍나무, 복자기나무, 신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단풍터널이 가을에는 상당히 좋을 듯하고 우측 개울의 맑은 물이 마음을 미쁘게 한다. 여름처럼 푸르름과 청량감, 나무들의 냄새와 향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수목들의 행렬과 개울물이 아스팔트 포장길을 지겹지 않게 해 주었다. 우측 편으로 커다란 주차장이 있으나 차량은 많은 편이 아니다. 어찌 보니 황량한 기분마저 든다. 이 주변에서 김밥이나 튀김 등 먹을거리와 면장갑을 준비할 수 있다. 이어 좌측으로 소요산관리사무소가 나온다. 해발 약 70m. 이어 3거리가 나온다. 좌측 길은 요석공원으로 거치는 길이다. 우리는 우측 길로 오른다. 입구에 ‘소요산 국민관광지’란 팻말이 붙어 있다. 이어 식당 밀집지역을 지나 다리를 건너니 삼거리다. 조금 전 요석공원 쪽으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지점이다. 다시 도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좌측에 조그만 공터에 석비가 있는데, ‘사적, 요석공주 별궁지’라고 되어 있어 참으로 애틋한 마음이 든다. 기이한 인연으로 설총을 잉태한 요석공주가 아들을 데리고 와서 여기에 머물며 원효의 환속을 기대했다는 곳..... 그들의 애틋한 사랑의 전설에 마음이 아파 온다. 요석공주 별궁지는 요석공주가 설총을 키웠다는 곳이다. 우측으로는 소요교가 있다.

이어 맑은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조금 더 오른다. 좌우측으로 바위들이 무척 많이 보이며 그 주변 사면에는 숲이 울창하다. 그것들이 빚어내는 조화는 아름다운 신록이나 녹음 또는 단풍이 아니어도, 좋은 풍광을 뿜어내고 있다. 더구나 조금씩 보이는 잔설은 이채로움을 더하여 준다. 차가 없기에 가난한 자의 여유와, 좋은 서울산사람들이 있기에 부자인 듯한 풍류를 맛보며 갈 수 있어서 좋았다. 이내 매표소에 이른다. 해발 약 85m. 현판에 “逍遙山”이라고 되어 있다.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일단의 등산객들이 몰려 서 있다. 입장료는 어른 금2,000원[문화재관람료 금1,200원 + 관광지 입장료 800원], 학생/군경 금1,200원, 어린이 금650원이다. 단체로 표를 사서 기념으로 멋진넘씨가 한 장씩 나누어준다. 자재암의 풍경과 안내문이 실려 있고 동두천시장의 관인과 자재암 주지의 관인이 함께 찍혀 있다. 국립공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립공원도 아닌데 너무 비싸다. 더구나 문화재 관람료가 60%나 된다니 배꼽이 배보다 더 큰 모양새일 뿐만 아니라 너무 어처구니없는 반강제적인 징수이다. 그래서 이영주 사장님 및 멋진넘씨도 문화재 관람은 전혀 하지도 않은 채 단순히 등산만 하는 사람에게 문화재관람료까지 부과하는 것은 행정편의적인 발상이고,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맹비난을 하신다. 참으로 그러하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한번쯤은 다 거부감을 느껴 보았을 것이다. 차라리 문화재 보호성금 또는 자연환경보호기금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그러면 납득하기 쉽고 이의를 제기하는 자도 없을 것 같다. 이곳 자재암은 매년 수많은 등산객을 상대로 적어도 수억원은 불로소득을 챙기고 있는 것 같다. 특수한 종교의 불로소득을 해당 지방자치단체가 앞장서서 징수하고 있다는 인상을 들게 한다. 정말 모순이 이만저만이 아니어 한심하기까지 하다. 불교계의 횡포이자 텃세가 대단하다는 것이기에 천박해 보이고, 씁쓸한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획일주의적 행정 처리는 분명히 재고되어야 함을 엄중히 제언하여 둔다. 해당 지방자치단체인 동두천시는 좀더 미래지향적인 시각을 가지고 세심한 주의로써 관심을 두고 해결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조리한 문화재관람료 징수에 묵묵히 내고 산행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문제점이 없는 것일까?

한참 더 아스팔트포장도로를 걸어 들어가면 일주문에 이른다. 해발 약 135m. 단청은 퇴색한 편인데, 이중 현판이 이색적인데, 바깥쪽 현판에는 “逍遙山 自在庵”이라고 쓰여 있고, 안쪽 현판에는 “경기 소금강”이라 쓰여 있다. 일주문은 사찰에 갈 때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인데, 여기서도 멀리서 온 우리 서울산사람들을 마중나와 반기는 듯이 우뚝 서서 있다. 일주문을 통과하니 쪽동백나무가 우리를 반겨주는 가운데, 바로 바로 좌측으로 급수대가 있다. 만약 의상대로 바로 오르려면 여기서 식수를 준비하는 게 좋을 듯하다. 좌측으로 바위 절벽이 보인다. 쉼터로 활용될 법한 팔각정도 2개나 지난다. 팔각정에서 커피나 한 잔 마셨으면 정취가 괜챦을 듯 싶다.

이어 원효대사의 이름을 딴 원효폭포 입구에 이른다. 잠시 원효폭포를 보고 가지 않을 수 없다. 몇 발 오르니 큰 공터가 나온다. 쉬거나 식사하기에 좋은 곳이다. 원효암이 마주 서 있는데, 좌측에 있는 원효폭포는 지금은 수량이 적어 별로였으나, 여름이 되어 수량이 많으면 바위 가운데로 쏟아지는 맑은 물이 장관을 이룰 듯하고 시원한 물보라를 감상하면서 땀을 식힐 수 있을 듯하다. 비록 작고 아담하지만 범상치 않은 기운이 서려 있다. 그 주변에는 얼음이 두껍게 얼어 있어 계절을 말해 주고 있다. 주변에 방음봉, 이필봉, 약수봉의 고임을 받아 더욱 어울리는데다가 한번 고였다가 다시 흘러내리는 것이 특이하다. 산행 초입에 위치하여 산을 찾는 사람에게 반기기라도 하는 듯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는 듯한 모습이다. 폭포 위로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노송들이 우리를 굽어보고 있다. 폭포 우측에는 커다란 바위로 된 원효대가 있는데, 그 아래에는 큰 천연동굴이 얕게 나 있다. 여러 상념에 잠기며 폭포를 잠시 감상한다. 폭포 아래 작으나 맑은 소에는 민물고기 몇 마리가 한가롭게 그리고 다정하게 노닐 봄을 기대하면서....

원효대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혼란한 시기에 생존하였던 고승으로 의상과 더불어 당나라에 유학하려고 2차례나 시도한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밖에 따로 도가 없음을 깨닫고 혼자 되돌아와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저술, 선교활동을 왕성하게 펼친다. 그의 사변력, 통찰력과 문장력은 당시 항간에 명성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원효는 광대들이나 치는 무애박을 치고, 무애가를 부르며, 무애춤을 추며, 광대, 백정, 기생, 시정잡배, 몽매하고 늙은 사람들 사이를 방방곡곡 떠돌며 춤추며 노래하고 술마시며 거문고를 켜며 무수한 대중에게 불법을 전한다. 그의 덕으로 코흘리개 아이들까지도 부처를 알게 된다. 소요산에 오니 원효의 생각이 과연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나타내는 자취가 도처에 남아 있어 감개무량하였다.
높은 산 불끈 솟은 바위는 지혜로운 이가 들 곳이요(원효대)
푸른 소나무 깊은 골은 수행자가 깃들 곳이니라(자재암)
주리면 나무 열매를 먹어서 주린 창자를 달랠 것이요(소요산)
목이 타면 흐르는 물을 마셔 그 갈증을 식힐 것이니라(원효폭포)
메아리가 울리는 바위굴을 염불하는 법당으로 삼고(나한전- 굴)
슬피 우는 기러기를 마음의 벗으로 삼을 것이니라.

이어 원효폭포로 직진하여 오르는 길은 보이지 아니하여 원효폭포 입구로 되돌아와 1980년에 건설한 俗離橋에 이른다. 이 속리교는 원효폭포에서 흘러내리는 물 위로 걸쳐 있는 작은 돌다리이다. 세속과의 이별을 의미하는 다리이므로 진정하게 소요산을 감상하려면 여기에 속세의 모든 보따리와 상념 등을 맏겨두고 가야 한다. 다시 내려와서 찾으면 되니까...... 속리교를 건너니 바로 잘 그려진 등산로안내판이 있다. 의상대 쪽으로 바로 오르거나 공주봉으로 오를 경우에는 여기에서 식수를 준비해야 한다. 그쪽으로는 물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주봉까지의 표고차는 약 390m 정도 된다. 속리교를 먼저 건넌 정순진 동기와 박형석 후배가 열심히 보고 기다린다. 등산로는 총 5개 코스로 되어 있다. 이어 좌측으로 오른다. 이제야 산행다운 산행이 시작되는 셈이다. “군사시설보호구역” 말뚝이 서 있다. 조금 후에 우측 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 있고, 오래 된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구 절터로 가는 것인 모양이다. 계곡 바위 사이로 작은 개울물이 흐르고 있다. 주변에는 이끼가 보인다. 산은 벌써 속살을 내보이고 있는 셈이다.

이어 3거리에 이른다. 여기에는 동두천시 사자회에서 만들어 세운 아주 커다란 소요산안내도가 서 있다. 향토애가 잔뜩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측(남)은 지계곡 길인데, 구절터나 공주봉을 경유해 정상인 의상대로 이어지는 것인데, 이 길은 하산길로 많이 이용한다. 물론 우측 길로 산행할 경우에는 성수기 때에 뒤에서 밀려오는 인파가 적을 수가 있어 편하게 산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코스인 좌측 주계곡 방면으로 오른다. 자재암 방향이다. 이 방향으로 오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지만 어느 길로 가더라도 여기로 돌아오게 된다.

급경사 계단길을 오른다. 이어 암봉으로 된 둔덕인 원효대에 이른다. 원효폭포 상단부에 해당한다. 좌측 아래로 원효폭포와 속리교, 일주문이 내려다보인다. 옛날 신라의 요석공주가 요석궁에 머물며 아들 설총을 데리고 아침저녁으로 이 원효대 밑에 와서 원효의 수도처를 향해 매일 3번 절을 하게 함으로써 각기 수도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라 애틋한 사연에 한줄기 뜨거운 기운이 가슴 속을 훑고 지나간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회원분들은 그냥 무심히 지나간다. 나는 잠시 전망대 위에 서서 타임머신을 타고 그 옛날로 되돌아간 것이다. 우측에는 흙으로 이루어진 제법 넓은 공터에 벤취가 설치되어 있고, 좌측에는 철난간이 잘 설치되어 폭포를 감상할 수 있게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안전사고 주의 안내문이 서 있다. 여기서 내려가기 전에 주위를 둘러본다. 맞은편 백운암 뒤로 높은 단애가 다가서 있고, 그 위엔 소나무숲이 무성하다. 우측으로 열린 계곡 안쪽으로는 중백운대, 상백운대, 나한봉 능선이 선명한 스카이라인 긋고 있다. 산입구에서 이만한 절경을 한꺼번에 바라보는 것도 힘들 것이다.

여기서 내려간다. 이어 계곡이 시작된다. 우측으로 진행하는데 이내 다리를 건넌다. 이어 완만히 오른다. 좌측에 큰 비석이 있다. 무슨 내용인지 확인할 시간이 없어 지나친다.

백운암이 나온다. 1925년 백월스님이 세웠다고 하던가!! 외부인의 출입을 막느라고 백운암의 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다. 왜 그럴까? 여하튼간에 백운암의 돌담은 아름다웠다. 백운암 앞에든 다소의 공터가 길게 나 있다. 백운암을 지나니 계단이 나온다. 이를 오른다. 느티나무 노거수가 나온다. 군사시설보호구역 말뚝이 나온다. 이어 참으로 좋은 글귀가 적힌 안내문이 있다. 너무 좋아서 인용해 둔다. “ 아무리 비바람이 때린다 할지라도 반석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어진 사람은 뜻이 굳세어 비방과 칭찬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문대장님이 최후미에서 어딘가 열심히 교신하고 있다. 슬며시 물어보니 김종복 사장님과 송민정씨와 통화한 것이라고 한다. 김종복 사장님은 최근에 새로 건자재 가게를 오픈하여 바쁜 관계로 산행에 참가하지 못하고, 대신 마나님이 오실 것이라 한다. 마나님이 아끼는 임영택 리더가 오늘은 참석하지 않아 다소 서운하시리라 믿는다. 이어 송민정님은 직접 승용차를 몰고 이곳으로 오겠다고 하여 우리 산행 루트와 반대 방향으로 오르라고 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한 열성들이시다. 두 분께 그 열정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린다.

이어 열려 있는 녹색 철문을 지난다. 난간이 잘 설치되어 있는 계단이 이어진다. 이어 멋진 나무로 지어진 휴게소에 이른다. 잠시 평탄하다가 좌측으로 오른다. 우측 아래는 가파른 절벽을 이루고 있어 아찔하다. 실족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약 50m 정도 오른다. 길은 아주 호젓하여 연인과 함께라면 금상첨화일 것 같다.
이어 자재암에 이른다.

(2) 自在庵(0.7km) - 下白雲臺

해발 약 175m. 벼랑 위에 위치한 협곡에 지형을 따라 기묘하게도 좁은 곳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터를 잡아 숨어 있어서 참으로 조용하고 아름다운 산사인 자재암이기에 원효같이 고승이 수도처로 삼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입구에 우물이 있어 여기서 식수를 충분히 보충할 수 있다. 노거수의 은행나무를 비롯한 거목들이 다수 보인다. 오랜 시간이 머무르고 있는 현장이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러브 스토리가 애잔하게 서려 있는 자재암과 나한전의 불경 소리가 나의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힐 것 같다. 자재암 뒤로는 단애와 노송숲이 어우러져 산록을 가득 메우고 있어 매우 고즈녁하다. 하백운대의 서릉에 해당하는 능선까지가 자재암의 뒷능선에 해당되는데 자재암 뒤의 삼성각에서 능선까지는 급경사여서 반 단애를 형성하여 마치 수목과 단애, 절벽과 송림이 잘 조화된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놓은 화폭 같이 보인다. 삼성각 뒤로 낮은 암릉이 툭 튀어나와 있는데, 이 작은 능선이 무척 보기 좋다. 그래서 만사를 제쳐두고 그 위 다복솔 아래로 올라가 보고 싶지만, 그곳은 바로 절 뒤라서 올라가기가 여의치 않아 보여 포기하고 말았다.
이 자재암[865-4045]은 신라 선덕여왕 14(645)년[654년(무열왕 1년) 또는 660년(무열왕 7년)이라고 하는 곳도 있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이니 유서가 깊은 절이다. 고려 중엽 이규보는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재암이 원효가 정진하던 곳임을 시로써 밝혀 전해주고 있으며, 조선 현종 때 미수 허목(학자, 우의정)은 저서 “소요산기”에서 원효대사가 이 절을 최초로 지었다고 적고 있다고 한다. 고려 광종 25(974)년 태조의 명으로 覺圭대사가 중창하여 소요사로 바꾸었으며, 의종 7(1153)년 화재를 당해 이듬해 覺玲선사가 대웅전과 요사 일부만을 복구하여 명맥만 이어왔다. 그 뒤 조선 고종 9(1872)년 元空선사와 濟庵화상이 퇴락된 사찰을 44칸에 달하는 건물로 복원하고 靈源寺라고 개칭하기도 했다. 이때 영산전, 滿月寶殿, 독성각, 산신각, 別院 등의 건물이 있었다. 순종 1(1907)년 정미의병 때에는 이곳이 의병활동의 근거지라는 이유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만월보전을 제외하고 모두 불태워졌다. 그 후 1909년에 제암 화상과 그 제자 性坡 스님이 복원, 원래 이름인 자재암으로 고쳤다. 1909년 중창 때 그린 불화도 많이 남아 있었는데 6·25전쟁 중에 대부분 소실되었고, 1914년 무렵에 그린 칠성탱화만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삼성각에 봉안되어 있다. 6.25 때 다시 폐허가 되었으나 1961년 眞精이 대웅전을, 1968년 性覺이 요사채를, 1977년에는 삼성각을, 1982년에는 일주문을 각각 단계적으로 복원하였다. 이어 1984년에는 부설 유치원이 개원하였고, 1983 - 1985년에 오래된 건물이 헐리고 새로운 중창이 이루어지면서 오늘날의 면모를 갖추었다. 즉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 삼성각, 나한전, 일주문, 백운암, 요사채가 있는데 전부 1961년 이후의 중창 때 세운 것이다. 자재암에는 세조 10(1464)년에 刊經都監에서 현장의 般若波羅蜜多心經을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으로서, 1994. 10. 17. 보물 제1211호로 지정된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金剛般若波羅蜜多心經略疎) 언해본이 소장되어 있는데, 목판본이며, 1권 1책으로 구성되었다. 보물 제771호로 지정된 것과 동일판본으로, 서울대학교 도서관본과 다른 점은 전(箋)이 붙어 있으며, 校正印이 찍혀 있으며, 보존상태가 양호한 점이다. 그 이외의 모든 유물은 최근의 것들이다. 그 귀중한 보물 金剛般若波羅蜜多心經略疎 언해본은 일반인에게는 잘 보여주지도 않는 것인데도, 그것을 소장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비싼 문화재관람료를 받고 있는 것 같아 더욱 심통이 터진다.
주소는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산 1번지이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안내문에 의하면 이 절에는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한다고 되어 있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세속의 인연을 맺은 뒤, 여러 가지 기행을 일삼다가 마음을 먹고 심산유곡인 이곳을 찾아와 벼랑에 초막을 짓고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을 데리고 와 원효를 만나려 했으나 원효는 만나주지 않았다. 요석공주는 소요산 입구에 궁을 짓고 원효의 환속을 기다렸다. 하지만 원효는 아들 설총을 보는 것보다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는 게 더 중요했던가보다. 참으로 애절한 사연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비오는 날 밤, 수행에 정진하고 있을 때, 약초를 캐다 길을 잃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한 관세음보살이 원효에게 하룻밤 재워 줄 것을 부탁하면서 은근히 유혹을 하였다. 그러나 원효는『마음이 움직이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갖가지 법이 없어지노니, 나는 참된 수행의 힘이 있노라』라며 설법으로 유혹을 물리친 원효는 이내 그 여인이 관세음보살이었음을 깨닫고 더욱 수행에 정진하는 한편 그 이튿날 관세음보살 진신을 친견하고 기쁨에 겨운 나머지, 지조를 지켜 자재무애[모든 것을 자중자애하고 아무런 흠이 없는 경지]의 수행을 쌓았다는 뜻에서 절을 짓고 자재암이라 했다고 전한다. 남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위기를 넘겼으니 어지간히 운이 좋았다고도 볼 수 있을 법하다. 남자들의 속성으로 그러한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아서 패가망신하는 일이 동서고금을 통하여 얼마나 많이 있었던가! 또한 수락산 興國寺의 승려이던 제암과 자재암의 주지인 원공이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우연히 만나 절을 중창했다는 영험담도 전한다. 추담대종사 사리탑 및 탑비가 절 입구에 있고, 경내에는 1980년에 세운 세심교가 있다. 바위를 막아 법당을 꾸민 것이 아주 이채롭게 보인다.
안내문에 따르면 원효가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은 뒤 파계승으로 자기 죄를 뉘우치고 인적이 없는 깊은 산속에 숨어 오로지 수행에만 일념하려고 찾아든 곳이 바로 이 소요산 자재암이었다. 후에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을 데리고 찾아와 그리움에 못이겨 계곡 건너편 입구에 궁을 짓고 그의 환속을 기다렸으나 단호하게 인연을 끊은 뒤 끝내는 그의 가르침을 하나로 자재무어의 도를 깨우친 곳이라고 한다.
심삼유곡의 절경 속에 자리한 자재암의 절터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으며, 원효와 요석공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만들어 낸 애틋한 곡절과 사연이 암자에 숨어 있어 비슷한 얄궂은 운명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리라. 원효스님과 공주의 은밀한 대화는 어떤 것이었을까? 천년이 지난 지금 그 옛날에 이루지 못한 원효스님과 공주의 사랑이 저승에서는 이어지고 있는지 몹시 궁금하다. 여하튼 자재암에는 여자의 향기도 나는 것 같다. ‘여자’라는 화두를 넘어서야만이 진정으로 여자를 사랑할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교훈을 얻는다. 이 자재암에서...
갑자기 천태산 정상에서 보았던 나옹선사의 “‘바람같이 물같이“라는 시가 생각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성 싶다. ”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은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 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 하네.“ 자재암의 분위기에 취하여 혼자 조용히 속으로 읊조려 본다. 몇 번을 보아도 아담하고 소박한 산사의 조촐함이 돋보여 무척 좋다. 무릉도원이 따로 있을까? 물론 성수기 때에는 원효대사의 불력에 굴복하여 인산인해를 이룰 것 같지만....

자재암의 끝부분 우측 바위 밑에는 나한전이 있다. 자연석굴에 설치되어 있는데, 매우 특이하고 신비스러웠다. 아마 금송굴도 비슷한 타입이라고 생각된다. 그 앞에 1985년에 세운 소요산 자재암 나한전불사기가 있다. 그 우측에 청량폭포[옥류폭포?]가 수량은 적지만 명주실을 풀어 놓은 듯 하얀 물줄기가 파란 이끼를 두른 채 하얀 포말을 일으키어 수를 놓는 듯이 시원하게도 흘러내리고 있는 모습이 멋지다. 가만히 눈을 감고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니 여기가 바로 천당이 아닌가 생각된다. 목탁소리라도 들리면 시퍼렇게 법기를 세울 것 같고,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승천하는 용의 길다란 꼬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만큼 꼬리 짓이 힘차다고나 할까? 나한전 동굴에서 흐르는 원효샘(원효정)이 있는데, 아주 맛 좋은 석간수가 솟아 물맛 좋기로 유명하다. 고려 때 서사시인 이규보도 원효샘의 물맛을 보고 「원효가 차를 끓이던 샘물이 젖같이 맛있네」하는 내용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7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시원한 물맛을 등산객에게 제공해 주지 않는가! 여기서 식수를 마련할 수 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도 이 물을 마셨을 것이다. 여기서 자세히 자재암을 관찰하다가 보니 어느덧 제일 후미가 된다. 벌써 문대장도 오르막을 오르고 있다. 그래서 나도 안내문 등을 상세히 읽어보지 못해 조금 미진한 것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자재암 나한전에서 좌측으로 오른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경사가 70도는 넘을 듯한데, 매우 가팔라서 벽을 타고 오르는 느낌이 들 것이다. 여느 높은 산 못지않게 가파른 부분이다. 아마 골짜기가 협곡을 이루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워밍업할 시간도 없고, 몸도 풀리기 전인데도 바로 가파른 등산로를 오르려면 숨이 차고 기가 질리며 난간을 붙잡고 씨름하기도 하여야 하리라. 그러나 그러한 것이 오르는 자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고 노송이 우거져 있어 운치가 그윽하기도 하긴 하다. 여기서 하백운대까지는 그래서 초보자는 힘겨운 곳이다. 그러나 흙냄새, 나무내음, 낙엽내음 등을 맡으면서 무념무상에 빠져보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그러면 바로 자신이 ‘도인’이 되는 것이다. 긴급구조요청 안내문이 있다. “소요산 3-12, 자재암, 연락처는 119 또는 031 -119.”라고 적혀 있다. 쇠난간과 로프가 잘 설치되어 있어 안전하다. 이어 바위길로 진행한다. 우측으로 자재암 지붕이 내려다보인다. 이어 나한전 위에 이른다. 긴급구조요청 안내문이 있다. “소요산 3-6, 연락처는 119 또는 031 -119.”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좌측으로 오른다.

이어 삼거리에 이른다. 이정표가 있다. “ 하백운대 0.6km, 일주문 0.5km, 선녀탕 0.4km”이라고 적혀 있다. 선녀탕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이정표에는 “의상대 1.5km, 금송굴 0.6km"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우측 계곡 안으로 가는 길은 선녀탕, 나한대, 금송굴로 이어지는데, 이 길을 따라가면 의상대로 오를 수 있다. 잠시 내려가서 선녀탕과 금송굴을 보고 오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선녀탕에 가면 수직의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탕이 있는데, 가정집의 욕조 크기라고 하며, 그 위로는 선녀가 옷을 벗어놓은 듯한 편평한 바위가 있다고 하는데, 보지 못하여 얼마나 궁금한지 모르겠다. 혹시 동순갑씨는 다녀왔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여기서 좌측 지능선 길로 오른다. 하백운대를 겨냥한다. 앞쪽에 복남씨가 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조수보호구역안내판이 나오고 통나무계단길이 나온다. 정겨운 모습이다. 우측 위로는 나한대와 의상대가 우뚝 서 있다.

이어 좌측(북동)으로 오른다. 암릉길로서 매우 가파르다. 초심자의 입장에 선다면 등산로라기보다는 암벽을 타고 오른다고 생각할 정도이다. 철난간과 로프가 잘 설치되어 있다. 이어 능선에서 좌측으로 오른다. 동순갑씨가 우측 바위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감상하고 있다. 아마 주계곡의 풍광에 취해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조수보호구역안내판이 나온다. 보호 대상은 고라니, 꿩, 어치 등이라고 한다. 어치란 말은 산까치, 때까치를 말하는 것이다. 긴급구조요청 안내문이 있다. “소요산 3-7, 연락처는 119 또는 031 -119.”라고 적혀 있다. 푸른하늘 부부와 복남씨, 동순갑씨, 이영주 사장님 마나님이 오이를 나누어 드시며 한숨을 돌리고 계시다. 여기서 나는 “등산을 하다가 힘이 든다고 그때마다 쉬면 인내력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조금만 힘이 들어도 쉬려고 하게 되므로 반드시 적당한 페이스를 유지하며 계속 오르시지요”, 또 “ 선두에 서서 산행을 하여야 힘이 덜 들고, 아무리 베테랑 산행 경력자도 뒤를 따르는 입장이 되면 선두에 서는 것보다는 더 힘이 들며, 그래사 항상 뒤쳐져 산행하는 버릇에 길들이다 보면 산행이 항상 어렵고 힘이 든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라고 푸른하늘님 부부에게 충고하고 싶었으나, 차마 말이 입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뱅뱅 돌기만 하였다. 그래서 여기 이글로 대신한다. 푸른하늘님이 껍질을 깨끗이 깍은 오이를 권한다. 그 성의에 답하여 받아서 먹어야 하는데, 통째로 주니까 어찌 처리할 줄 몰라서 "괜챦다"는 말 한마디로 성의를 거절한 우를 범하고 말았다. 하백운대에 이르기까지 가파른 산길이 푸른하늘님 부부의 발목을 잡을 듯하고, 몰아쉬는 숨소리는 천지를 진동시키고 있었으며, 비오듯 쏟아지는 땀방울을 씻어내는 모습은 얼마나 힘들어 보이던지 모른다.

이어 절벽에 가까운 바위지대가 나온다. 초심자는 조금 힘들지 모르나, 암벽을 타고 오르는 재미도 쏠쏠한 편이다. 여기서부터 하백운대까지는 지그재그로 길이 이어진다. 푸른하늘 부부와 복남씨, 민들레님과 그 후배, 이영주 사장님 마나님이 힘들어하시는 것 같다. 특히 푸른하늘 부부님은 아직 초심자의 수준이라서 더욱 그러한 듯한데,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직 등산복이나 등산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일반 방한복을 걸치고 온 것이어서 말이다. 문대장님, 멋진넘님, 도치님에게 부탁하여 언제 한 번 날을 잡아서 종로에 있는 등산장비점으로 푸른하늘 부부님 두 분을 초대하여 등산복 등을 갖추는데 조언과 도움을 드리라고 권하고 싶다. 두 분을 관심있게 산행 내내 관찰하였는데, 몹시 힘들어하여 안스러웠다. 금슬이 좋은 두 분이 오랫동안 해로하려면 등산이 가장 좋고, 등산을 할 때에도 진정으로 마음이 맞으며 즐겁게 산행할 수 있는 분들과 함께 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우리 서울산사람들과 같이 산행하는 것이 딱 안성맞춤인 것이다. 두 분 아셨지요?

어느덧 안개가 걷히면서 해가 비치니 색다른 계곡미를 즐길 수 있었다. 더구나 날씨까지 포근한 편이어서 산행하기에 아주 좋았다. 날씨까지 맑아지니 정상에 이르면 조망을 즐길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돌이 많고, 가파른 곳을 오르다보니 땀이 많이 난다. 기분좋은 땀이다. 그러나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는 못할 구간이다. 그리고 하나 둘씩 두껍게 입었던 옷을 벗어제치는 분들이 보인다. 이영주 사장님 마나님, 민들레님 등... 이어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는 곳을 지난다. 해발 약 335m 정도이다. 비싼 나무로 설치되어 있어 보기에 좋았다. 난간도 아주 양호하게 설치되어 있다. 물론 가파르다. 우측 계곡 아래로 서 있는 울창한 나목들의 樹海가 볼 만하고, 상백운대 쪽에 상고대가 햇빛에 빛을 발하고 있다. 드디어 나무 계단이 끝나고 능선에 이른다. 이영주 사장님이 마나님을 기다리느라 잠깐 서 계신다. 마나님에게 보내는 눈길이 인자하고 다정스럽다. 전망이 다소 좋다. 우측으로 나한대와 의상대가 보인다. 좌측으로는 중백운대와 상백운대가 보인다.

이어 좌측(북동)으로 오른다. 이미 정순진 동기와 박 후배는 하백운대 정상에 이른 모양이다. 오랜만에 산행한 박 후배가 힘들어하는 기색이나, 정 동기는 비교적 산을 많이 다녀서 제 페이스를 유지하며 무난히 오르고 있어 다행이다. 철난간과 로프가 잘 설치되어 있는데, 길에는 돌이 많이 박혀 있다. 이어 나무 계단을 지나니 전망대 바위가 있다. 좌측 멀리로 둘러쳐진 나한대와 의상대가 보인다. 이어 큰 바위가 나온다. 복남씨가 오늘 따라 컨디션이 별로인지 진도가 늦다. 요사이 보기 드문 효녀인지라 그간 어머님 간호에 정열을 쏟다 보니 과로한 흔적이 보인다. 아무려나 힘이 많이 들었나 보다. 아무튼 퇴원을 하시었으니 다행이고, 문안 한 번 못가고 말았으니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 내가 산에 갈 때 호신용 등 여러 용도로 쓰는 나무 지팡이를 어머님의 쾌유를 위해서 줄 수 없느냐고 제안한다. 그러나 나의 영이 깃든 것이라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다른 것으로 드릴 것을 여기서 약속해 둔다. 그런데 제가 자꾸 잊어먹어서 탈이다.

이 큰 바위는 거의 직벽을 이루고 있어서 그대로 직진할 수는 없었다. 좌측으로 우회하는데, 잠시 내려갔다가 오른다. 이어 통나무 계단을 한참 진행한다. 이어 우측(북북동)으로 오른다. 참나무숲이 울창하여 큰 산에 온 느낌이 들게 한다. 오랜만에 흙길이 나온다. 그래서 이상하기도 하다. 이어 평탄한 곳에 이른다. 소나무와 참나무 숲이 울창하다. 우측 끝은 아마도 조금 전의 큰 바위로 이어지는 듯하다. 여기서 좌측으로 평탄하게 진행한다. 이어 조금 오른다.
이어 하백운대에 올라선다.

(3) 下白雲臺(0.4km)– 中白雲臺

능선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모두들 가파른 경사를 힘들게 올라온 보람을 만끽하고 있다. 해발 440m라고 되어 있다. 주변은 신갈나무류 숲이 울창하다. 공터가 넓은데, 황토라서 제법 정감이 간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와서인지 풀 한 포기 없는 흙만의 공터가 꽤 넓게 이루어진 것인데, 여하튼 쉬거나 식사하기에는 좋을 듯하다. 조망이 좋다. 참나무 숲 사이에 가려 좌측(서) 아래로 협곡을 이루고 있는 주계곡과 자재암 지붕이 아찔하게 내려다보인다. 우측으로 중백운대와 상백운대가 보인다. 뒤돌아보니 나한대, 의상대와 공주봉이 보인다. 이정표가 있는데, “자재암 0.7km, 중백운대 0.4km."라고 적혀 있다. 좌측 멀리로 마차산과 감악산이 보인다. 좌측(북서)으로 극소능선이 분기하고 있는데, 그 쪽으로 길이 나 있으나 ”등산로 폐쇄“라는 팻말이 서 있다. 그 능선으로 내려가면 소요산역 부근으로 하산하게 되는데, 굳이 입장료를 내기 싫으면 소요산역에서 이 능선을 타고 올라도 될 것이다. 참고로 이 지역 주민들도 입장료를 안내려고 즐겨찾는 코스라고 한다. 우리도 이 능선으로 오르려고 했으니 우리의 도덕군자이신 멋진넘씨가 정직하게 산행하자고 하는 바람에 정규 코스를 산행한 것이다. 긴급구조요청 안내문이 있다. “소요산 3-8, 연락처는 119 또는 031 -119.”라고 적혀 있다. 멋진넘씨가 나무 한 그루를 잡고서는 어찌해 보겠다고 씨름을 하여 재미있게 한다. 정순진 동기와 박형석 후배가 미리 와 있으며, ‘이제 몸이 풀린다’며 여유를 부리고 있다.
여기서 잠시 상념에 잠긴다. 산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혼자서 산행하는 게 좋다. 그렇지 않고 오늘같이 여러분들과 함께 산행하더라도 흙, 나무, 잡초, 벌레 등등 모두가 하나 되어 살아가는 생명체들의 이야기가 머무르는 곳이 산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분석하려 하지 말고 그저 들어주려고 하여야 한다. 인간만이 아닌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경외감을 느껴야 한다. 나도 그걸 깨닫는 데 참 많은 시간이 걸렸었지 .....

하백운대에서 우측(북동)으로 잠시 내려간다. 주변의 숲이 울창하다. 능선에서 산아래를 굽어보면서 계곡 사면에 서 있는 앙상한 겨울나무에게도 겸재 정선이 환생해서 붓놀림을 해 놓은 진경산수화 한 폭 같은 느낌이 들어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문득 약장수님이 왔으면 얼마나 환상적인 사진을 찍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몹시 아쉬웠다. 수묵담채화처럼 은은한 향기가 나도록 앵글을 맞추실 텐데 말이다. matroos님이나 쩡애님도 마찬가지이다. 사진기는 가지고 왔으나 잘 찍지 못하니 아쉽다. 아니면 능력만 있다면 스케치라도 해 갔으면 좋으련만 .......... 경사는 완만하다. 이제부터는 그리 힘이 드는 코스는 없을 것이다. 부드러운 안부를 지나 오르니 이내 아주 완만한 둔덕이 있다. 잠시 내려가다가 오른다. 논밭 사이로 난 고향길을 걷는 기분이다. 그만큼 여유로운 산세가 이어지고 있다. 하백운대까지 오름길과는 아주 딴판이니 말이다. 약간 경사가 있는 지역인데, 능선을 직진하지 않고, 약간 사면으로 난 길로 진행하여 오른다. 등산로가 많이 훼손되어 있어 가슴이 아려온다. 혼자 온 남자 등산객이 매우 비만한 편인데, 너무 힘이 드는지 마치 임종하는 사람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듯이 헐떡이고 있다. 참 안 됐다. 나도 등산을 하지 않았다면 저리 되지 않았을까 싶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한참 후에 우측으로 휘어져 오른다. 통나무로 된 계단 길을 진행한다. 길 위에 떨어진 쪽동백나무와 신갈나무의 낙엽을 무심히 밟으며 진행한다. 이어 우측으로 휘어 오른다. 이어 철난간과 로프가 설치된 길이 나온다.
이어 잠시 후에 중백운대에 이른다.

(4) 中白雲臺(0.5km)–上白雲臺

해발 510m라고 되어 있다. 동서 방향으로 길쭉하게 평탄한 지형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일부는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고, 남쪽이 수직절벽이어서 아찔하다. 절벽 위에는 노송군락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출하고 있어 천연고색으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정말 암벽을 배경으로 노송이 있어 경관이 좋았다. 좌우측 아래로 울창한 숲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공터가 넓어 쉬기에 좋다. 어디선가 새소리 같은 청설모 소리가 들렸으나 어디에 숨어 있는 지 발견할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즐거운 간식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조망이 좋다. 우측으로 계곡과 의상대와 나한대, 공주봉 등이 너무나 포근하게 보인다. 전방으로 상백운대도 보인다. 긴급구조요청 안내문이 있다. “소요산 3-9, 연락처는 119 또는 031 -119.”라고 적혀 있다. 암봉 부분에 서 있는 이정표에는 “하백운대 0.4km, 상백운대 0.5km”라고 적혀 있다. 중백운대에서 상백운대까지는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노송군락을 감상하다가 중백운대 암봉에서 암반지대를 내려간다. 철난간과 로프가 잘 설치되어 있다. 이어 오른다. 여기서 주능선 삼거리까지는 내내 오르막이다. 큰 키의 참나무숲 군락을 지난다. 돌이 길에 박혀 있다. 군인들이 훈련 때에 파 놓은 천막 친 흔적이 있는 참호 자리가 보인다. 박형석 후배와 군대에서 동계 훈련을 받던 때를 회상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관심이 같은 것이라 이내 대화는 무르익는다.

한참을 오른다. 이어 주능선 3거리에 이른다. 해발 530m봉이다. 조금 평탄한 부분이 있는 곳인데, 이상하게도 긴급구조요청 안내문이 2개나 서 있다. “소요산 3-12, 중백운대쪽. 연락처는 119 또는 031 -119.”라고 적혀 있는 것과 “소요산 7-13, 연락처는 119 또는 031 -119.”라고 적혀 있는 것이 그것이다. 좌측(북) 길은 뚜렷한데, 덕일봉(△535.6m=감투봉), 번대산(445m) 또는 칼바위능선을 경유해 포천군 신북면 신북온천으로 이어진다. 그리로도 시간이 있으면 가 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신북온천에서 온천을 하면 얼마나 개운할 것인가? 신북온천 쪽으로 하산하면 동두천행 버스가 매시 정각에 있다.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덕둔리 627-1 소재의 신북온천[031-535-6700]은 한강 이북에 있는 유일한 온천으로 92년 12월 온천지구로 지정되어 1994년 4월에 개장하였다. 맑은 시냇물과 울창한 수림이 어우러져 있고 주변 경관이 수려한 남청산 자락에 위치한다. 지하 600m에 용출되는 온천수는 칼륨, 아연, 염소, 황산이온, 규산, 탄산, 불소 등이 함유된 알칼리성 국내최고의 중탄산나트륨천으로 입욕시 수질이 매끄럽고 부드러우며 갱년기장애, 노화방지, 신경통, 심장병, 피부질환, 피부미용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바로 이 미끄러움이 피부에 보호막을 형성하는 작용을 하여 생기는 것으로서 피부에 보습작용을 하여 피부를 탄력있고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아토피성피부, 어린이 태열 등 피부병에 탁월한 효과가 있고 신경통, 관절염 등 퇴행성질환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한 남녀 6백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시설로 열탕과 온탕, 흙사우나와 건사우나가 있으며, 탕내에는 온천욕과 함께 전통 재래식 불 한증막과 함께 탕내 쾌적한 휴게실도 잘 갖추어져 있어 노인들과 주부들에게 인기를 끄는 곳이기도 하다. 인근 덕둔리의 열두개울 계곡과 포천쪽으로 이어지는 삼정리약수터 등을 연결해 주말 휴양지로 손색이 없고, 또 왕방산(737m)과 소요산 등산로와 연계해 주말에 등산과 온천을 동시에 즐길 수도 있으며, 최근에는 소요산 중턱에서 산행으로 신북온천과 연결되는 산행로까지 열려 등산복 차림의 이용객들이 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여기 530m봉에서 상백운대를 지나 왕방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갈림길까지는 좌측(동)의 포천군 신북면과 우측(서)의 동두천시의 경계를 진행하게 되는데, 자못 의의가 깊다. 우리는 여기 530m봉에서 우측(남동)으로 진행, 완만히 내려간다. 전방의 상백운대 부근의 나무에는 상고대가 서려 있는 것이 보인다. 바로 안부에 이른다. 우측으로 선녀탕으로 이어지는 하산로가 내려가고 있다. 이정표가 서 있는데, “중백운대 0.3km, 상백운대 0.2km, 선녀탕 0.8km”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직진하여 오른다. 넓은 공터가 있는 둔덕에 이른다. 이어 잠시 내려가다가 오른다. 단풍나무, 느릅나무, 층층나무, 소태나무, 물푸레나무, 신갈나무 등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가파르다. 그런데 바람이 많이 불면서 제법 공기가 차가워진다. 일기예보에 오늘 저녁부터 추워진다고 하더니 그런 모양이다. 주변의 나무에는 상고대가 옅지만 형성되어 있어 보기에 좋았다. 그런데, 앞서 올라가던 복남씨와 그 친구 민들레님이 환성을 지르고 있다. 모두 긴장하여 무어냐고 하니까 너무 예쁜 것이라고 하면서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에 상고대가 제법 많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주워 올리면서 너무 예쁘지 않느냐고 한다. 그것 정도를 가지고 예쁘다고 난리를 치니 참으로 마음이 순수한 것을 드러낸 것이다. 만약 그분들이 덕유산 등 높은 산에 형성되는 상고대 등을 보았으면 아마도 눈물을 흘릴 지도 모를 일이다. 한참 보이지 않던 동순갑씨가 홀연히 나타난다. 이어 오른다. 약간 가파르다. 응달이 되어서 그런지 약간 으스스한 분위기이다. 생강나무와 당단풍나무가 보인다.

이어 상백운대 직전의 넓은 공터에 이른다. 공터가 무척 넓어서 쉬거나 식사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좌측(동)으로 극소능선이 내려가고 있다. 긴급구조요청 안내문이 있다. “소요산 3-13, 연락처는 119 또는 031 -119.”라고 적혀 있다. 우측 위 상백운대에서 일단의 산행객들이 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우리는 여기서 배낭을 벗어 놓고 쉬기로 한다. 주변은 잡목숲이다. 잘 지어진 방커와 교통호가 있다. 벙커에서 혹한기 훈련을 하던 경험을 박 후배에게 들으니 옛날 생각에 감회가 새롭다. 납작한 묘 하나가 있는데, “學生淸道金公錫弘之墓”라는 조그만 비석이 서 있다. 그 후손들은 어찌 여기까지 운구하여 묘를 썼을까? 그러고 보니 명당인 것 같다. 잔디도 좋고, 잘 관리되어 있었다. 옛날에는 높은 곳에 묘를 쓸수록 효성의 잣대로 삼았기에 굳이 이렇게 높은 곳에 묘를 쓴 모양이다. 멋진넘님이 비석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잔을 드리는 시늉을 하면서 조크를 한다. 동순갑씨가 경치를 보려고 묘를 밟고 넘어가니 이를 본 도치님이 기겁을 하며 밟지 말라고 한다.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아직 우리와 같이 살아 있는 사람으로 대접하려는 고운 마음씨가 부지불식간에 나타난 것이다. 후미로 올라 온 문대장님이 막걸리를 내어 놓는다. 이에 응하여 복남씨가 김치전을 통째로 내어 놓는다. 얇게 부친 김치전이 참 맛있다. 덤으로 한 장을 더 주어서 다른 분에게 덜 돌아갈 것 같아 미안하다. 나는 이영주 사장님이 따라 주시는 막걸리 한 잔을 먹으니 속까지 다 시원하다. 높은 산에서의 막걸리와 김치전 안주.... 맛보지 않은 분은 그것을 모르시리라. 모두 맛있게 먹는다. 조금 후에 맨 후미로 푸른하늘님 부부도 도착한다.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한데, 어김없이 그 분들에게도 막걸리와 김치전이 제공된다. 정순진 동기와 박형석 후배도 맛있게 들고 있고, 금방 어울려 주어서 감사하다. 아마도 그 분들은 우리 서울산사람들의 훈기와 정에 흠뻑 젖었을 것이리라. 이제 모두들 산에 취하였다. 그리고 인정에 취하였다. 그래서 모두들 행복한 모습이다. 그러한 행복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더 행복하다. 산에서 만났기에 더 정겨워서일까? 아니면 남을 배려하고 인정을 베풀 수 있는 마음을 지닌 서울산사람들이기 때문일까? 이젠 제법 선배 반열에 들어선 민들레님도 귤을 통째로 내어 놓고 권한다. 여러 가지 대화 중에서 가장 압권인 것은 멋진넘씨가 농담 끝에 도치님을 보고, 13번째 여자라고 농을 한다. 그러나 이를 전혀 탓하지 않는 도치님이다. 어쩜 저리도 도량이 넓을까? 워낙 입담이 좋은 멋진넘씨라서 탓하기를 포기한 것일까? 아니면 혹시 남자가 아닐까! 산을 좋아하다 보니 마음이 넓어져서일까? 꼬리를 이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한다. 여하튼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이라도 자꾸 하면 화가 나는 법인데,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자꾸 상처가 될 만한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자꾸자꾸 쌓이게 되어 나중에는 어려워질 수 있는데.... 이제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으면 하고 기대해 본다. 그리고 여기서 단체사진을 찍는다. 문대장님이 자신의 사진기로 수고를 해 준다. 모두 잘 나오겠지 하고 기대가 크다.
여기서 상백운대 방향으로 진행한다. 평탄한 공터를 지나 내려간다. 이내 3거리에 이른다. 우측에 하산로가 나 있다. 이어 오르막이다. 이어 상백운대에 이른다.

(5) 上白雲臺(1.2km) - 羅漢臺(0.3km)

해발 약 559m. 지형도에는 이곳이 소요산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얼핏보면 여기를 정상으로 잘못 인식할 수는 있어 보인다. 소요산의 정상은 의상대인데, 지형도 자체를 놓고 보면 약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나한대와 의상대가 보인다. 긴급구조요청 안내문이 있다. “소요산 3-10, 연락처는 119 또는 031 -119.”라고 적혀 있다. 이정표가 서 있는데, “중백운대 0.5km, 나한대 1.2km, 선녀탕 1km”라고 적혀 있다.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노송들이 울창하여 보기에 좋다. 삼각점이 보이는데, “5148-3 336-FOB"라고 적혀 있다. 보통의 삼각점하고는 다르게 영어로 표시되어 있는 것인데, 미군지역이라서 군사관측용 삼각점일 것이다. 우측(서)으로 소능선이 내려가고 있다. 바람이 세다. 산책산악회의 일원들이 와서 쉬고 있는데, 나를 보고 신기해 한다. 무엇을 그리 열심히 하냐며 옆으로 와서 자세히 보려는 사람도 있었다. 대충 얘기를 해 주었다.

상백운대에서 의상대까지는 굴곡과 바위가 많은 능선을 진행하여야 한다. 칼날같은 칼능선, 병풍바위? 등 바위가 제법 갈 길을 붙잡지만 소요산의 아기자기함이 흠뻑 배여 있다. 이 부분의 칼바위는 풍화작용에 의하여 양파처럼 허물을 벗어내는 북한산에 있는 바위와 같은 화강암 종류가 아니고, 모두가 둥글지 않고 각이 선 모양이며 그 조각조각도 마사토 같은 모래가 아니고 다양한 크기의 각진 돌덩어리로 칼날 같다. 사암이 변성된 규암 혹은 편마암으로 엽리와 선구조로 인한 칼바위인 것이다. 또한 지리산처럼 멋진 바위는 더구나 아닌 것이다. 이러한 칼바위 능선과 더불어 북쪽으로 멀리 보이는 시원스런 능선들을 위시한 좌우의 조망이 소요산의 유명세를 실감나게 해 준다. 좌측 아래로는 사격장도 보인다. 상백운대에서 내려간다. 이정표가 서 있는데, “상백운대 0.1km, 칼바위 0.2km, 위험”라고 적혀 있다. 긴급구조요청 안내문이 있다. “소요산 4-8, 연락처는 119 또는 031 -119.”라고 적혀 있다. 이어서 바위지대를 진행한다. 바위들이 칼날 같은 형태로 형성되어 있다. 절리가 상당히 발달된 모습이다. 위험스러운 듯 험하고 멋대로 솟구쳐 있는 바위지대를 조심스럽게 오른다. 이어 바위와 족히 기백년은 됨직한 노송들이 잘 조화된 모습은 오랜 세월동안 동고동락한 사이좋은 한가족을 보는 듯하였다. 그토록 오래 세월을 버티면서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며 눈, 비, 바람의 모짐을 견디어 낸 노송의 모습이 의연해 보인다. 혼자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생각이 들 정도로 우람하고 늠름하며 독야청청 자태를 뽐내고 있어 그 모습에 도취된다. 한 장의 사진이라도 찍고 싶어지게 된다. 노송들은 수피가 유난히 거북등같은 모습을 하고 색깔이 짙고 거칠어서 이색적이다. 만약 안개라도 끼거나 눈이라도 내리면 그 경치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울 것 같다. 이런 곳이면 잠깐만이라도 발걸음을 멈추고 감상하고 가는 여유가 바람직할 것인데도 우리 서울산사람들은 이곳을 더 빨리 지나가 버린 듯하다. 기분이 좋으면 발걸음이 빨리지기 때문일까? 계속 이어지는 바위지대인 평탄한 지역을 지난다. 노송 숲인데, 바위들은 칼날 같이 되어 있어 조심하여야 한다. 잘못하여 넘어지기라도 하면 많이 다칠 것 같다. 게다가 여간 성가시지도 않다.

이럭저럭 상백운대에서 300m 정도 진행한 것 같은데 3거리에 이른다. 좌측(남동) 길은 주능선 길로서 國師峰(720m)과 旺方山(△737.2m)으로 이어지고 있다. 혼자 왔으면 그쪽으로 해서 멀리 왕방산까지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이를 참아내는 것이 무척 힘이 든다. 수차 마음을 달래며, 숙제로 남겨 둔다. 여기서 우측(남서)으로 내려간다. 소요산 정상 방향이다. 굴참나무, 노린재나무 등이 보인다. 이어 오른다. 쪽동백나무가 보인다. 이어 칼날같이 날카로운 암릉길이다. 노송과 바위들이 어우러진 모습이 보기 좋다. 이어 둔덕을 지나 내려간다. 여기도 칼날 같은 바위로 되어 있는 능선길이다. 이어 오르다가 내려간다. 역시 칼날 암릉이 이어진다. 이어서 흙길이 되면서 통나무 계단과 철난간이 설치된 곳을 내려간다.

안부에 이른다. 우측으로 선녀탕 쪽에서 올라오는 넓고 좋은 길이 나 있다. 우측으로 동두천시가 내려다보인다. 이정표가 서 있는데, “상백운대 0.7km, 선녀탕 0.9km, 나한대 0.5km, 칼바위 0.2km”라고 적혀 있다. 이어 오른다. 길이 좋다. 이어 평탄한 곳에 이른다. 긴급구조요청 안내문이 있다. “소요산 4-4, 연락처는 119 또는 031 -119.”라고 적혀 있다. 커다란 노거수의 소나무가 이채롭다. 이어 밋밋한 봉우리에 이른다. 다시 내려간다.

이어 안부에 이른다. 주변은 넓은 공터로 되어 있는데, 노린재나무 등이 보인다. 이정표가 서 있는데, “선녀탕 0.9km, 나한대 0.3km, 칼바위 0.7km”라고 적혀 있다. 긴급구조요청 안내문이 있다. “소요산 4-6, 연락처는 119 또는 031 -119.”라고 적혀 있다. 이어 좌측으로 오른다. 경사가 급하다. 제법 힘든 구간이라 겨울에는 꽤나 미끄러울 것 같다. 쇠파이프 난간과 로프가 잘 설치되어 있다. 동순갑씨는 등산로로 가지 않고 그냥 직진해서 가파른 사면길을 오른다. 잡목들이 무성하여 가지들이 몹시 걸리적거리고, 낙엽들이 많아서 제법 미끄러울 텐데, 산꾼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순간이다. 이어 통나무 계단이 나온다. 푸픈하늘님 부부가 최후미로 오른다. 숨이 턱에 차는 듯 몹시 힘겨워한다. 부군께서 더 그러해 보인다. “돼지같으니 산에 오르기가 힘든다”며 부부끼리 다정한 농담도 건네며 오르는 폼이 무척 정답게 보인다. 누구라도 두 분을 보면 언뜻 두고 온 연인이나 배우자를 떠올리게 될 정도이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도 안스러워 “약 1년간만 서울산사람들과 산행을 하고 나면 틀림없이 산행 실력이 붙을 것이다”라고 격려하여 주었다.

이어 우측으로 오른다. 민들레님과 그 후배를 만난다. 민들레님이 약간 힘드시는 것 같다. 나를 보고 “산에 얼마나 다니시면 그렇게 수월하게 오를 수 있느냐?” 고 묻는다. “ 3년 이상 다니시면 일상적으로 밥을 먹는 것과 같이 느낄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약간 놀라운 모습을 지으면서 각오를 다지는 것 같다. 여하튼 계속 산행에 참가하여 조속히 생활체육으로 산행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면 하고 기원한다. 그러나 열정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없었다.
이내 나한대에 이른다.

(6) 羅漢臺(0.3km) - 義湘臺

나한대에는 바위들이 있고, 공터가 넓어 쉬기에 좋다. 해발 571m라고 되어 있다. 이정표가 서 있는데, “상백운대 1.2km, 의상대 0.3km, 금송굴 0.9km”라고 적혀 있다. 우측으로 금송굴 하산로가 있는데 다녀오고 싶었으나 참는다. 주위의 조망이 좋은 편이다. 정면(서)으로 정상인 의상대의 테라스형 암릉이 가까이 보인다. 저멀리로 국사봉과 왕방산이 눈에 들어온다. 오지재도 보인다. 상백운대 쯤에서 국사봉 방향으로 뻗은 능선이 몹시 보기에 좋은데, 그리로 산행하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끓어오른다. 오늘은 숙제로 남겨 놓을 수 밖에....

이어 나한대에서 내려간다. 이어 5분 거리인 바위지대를 건넌다. 암릉이 야트막한게 그림같고, 수석처럼 아름답다. 요철이 극심하여 암릉 아래로 철제보도를 만들어 산행객들이 그 위로 다니게끔 잘 설치되어 있다. 여기의 바위는 춘천 삼악산의 것과 유사한데, 절리가 미세하여 예각을 이룬 것들이 많고, 절리된 바위의 면은 대패로 민 듯이 부드럽다. 그래서 비나 눈이 올 때는 매우 미끄러울 것 같다. 절리된 돌덩어리 중에는 직육면체인 것도 많이 보인다. 비스듬히 기운 바위덩이에서 초대형 끌로 깨뜨린 듯한 바위들이 날카로운 모서리를 구성하며, 줄지어 있는 것을 보니 규모는 적지만 장관이다. 그러나 산행을 하면서 가장 걷기 싫은 부분이 이러한 철제 계단이다. 길이 험해서 위험하므로 산행에 도움을 주고 안전을 도모하기 위함이지만 철제 계단은 아무래도 인공이 가해진 것이라 산행의 묘미를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리기 때문이다.

이어 가파르게 오른다. 10분간 오른다. 낙엽이 다소 있어 감성적인 여인이라면 아마도 낙엽을 한줌 주워 머리에 뿌려보며 한바탕 겨울 정취와 낭만에 젖어봄직도 한 구간이다. 나한대에서 의상봉까지의 구간은 가을 단풍이 절정일 때 오면 아주 멋있을 것 같다. 소요산을 왜 경기의 소금강이라고 불렀는가를 실감나게 해 줄 것 같다.

(7) 義湘臺(1.1km) - 공주봉

이어 의상대에 이른다. 소요산 정상이며 주봉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의상대라 하였을까? 분명히 소요산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러브 스토리가 깃들어 있는 것을 감안하면 분명히 원효봉이라고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부르도록 제언하고 싶다. 이영주 사장님의 말
씀대로 의상대사가 더 귀족적이고 왕실 등 상류층의 지지를 받았기에 그를 더 상위로 치는 풍토에서 일부로 원효봉 대신 의상봉으로 바꾸어 부른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정상은 약간 붉은 끼가 있고, 칼날같이 모서리져 있는 암봉으로 되어 있다. 우측으로는 바위 절벽이 이루어져 있다. 능선 중앙의 선녀탕 쪽으로 험하게 뾰족바위 암릉이 뻗어내려가고 있다. 산아래 계곡이 수줍은 듯 자리하고 있다. 정상에는 철 깃대가 서 있다. 동두천시청산악회가 세운 정상표지석에는 ‘소요산 의상대 535.6m.’라고 적혀 있다. 지형도상의 높이와 정상표지석상의 높이 표시와 소요산 자체에서 해 놓은 이정표상 해발 587m 등 높이가 각각 달라서 몹시 헷갈리게 한다. 조속히 통일하여 줄 것을 강력히 권고한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산에 이렇게 엉터리 해발 표시가 있어서야 어디 되겠는가? 창피하여 산꾼이라고 말하기도 두려워진다. 소요산을 보려면 의상대에 올라서야 한다는 말이 실감나듯이 사방으로 탁 트인 조망이 아주 좋아 절경을 즐길 수 있었다. 나한대도 가까이 있다. 서쪽으로는 공주봉 뒤로 마차산과 감악산이 보이고, 북쪽 아래로는 소요산역에서 자재암으로 이어지는 계곡의 전경과 자재암 위의 하백운대가 마주 보이고, 그 우측으로 중백운대와 상백운대가 보이고, 그 멀리로 종현산, 성산, 종자산, 지장봉 등이 보인다. 북동쪽으로는 관모봉, 금주산이 보이고 그 뒤로 명성산, 관음산, 사향산이 눈에 들어온다. 남동쪽으로는 국사봉, 왕방산, 해룡산이 보이고, 남으로는 동두천 시내와 3번 국도와 그 너머 멀리로 불곡산, 도봉산, 북한산, 수락산이 보인다. 따사로운 햇살은 작은 도시 동두천시를 감싸주고 있는데, 유난히도 반짝인다. 아름다운 산행의 절묘함을 맛보는 기분이다. 긴급구조요청 안내문이 있다. “소요산 2-4(의상대), 연락처는 119 또는 031 -119.”라고 적혀 있다. 혹자는 정상에 대해서 별로 의미를 두지 않으나 그래도 정상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푸른하늘님 부군이 정상에 올라와서 힘이 들었는지 자재암 쪽을 향하여 함성을 토한다. 건강미가 넘쳐 보이고 젊음이 싱그러워 보인다. 그런 모습이 그저 아름답게 보인다.
정상이 암봉인데도 약간의 공간이 있어 여기에 진을 펼친다. 간단한 점심 겸 정상주 등 식도락을 거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팀들도 몇몇 있었다. 진수성찬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정상에 오른 상쾌한 기분을 만끽하며 즐겁게 김밥 등 식사와 이슬이를 한다. 술 한잔이 들어가니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지며, 마음의 자유도 한껏 누린다. 그런데 막 혼자 차를 몰고 와서 혼자 공주봉으로 해서 의상대로 오른 송민정씨가 여기에 와서 합류가 된다. 이영주 사장님이 마치 딸을 대하듯 따스하게 손을 잡아 끌어올려 주신다. 자상하신 분이시다. 먹을 것을 잔뜩 짊어지고 산을 오르느라 힘이 들었는지 힘든 기색이 남아 있었으나 서울산사람들을 만나니 이내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송민정씨는 포도주와 싱싱한 굴과 초장, 베이컨과 소시지 꼬치와 양송이버섯 요리 등등을 잔뜩 가지고 왔다. 포도주 한 잔과 굴 안주를 권하여서 맛있게 얻어먹었다. 의외로 취기를 돋우며 기호에 잘 맞았다. 그런데 도련님이 괄시하여 마음먹고 안타를 날리고파 힘들여 가지고 왔는데 오늘은 도련님이 결석하였으니 어이가 없기도 하리라.... 아마 10kg 정도의 무게가 나갈 듯한데, 조금은 힘들었을 것이다. 산 정상에서 싱싱하고 맛있는 굴을 초장에 찍어 이슬이 안주로 먹으니 맛이 기가 막힌데, 누구의 표현대로 “산이 정말로 바다로 가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요리 솜씨를 과시한 것도 된다.
또 조금 후에 늦게 연락을 받고 뒤 따라 올라오신 연천 김종복 사장님의 마나님이 도착하시어 그간의 소식과 인사를 나누었다. 내 배낭 속에 있는 것과 똑같은 붉은 색 방한모를 쓰시고 계셨다. 그러니 아직 소녀 같으시다. 바쁘실텐데 이렇게 참여하여 주시니 몹시 고맙다. 과일이 나오고 오징어포가 나오고, 김밥이 나온다. 모두들 서로 술을 권하고 덕담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술을 피해 있던 도치님도 정순진 동기가 한 잔을 권하니 드디어 결심을 깨고 만다.

의상대 정상에서 또 한바탕 항명이 일어난다. 바로 하산하느냐에 대해서 문대장님과 이미 공주봉을 거쳐 온 송민정님은 적극적이다. 바로 하산하는 길은 급경사 너덜지대라 초보자에게는 힘겨운 코스이다. 그러나 연천 김종복 사장님의 마나님과 동순갑씨, 기타 여러 회원들이 공주봉을 거쳐 하산하는 것으로 밀어붙이니 문대장도 역시 민주화의 대세에 굴복하고 마니, 공주봉을 거쳐 하산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의상대 정상에서 잠시 다시 내려선다. 이내 이정표가 보이는데, “공주봉 1.1km, 나한대 0.3km”라고 적혀 있다. 잠시 내려가니 우측으로 하산로가 나타난다. 이리로 내려가면 바로 속리교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송민정씨가 선글라스가 없다고 한다. 이영주 사장님 등 여러 분이 다시 의상대에 올라 샅샅이 뒤졌으나 보이지 않는다. 매우 아까와 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다시 좋은 것으로 장만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어 얕은 둔덕에 이어 남릉 나무 계단으로 된 길이 나온다. 계단을 다 내려서니 이정표가 서 있는데, “의상대 0.1km, 공주봉 1km, 나한대 0.3km”라고 적혀 있다. 좌측 길이 나한대로 직접 가는 우회로이다. 이어 능선 길은 서쪽으로 이어진다. 소요산에서 그나마 걷기에 편한 부분이다. 내리막에 이어 오르막이다. 이어 좌측 사면으로 난 길을 내려간다. 우측 위로는 바위지대이고, 좌측 아래로는 가파른 사면에 나무들이 울창하다. 여기서 우측 위로 암릉도 나한대에서 의상대에 이르는 암릉과 같지만 이를 통과하지 않아서 마냥 아쉬웠다. 비록 암릉의 경관이 비범한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과의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어쩔 수 없었다. 그 아래로 부대시설과 도로 등이 보인다. 송민정씨가 배낭이 무거운 것 같으니, 우리 문대장님이 짐을 받아 자기 배낭에 넣어 내려간다. 듬직한 모습이고, 의리가 있는 모습이다. 그런 대장이 자랑스럽다. 이어 평탄한 곳에 이른다. 좌측 아래 사면에는 동순갑씨가 더덕을 찾고 있다. 있더라도 땅이 얼어서 도구가 없으면 캐지 못할 것이다.

이어 안부 3거리 능선길에 내려선다. 해발 455m 정도이다. 공터가 있어 쉬기에 좋다. 이정표가 서 있는데, “의상대 0.9km, 공주봉 0.3km, 일주문 1km, 샘터 0.5km”라고 적혀 있다. 우측이 일주문 쪽으로 내려가는 하산로이다. 의상대에서 여기까지는 표고차는 130m이나 거리는 900m로 완만하게 내려온 것이다. 이어 오른다. 뒤돌아보니 의상대의 바위벽이 멋있다. 다시 평탄지대에 이른다. 좌측 아래로 미군부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잠시 내려간다. 이내 안부에 이른다. 길은 아주 양호하다. 다시 오르막이다. 동순갑씨는 아예 좌측 사면에서 무언가를 발견하여 캐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어 가파르게 오른다. 등로 우측 위로는 엄청난 바위지대가 있다.

여기서 좌측으로 오른다. 철난간과 로프가 잘 설치되어 있다. 위험표지판이 있는 노송이 서 있는 곳에서 우측(북)으로 오른다. 제법 가파른 편이다. 이어 암반지대 사이로 난 길이 된다. 푸른하늘 부부가 제일 후미로 힘겹게 올라오고 있다. 남편이 더욱 힘들어 보인다. 이제 보니 남편은 지팡이까지 임시 조달한 것이 아닌가!! 이어 전망이 좋은 바위에 이른다. 우측으로 계곡이 보이고, 전방으로 광대한 지역에 위치한 미군부대가 보인다. 그 미군부대의 존재로 인하여 동두천시가 살아가고 있다고 하니 대단한 일이다. 부대가 자리잡은 위치가 아주 명당이다. 그리고 미군부대와 붙어 있는 동두천시가지도 내려다보인다. 잠시 조망을 즐기다가 좌측(북서)으로 오른다. 이정표가 서 있는데, “의상대 0.9km, 공주봉 0.3km, 구절터 0.7km”라고 적혀 있다. 이내 공터가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여기서 우측으로 오른다. 철난간과 로프가 잘 설치되어 있다.
이어 평탄한 봉우리에 이른다. 여기가 공주봉이다.

(8) 공주봉(1km) - 일주문(km) - 매표소 - 만성기사식당

암봉으로 되어 있는데, 공터가 있어 쉬기에 좋다. 제법 긴 시간에 여섯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지나온 것을 대견해 하며 잠시 돌아보는 여유를 누릴 수 있고, 깊이 인상을 받는다. 때로는 순탄하고 때로는 험준했던 능선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소곳한 선으로 다듬어져 심플한 스카이라인을 이루며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 같아 슬며시 혼자 미소를 짓는다. 산 아래의 주위 경관은 여기가 제일 좋아 보이기도 한다. 원효대사가 요석공주를 두고 지은 이름이 바로 이 공주봉이 아니던가!! 그 유래를 알고 나니 가슴이 얼마나 아려지는지.......그러나 겉모습만으로는 이름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요즘에는 공주가 무수리보다 많은 세상이니 그런가 보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진정한 공주는 저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산행하면서 나는 “땀”의 의미 속에 그 실체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주변은 잡목 숲이다. 조망이 좋아 피로를 잊기에 충분할 것이다. 좌측으로는 미군부대가 보이고, 우측으로는 계곡과 동두천시내가 보인다. 미군부대와 부대찌개로 대변되는 도시라서 조금은 서글퍼 보인다. 다만 산 아래 군부대에서는 평일이면 사격연습차 총소리를 낼 것 같은데, 참으로 가슴 아픈 분단의 현실을 여기에 와서도 느껴야 하니 안타깝다. 해발 526m라고 되어 있다. 이정표가 서 있는데, “의상대 1km, 일주문(구절터) 1km”라고 적혀 있다. 완만하게 진행한다. 좌측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어 헬기장이 나온다. 공터가 넓어 쉬기에 좋다. 주변은 억새가 무성하다. 이 지역이 소요산에서 유일하게 억새를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긴급구조요청 안내문이 있다. “소요산 1 - 3. 연락처는 119 또는 031 -119.”라고 적혀 있다. 이어 잠시 오른다. 삼각점이 있다. “336FOB B-8732". 깃대와 깃발은 없다. 그리고 ‘포천303, 동경 127° 4′37″, 북위 37° 56′08″ ’이라고 국립지리원의 안내문에 적혀 있다. 그 안내문은 전번에 무의도 호룡곡산 정상에 서 있던 것과 유사한 내용이다. 그래서 그 기재를 생략한다. 좌측에는 비상시 재난구조용안테나(아마추어 10소자야기 안테나)가 있다. 그 쪽 능선상으로 길이 나 있으나 ”등산로 폐쇄“라는 팻말이 서 있다.

공주봉에서 우측(북동)으로 내려간다. 이 봉우리가 방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는 방커가 나온다. 이어 철난간과 로프가 설치된 길이다. 돌탑이 조그마하게 세워져 있다. 길이 얼어 있어 미끄럽다. 박후배가 오랜만에 등산을 해서인지 무릎이 이상이 왔다고 한다. 지팡이를 빌려 주었다. 너무 무리했나 보다. 이어 계단을 한참 내려간다. 주위는 숲이 울창하고 길은 넓고 양호한 편이다. 이어 우측에 아주 넓은 바위가 나오고 거기에는 등산객들이 앉아서 쉬고 있다. 한 100여명은 쉴 수 있는 곳이다. 내려서는 발길이 아쉬우면 여기 전망대에서 잠시 머물며 마지막 전망을 즐겨도 좋을 듯하다. 이 바위를 “마당바위”라고 하던가!!!

여기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이어 우측으로 휘어진다. 철난간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이어 통나무 계단을 가파르게 내려간다. 거꾸로 산행한다면 초보자에게는 꽤나 힘든 코스이고, 또한 기분을 전환시켜 줄 별다른 경치도 없는 구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내리막에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부분이다. 방심하다간 초보자는 다치기 쉽기 때문이다. 말발도리나무가 보인다. 우측에는 너덜지대가 나타나고 전방으로는 의상대가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잔설이 일부 남아 있어 겨울의 정취를 돋우고 있다. 문득 윤동주 시인의 “편지”라는 시가 생각나는 왜인지 모르겠다.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읍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바위가 있는 곳에 이른다. 박형석 후배가 좀 쉬었다가 가자고 한다. 운동을 안 해서 무릎에 무리가 왔나보다. 쉬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이어 내려간다. 참개암나무, 노린재나무, 다래덩굴, 고로쇠나무 등이 눈에 들어온다. 가을에는 단풍이 아주 예쁠 것 같다. 이어 돌계단을 지난다. 개살구나무, 다릅나무 등이 보인다. 이어 철난간 설치 지역을 지나 좌측으로 내려간다. 북동 방향이다. 또 철난간과 로프가 설치된 지역에 돌계단을 내려간다. 이정표가 서 있는데, “의상대 1km, 공주봉 0.9km, 일주문 0.4km”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의상대 코스로는 옛날에 가족과 함께 올라본 적이 있는 너덜지대의 힘든 코스였다. 긴급구조요청 안내문도 있다. “소요산 1 - 4. 연락처는 119 또는 031 -119.”라고 적혀 있다. 벚나무와 야광나무가 반긴다.

이어 구절터에 이른다. 해발 220m 정도이다. 엄청 큰 공터라 쉬기에는 좋을 듯한데, 절은 간데 없고 터만 남아 잡초만 무성하니 쓸쓸해 보인다. 그 위로는 바위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 옛날 수도승들의 불경 읽던 목소리와 목탁소리도 들리지 않고, 주춧돌 하나, 깨진 기와 한 장도 보이지 않는다. 세월의 무상함을 나타내는 듯 주변의 흩어진 바위에는 이끼가 끼어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측으로 내려간다. 소태나무가 보인다. 이어 개울을 지나 좌측으로 내려간다. 이번에는 팥배나무가 반긴다. 긴급구조요청 안내문이 있다. “소요산 1 -3, 연락처는 119 또는 031 -119.”라고 적혀 있다. 이어서 산딸나무, 황벽나무, 굴참나무 등이 보인다. 좌측에는 개울물이 제법 많아지고 있고, 우측 위로는 바위 절벽이 서 있다. 계속해서 내려간다. 좌측에 계단식 공터가 축조되어 있다. 복자기나무와 물푸레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이어 자연보호헌장을 지나 이내 자재암 방향과 공주봉 방향이 갈리는 3거리에 이른다. 동두천시 사자회에서 만들어 세운 아주 커다란 소요산안내도가 서 있는 바로 그곳이다.

여기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이내 안내문을 지나고 속리교를 지난다. 아까 오를 때 원효대 밑 천연동굴에 맡겨 놓았던 세속의 보따리를 다시 찾고 보니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어 좌측으로 내려가면 일주문이 나온다. 이를 지나니 마지막 휴게소라고 쓰여 있는 넓은 공터가 있는 곳에 모두 모여 있다. 멋진넘씨는 커피를 타서 돌린다. 감사하게 받아 마시니 약간 쌀쌀해진 날씨 탓인지 더욱 맛이 난다. 이영주 사장님은 내려오는 회원들마다 쓰레기 봉지를 달라고 하여 직접 확인하신 후 쓰레기통에 버리신다. 송민정님의 선글라스가 혹시나 쓰레기봉지에 들어가지 않았나 해서이다. 참 대단히 자애스런 모습이시다.

제일 후미까지 도착하자 우리는 함께 내려간다. 한참후 요석공주 별궁지를 지나는데, 모르는 분들을 위하여 내가 짧은 실력이나마 그 유래를 설명하여 주었다. 뒤풀이를 하기 위한 식당을 위하여 내가 멋진넘씨를 통하여 문대장에게 ‘만성기사식당’을 추천하였더니 그곳으로 결정되었다. 본래 김종복 사장님이 댁으로 오면 한턱 내시겠다고 하였으나 괜히 폐를 끼친다는 중론에 따라 이렇게 음식점을 선정하기로 한 것이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서울산사람들임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솔직히 소요산 주변의 음식점은 북한산이나 도봉산 입구의 음식점들보다 다양하지 못하고 질 또한 떨어지며 성의도 부족하고 비싼 편이기 때문에 함부로 음식점을 추천하면 회원분들의 기분을 망칠 수 있으므로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닌데, 그 집은 비교적 괜챦아보여 그렇게 한 것인데, 다행히 모두 만족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어 음식점 밀집지역으로 들어가는 다리에서 올라올 때와 반대편으로 내려간다. 아스팔트 포장도로이다. 이어 좌측에 조그맣게 조성되어 있는 요석공원이 나오고,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와의 애처로운 사랑에 대한 전설의 안내문이 있다. 공원의 좌측에 밀집되어 있는 요식업소를 제외한다면 공원으로서의 효용이 아주 떨어질 듯한데, 정말 짧은 눈으로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무지함과 엉망임을 보는 것 같아 다소 씁쓸하다. 이어 소요산 관리사무소를 지난다. 여기서 송민정씨와 몇몇은 송민정씨의 차로 이동한다. 이어 좌측으로 있는 주차장 지역을 지나 한참 내려가다가 무슨 OOO전적비가 있는 3거리에서 우측 도로로 내려간다.

이어 도로 끝지점에 있는 음식점 ‘만성기사식당(031-865-0639)’에 도착하여서 하산 뒤풀이 겸 송년 회식이 치러진다. 연탄불이 있는 패치카가 설치되어 있어 옛날 생각이 나게 한다. 역시 송민정님이 베이컨과 소시지 꼬치와 양송이버섯 요리가 압권이었다. 색깔도 잘 조화시킨 것이 정성이 듬뿍 묻어나고 있었다. 많은 양을 직접 만들어 오느라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결국 약속시간에 대지 못하여 부득이 직접 차를 몰고 소요산주차장에 와서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혼자 우리가 산행한 루트의 반대방향으로 올랐다고 한다. 웬만한 정성이 아니면 하지 못할 일... 덕분에 우리야 잘 먹었지만.... 정말 싶지 않은 일이라 보통 사람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참으로 고맙고 대견하다. 서울산사람들과의 만남이 마냥 좋아서이리라. 그러나 수확도 많았다. 타고난 미모에다가 순발력, 재치, 덕성이 두루 갖춘데다가 이번에 정식으로 요리솜씨가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하여 재벌가의 맏며느리감으로 손색이 없다는 칭송을 받았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중매를 검토하리라는 예감 때문이다. 문대장님의 지적처럼 직접 보시지 못하신 분들은 전혀 상상이 안 갈 것이다. 그냥 ‘환상적’이라는 단어 밖에 쓸 수 없었다. 정상윤씨가 음식을 제대로 준비해 오지 않는다고 조금 구박을 하여 마음먹고 준비했다며 오히려 겸손해 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좋다. 모두들 무한히 감사하며 맛있게 잘 먹었다. 그리고 이 식당만이 가진 특성인 직접 기른 돼지고이 생삽결살 구이(1인분 6천원)와 직접 담근 동동주(1주발에 5천원)가 정말 일품이다. 돼지고기가 찰지면서 무척 고소한 것이다. 2내지 3일에 한번씩 고기를 직접 잡아서 온다고 한다. 아침에 잡아서 오니 싱싱하다고 자랑이다. 동동주도 색깔부터 너무 노르스름하게 고우며 맛 또한 아주 좋다. 이 식당은 솥두껑이 요철이 있는 것이 있는데, 암솥, 수솥으로 명명하며 재미있어 했다. 화장실로 통하는 문에는 “연구실”이라고 쓰여 있어 재미있다. 화기애애한 가운데 덕담이 오가고, 이슬이도 여러 병이 거덜났다. 그 와중에서도 건강을 위하여 밥공기로 배를 채우는 분도 보인다. 이어서 이영주사장님, 문대장, 박형석 후배와 멋진넘씨 등 여러 회원님들의 덕담이 이어지고 새로운 신년 각오를 다지면서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한없는 선물에 감사하면서.....

특히 이영주 사장님이 불교계에서 원효보다 의상을 더 우대하여 의상이란 이름이 곳곳에 많이 남아 있으나, 사상적으로는 원효가 더 위대하다는 지론을 펴시었는데, 그 말씀의 이론이 정연하여 나도 그 말씀에 찬동하며 아래와 같이 보충 설명을 해두고자 한다.

한국불교가 낳은 불멸의 聖師인 원효는 대승불교의 건설자인 인도의 Nagarjuna(龍樹)나 중국불교를 새롭게 열어간 天台智者대사에 비견될 정도로, 한국불교에서만이 아니라 세계불교사에 있어서 그 위치는 그만큼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이름 그대로 민족의 첫새벽을 열어간 원효는 그의 의미 그대로 비단 한국의 불교사상만이 아니라 철학사상 일반에 있어서도 큰 새벽을 연 밝은 별이었다. 元曉(617-686)는 법명이며[부처님의 세상을 처음으로 빛나게 한다는 뜻으로, 원래 우리 말의 '해가 돋는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임. 원효가 이룬 업적을 생각할 때 참으로 그 이름대로 임을 알 수 있음], 속성은 薛, 아명은 ‘첫새벽’이란 뜻의 誓幢(서당)[집에서는 보통 新幢이라고 불렀다]이다. 薛聰의 아버지이다.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押梁(압량)군 불지촌(현 慶山郡 압량면 신월동) 율곡 娑羅樹 밑에서 태어났다. 불지촌이란 마을 이름으로서 살지촌이라고도 한다[삼국유사 : 押梁君南 佛地村北 栗谷娑羅樹下 村名佛地 或作發智村]. 그러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傳承이 단절된 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그의 고향인 명산 팔공산에서의 수도에 관한 전승은 아직도 전해져 내려온다. 이것은 산중의 사찰에 천년 法燈이 不滅했기 때문에 성사로 보살로 받들던 원효대사의 수도처가 스님들 사이에 면면히 전해 내려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와 같이 귀중한 것이다. 원래 원효의 집은 율곡의 서남쪽에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만삭의 몸으로 마침 율곡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던 길에 갑자기 진통이 와서 해산을 하게 됐다. 너무 급해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자 할 수 없이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좋고 거기서 해산 구완을 했다. 그래서 그 밤나무를 사라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 나무는 열매가 보통 것과 달리 아주 특이해서 지금도 그것을 사라율이라 부른다. 옛날 옛적에 어떤 절의 주지가 그 절의 노비들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한 사람 앞에 밤 두 톨씩을 나눠주곤 했다. 노비들은 불만이 쌓여서 마침내 관가에 주지를 고발했다. 관리는 이 말을 듣고, 주지스님이 그렇게 야박스럽게 굴 수가 있나 하고 밤을 가져다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밤 하나가 그릇 하나에 꽉 찰 만큼 엄청나게 컸다. 관리는 이것을 보고 앞으로는 노비 한사람에게 밤 한 톨씩만 주라고 판결은 내렸다. 그때부터 그 밤나무가 있는 골짜기를 율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별똥별]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29세 때인 648년(진덕여왕2) 皇龍寺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에 정진하였다. ‘송고승전’에서는 원효가 일찍이 나이 십세 무렵에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리 영특했던 그에게 일정한 스승은 따로 없었다. 혼자서 독학으로 공부했다. 불교가 공인된 지 100년이 지나던 이 무렵 신라에는 적지 않은 고승들이 배출되어 있었다. 원효가 그들을 찾아 배우고 물었지만, 뒷날 佛法의 깊은 뜻을 깨달음에 있어서는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효는 출가하고 나서 가산을 불문에 희사, 자기 집을 절로 만들고 이름을 初開寺라 했다. 또 자신이 태어난 그 밤나무 옆에도 절을 지어 沙羅寺라 일컬었다. 젊은 날의 원효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젊은 시절 한때에는 명예스러운 화랑의 신분을 즐기기도 하고, 전쟁에 종군도 하였다는 정도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다양한 저술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편린들에서 그는 불교학은 물론 儒家와 道家者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학문을 닦는 한편 수행자로서 간절하고 피나는 고행을 다했던 것 같다. 원효에게 가장 많은 감화를 준 스승은 그에게 [법화경]을 가르쳐 준 영취산의 낭지대사와 백제의 고달산에 피난하여 살면서 [열반경]을 그에게 강설하여 준 고구려의 도승 진덕화상이었다. 이러한 기록들에서 우리는 원효가 신라 본국뿐 아니라 이웃나라 백제에까지 두루 돌아다니며 여러 스승 밑에서 진리탐구에 열중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원효와 의상은 삼국이 서로 싸워 전쟁이 끊이질 않은 시대에 같이 수도를 한 도반으로서 650(진덕여왕 4)년 34세때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압록강을 건너 요동까지 갔다가 중도에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고 귀국하였다. 661년 45세에 의상과 다시 이번에는海路로 해서 唐으로 가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唐州界[唐項城(南陽)]로 향하였다. 항구에 당도했을 때 이미 어둠이 깔리고 갑자기 거친 비바람을 만나 한 땅막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곳은 땅막이 아닌 옛 무덤[古塚(총)] 속임을 알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그날 어두운 밤에 원효는 동티(귀신의 장난)를 만나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이는 곧 그에게 큰 깨달음의 한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잠을 자다가 원효스님이 잠결에 목이 말라 그릇에 물을 떠 마셨는데 갈증이 심하였던 터라 물을 마시니 무척 시원하였다. 이어 기분좋게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머리맡에 해골이 놓여 있는 것을 본 원효스님은 어제 마신 물그릇이 물이 괴어 있던 해골인 줄을 알고 속이 메스꺼워 구역질을 하였다는데, 이는 후세의 사람들이 재미있게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원효는 그 가운데 문득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깨닫고 여기서 나아가 ‘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萬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마음 밖에 법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는 곧 진리이다. 당나라에 진리가 있다면 그것이 왜 신라에는 없겠는가’라면서 큰 깨달음(大悟)을 얻었다. 이것은 사물 자체에는 淨도 不淨도 없고(염정불이)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인데, 그는 이처럼 인간의 내면 속에 간직되어 있는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또한 신라인으로서 주체적인 자각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두 번에 걸쳐 당나라에 유학을 시도하였으나 대오각성한 원효스님은 당나라에 가서 더 배울 것을 포기하고 그냥 신라로 돌아왔다. 그 후 芬皇寺에서 독자적으로 通佛敎(元曉宗·芬皇宗·海東宗 등으로도 불린다)를 제창, 서민과 빈민들을 상대로 불법을 가르치며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원효의 이름이 이미 신라에 널리 알려졌을 때의 어느 날, 황룡사의 승려인 원효가 아침부터 미친 사람처럼 서라벌 거리를 쏘다니며 나무막대 하나를 들고 큰 소리로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라는 노래를 불러댔다. 사람들은 원체 이상한 행동을 잘 하는 원효대사가 이번엔 또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러나 하면서도 그 노래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태종 무열왕이 대궐에서 이 노래를 듣고 그 말뜻을 알아차리고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런 분의 자식이라면 영특할 것은 틀림없고, 나라에 훌륭한 인재가 생기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지." 마땅한 여자가 없을까 궁리하던 무열왕은 무열왕 자신의 둘째딸로 남편을 백제와의 싸움에서 사별한 후 마침 과부가 되어 요석궁에서 혼자 몸으로 살고 있는 요석공주를 떠올렸다. 무열왕은 됐다 싶어서, 즉시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안내하게 했다. 관리들이 원효를 찾아나섰을 때, 원효는 이미 일이 그렇게 될 줄 알고 먼저 문천교 다리로 나가 기다렸다. 저 편에서 관리들의 모습이 보이자 원효는 모르는 척하고 다리를 건너오다가 일부러 발을 헛딛고 물에 빠졌다. 관리들은 허겁지겁 원효를 건져내서 요석궁으로 데려갔다. 원효는 젖은 옷을 말린다는 핑계를 대고 옷을 벗고 궁에서 머물렀다. 요석공주는 처음엔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스님답지 않은 자유분방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원효는 瑤(요)石公主와 함께 밤을 보내며 잠자리를 같이 하기에 이르렀다. 짧은 인연이지만 요석공주가 10달이 지나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설총이라 지었다.「원효의 사랑」설화는 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지금도 유명한데 이광수가 1942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소설 ‘원효대사’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어찌나 총명하던지 어릴 때 이미 유학과 역사에 통달했다. 그는 吏讀[두]文字를 만들어서 그때까지 중국어로만 통하던 중국과 우리나라의 문물을 우리 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끔 했다. 이런 공적 때문에 설총은 흔히 신라를 대표하는 10사람의 현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설총은 후에 당대 최고의 학자가 된다. 설총은 파계의 소생이라지만, 한국 유교의 문묘에 배향된 18유현중에서도 첫 번째로 모시어지고 있으니 대단한 일이다. 원효대사가 입적하자 아들 설총은 유해를 화장한 뒤 그 가루로 살아계실 때의 모습을 조각하여 분황사에 모셔 놓고 일생 동안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뜻을 표했다. 그런데 하루는 설총이 아버지의 塑(소)像 옆에서 절을 하는데 그 상이 갑자기 돌아다보았다. 그때부터 소상은 돌아본 채로 있다고 한다.
원효는 설총이 태어난 사실을 스스로 破戒로 단정, 승복[가사장삼]을 벗고 속세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고 다니며, 小性居士, 卜性居士라 자칭, 無(애)歌[화엄경의 일체무애인/일도출생사(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다번에 생사를 벗어나리로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노래]를 지어 부르며 군중 속에 퍼뜨리자 불교가 민중 속에 파고들었다. 기이한 행색의 원효를 당대의 가장 뛰어난 학승이며 왕실에서도 존경받는 고승이었던 원효는 기이한 행색을 하고 자신을 한없이 낮춘 자유로운 성자였고 민중의 벗이었으니, 가난한 사람, 천민, 부랑자, 거지,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그런 원효를 허물없이 따랐을 것이다. 원효는 그러한 무지랭이들에게 가슴 절절히 와 닿는 생기를 불어 넣었으며, 염불을 따라 부르며 정토에 때어날 희망을 키워 주기도 한 진정한 고승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들어온다. 또 당나라에서 들여온 金剛三昧經을 왕과 高僧들 앞에서 강론,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참선과 저술로 만년을 보내다가 신문왕 6년(686) 3월 30일 70세에 경주 남산 穴寺에서 입적하였다. 뒤에 고려 숙종이 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불교사상의 융합과 그 실천에 힘쓴 淨土敎의 선구자이며, 한국의 불교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가장 위대한 고승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그의 저술은 大慧度經宗要, 法華經宗要, 華嚴經疏(소), 大涅槃經宗要, 解深密經疏, 大乘起信論疏 2권, 大乘起信論別記 2권, 大無量壽經宗要, 阿彌陀經疏, 彌勒上生經宗要, 金剛三昧經論(저술배경에 소의 두 뿔 사이에 벼루를 놓고 집필했다는 일화 있음), 菩薩瓔珞(보살영락)本業經疏, 梵綱經菩薩, 戒本私記, 菩薩戒本持犯要記, 中邊分別論疏, 判量比論, 大乘六情懺悔, 發心修行章, 遊心安樂道, 十門和諍論(원효사상의 중심 개념인「화쟁」을 풀이) 등 100여종 240여권(또는 86부 180여권)으로 알려져 있다. 그 연구 범위도 대·소승불교의 모든 부문을 망라하고 있어, 가히 넓고 깊은 學解와 초인적 저술활동을 보여준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그의 대표적 저술이라 할 수 있는 분황사에서 저술한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은 탁월한 이해와 견해를 보이는 것으로 너무나 유명한데 중국 석학들까지도 가져가 읽고 배우며 찬탄과 경이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었음은 물론이며 당연히 당시 후진국인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저술은 19부 22권만이 1천3백년의 장구한 세월을 뚫고 전해지고 있을 뿐이어서 몹시 안타깝다.

원효대사에 비견되는 義湘大師(625∼702)는 신라시대의 高僧으로 우리나라 華嚴宗의 開祖이다. 성은 김씨. 한신(韓信)의 아들이다. 19세 때(29세에 출가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최근의 고증을 따랐음.)경주 皇福寺에 출가하였다. 얼마 뒤 중국으로 가기 위하여 元曉와 함께 遼東으로 갔으나,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잡혀 정탐자로 오인 받고 수십일 동안 잡혀 있다가 돌아왔다. 10년 뒤인 661년(문무왕 1)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처음 揚州에 머무를 때 州將 劉至仁이 그를 관아에 머무르게 하고 성대히 대접하였다. 얼마 뒤 종남산 至相寺에 가서 智儼(엄)을 청하였다. 지엄은 전날 밤 꿈에 海東에 큰 나무 한 그루가 나서 가지와 잎이 번성하더니 중국에 와서 덮었는데, 그 위에 鳳의 집이 있어 올라가 보니 한 개의 摩尼寶珠의 밝은 빛이 멀리까지 비치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의상을 특별한 禮로 맞아 제자가 될 것을 허락하였다. 그 곳에서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은밀한 부분까지 분석하였다. 당나라에 머무르면서 지엄으로부터 화엄을 공부한 것은 8년 동안의 일이며, 나이 38세로부터 44세에 이르는 중요한 시기에 해당한다. 의상이 터득한 화엄사상은 넓고도 깊이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남긴 華嚴一乘法 界圖를 통하여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신라로 돌아온 당년에 洛山寺의 觀音窟에서 관세음보살께 기도를 드렸다. 이때의 발원문인 白花道場發願文은 그의 觀音信仰을 알게 해 주는 261자의 간결한 명문이다. 그 뒤 浮石寺를 세우기까지 전국의 산천을 두루 편력하였는데, 이는 화엄사상을 펼 터전을 마련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귀국 후부터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674년 경주의 황복사에서 表訓·眞政 등의 제자들에게 화엄일승법계도를 가르쳤다는 것으로 보아, 부석사가 이룩되기 전부터 훌륭한 제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의상 이전부터 이미 우리나라에 화엄사상이 전개되어 있었지만, 화엄사상이 크게 유포되기 시작 한 것은 의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의상이 화엄대교를 전하기 위하여 중악 팔공산 美里寺, 남악 지리산 華嚴寺, 강주 가야산 海印寺, 웅주 가야현 普願寺, 계룡산 甲寺 등을 창건한 것으로 전하여 온다. 또, 의상의 교화활동 중 가장 큰 업적은 많은 제자들의 양성이 었다. 그에게는 3,000명의 제자가 있었고, 또 당시에 亞聖으로 불린 悟眞·智通·표훈·진정·眞藏·道融· 良圓·相源·能仁·義寂 등 10명의 제자와 ‘송고승전’에 이름이 보이는 梵體나 道身, 그리고 ‘法界圖記叢隨錄’에 나타나는 神琳 등이 훌륭한 제자들이었다. 이들은 항상 스승을 모시면서 화엄학을 수학하였다. 의상은 황복사에서 이들에게 ‘법계도’를 가르쳤고, 부석사에서 40일간의 법회를 열고 ‘一乘十地’에 대하여 문답하였으며, 소백산 錐(추)洞 에서 ‘화엄경’을 90일 간에 걸쳐 강의하였다. 지통의 ‘錐洞記’, 도신의‘道身章’, 법융의‘法融記’, 진수의 ‘眞秀記’ 등은 모두가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문헌들이다. 668년(문무왕 8)에 세수 78세로 태연자약하게 입적 하였다고 한다. 저술로는 十門看法觀 1권, 入法界品초記 1권, 화엄일승법계도 1권, 백화도량발원문 1권 및 최근 발견된 一乘發願文 등이 있다.

원효스님은 귀족과 지배계층에 기울어진 불교를 바로잡아 서민과 빈민도 쉽게 깨달음을 얻을 길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의상대사는 종국에서 오랫동안 화엄학을 연구하여 깨우치고 귀국하는데 그분을 사모하는 분이 따라나서려 했으나 거절하였다. 의상은 귀국하여 영주 부석사를 짓고 많은 제자를 가르치며 전국에 수많은 사찰을 건립하여 신라를 불국토로 만든다. 이처럼 의상과 원효는 신라불교의 라이벌이자 두 기둥이었는데, 의상은 귀족출신에 정통 불교사상가이나, 원효는 서민불교를 진작시켰고, 의상은 중국에서도 인정하는 국제적인 불교고승이나, 원효는 신라가 배출한 특출하고 독자적인 사상가였다. 그 후 두 분에 대하여 설화가 많이 생겼는데 서로 자기문중의 스승이 더 우위에 있다는 내용의 설화 중 숯을 씻는 여인으로 변한 관세음보살을 원효는 못 알아보나, 의상은 알아본다는 식의 에피소드가 그것이다. 후세에 와서는 한국불교의 최대사상가로 원효가 꼽히는 점에서 보아 독창성이나 역사적 영향력은 원효가 앞서나, 당대에는 중국유학파이자 지배계층출신인 의상이 앞서는 것으로 평가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영주 사장님의 말씀처럼.......


※ 그 후

이어 뒤풀이 회식이 끝나고 소요산 역으로 갔다. 송민정씨는 승용차로 개인 출발한다. 나머지는 단체로 표를 구입하고 기다리면서 역에서 준비한 차를 마신다. 이어 다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정겨운 님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지루함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의정부역에 도착하여 푸른하늘님 부부는 승용차로 가기 위해 빠지고 나머지는 전철로 서울로 향했다.

종로3가역에서 내리기로 하였는데, 모두 피곤한 탓인지 나와 정순진 동기, 복남씨와 문대장만 남아 국일관 호프집에서 마무리 호프잔을 나누었다. 마침 정상윤 리더가 전화가 연결되어 뒤늦게 합류하였는데, 오늘 산행의 개요를 설명하니 안타까워 죽으려고 한다. 또 짜총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여기서 회동할라치면 왜 미리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원망투의 목소리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것을....


교통 :

갈 때는 의정부역에서 09 : 20 발 경의선 신탄리행 통일호 열차 이용, 소요산역에 약 9시 55분 하차.

참고로 이 열차는 의정부역에서 매시 20분 출발, 요금은 1, 100원. 31분 소요. 전철 1호선 수유역에서 136, 139번 06 : 00~ 22 : 00 사이에 5 내지 10분 간격으로 운행[의정부역, 의정부북부역, 동두천 경유]하는 좌석버스 및 완행버스(36, 39번)를 이용해서, 소요산 주차장에 하차할 수도 있음. 요금 1,300원, 1시간 10분 소요. 상봉터미널에서도 하루 버스 12회 운행.

올 때는 소요산역에서 의정부행 열차는 매시 42분 출발,


먹거리 :

우리가 갔던 만성기사식당(031-865-0639) 외에도 소요산역 부근의 청궁반점(866-6564), 제일
삼계탕, 칼국수(867-0147), 대운식당(867-0997), 대일식당(866-0507), 팔복가든식당(865-3804), 할매순대국(866-1116), 성진정육식당(867-0136)도 좋고, 관리사무소와 매표소 간 식당 밀집지역에 있는 낙원식당(866-3480), 금수강산(867-5386), 은혜식당(867-4107), 약수물식당(865-7208), 삽다리식당(865-8931), 계림식당(865-5126) 등도 무난한데, 각종 매운탕, 해물파전, 도토리묵, 녹두전, 산나물비빔밥, 갈비탕, 육개장, 선지해장국 등이 매식한다.
동두천 시내에 있는 송월관(865-2428)의 떡갈비가 권하고 싶다. 이 집은 50여년 동안 맛을 지켜온 동두천의 명물이다. 떡갈비는 떡처럼 만들어진 갈비인데, 갈비살을 발라내어 다진 후 갖은 양념을 해 갈비뼈에다 다시 빈대떡 모양으로 두툼하게 붙인 다음 석쇠에서 한번 구워낸 다음 다시 잘 달군 놋쇠판에 구워내는 것이다.
▣ 김현호 - 소요산이름 으로 우리의 역사와 지리를 겸사겸사 공부하고 가는군요 "소요산의 바이블" 로 명명해도 손색없을듯..
▣ 문창환 - 이종환님! 오랫만에 뵙는군요. 탐진기맥(?)은 끝나셨나요? 올 한해도 건강하시고 왕성한 산행하시기 바랍니다.
▣ 이현우 - 소요산 산행기중 장원 입니다.
▣ 이종환 - 문창환님 오랫만에 뵙습니다. 그간 산행 하시는 모습을 멀리서 보긴 했습니다. 정말 대단하시더군요. 저는 탐진기맥을 끝내고 이제 여수지맥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들도 여기 올리고 싶으나 시비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김현호님, 이현우님 감사드리구요. 올해도 산운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