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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산에서 바라본 북한 따의 개성시 송악산 인듯-




다시 찾은 橋桐島(교동도) 하늘은 맑고 청명해 북한 땅이 한눈에

20180530320호      2018-07-07()


자리한 곳 : 인천시 강화군

지나온 길 : 월선포-남산포-교동읍성(남문)-연산군적거지-교동향교-화개사-봉수대-화개산-회개산성-연산군유배지-조선시대한증막-대륭시장-난정저수지-수정산 한증막지석리 망향대-오현 마을버스정류장

거리및시간: 7시간 52(08:38~16:30) : 총거리 25.8km

함께한 이 : 계백 단독산행

산행 날씨 : 가을 하늘처럼 맑고 화창한 날


술 때문에 소중한 사진을 날렸고 나쁜 날씨로 북한을 보지 못한 그리움에 다시 찾은 교동도

지난 24() 목우산행을 끝내고 하산()주가 건아하게 오른 상태로 3일간의 산행사진으로 카메라 메모리카드가 가득해, 정상적으로 컴퓨터에 옮겨놓는 도중에 졸음이 쏟아지는 상태라 흐리멍덩해진 정신으로 눈이 침침해 삭제버튼을 잘못 누르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러 소중한 사진 30%(교동도分)를 날리고 고민하다, 좋은날 다시 찾기로 자신에게 했었던 약속을 지키고자 기회를 엿보던 참이었는데, 마침 특별한 선약이 없는 주말이라 실수가 없도록 치밀하게 준비하고 새벽에 일어나 날씨를 확인한다. 강화터미널에서 교동도를 운행하는 군내버스(0730분)를 이용해야 계획한 산행에 차질이 없다는 계산으로 배낭을 꾸려 집을 나선다.(04:45)

 

이동경로: 응암동-753버스(동교동 삼거리정류장)-3000버스(강화터미널)-70버스(교동도 월선포)

목적지 까지는 집에서 최단거리로 70km에도 미치지 못한 거리이나 만성적 교통체증과 바로 연결되는 교통편이 없으므로 대중교통편을 이용하려면 두 번 환승이 필수이며, 강화터미널에서 교동도가는 노선버스는 하루 11회 운행하는데, 문제는 배차간격이 평균 90분이라 배차시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지 못하면, 자택에서 출발해 목적지까지 도착하기만도 5시간가까이 소요됨으로, 3시간 초반에 도착이 필수조건이다. 따라서 환승하느라 대기시간을 줄이려는 노력은 필수다. 참고로 강화터미널에서 교동도 가는 첫차가 0610, 2번차 0730분이다. 그러므로 첫차 이용은 물리적으로 불가하기 때문에 2번차에 반드시 탑승해야만 일정을 원만하게 소화 가능한데, 첫차 출발시간이 늦은 지하철을 이용하면 강화 가는 첫차시간을 맞추지 못하기에, 시내버스로 동교동삼거리 정류장으로 이동, 강화행(3000) 첫버스를 기다려 강화터미널에 닿는다.(07:17) 터미널에서 잠시 기다려 70(교동도)버스에 올라선다 서울시내버스처럼 혼잡하지 않고 승객이 서넛뿐이라 편한 자리를 골라 앉는다. 검문소(해병대)와 교동대교, 교동면소재지를 경유해 오늘산행의 시작지며 버스종점인 월선포에 도착, 확인하니 희망대로 자택을 출발해 3시간 20여분만이라 흡족하.(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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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E78B4B5B470DD6304B29 -월선포구에서 잡아본 석모대교, 교동대교 풍경-



교동대교

2008925일 착공하여 201471일에 개통하였다. 교각을 탑에서 연결한 케이블로 지탱하는 사장교(cable-stayed bridge, 斜張橋)로 만들어졌다.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와 교동면 봉소리를 연결하는 다리로 길이는 3.44km이고 2차로로 만들어졌다. 교동도는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으로 관할 부대의 통제를 따라야하고 출입증을 받아야 교동도로 진입할 수 있다.             -두산백과-

 

喬桐島(교동도)

교동의 원래 이름은 대운도(戴雲島)이다. 고림(高林) 또는, 달을신(達乙新)이라고도 불렀으나, 고구려 때 처음으로 현()을 두어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하고, 신라 경덕왕 때 교동현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고종 32(1895)에는 읍을 폐하고 강화와 합군하였다가 다음해 7월에 다시 읍으로 하고 군수를 두었다. 그때 당시는 교동 동서남북면 4개면과 송가면을 합쳐 5개면이었다가 국권침탈 후(1910)에 송가면은 송남면으로 개칭하고, 본도는 4개면 13개로 구획되어졌다. 합군(1914) 이후, 송남면은 삼산면에 부속되었고 교동은 화개면과 수정면, 2개면이 되었다. 1934년 이후, 화개·수정면을 합면하여 지금의 교동면이 되었으며 현재 법정리는 13, 행정리는 17개이다.

본도는 인천광역시 서해안에 놓여 있으며 동남은 양사면, 삼산면, 서도면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북으로는 불과 5km 밖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북한과 군사분계선을 이르고 있어 황해도 연백군이 눈앞에 보인다. 도서라고는 하지만 비교적 평야가 많으며 해안선은 평탄한 편이고 해저는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하다본래 강화 본도와 교동도를 오가는 교통수단은 매시간 1회 운영되는 배편이 유일하였는데, 20147월 인천시 강화 본도와 교동도를 잇는 교동연륙교가 개통되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선착장 주변에 설치된 그네의자에서 조반을 해결하며.....

바닷가 조망을 온전하게 즐길 수 있도록 설치된 편의시설물인 선착장의 그네의자에 배낭을 풀어 따뜻한 커피한잔과 간편식, 사과 반쪽으로 조반을 해결하며 내고향 하의도 풍경과 흡사해 편안한 마음이다. 지난번(622) 방문때에는 흐린 날씨 때문에 가시거리가 매우 짧아 불만스러워 5시간 남짓으로 단축했었는데, 오늘은 교동도를 다시 찾아왔음을 축복하는 메시지로 가을보다 하늘이 높고 맑으며, 바람까지 살랑거려 여름 날씨로는 드물게 선선해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칭하는 최고의 안보관광지 교동도 구석구석을 제대로 둘러보는데 최소 8시간이상 소요되겠다는 나름의 계산을 해보며 30분가량의 식사를 끝내고 산행을 시작한다.(08:38)

 

월선포 선착장

교동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하점면 창우리와 월선포 선착장에서 교동도를 오가는 배를 타던 교동도의 선멀(배를 만드는 마을이라는 뜻)의 작은 포구로 달밤에 선멀에서 바라보면 고요한 바다위에 둥근 달이 비치니, 바닷물 속의 달님, 하늘에 떠 있는 월광이 겸하여 노송이 바닷물위에 비추는 광경이 달의 신선이라 하여 月仙(월선)이라 하였다며, 이백이 놀던 자리 같다고 해서 월선포라 했다는 믿거나말거나,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포구다. 강화나들길 9코스 교동 다을새길 시작점이며 선착장에서 바라보는 교동대교와 강화본도의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평화의 섬 교동도 안내 편집-

 

해안선과 주요포구들의 넉넉한 풍광들

교동교회를 건성으로 돌아보고 월선포구 선착장에서 나들길을 출발한다. 강화본섬으로 연결되는 두 개의 교량(교동대교, 석모대교)과 비릿한 갯내음이 진하게 후각을 자극하는 서해바다는 나에겐 고향이며 호연지기를 길렀던 본향이다. 바밧물은 강렬한 햇볕으로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평화롭고 고요한 섬마을 포구에서 바라본 별립산이 해발에 비해 웅장하게 다가온다. 남북 군사대치로 긴장의 현장에서 유적과 역사현장 남산포 가는 방조제를 고집스럽게 따르며 바다와 뭍을 체험하느라, 제초작업이 안된 여러 곳에서 고단했고 힘들었으나 낚시꾼과 만남는 즐거움으로 4km가량 거리를 이동해 삼도수군통어영지가 자리했던 남산포에 이른다.(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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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나들길 월선포에서 남산포로 가는 방조제-


남산포 三都水軍統禦令址(삼도수군통어영지)

교동도 진망산(남산) 끝자락에 위치한 포구로 대변창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이 드나들던 곳 대빈창으로 사용된 곳에서 유래한 것이다. 송나라 사신이 왕래할 때 배가 무사함을 제사 지내던 사신당을 진망산 아래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인조 7(1629)에 경기 수영이 설치되고 인조 11년에 (1633)에 삼도수군통어영지가 설치되어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이후 고종까지 존속 하였다 전해오나 현재 흔적은 전혀 없고 썰물 때 석축이 잠깐 모습을 드러내고 ,배를 묶어두던 함선계류석만이 남아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말해 준다.                       -평화의 섬 교동도 안내 편집-

 

교동도 관광안내도는 빛 좋은 개살구

혹평일지 모르겠으나 정교하지 못하고 대충 만든 강화군 홍보물 “2018 올해의 관광도시, 평화의 섬 교동도관광안내지도에 대해서 한마디로 표현하면 빛 좋은 개살구‘다. 지면은 크고 넉넉한데 내용은 빈약하며 地圖(지도)는 읽어내기 어렴고 오래전 부터 주민들이 사용하고 있는 모든 샛길이 정밀해야 하는데 생략된 곳이 많았고, 등산로도 수정 보완해 말 그대로 안내도 한 장이면 교동도 관광이나 산행을 완벽하게 할 수 있어야 기본이며, 방문객에 대한 예의이다. 불편을 느끼지 않아야 기쁘게 다시 찾아오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란 단어에 합당한 교동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되는 이유는 안내도 때문에 수차례 속어로 '알바'하며 이런 xxx했기 때문이다.

 

교동읍성 교동면 읍내리 148

교동읍성(인천시 기념물 23)은 지방행정 관아가 소재한 고을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한 성곽으로 조선 인조7(1629)에 교동에 경기 수영을 설치하면서 처음으로 축조된 것으로 삼도수군통어영의 본진이다. 둘레는 870m, 높이는 2.4m인 옹성 세 곳과 치첩 네 곳이 있으며 둘레에는 동, , 북에 세 개의 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무지개 모양의 남문의 홍예문 부분만 남아 있다.  근거리에 자리한 황룡우물터와 연산군적거지도 경유해 읍내리비석군 경유한다                             -평화의 섬 교동도 안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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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6A994C5B470DDB31158F -우리나라 최초로 창건된 교동향교(무려 891의 역사를 자랑한다) -


喬桐鄕校(교동향교) 교동면 읍내리 148

고려 인종(仁宗) 5(1127)에 창건된 것으로 한국에서는 가장 오래된 향교이다.

충렬왕(忠烈王) 12(1286)에 제거(提擧) 안유(安裕)가 왕을 따라 원()에 가서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상을 처음 그려왔고, 김문연 등을 중원에 보내 선현과 72제자의 상을 그리게 하였으며 각종 제기와 악기, 육경과 제자백가의 책, 역사서를 사들여 고려로 가지고 오게 했는데, 김문연 등은 서해 방면으로 귀국하면서 지금의 교동에 기착, 가지고 온 기물과 책들을 교동향교에 잠시 봉안하였다가 개경으로 이안하였다화개산 북쪽 계곡에 있던 것을 조선 광해군(光海君) 원년(1609) 711일에 교동현감 이직이 당시의 경기관찰사 김신원에게 큰 바람으로 향교의 지붕 기와가 모두 날아가고 나무는 모조리 뽑혔으며, 향교의 명륜당과 동서 재()가 한꺼번에 바람에 무너졌음을 첩보하였고, 이에 대성전에서 위안제를 거행할 것을 요청하였다. 현종(顯宗) 8(1667) 각 도의 여러 고을에 배향 신위를 옮겨 정하도록 하면서, 교동현감 구문치가 대성전을 보수하고 양무를 신축하여 105현을 배향하고자 청하면서 위판을 만드는데 필요한 밤나무와 향축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교동향교도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영조(英祖) 17(1741)에 강화부사 조호신(趙虎臣)이 화개산 남쪽 계곡,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예전의 향교터는 지금의 고구리에 남아있으며, 현재도 구향교골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관학(官學) 즉 국립학교라는 향교의 성격상 기본적으로 수령이 통치하는 관아와 가까운 곳, 읍치(邑治)의 중심에 위치하여야 했는데, 교동향교와 같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관아와는 다소 떨어진 곳에 향교를 중수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고종 27(1890)에 동서 재실을 중건하였다1931년에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의 위패 및 유교의 현인 16위와 한국의 유학자 18위를 봉안하고, 동서무에 각각 한국의 9현을 봉안 배향하였는데, 1949년에 모화사상을 축소하자는 전국유림대표회의의 결의에 따라 16현 동서 배향이 가운데 주자(주희)와 정자(정이)를 제외한 14위의 위패를 매향하고, 해동 18현을 승봉하여 제향하였으며 봄과 가을에 행하던 석전(釋奠)을 폐하고 공자의 탄일인 음력 827일에 기념 석전을 봉행하다가, 3년 뒤인 1952년에 공문십철과 송조 4현을 복위하는 동시에 석전도 다시 부활시켰다. 한국전쟁으로 향교 건물이 퇴락한 것을 1960년에 중수하였으며, 동서 재실과 내외삼문의 개건 및 단청 보수가 1981년에 이루어졌다.   -위키 백과-

 

화개사 교동면 읍내리

고려 때 창건되었으나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341(고려 충혜왕 2) 묵은 이색이 독서를 하던 곳이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평화의 섬 교동도 안내지도-

 

봉수대 교동면 고구리 산 233

화개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현재는 낮은 석단이 잘 보존되어있다. 과거 강화본섬의 덕수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동쪽 하점면 봉천산 봉수대로 전했다고 전해진다.                       -평화의 섬 교동도 안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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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남산포 주변 풍경-


화개산


교동도의 최고봉으로 높이는 259m의 산으로 행정구역상 교동면 고구리와 읍내리로 나뉘어져 있다 고려시대 목은 이색이 화개산을 전국 8대 명산중 하나로 꼽았으며 산정상에서 북쪽으로 북한 황해도 연백평야 예성강 하구 송악산이 남쪽으로는 서해를 비롯한 석모도의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평화의 섬 교동도 안내 편집-


화개산성 강화군 향토유적 제 30

. 외성을 갖춘 산성으로 총길이 2,096m에 이르는 포곡식산성이다 적의 침입시 방어를 위한 병력 집결지로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조선 세종 이전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 23927월에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개성을 빼앗았다. 9월에 북으로 거란을 정벌하여 남녀 5백명을 사로잡고, 사로잡혀 있던 본국백성 1만병을 설득하여 귀국시켰다10월에 백제의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방이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왕은 군사를 일곱 갈래로 나누어 20일동안 공격한 끝에 함락시킨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화재산성이 관미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평화의 섬 교동도 안내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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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551D425B470DE11765FF -화개산성 안내판, 한평 남짓의 공간에 위리안치 연산군-



연산군유배지 교동면 고구리 산233

중종반정으로 150692일 교동으로 폐위되어 그해 116일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유배되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귀양이라고 하면, '위리안치'가 떠오르는데, 안치도 죄에 따라 세가지로 구분된다. 본향안치는 정치적 배려로 죄인의 고향에 유배 보내는 것이고, 주군안치는 유배지 행정구역 안에서 활동을 어느 정도 자유롭게 허용해주는 것이며, 위리안치는 집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겹겹이 쳐서 일종의 차단벽을 만들어 외부와 완전히 시켜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위리안치를 받은 연산군(재위:1494~1506)1476년 성종의 적장자로 태어나 18세에 불행의 씨앗을 품고 즉위해 12동안 이미 알려진대로 '폭정의 아이콘'에 걸맞게 두번의 사화(무오,갑자)를 일으켜 무고하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興淸亡淸(흥청망청)이란 말이 유래하도록 낭비와 사치가 극에 달해, 중종반정으로 폐위 교동도에 위리안치 됐다. 연산군은 교동 유배 생활 두 달 만에 30세이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연산군유배지터 아래 개울 공터에 조선시대 한증막(주민에 증언에 따르면 "어릴 때 동네 어른들이 불을 지펴 한증막에서 목욕을 즐기는 것을 보았단다" 따라서 1960년대 말까지 주민들이 사용했다고 추정된다.)에 들려서 교동면의 심장인 면사무소와 113년의 자랑스런 역사를 간직한 교동초등학교(19065월 설립)등 주요 기관들이 자리한 소재지에 도착했다.(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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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세트장 처럼 추억으로 남아있는 대룡시장-


대룡시장의 역사 교동면 대룡리

6,25전쟁 당시 실향민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향에 있는 연백시장의 모습을 재현한 골목 시장이다. 지금은 시장을 만든 실향민 어르신 대부분이 돌아가시고 실향민 2,3세대와 원주민들이 시장을 지켜나가고 있다. 처음 피란민들이 장사할 때는 움막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새마을 운동 때 슬레이트 지붕과 양옥으로 된 건물을 지어 지금의 시장 모습을 갖췄다. 골목 구석구석 보이는 간판들에서 6~70년대 모습을 볼 수 있다. 대룡시장 대부분 가게는 주말 장사를 한다. 주말이면 농사지은 농산물을 가지고 나와 파는 주민들부터 외지에서 온 상인들까지 실향민들의 터전으로 들어온 대룡시장 자체가 드라마 세트장 역할로 활기차며 생활수준이 높아진 현대인들이 마음의 쉼터로 즐겨 찾아 많은 세월은 흘러갔지만 추억만은 그대로 남아있는 곳으로 활기차다.       -신문기사 편집-

 

북한 연안군과 마주한 전망대(난정저수지)에서 오르자 46해병대 시절 추억이 떠오른다.

드라마 세트장을 옮겨놓은 느낌의 대룡시장을 돌아보는데 20여분 남짓을 투자했다 여기까지는 화개산을 중심으로 문화유적지를 돌아봤으니, 이제부터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여정으로 넓은 농지와 남북이 무력 대치하는 곳이라 긴장감이 느껴지는 안보관광지를 만나볼 시간이다 교동의 유일한 교차로에서  벌판을 가로지르며 직선으로 뻗어나간 신작로를 따라 양갑리로 향한다.(12:49)

사면이 물로 둘러싸인 작은 육지가 사전적 ‘’에 대한 정의 처럼 '섬'하면 일반적으로 물부족과 농토가 없거나 협소할 것이란 선입견이 보통인데 교동도는 전혀 다르다. 육지의 면단위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은 넓은 들판이 아스라이 펼쳐지며, 전국최고수준으로 깔끔하게 경지정리된 농지와 고구저수지와 난정저수의 풍족한 지표수, 사통팔달로 이어진 농수로와 수리시설이 잘 정비된 비옥한 농토가 넘쳐나는 축복받은 풍요의 고장임을 발로 확인하며 난정저수지기념탑 팔각정에서 다리쉼하며 늦은 점심을 때운다.(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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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땅 해주의 수양산이 아닐까??? 난정전망대(저수지) 풍경-


난정저수지의 넓은 자락으로 이어진 비포장로를 따라 수정산 조선시대 한증막을 돌아본다. 난정저수지 끝자락에 자리한 전망대 2층에서 바라본 북한 땅을 보다 가깝고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망원경이 설치됐다, 반공이란 이데올로기가 확고하진 못했으나 국방의무는 자원입대해야겠다는 신념으로 해병대(2여단)복무시절, 혹독했던 내무생활과 강추위, 배고픔에 짬밥 통으로 자꾸만 눈길이 가던 생각만으로도 치가 떨리지만, 서운함은 세월 속에 사그라지고 농축된 추억만 남아 주마등처럼 스쳐가 눈시울을 적신다.

 

망향대 교동면 지석리 산70번지

남북분단 이전에 교동도와 연백군은 같은 생활권으로 왕래가 잦았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북한의 연백군(현재 연안군 배천군)등 황해도에서 온 피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고 1960년에 물길 건너 연백군이 눈앞에 잡힐 듯이 보이는 이곳에 비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평화의 섬 교동도 안내지도-

 

초행길이던 지난(6월 22일)번에는 물어물어 찾았던 지석리 망향대는 25,000/ 1 지도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음은 그래도 이해하지만, 강화군에서 제작한 교동도 관광지도에 밤머리산 자락에 망향대 표기가 되어 있으나 찾아가는 도로나 방법의 기록들이, 전혀 없으니 아쉽다. 보름 전에 다녀온 곳이니 찾아가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두번째로 찾아온 望鄕臺(망향대) 도착한다. 북한과의 거리는 고작 3km 남짓의 한강하류 물길과 철조망이 가로막은 북한 땅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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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머리산 자락의 망향대에서 바라본 북한 땅이 지척이다-


주말이며 날씨가 좋은 관계로 가족단위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분단된 나라의 안보관광에 도움을 주려는 목적으로 설치된 성능 좋은 망원경을 통해서 북한의 산야를 자세하게 살펴보고 싶다면, 두 대의 망원경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그러자면 차례를 기다리는 대열에 서서 상단시간을 기다려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얼마간의 기다림 끝에 차례가 돌아와 망원렌즈를 통해 당겨서 바라본 북녘 땅에는, 오가는 초병들과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지 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좋은 이웃 처럼 친근감이 느껴진다. 더 오래도록 살펴보고 싶었지만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망원경을 넘겨준다.(16:15)

 

에필로그

시간이나 거리상으로도 7km 남짓의 일주도로를 따라 인사리 북진나루를 돌아보고 고구저수지를 경유해 상용보건진료소에서 마무리하고 70번버스를 기다리면 되는 새로운 코스를 진행하더라도 일몰전 18시까지 도착하는데 무리가 없으나, 꼭 그렇게 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으며 볼거리도 없으므로 망향대에서 일정을 접는다. 800m가량 뒤돌아가 오현 마을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16:30)

20여분을 기다리자 마을버스가 도착했고 오현마을 주민 1명이 버스에서 내리기를 기다려 승차했는데 미니버스의 승객으론 내가 유일했다. 교동면사무소 정류장에 하차할 때 까지 마을버스에 타는 승객이 아무도 없었으니 사실상  25인승 전세버스를 대절한 결과이니 어찌 평범한 일상이겠는가?  여기서 시작된 행운은 계속되 최소의 기다림으로 매끄럽게 대중교통 환승이 연결되고, 평소와는 다르게 48번국도의 원활한 교통흐름으로 예상보다 일찍 귀가한 기분 좋은 문화유적탐방산행을 매조지다.             --.


~오라는 곳도 불러준 이도 없지만 찾아가 안기면 언제나 포근하기만 한 을찾아서~


2018-07-12

계백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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