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04.07.08 ~ 2004.07.10


인원: 나 그리고 아내 둘이서


산행코스: 중산리-칼바위-로타리대피소-천왕봉-제석봉-장터목(1박)
연하봉-촛대봉-세석산장-칠선봉-선비샘-벽소령-형제봉-연하천(2박)
토끼봉-화개재-삼도봉-임걸령-노고단안부-성삼재


배낭: 45L (20kg) + 32L(6kg)


 


산행을 준비하며:


     2년 전 사진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지리산 산행기를 접하게 되면서 지리산에 대한 추억이 되살아나 그리움을 가슴 한편에 키우기 시작했다.고 3때 한참 입시 준비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지리산을 접하게 된 이후로 7년 정도 매년 두세 번은 지리산에 올랐었다.그 후로는 직장 문제로 산행을 중단해서 10년이 넘게 너무나도 철저히 잊고 지냈던 지리산이다.

     작년부터 등산 장비도 다시 준비해서 근교 산에는 몇 차례 올라 보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남들이 작성한 산행기로 지리산에 가는 것을 대신하는데 그 동안 많이 바뀐 모양이다.산장 사전 예약, 야영 취사 금지, 등산로 자연휴식년제와 같은 제도뿐 아니라 산행기에 올라온 등산로나 대피소 전경도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하지만 산행기를 어찌나 많이 봤던지 이제는 마치 최근에 다녀온 곳처럼 낯설지가 않다.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리산에 다녀와야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고 며칠 되지 않는 휴가를 쪼개어 미리 휴가 계획서를 제출했다. 연 휴가가 많지 않다 보니 나 홀로 3일간의 휴가를 소모한다는 것은 어지간히 간이 크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며 이제 9개월 된 딸아이도 걸린다.

     아내는 나에 비해 훨씬 신세대 축에 드는데 산행에 별 관심이 없다. 지금까지 올라본 산이라곤 학창시절 경주 토암산에 소풍가본 게 전부라 한다.시간 죽이고 돈 들여가며 힘들게 산에 올라 사서 고생하는 이유를 이해할 리가 만무하다. 일단 아내를 부추겨 동행하는 쪽으로 계획을 세우되 만약 아내가 따라 나서지 않으면 혼자라도 다녀올 각오를 다졌다.

     한달 전부터 계획을(아내를 꼬시기로) 세우고 저녁 식사 마치면 인터넷 산행기에 올려진 사진들, 특히 사진 작가들이 며칠씩 산에서 밤 낯을 꼬박 새우며 만들어낸 작품사진들을 자주 보면서
야! 지리산 멋있다! 끝내준다! 하면서 아내의 시선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관심하던 아내도 나중에는 거기가 어딘데? 우리나라야?

하면서 조금씩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간간히 필요한 장비도 주문하여 어떨 때 쓰는 물건인지 설명도 해주고 아내 등산화, 양말, 등산복 등을 내 멋대로 주문해서 신어보게 하고 입혀보기도 하면서 지리산에 가는 것을 기정사실화 시켜나갔다. 결국 내 작전은 성공했고 아기는 친정에 맡기고 2박 3일 일정으로 지리산 종주를 하기로 아내와 합의를 했다.

     2주전부터 아내에게 등산화를 신겨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는 훈련을 시키고 다시 꼼꼼히 산행코스와 산장 예약 등을 점검하는데 산행다운 산행을 처음 해보는 아내의 산행 실력을 가늠할 수 없어 일정을 확정 짓기가 쉽지 않다. 성삼재를 들머리로 하면 좀더 쉽게 산행을 하겠지만 처음으로 지리산을 접하는 아내가 산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고7년 전에 반월판 손상으로 무릎 수술을 받아서 나 역시 무릎이 좋지 않아 하산길이 걱정이 되는 터라 산 아래에서부터 시작해서 성삼재나 화엄사(상황을 봐서)로 내려오기로 계획을 세웠다.사실 지리산의 종주길이 꽤 먼 거리이기는 하나 힘이 드는 측면이나 성취감면에서 지리산 종주의 50%이상은 주 능선에 올라서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입산통제만(?)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가겠다고 다짐한 터라 일기예보도 확인하지 않았다. 그런데 출발 3-4일전부터 TV에서 7일~8일에 걸쳐 전국적으로 비가 많이 온다고 요란을 떨고 예년에 홍수, 태풍피해 등을 기획 보도하는 바람에 주변 지인들이 지리산 산행을 만류한다.
하지만
그래도 이번엔 꼭 간다
라고 마음을 다지고 계곡이 없는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으로 오르는 코스를 들머리로 최종 결정했다.

     출발 하루 전 퇴근해서 먹거리, 가스 등을 사서 배낭을 꾸리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하고 집에 들어오니 밤 10시가 넘어 몸이 무척이나 피곤하고 무릎도 약간 아프다. 부랴부랴 친정에 애를 맡기고 이마트에서 이것 저것 주섬주섬 사서 집에 와 배낭을 꾸리는데 아내는 애를 친정에 맡기고 와서 마음이 편하지 않는 듯 배낭을 꾸리는데 기분이 신통치 않다.

     1시 30분을 넘겨 배낭을 다 꾸려서 저울에 달아보니 물통을 빼고 내 배낭이 20kg, 아내 배낭이 6kg정도 나간다. 배낭을 들쳐 메보니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배낭을 다시 풀어 쓰임새가 적은 물건을 빼려고 해보았으나 폭우에 대비해 챙긴 물건이 많아 무게가 줄지 않는다. 잠을 청하려 누웠는데 호우 걱정도 되고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3시를 넘겨서 잠깐 잔 것 같다.


 


첫째 날: (중산리 - 천왕봉 - 장터목)


     6시에 일어나 아내를 깨워 간단히 요기를 하고 진주로 출발하여 9시 30분 중산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하늘엔 먹구름이 있긴 하지만 구름 사이로 가끔씩 햇살이 환하게 내리쬔다. 비가 와도 하루 종일 쏟아질 것 같지는 않다. 속으로 안도하고 비가 온 후 상큼한 지리산 풍경을 상상하며 내심 천왕봉에서 비경을 기대해본다.

     중산리 버스 종점에 도착하여 거목산장에서 산채 비빔밥을 한 그릇 비우고 나니 배가 든든하다. 마침 주인장께서 매표소까지 차로 데려다 주시고 차에서 내릴 때는 안전산행의 당부 말씀도 잊지 않으니 고맙기 그지없다. 뉴스에서 비가 많이 온다고 법석을 떨어서인지 매표소엔 산행을 준비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주변 식당 상가는 파리 날릴 정도로 한산하다.

      11시 20분 물통에 물을 채우고 드디어 출발! 아내에게 삐딱한 돌과 나무 뿌리는 밟지 말라고 일러주고 아내를 앞장 세워 중산리 계곡을 따라 오르는데 등산로에는 어제 내린 많은 비로 천지가 물줄기이다. 역시 첫 산행이라 아내는 처음부터 등산로를 잘 타지 못한다. 고속도로(?) 같은 등산로인데도 바로 옆으로 나있는 우회로도 아닌 우회로에서 자꾸 이쪽 저쪽하고 물어본다. 조금은 갑갑하여 내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한다. 얼마쯤 올라가니 칼바위를 지나 갈림길이 나오고 망바위쪽으로 본격적인 가파른 등산로가 시작된다. 아내는 그럭저럭 잘 따라온다.

      오늘은 장터목까지만 가면 되니까 시간은 넉넉하다. 아내가 초반에 무리하여 지치지 않도록 쉬엄쉬엄 올라가다 보니 벌써 내려오는 사람들이 간간히 있다. 50-60대 아주머니들이 대부분인데 생수통 하나에 수건 한 장 걸치고 산행하는 걸 보면 아마도 불공 드리러 다녀오신 분 들 같다. 아내가 배낭이 무겁고 거추장스러웠던지 저 사람들은 배낭 안 메고 다니네 하고 구시렁거리는데 그냥 못들은 척하고 길을 재촉한다.
    
      갑자기 경사가 상당한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계단 간격이 너무 높아 한 계단 한 계단 힘들게 올라 계단 끝에서 쉬고 있는데 남 녀 한 쌍이 올라온다. 창원에 사는 분인데 지리산에 자주 온다고 한다. 차림새나 배낭 꾸린 솜씨가 한눈에 봐도 산행을 잘하는 분들 같다. 인사를 하고 먼저 출발했는데 천왕봉 오르는 내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같이 산행을 하게 되고 마지막 천왕봉에 오르는 급경사 길을 앞두고 휴식하면서 시원한 과일 젤리를 나누어 줘서 맛있게 먹고 천왕봉에서 사진도 찍어줘서 고마웠던 분들이다.

      한참 동안 땀을 비 오듯 쏟으며 올라서니 평탄하고 어느 정도 높이를 실감할 수 있을 정도의 조망이 있는 곳에 도착한다. 조금 더 가니 큰 바위 밑에 샘이 있는데 수량이 풍부하다. 지리산에 들어 처음으로 샘물을 먹으니 물맛이 아주 좋다. 아내에게 물을 마실 거냐고 물으니 처음에는 땅에서 물을 퍼먹으니 이상했던지 안 먹겠단다. 그러나 잠시 뒤 내가 물 맛이 끝내준다고 하면서 서너 잔을 벌컥벌컥 마시는 걸 보더니 자기도 먹겠다고 해서 물을 퍼 주니 마셔보고는 물이 시원하고 맛있다고 한다. 아내는 이후로 종주 끝날 때까지는 샘 물을 아주 잘 먹었다.

     로타리 산장이 가까워 오니 싱그러운 숲 내음을 압도하는 화장실의 암모니아 냄새가 먼저 느껴진다. 미숫가루, 건빵, 핫브레이크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있는데 올라오면서 만났던 남녀가 뒤늦게 도착한다.

     여기서부터 경사가 더 가파르기 때문에 스틱을 꺼내서 한 개는 아내에게 주고 스틱 사용법을 일러줬다. 한참 가파른 돌길을 오르고 나니 널찍한 경사진 바위 위로 등산로가 형성되어있고 조금 비껴 서서 조망이 시원한 바위가 있어 사진을 한두 장 찍고 쉬어가기로 했다.


[Canon] Canon PowerShot G3 (1/200)s F5.6

     골짜기를 따라 아래서 위로 안개가 자욱이 상승하면서 시원한 바람에 흩날리는데 물을 마시며 보고 있노라니 신선이 된 기분이다. 개선문을 통과하여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자 허벅지가 뻐근하고 배낭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데 힘이 들기 시작한다. 10년이 넘게 산행을 안 하다가 술 담배에 찌들고 운동부족에 시도 때도 없이 밤에 불려나가 일하던 몸으로 처음부터 20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오르니 오죽하겠나 싶지만 생각했던 것 보다 힘들고 숨도 차다. 반면 초행인 아내는 힘들다고 하면서도 제법 잘 따라오는데 나이 차이를 실감한다.
[Canon] Canon PowerShot G3 (1/625)s F4.0

     개선문을 지나 천왕샘에 오르기 전 급경사의 돌길을 오르다 쉬고 있는데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올라오고 있다. 산행 장비는 전혀 갖추지 않고 일상 생활에서 입는 반바지, 운동화, 스포츠 양말, 허리색, 그리고 한 손에 들려있는 조그만 생수통이 전부이다. 빠르게 올라왔는지 허벅지 근육이 터질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데 3-4명의 손에 들려있는 생수통을 보니 모두 텅 비어 있었다. 내 물통에는 물이 1L가득 들어 있고 아내의 물통에는 400ml 남짓 남아있어 아내의 물통을 대학생들에게 건네 주었더니 한 명이 덥석 받아 들더니 순식간에 300ml가량을 마셔 버리고 남은 물을 친구에게 건네 주는데 모자랄 것 같아 내 물통의 물을 반쯤 더 건네 주었더니 두세 명이 더 나누어 마셨다. 물을 먹으니 살 것 같다고 하면서 근처에 샘이 있느냐고 묻길래 조금만 더 가면 천왕샘이 있고 요즘 비가 와서 물이 많이 있을 거라고 일러주었다. 학생들은 중산리에서 1시쯤 출발했는데 우리를 따라잡았다며 고무되어있다. 남이 힘들게 지고 올라왔던 물을 얻어 마시고도 고맙다는 말 한마다 없이 먼저 올라가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씁씁했지만 어차피 천왕샘에 도착하면 버릴 물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힘들게 올라 천왕샘에 도착하여 물을 마시는데 물 맛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여기서 다시 창원에서 오신 분들을 만났는데 이분들은 천왕봉 부근이나 중봉에서 비박 할거라고 물을 충분히 준비하고 있었다. 수량이 많아 세수도 하고 수통에 물도 교환하고 마지막으로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천왕봉으로 오르는데 경사가 엄청나다.

     드디어 천왕봉에 도착하니 먼저 올라갔던 대학생들, 외국인 2명 그리고 창원에서 오신 2분이 사진 찍고 나름대로 정상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Canon] Canon PowerShot G3 (1/1250)s F4.5


[Canon] Canon PowerShot G3 (1/1250)s F4.5


[Canon] Canon PowerShot G3 (1/1250)s F4.0


     오늘 천왕봉에서 대자연이 연출하는 경관은 그야말로 비경이다. 안개와 구름이 시시각각 교차하고 구름 사이로 햇볕이 새어나올 땐 마치 하늘에서 서치라이트을 비추는 듯한 모습이다. 가끔은 뭉게구름 사이로 눈이 부시게 파란 하늘도 보이기도 하고 태양이 구름 뒤에 숨어서 살아 움직이는 구름의 실루엣을 멋있게 연출하기도 한다. 우리를 환영이라도 하듯 중봉쪽으로 정상 표지석 바로 아래 불룩 솟은 바위 근처로 작은 무지개도 잠시 보인다.

     항상 발 디딜 틈 조차 없이 많은 인파로 붐비던 천왕봉이지만 오늘만큼은 정말 한산하다. 바람도 세지 않아 반팔셔츠 바람에도 시원할 정도로 불어줘서 천왕봉의 비경을 오래도록 감상할 수 있다. 생전 처음으로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 마침 장엄하게 연출되는 천왕봉의 비경을 만끽하는 아내의 흥분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뿌듯하다. 아내 만한 산 친구도 없다던데 지리산 매력에 흠뻑 취해서 앞으로 좋은 산 친구가 되어 주길 기대해본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창원에서 오신 2분과 우리 4명만이 천왕봉을 지키고 있었다. 정상 표지석의 한 면에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와 다른 면에는 지리산 천왕봉 1915m라고 쓰여있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얼싸안고 어루만지고 정상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였음을 한 눈에도 짐작하리만큼 정상 표지석에는 손때가 묻어있고 맨질맨질하게 윤이 나있다. 우리도 정상석의 앞 뒷면을 배경으로 동서남북으로 돌아가면서 사진을 찍고 이분들과 작별 인사을 하는데 이분들은 낙조을 보고 간다고 계속 천왕봉을 지키고 있겠단다. 부러움을 뒤로하고 제석봉으로 길을 재촉했다.

     통천문을 지나 내려오는데 수술 받지 않은 정상 무릎의 바깥쪽이 뜨끔뜨끔 아프기 시작했다. 아마도 반대측 무릎이 신경이 쓰여 오르면서 정상이었던 다리 근육을 많이 사용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으나 통증이 계속된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25km이상인데 내심 걱정이 되고 최악의 상황에서 어느 쪽으로 탈출할까 혼자 방정맞은 생각을 하다 보니 고사목 지대에 이른다.

     예전엔 앙상한 고사목들 사이로 바위들이 들어나서 더욱 황량했는데 출입통제 덕인지 키가 그만 그만한 초목들이 빽빽이 들어차있고 등산로를 따라 울타리가 세워져 있어 마치 목장 길을 걷는 것 같다. 사진 몇 장 찍고 장터목 산장에 도착하는데 등산객들이 거의 없어 한산하다. 서너 팀들이 대기자로 등록하였는지 매점 앞 의자근처에서 서성이고 있다. 분명 인터넷 예약상황을 확인 할 때는 이미 예약완료 상태였는데 ----.

     취사실 밖 나무 탁자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밥을 해본다. 아내는 내가 예전에 산에 자주 다녀서 밥을 잘 짓는 줄로 알고 있어 손을 놓고 있다. 오늘 삼층밥을 만들어버리면 아내 앞에서 망신 당하게 되므로 바짝 긴장(?)을 하고 예전에 밥짓던 경험을 되살려 본다. 일단 쌀을 불리기로 하고 수통에 남아있는 물을 코펠에 부어 쌀을 담가놓고 낙조를 감상하였다. 백무동쪽으로 둥근 태양이 주변으로 구름을 붉게 물들이며 지고 있다. 그렇게 장관은 아니지만 편히 쉬면서 감상하니 좋다.

     아내는 춥다고 재킷을 꺼내 입었는데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다. 아무래도 첫 산행에서 무리한 모양이다. 내 재킷과 판쵸우의까지 덮어주고 소주를 한잔 따라 주니 조금 낫다고 한다. 조금 후 자리배정을 받고 담요를 대여 받아 자리에 깔아두고 밥을 지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해서 버너를 들고 취사실로 들어가 심혈을 기울여 불 조절을 해서 드디어 밥을 완성했다. 코펠 뚜껑을 열고 밥알을 떠서 먹어보는데 긴장된다. 다행히 밥이 아주 잘 되었고 코펠 바닥에도 밥이 전혀 타지 않았다. 마침 옆에서 중년의 아저씨들이 요란하게 밥을 하고 있는데 밥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휘발유버너로 밥을 하는데 화력조절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덕분에 아내 앞에서 기 좀 살았다.

     잠시 뒤 산장지기 중 한 명이 발전기가 고장 나서 일직 소등을 하고 제한된 곳만 불을 밝힐 수 있다고 한다. 다행히 취사실은 계속 불이 들어온다고 하여 집에서 준비해온 양념돼지 불고기에 소주 한 병을 아내와 함께하는데 맛 최고! 분위기 또한 그만이다. 여기서는 돈이 많으나 적으나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최고다. 

     잠깐 잔 것같은데 시끄러워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안되었는데 코고는 소리 이 가는 소리에 더하여 민감한 아저씨 한 분이 잠을 못 자겠다고 계속 불만을 토해낸다. 코고는 소리보다는 그 아저씨의 신경질적인 소리가 더 거슬려 도저히 잠을 이를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서 무수히 많은 별이 쏟아지고 남 북으로 길게 늘어선 은하수와 함께 반달에서 조금 모자란 달이 덩그렁 떠있다. 달빛이 은은하고 상당히 밝아서 랜턴 없이도 산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기에는 오늘 일정에 무리가 될 것 같아 3시쯤 출발하여 촛대봉에서 일출을 보려고 원래 계획을 세웠었다. 조금 기다려서 아내가 일어나면 출발하기로 하고 혼자 달빛에 젖어 산장 주위를 산책하였다. 3시가 다되어 가는데 아내가 일어나지를 않는다. 여자들만 자는 틈을 비집고 아내를 깨울까 생각하다가 그만두고 다시 누워서 기다리기로 했는데 순간 잠이 들었나 보다.

     뒤척이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6시 30분이 지나고 있다. 젠장! 일출은 물 건너 갔네 하고 일어나서 나와보니 천왕봉 일출을 본 사람들이 오늘 일출이 정말 장관이었다고 한다. 더불어 옆에 계시던 프로사진작가도 최근 들어 보기 힘든 일출이었다고 맞장구를 친다.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려면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데 여기까지 와서 일출을 놓치다니---.

    
 나야 예전에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4번 정도 일출을 본적이 있다. 아내에게 장엄한 일출광경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진한 아쉬움이 밀려든다. 아내는 아직도 안 일어났다. 이제는 챙겨서 출발을 해야 하므로 체면 무릅쓰고 숙소로 들어가서 자는 여자들 뜸을 비집고 아내를 찾아 깨웠는데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주변 다른 여자들도 매 한가지다. 이 사람들 산에 왜 온 거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둘째 날: ( 장터목 ~ 연하천 )


     7시 20분 세석산장을 향하여 출발하는데 벌써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고 조금 가니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연하봉 근처에 오니 등산로가 햇살에 노출되고 전망이 확 트인다. 가끔 잘 다져진 흙 길이 나오니 걷기가 그만이다. 주변으로 이름 모를 야생화와 초목들 사이로 고사목들이 삐죽 삐죽 장승처럼 서있는데 기괴한 형상의 바위 틈에 간신히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어우러져 색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대학시절 30kg 가까이 되는 배낭을 짊어지고 화엄사에서 아침에 출발하여 11시간 만에 장터목까지 오다가 결국 이 근처 어디선가 탈진하여 꼼짝도 못하고 누워서 어두워지는 하늘만 한참을 쳐다봤던 기억이 난다. 자꾸 뒤돌아 보면서 그 자리를 확인하려고 하는데 기억이 희미하여 정확히 찾을 수 없다. 전망이 좋은 바위에 올라 산과 골짜기가 바다를 이루며 웅장하게 펼쳐진 지리산 능선을 감상하고 지리산의 등대격인 반야봉을 배경으로 찰칵! 하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Canon] Canon PowerShot G3 (1/1000)s F4.0


     촛대봉을 앞두고 약간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어제 아팠던 무릅이 다시 아프기 시작한다. 연신 아픈 다리를 허공에 뿌려보면서 점검하는데 영 시원치 않다. 촛대봉에서의 조망은 언제나 시원하여 가슴이 탁 트인다. 특히 드넓은 평원의 한가운데 다소곳이 자리잡은 세석산장은 주위 경관과 잘 어우러져 보는 이을 편안하게 해준다.

     산장을 그냥 지나치려 하는데 아내가 화장실을 간다고 하기에 물통의 물도 교체할 겸 샘터로 내려갔는데 물이 엄청나게 많아서 서너 명이 동시에 등목을 해도 될 만큼 물이 콸콸콸 품어져 나온다.

     영신봉을 오르는데 산장 관리 직원 두세 명이 비닐봉지를 들고 등산로 주변의 쓰레기를 줍고 산행을 방해하는 웃자란 초목을 정리하여 우리 갈 길을 편하게 해준다. 앞서거니 뒤서가니 하면서 간단히 인사를 하고 가는데 가슴이 흐뭇하다.

     칠선봉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무릅 통증이 시작된다. 계단을 내려설 때마다 아픈 쪽 다리가 구부러지면 힘을 줄 수 없을 정도로 무릎이 아프다. 이거 큰일이다. 갈 길은 멀고 아무래도 일시적으로 아픈 상태가 아닌 듯싶다. 무리하지 않도록 자주 쉬면서 가니까 선비샘까지 무척이나 지루하다.

     이정표에는 선비샘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기록이 없어 중간에 홀로 올라오는 사람을 만나 선비샘까지 얼마나 남았냐고 물어보니 그 사람 왈
지리산에 그런 샘도 있나요? 처음 들어 보는데요! 라고 한다. 머리가 ! 황당하기도 하고 순간 우리가 백무동에서 올라오는 비 지정 등산로 쪽으로 길을 잘못 들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왔으면 선비샘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예전엔 선비샘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야영을 해서 꽤 넓은 공터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오랫동안 통제하는 바람에 숲이 무성해져 찾기 힘들어졌나? 라고 생각도 해본다. 어제부터 지리산에는 이상하리 만큼 등산객들이 없어 마주치거나 우리를 추월해가는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어 갈림길을 무심코 지나치다 샛길로 빠졌나 하고 지나온 길을 되 집어 생각해보거나 등산로 오르내림, 넓이, 산행 흔적 등이 분명 주 능선길이 맞다. 한참을 더 가니 단체 산행객들이 노래를 부르며 올라오고 있어 다시 물어보니 조금만 더 가면 된단다.

     선비샘에 도착하니 아내가 힘든 모양이다. 배도 고프고 지친 모습이 역력하다.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면서 30분 가량 쉬고 출발하니 아내는 기력을 회복하고 잘 가는데 나는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진다. 벽소령 산장을 1.5km남짓 남기고 드디어 아픈 쪽 무릎이 심하게 고장 난 모양이다. 더 이상 다리를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하다. 급기야 아내에게 줬던 스틱 한 개를 건네 받아 양 스틱에 의지하여 힘들게 길을 계속 간다. 여기서부터 고행의 산행이 시작되었다.

     옛 군사 작전도로에 들어서면서 길은 평탄해지는데 탁 트인 조망이 시원한데 한 쪽은 폭파로 바위가 흉측하게 찢겨 속살을 드러내고 그 아래로 조각난 바위들이 나뒹굴고 있다. 반대편 벼랑 쪽으로는 돌을 쌓아 올려 석축으로 길을 떠받치고 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석축의 높이가 상당하다. 도로가 만들어지기 전 등산로가 어떠했을까 상상해보는데 폭파 전 바위 사이를 넘어 나 있었을까? 아니면 바위 밑을 돌아가는 비탈길이었을까? 좀처럼 그려지질 않는다. 아내는 누가 이 높은 곳에 이렇게 돌을 쌓아 석축을 만들었는지 대단하다고 하면서 대성리 의신 방향으로 장엄하게 굽이쳐 흐르는 수많은 골짜기와 능선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자아낸다. 저 아래 골짜기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이던 역사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도로는 성삼재, 정령치, 밤머리재를 관통하는 도로와 함께 지리산 허리를 동강내는 도로로 60년대 군사용 작전도로로 만들어 졌지만 지금은 용도 폐기된 지 오래다. 성삼재 도로의 영향은 환경파괴의 차원을 넘어 사람들 머릿속에 지리산의 개념도 마저 바꾸어 놓은 것 같다. 산 꾼들이야 서북능선 봉우리들이 지리산 능선의 일부 인줄 알고 즐겨 찾기도 하지만 일반인들 중에는 지리산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리산 종주를 성삼재~천왕봉이라고 하는 이도 있고 화엄사에서 시작해야 진정한 종주라고 고집하는 이도 있지만 성삼재 도로 덕분에 지리산 종주의 개념도 이미 성삼재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인식된 지 오래다. 태극종주라는 용어도 지리산 종주 개념의 변화에 따라 지리산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등장한 산꾼들의 애 뜻한 마음에서 나온 고집스런 집착이 아닐까? 벽소령을 가로지르는 도로마저 포장되었다면 벽소령에서 노고단가는 길 역시 지리산의 변방으로 떠밀려 천왕봉에 이르는 지역으로 지리산의 개념이 축소되고 벽소령에서 천왕봉까지 당일 더블 왕복종주와 같은 웃지 못할 산행기도 오르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몸 따로 마음 따로 걷는데 평지 길인데도 땀은 비 오 듯하며 한쪽 다리는 질질 끌다시피 하며 산장에 도착하는데 통나무 의자에 앉으려 하니 무릎이 구부려지질 않는다. 시원한 사이다 1캔을 사서 나누어 먹고 쉬는데 음정마을 쪽으로 내려가는 탈출로가 마음을 심난하게 만든다. 벽소령이 전체 주 능선의 중간쯤 되는 위치이니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있다. 여기서 포기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고 체면을 구기게 된다. 더욱이 아내와 첫 산행을 이렇게 어정쩡하게 그만두면 다음에 산에 다시 가자고 말 꺼내기도 쑥스러울 것 같다. 하산 길 또한 아픈 무릎을 이끌고 내려가기는 만만치 않다. 여기서 그만둔다는 것은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아 계속 가기로 마음을 다져먹는다. 아내는 어떤 길을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전혀 감이 없는 눈치이다.

      여기서부터 연하천까지는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지루한 바위 너덜길이고 형제봉 오르는 길이 상당히 가파른 비탈길이므로 쉽지 많을 것이다. 스프레이를 뿌리고 파스를 붙이고 출발하니 한결 낫더니 100여 미터를 못 가서 전보다 무릎이 더 아프다. 이제는 다리를 전혀 구부릴 수 없어 끌고 가는데 돌팍이나 나무뿌리에 부딪히면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온다. 온 몸의 신경을 다리에 집중하다 보니 배낭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후 5시가 조금 못되어 평균 시간보다 1시간이나 늦게 연하천에 도착했는데 산장 앞 공터엔 여기 저기 천지가 물줄기로 어지럽다. 아내는 이제 다 온 거냐고 묻는다. 아니! 벽소령에서 여기까지 온 거리에 조금 더 가면 우리의 숙박 예정지인 뱀사골 산장이 나온다고 일러주니 아내도 맥이 풀리는 모양이다.

     다리가 아파서 꼼짝도 못하겠길래 아내에게 매점에 가서 돈을 지불하고 시원한 맥주 캔을 건져오라고 시켰더니 맥주도 파느냐면서 금방 희색이 돈다. 맥주 맛이 정말 좋아 캔 맥주를 마시고 나면 남는 시큼한 뒷맛을 전혀 느낄 수 없다.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게 맥주를 먹어본 적이 없다. 단숨에 맥주 한 캔을 다 비우고 나니 정신이 몽롱해지는데 앞으로 갈 길이 걱정이다.

     이런 속도로 가면 뱀사골 산장에 깜깜해져서 도착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고 아내의 부축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는 최악의 상황이 전개 될 수도 있다. 벽소령에서 음정마을로 탈출을 시도할 것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상태로 더 이상 가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산장지기에게 혹시 잠자리 여유가 있겠냐고 물으니 그럴 것 같으니 먼저 저녁식사를 준비하라고 한다.

     다행이지만 산행계획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천왕봉과 촛대봉 일출을 놓쳤으니 반드시 뱀사골 산장에서는 새벽에 일어나서 반야봉 일출보고 아쉬움을 만회하려고 했던 계획도 접어야 했다.
     단체 산행을 온 사람들과 어울려 소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맛있게 하고 후식으로 맥주를 서너 캔 더하니 피곤한 몸이라 그런지 금방 취기가 올라온다. 주변이 구상나무 숲으로 둘러 쌓여 별을 감상하기에는 연하천이 으뜸인데 오늘은 그리 신통치 않다. 잠을 청하는데 취기덕분인지 금방 깊은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마지막 날: (연하천 ~ 성삼재)


     얼마나 잤을까 몸에 오한이 들어 잠을 깨어 무릎을 구부려 보려고 하는데 완전히 굳어 버린 것 같다. 아파서 구부릴 수 가 없다. 이러다 헬기에 실려가거나 애꿎은 조난 구조대의 수고를 빌려야 할 것 같은 생각을 하니 걱정이 태산이다.

     걱정만 하고 있을 수 없어 들쳐 일어나 밖에 나와보니 단체 산행객 중 가장 고참인 분만 일어나서 고사목 기둥의 가지에 배낭을 걸어놓으시고 일찍 산행을 시작해야 하는데 일행들이 안 일어난다고 투덜거리고 계신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배낭을 정리하면서 죽으나 사나 가야 한다고 굳게 다짐하고 타이레놀 4알 먹고, 파스도 붙이고 스프레이로 무릎주위를 도배하고 무릎 보호 밴드를 세게 조여 맨 다음 출발하는데 처음 맞닥뜨린 계단에서 몇 계단 올라서니 굳은 다짐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아픈 다리를 전혀 쓸 수 가 없다.

     이제부터는 수술 받았던 오른쪽 한쪽 다리로만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쪽다리 근육만 사용하니까 힘은 배로 들어 평지나 내리막길에서도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수시로 돌부리에 등산화가 부딪히면 무의식 중에 비명이 입가로 세어 나온다. 이러다가는 영영 등산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생각이 엄습한다.

     경치 구경은 고사하고 땅만 쳐다보고 가다 보니 나뭇가지나 비스듬한 바위에 머리를 수없이 부딪힌다. 다행히 모자를 쓰고 있어 상처는 입지 않았으나 내 꼬락서니가 정말 한심스럽다. 스틱은 이미 스틱의 기능을 넘어 다리에 기부스를 한 환자들이 체중을 의지하는 목발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앉아 쉬면서 여기저기 부딪혀 페인트가 벗겨진 스틱을 보고 있으니 고마움에 어루만져보고 미끄러지지 않도록 더 조여본다. 아마도 스틱이 없었다면 중간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예전엔 산행하면 한번도 앉아서 쉬지 않고 주 능선까지 오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추월을 거의 허용하지 않았었는데! 하고 그 동안 체력과 몸을 관리하지 않은 자책성 넋두리를 늘어놓아 본다.
     어제 그제는 등산로가 한산하여 호젓한 산행을 하였는데 오늘은 토요일이라 성삼재에서 몰려오는 산행객들과 자주 마주친다. 파스 냄새 진동하며 쩔뚝거리며 모습을 보이기도 싫고 산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미리 비켜서 보지만 나중에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거나 둔탁한 등산화 소리가 가까워지면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아내는 뒤따라오면서 가끔 키득 키득 웃는데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딸아이 재롱이 생각나서 그렇다며 아기가 보고 싶다고 한다.


[Canon] Canon PowerShot G3 (1/322)s F4.0


     화개재까지만 가면 뱀사골 계곡을 따라 내려갈 수 있다. 예전에 도벌 꾼들이 만들어 놓은 산판도로를 다듬어 놓은 등산로로 초반에만 잠깐 가파르고 그 다음부터는 완만한 경사에 넓고 평탄한 길일이다. 뿐만 아니라 많은 계류가 만들어 놓은 수많은 소(沼)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수려한 계곡을 끼고 내려가므로 탁족도 하면서 쉬엄쉬엄 갈 수 있겠다는 몽상을 갖고 천신만고 끝에 화개재에 도착했다.

     나무로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있고 마침 나무그늘아래 의자도 마련되어있어 일단은 숨을 돌리기로 한다. 토끼봉을 내려오는데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앉아서 쉬는데도 주변 나무에 땀이 배어 흥건하다. 여기서부터 뱀사골 계곡을 따라 반선까지는 9km, 주능선을 타고 노고단까지는 6.5km정도된다. 노고단에서 성삼재까지 3km 남짓 되니 거리상으로는 어느 쪽이나 비슷하다. 토끼봉을 내려오면서 뱀사골 계곡으로 탈출하려고 마음먹었으나 아직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사실 삼도봉으로 오르는 554(?)계단과 막바지 가파른 급경사 길만 올라 채면 노고단까지는 뱀사골 하산길과 비교하여 그리 어려운 길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여 30분 정도 쉬고 나니 죽기야 하겠나 싶어 종주를 끝내야겠다는 쪽으로 자꾸 마음이 기운다. 어떤 분이 사진 찍어 주기를 청하니 아내가 사진을 찍어주는 동안 이정표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 그냥 직진하여 먼저 앞서간다.

     이제 554 계단 앞에 도달하여 계단을 따라 위를 바라보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 둘, 셋 - - - 스물 하나, 이십이, 스물 셋 - - - 처음에는 세기 시작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통증 때문에 셈을 까먹고 계단 난간을 붙잡고 쉬기를 여러 번 중간쯤에 쉴 수 있도록 의자가 마련되어있는 곳에 도착하는데 한쪽 다리로만 올라오다 보니 허벅지 근육이 터질 것만 같다.

      내 몰골이 너무 안되 보였는지 쉬고 있는 분들 중 한 분이 아트라스 1개를 건네 주는데 배낭에 2개의 핫브레이크 남아 있으므로 받지 않으려고 하는데 한사코 건네 주시길래 고맙게 받았다. 옆에 한 분이 서서 담배를 태우는데 담배 한 모금이 어찌나 간절하던지 체면 무릅쓰고 담배 한 개비 얻었다. 상의 호주머니에 넣으려 하니 땀에 젖어 못쓰게 될 것 같아 다시 꺼낸 다음 구부러지지 않게 고이 배낭 주머니에 간직하고 삼도봉에 오르면 피우리라 하고 다시 계단을 올라선다. 아내는 먼저 올라가서 계단 끝에서 쉬고 있다가 카메라에 고전 분투하는 내 모습을 열심히 담고 있다.

[Canon] Canon PowerShot G3 (1/50)s F3.2


     이제는 정상이던 다리도 근육이 바르르 떨리고 무릎도 아프기 시작한다. 마지막 죽을 힘을 다해 드디어 삼도봉에 올라서니 운무가 자욱하여 불무장등쪽으로는 보이는 게 없고 바로 앞 반야봉을 안개 띠가 감싸더니 금방 정상를 삼켜버린다.

     배낭을 벗어 던지고 홀로 삼도봉 바위의 가장자리로 비켜 앉아 계단 오르며 적선 받은 담배를 꺼내 한 모금 들이마시니 머리가 띵하고 눈물마저 핑 돈다. 그야말로 무아지경! 몸은 구름 위에 떠있는 듯하고 아무 생각도 안 난다. 식은 땀이 등줄기 타고 흘러내려 몸이 전율이 느껴진다.

     등뒤에서 한 분이
담배 맛 정말 죽이겠다 라고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는데 목소리를 들어서는 50대 이상일 것 같고 아마도 금연을 하신 모양이다. 힘도 없고 미안하기도 하여 뒤돌아 보지 않고 계속 노고단가는 능선을 응시하고 있는데 바로 앞에 다람쥐 한 마리가 노닐고 있어 아내가 카메라에 담으려고 열심히 쫓고 있다.

[Canon] Canon PowerShot G3 (1/1250)s F4.5


[Canon] Canon PowerShot G3 (1/158)s F4.0


     청동 삼각뿔을 배경으로 아내 사진을 찍어 주고 다시 출발하려는데 뱀사골로 올라온 청년 둘이 반야봉 가는 길이 힘드냐고 물어본다. 가파른 오르막이라 힘들기는 하지만 그리 멀지 않으므로 시간 상으로 충분하고 반야봉 정상에 서면 힘들게 올라온 수고의 갑절의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이야기하고 우리는 못 가는 아쉬움을 실어 보낸 후 길을 재촉했다.

     소금장수(?) 무덤을 지날 무렵 갑자기 산악 마라톤을 하는 팀이 나타나더니 정신을 빼놓고 저만치 앞서간다. 계속해서 한 두 명씩 우리를 추월해가는데 십여 미터 전부터 길을 비키라고 한다. 다리가 아파서 몸의 중심 잡기도 힘든데 옆으로 비켜서려니 괜히 심통이 난다. 페이스 조절이나 기록 때문이겠지만 배낭을 메고 가는 산 꾼들도 나름대로 리듬을 갖고 산행하는데 운동장도 아니고 너무 무례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임걸령까지 가는데 너무나 지루하고 힘들어 평지에서도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임걸령샘 물맛은 지리산 샘 중 으뜸인데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물맛도 모르겠다. 임걸령부터 노고단 안부까지는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저 멀리 나뭇가지 사이로 노고단 안부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광경이 보이고 더 가니 웅성웅성 사람들 소리가 들린다. 오후 2시10분 노고단 안부에 도착하니 연하천에서 꼬박 8시간 10분이 걸린 셈이다.

     역시 인내의 열매는 달다.
 
     너무도 오랫동안 무심했던 나를 지리산 신령님이 호되게 담금질하신 것 같다.  여기부터는 굴러가도 가겠다 싶어 안도의 한숨을 돌리며 저 멀리 천제단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성삼재를 향하여 내려선다.

[Canon] Canon PowerShot G3 (1/400)s F4.0


[Canon] Canon PowerShot G3 (1/400)s F4.0


     지금까지 잘 참고 따라오던 아내도 성삼재까지 돌길이 힘든 지 이 모양으로 길을 만들어 놓은 거냐고 계속 투덜거리며 내려오는데 오히려 나보다 뒤쳐지고 자꾸 그 자리에 서 버린다. 좌측으로 화엄사 내려가는 이정표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아내에게 코재의 내력을 설명해주고
더는 못 가겠으니 혼자라도 갈래? 하고 놀려주면서 성삼재 휴게소에 이르렀다.

     간발의 차이로 구례 행 버스를 놓치고 나니 2시간을 기다려야 다음 버스가 있다. 어찌 4시경에는 차가 없는지 시간표를 보며 의아해하다가 시간이 많으니 하산주를 한잔하기로 했다. 파전과 동동주를 시켜 먹는데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정말 엉터리다. 삼분의 일 정도 마시고 자리를 일어나 택시요금을 물으니 원래 이만 오천원인데 이만원에 가겠다고 하여 택시에 지친 몸을 싣고 다시 속세로 내려오는데 악전고투했던 기억이 아스라하여 잠 속으로 빠져든다.

추신:
 산행기에 다분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작성된 부분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봐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