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찾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게 있었다. 더 많은 산을 찾고 싶고 더 깊이 알고 싶은 뭐 그런 것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게다.


어쩌면 “난 다른 사람보다 산에 대해 더 많이 안다” 라는 허접잖은 자만심 때문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순수하게 봐 준다 해도 결국 자기자신에 대한 뿌듯함 또는 자기만족 때문이리라…


그래서 나 또한 북한산 종주를 맘속에 담아 둔 지가 1년 여..


1월 2일 하늘이 내려 준 기회였다.


강창운 차장과 약속을 하고 만난게 우이동 버스종점 앞이었다.


원래 12대문 종주라 함은 북한산성매표소에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로 알려졌지만 우이동에서 굳이 그곳까지 갈 필요가 없었기에 시간이 더 걸린다 해도 우이동에서 출발하기로 하고 오전 9시 15분경 북한산 종주를 위해 힘찬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힘찬 출발이라 해도 20분 이상이 걸리는 도선사까지의 아스팔트 도로는 산행 들머리로서는 과히 기분 좋은 곳은 아니다. 심한 경사로 인해 올라 가는 차량들이 내 뿜는 매연 냄새도 그렇지만 거친 숨을 내쉬면서 그런 매연을 그대로 폐 속으로 집어 넣어야 한다는 사실이 산을 찾는 이에게는 매우 불쾌한 기분일게다.


그래도 그런 것쯤은 참을 만 했다.


도선사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익숙한 등산로를 밣고 오르자 새벽과 아침녘에 내린 눈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는다. 적설량이야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많은 사람이 밣지 않아서인지 순백색의 흰눈이 서설인양 우리들의 기분을 마냥 싱그럽게만 해 준다.


땀을 흘릴 만큼 흘린 뒤 도착한 북한산장 잠시 목을 축이고 바쁜 걸음을 그대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착한 위문 늘상 오르던 곳이지만 오늘 만큼은 새롭게 느껴졌다. 12대문 중 첫번째 통과지점이기도 하려니와 이제껏 가보지 못했던 북쪽 방향의 출발점이기도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파른 나무계단과 돌계단이 이어지고 작은 암자인 약수암이 나무판자들로 엉기성기 덧대어져 있는 것이 그 옛날의 암자와는 다른 모습처럼 보였다. 하지만 백운대 바로 밑에 위치한 암자이기에 그 옛날 수도승들에게 있어서는 분명 득도를 할 수 있는 명당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밑에서 보이는 백운대와 인수봉 그리고 만경대와 노적봉이 형제처럼 다정하게 서 있고 그 위를 덧 없이 흐르는 구름과 안개로 감싸여 있는 모습은 인간에게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자연의 묘리를 느끼게 할 만큼 오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약수암 밑의 작은 마당에서 오르던 다리품을 쉬고 있던 산행객들의 모습에서도 산이 주는 너그러움을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곳부터는 급경사는 아니었다. 새로이 눈 속으로 들어 오는 모든 광경이 그저 흥미롭고 경이롭기만 할 뿐이었다. 대동사를 지나자 원효봉 오르는 길이 나온다. 여름이면 제법 많은 물이 흐를 것 같은 계곡을 건너 원효봉을 향해 다시 오름길을 시작했다.


10여분 정도를 오르자 2번째 문인 북문이 나온다. 몇몇 사람들의 말소리에 이곳이 그렇게 한적한 곳만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부부인 듯한 사람들의 발걸음을 따라 오르자 원효봉이다.


앞으로는 염초봉과 인수봉 백운대가 보이고 오른쪽엔 의상봉이 바로 앞에 가까이 까지 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를 구름 속에 갇혀 있는 용출봉과 용혈봉 그리고 많은 봉우리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 뒤로 문수봉이 아득히 멀어져 보인다.


게다가 넓다란 바위들이 널브러져 있는 원효봉 봉우리는 가쁜 숨을 돌리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먼저 막걸리로 목을 거나하게 축이고 컵라면으로 허기를 메꾸자 신선이 따로 없었고 온 세상이 그렇게 여유롭게만 보였다.


느긋하게 휴식을 취한 우린 다시 배낭을 싸고 사진까지 찍은 우린 또다시 미끄러운 하산길을 조심스레 내려 갔다. 문 잠긴 원효암이 나오고 곧 이어 시구문이 나온다. 매표소가 있지만 사람은 없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잠시 주춤했지만 성곽 안쪽으로 발길을 들여 놓았다.


조금 더 내려 가니 커다란 계곡이 나오고 썰렁해 보이는 음식점들이 나온다. 수문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이 되지만 누구에게도 물어 볼 길이 없어 확인은 하지 못하고 산성매표소쪽으로 내려갔다.


매표소 부근에서 의상봉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해 잠시 헤메다가 대서문으로 오르는 잘 정돈된 길을 만나 따라 오른다. 차들이 다니는 것으로 보아 성 안쪽에 음식점들이 있는 듯…


의상봉으로 바로 오르는 길이 중간에 있었지만 대서문을 보기 위해 계속 전진하여 성안쪽으로 들어 서자 의상봉 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음식점 주인 아낙에게 길을 묻자 퉁명스럽게 가르쳐 주고는 막걸리를 하나 사란다. 얼마냐니까…3천원을 달란다…에이 여보쇼…하고는 그냥 대서문 윗쪽 성곽을 따라 의상봉을 향해 또 다시 오름길로 들어 섰다.


잘 다니지 않는 길인지..등산로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암릉이 나오고 급경사가 계속되었다. 위험한 곳엔 쇠줄로 안전로프를 확보해 놓았지만 눈과 얼음이 바위를 덮고 있어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아마도 제일 힘들었던 구간이었을게다.


첫 들머리로 의상봉을 택했다면 모르지만 이미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이 넘어 서고 있었고 게다가 눈과 얼음 때문에 걸음걸이가 매우 조심스러웠기에 다리에 힘이 많이 들어 갔기 때문이었을게다.


그렇게 고생하고 오른 의상봉 또 다른 멋진 전경이 우리를 향해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가 걸어 왔던 원효봉과 그 뒤쪽으로 백운대와 인수봉 그리고 아직도 가야 할 용출봉과 저 멀리 문수봉까지 모두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지만 그 위용만큼은 또 다른 맛으로 다가 왔다 뿌듯함과 왜 이제야 왔을까 하는 아쉬움이 교차한다.


배낭도 없이 준비물도 없이 오른 일가족이 보인다. 위험할텐데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조심하세요 라는 말밖에는 달리 할말이 없었다.


그리고 10분이 채 안되어 가사당 암문이 나온다. 아래로는 국령사의 커다란 금불의 머리부분이 보이고 앞으로는 용출봉과 용혈봉이 나온다. 용출봉과 용혈봉… 어디가 용출봉이었고 어디가 용혈봉이었는지 솔직히 확인을 하지 못했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를 오르락 내리락 몇 번인가는 했지만 이때부터 오른쪽 다리의 무릎 윗부분의 근육이 아프기 시작했다. 아마도 근육이 뭉친 듯 미끄러운 길을 오르내리며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 갔었던 모양이었다. 에어파스와 압박밴드로 응급처치를 했지만 오름길만 만나면 아파왔다. 우리가 추월했던 사람들이 우리를 다시 추월해서 앞으로 나선다.


몇 번을 쉬면서 그리고 몇 번인가 다리를 주무르면서 산행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보니 부왕동 암문이 우리를 반긴다. 그렇게 먼길이 아니었건만 부상당한 다리 때문에 시간은 시간대로 걸리고 가는 길은 힘들기만 했다.


부왕동 암문을 지나 나월봉과 나한봉 가는 길이 나왔지만 다리 때문에 오름길을 포기하고 우회로로 사면을 따라 가기로 했다. 능선을 내려와 산속으로 들어선 것이다. 눈으로 덮인 산속…어디쯤 가고 있는 것인지 불안스럽기도 했지만 아쉬움도 많았다.


사면이라고 하지만 오름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또 다시 앞서 가는 강차장을 불러 세우고는 자리를 깔고 털석 주저 앉고 말았다. 조금 남은 골뱅이와 생맥주로 입가심 겸 휴식을 취한 후 조금 더 오르자 청수동 암문이 나온다.


그리고 그렇게 아득하게 멀어 보이던 문수봉이 보이고 그 아래로 비봉으로 가는 능선이 이어지고 있었다. 문수봉 우회로를 지나 내림길을 만나 속도를 내자 대남문이 성곽을 옆으로 늘이고 서 있는 모습이 들어 왔다.


벌써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과연 12대문 종주를 할 수 있을는지…아픈 다리로 계속 강행을 할 경우 어떤 결과가 놓이게 될지도 몰랐지만 이제 4개만 더 가면 되는데 하는 아쉬움이 더 크게 다가 왔다. 그래 가는데 까지 가보자..이제부터는 오름길 보다는 구배가 심하지 않은 능선길이니 갈만할께다..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실제 허벅지 안쪽 근육에서 더 이상 통증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성곽을 따라 나 있는 작은 고개를 몇 개 넘어 서자 12대문 중 가장 규모가 크다는 대성문이 그 커다란 몸집을 드러내고 있었다. 원래 누각이 있는 대문은 대서문과 대남문 그리고 대동문뿐이었지만 소동문이라는 작은 암문이었던 이곳이 궁궐하고 가까워 임금이 드나들도록 크게 중축하고 대성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이야기를 어느 산행기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이제껏 그래 왔던 것처럼 증명용 기념사진을 찍은 후 다음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였다. 해가 기웃기웃거리며 노을이 서서히 북한산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어두워지기전에 오늘의 마지막 기착지인 용암문까지 갈 수 있을는지 불안감마저 들었지만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하였다.


사실 다리에 근육통이 찾아 오긴 했지만 체력적인 문제는 없었다. 다리에도 아직은 힘이 남아 있었다. 벌써 7~8년을 다져 온 산꾼 아니던가…물론 오늘처럼 긴 산행을 한 것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런 저런 생각과 비로소 여유를 찾은 나는 강차장과 잡다한 이야기까지 썩어 가며 나머지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칼바위 능선이 보이고 그 아래쯤에 보국문이 있을 텐데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사실 대성문에서 보국문까지는 그렇게 먼거리는 아니지만 여유가 없어진 우리에게는 꽤나 길게만 느껴졌었던 것 같다.


다리의 통증은 없어졌지만 성곽 옆의 작은 돌계단들은 자기 멋대로 들쭉날쭉 길을 만들고 있는데다 저녁노을과 바람이 불어 눈으로 덮인 계단은 더더욱 미끄럽기만 하였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리품을 팔고 몇 개의 고갯길을 넘어 서자 드디어 보국문이 나오고 그 뒤로 칼바위 능선이 겨울 찬바람을 맞으면서 봄가을에 볼 수 있었던 아니 아침녘에 볼 수 있었던 그 멋드러진 위용은 간데 없고 겨울 그리고 황혼의 썰렁함만을 안고 서 있었다.


이제부터는 너무나 익숙한 길이다. 수없이 아니 수백 번은 다녔을 길이다. 발걸음이 빨라지고 곧 이어 대동문이 나선다. 잠시 잠깐 애인을 만난 듯 눈인사로 애정을 표시한 후 시간에 쫓겨 그냥 날달음질을 한다.


동장대로 올라 서는 길이 또 다시 다리통증을 기억나게 한다. 하지만 오름길로는 이곳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그 또한 즐거움이고 12대문 중 마지막으로 용암문 만을 두고 있음에 뿌듯함이 밀려 온다. 사실 동장대는 북한산 어느 곳에서도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그러기에 그 옛날 적군을 만나 대항하여 싸울 때 장군들이 성곽을 지휘할 수 있었을게다.


동장대를 지나서 마지막 용암문까지 아직도 1키로 정도가 더 남았지만 마냥 여유스럽기만 하다. 성곽보수공사로 인하여 사면을 따라 우회로가 나 있지만 가파르고 미끄러워 조심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가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북한산 대피소 아래 샘터에서 마지막으로 목을 축이고 나니 바로 앞이 용암문이다. 이 뿌듯함…. 중간에 미끄러움과 다리통증이라는 어려움은 있었지만 해냈다는 자신감이 물밀듯이 가슴을 치며 들어 온다.


강차장과의 하이파이브…


보국문인가 대동문쯤부터 시장기가 느껴졌지만 시간에 쫓겨 그냥 지나쳤기에 우린 용암문 안쪽 쉼터에 앉아 식어서 차갑기까지 한 삼각 김밥을 따스한 물과 번갈아 가며 속을 채우고 나서야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버렸다. 산 아래의 도시만이 여러가지의 불빛들로 그 존재를 알리며 자연과의 차별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려가는 길이 다소 가파르기에 걱정이 앞섰지만 다행히 보름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달빛과 하얀 눈은 충분히 우리의 눈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이렇듯 늦어질 것으로 예상했다면 헤드랜턴이라도 가지고 왔을 텐데….하는 아쉬움과 함께…


그렇게 한참을 내려 오자 도선사의 저녁 종소리가 어둠 속을 뚫고 산으로 산속으로 은은하게 울린다. 그리고 그 종소리와 함께 도선사 마당으로 내려 서자 아직도 신도들의 왕래는 계속 되고 있었다. 사람이 사는 곳으로 내려 온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아스팔트 도로를 터벅거리며 우이동 버스종점에 도착하자 6시 45분경 출발한지 9시간 30분만에 출발점에 돌아와 있었다. 북한산성을 원점으로 할 때 보다야 시간이 더 걸릴 수 있었겠지만 어찌되었건 여러가지 악조건을 감안하더라도 그렇게 나쁜 기록은 아니리라…


하기사 기록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다른 이보다 더 빨리 가는 게 또 무슨 의미랴…


산이 있어 산에 왔으면 산이 살아 가는 모습에 나를 집어 넣으면 그만인 것을.. 우린 아직도 산을 우리들 맘대로 생각하고 우리의 소유물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겐 그저 산을 찾아 가기 위한 또 다른 시작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 김현호 - 축하드립니다 어둠속에서의 하산이 좀 위험하긴한데 조용하구 운치있을듯..
▣ 권경선 - 님의 말씀처럼 기록에 신경쓰다 보면 산은 온데 간데 없고 나만 홀로인것 같아 하산하고 나면 아쉬움이 남더군요. 북한산 종주 축하 드립니다.
▣ san001 - 축하합니다. 최대한 고생하는 방향으로 코스를 잡으셨네요. 님의 말씀대로 산은 항상 그자리에 있는 영원한 친구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