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 閑談 17

세월의 모래시계 위에서- - - 


 

 

 J형!

 어느새 겨울 레이스가 펼쳐지는 입동(立冬)입니다. 살아가는 나날들이 속도를 가늠 할 수 없을 만큼 숨 가쁘게 지나가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애년(艾年)을 훌쩍 넘기고 나니 가을 햇살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아쉬움만 남기고 줄달음치는 세월이 한없이 원망스럽습니다. 더구나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했다는 초조함에 사로잡힌 탓인지 불안한 마음 감출 수 없이 옹울(壅鬱)하기에 산으로 갑니다. 
 

 무슨 일이든지 심지어 유희(遊戱)도 반복적인 것은 권태감을 불러일으켜 싫증을 유발하기 마련입니다. 어쩔 수 없는 처지로 원거리 산행을 못하기에 나태함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릴 때, 불쑥 치미는 울화를 가라앉히려고 가까운 무등산을 찾아 나서지만 한결같은 답습산행은 감칠맛이 떨어져 흥취가 반감되므로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이 허전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운동에는 별다른 열의를 보이지 않고 자꾸만 산으로 가고픈 마음에 집주하는 것은 산행의 매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주말에 가까운 산에 다녀오지 않으면 어딘가 공허하기에 산에 가는 것이 의무적인 일과로 습관화되었나 봅니다. 
 

 산행은 오르면 오르는 만큼 또다시 내려가는 것이 철칙이기에 진정한 삶의 의미를 터득하는 체험의 시간입니다. 반복적으로 이어진 오르내림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웁니다. 그리고 힘겹게 정상에 서면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짜릿함으로 환호하지만 그 매력에 도취하여 오랫동안 서있을 수 없음을 자각케 하여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덧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J형!

 수없이 오르내리던 산길이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계절의 변화에서 다소나마 즐거움을 찾아보려고 애써보지만 고달픈 삶의 무게가 버거운지 별다른 감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시작한 발품이기에 꾹 참고 쉼 없이 오르니 온몸에서 땀이 흥건하게 배어나면서 기분이 점차 상활(爽闊)해져 또다시 산행의 묘취에 매료되기 시작합니다. 
 

 쉼터를 거쳐 약수터에서 시원하게 목을 축이지 않고 지나치면 왠지 서운하기에 언제나 그러하듯이 오늘도 습관적으로 그곳에 들려 한모금의 물로 갈증을 달래봅니다. 이곳에서 옛 절터가 있는 산봉우리까지는 수많은 바윗돌들이 흩어져 엄청나게 광활한 비탈을 이루면서 태고의 신비를 불러일으키는데 이곳을 덕산너덜 또는 너덜겅이라고 부른답니다. 
 

 언젠가는 이 돌무더기를 타고 올라가고 싶었는데, 오늘은 날씨마저 화창해 좋은 기회를 잡은 것 같습니다. 왜 좋은 길을 두고 고생을 사서 이곳으로 오르려고 하는 마음이 솟구칠까요? 아마도 지나치게 단조로움이 반복적으로 이어지기에 매너리즘에 빠져 무력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 그 늪에서 헤어나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형께서는 잘 아시겠지만 너덜이란 화산암이 풍화되면서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윤회가 진행되고 있는 자연학습장입니다. 화산 폭발로 인하여 생긴 용암이 지표상에서 급속히 식으면서 수축현상이 일어나 바위가 수직으로 갈라지는데 마치 뜨거운 팥죽이 식으면서 금이 가고 가뭄에 논바닥이 갈라지면서 굳어가는 현상과 같은 이치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바위틈에 스며든 물이 얼었다 녹았다 하는 팽창과 수축과정을 반복하면서 바위조각들이 떨어져내려 산비탈을 덮으면서 만들어진 것이 너덜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끝임 없이 계속되므로 영겁의 세월이 지나면 지금과 같은 바윗돌들은 없어지고 흙으로 덮인 모습으로 변한다고 하니 대자연의 섭리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J형!

 너널로 들어서니 엉켜있는 돌무더기가 허물어지면 어쩌나 두려움이 앞서지만 침착하게 바윗돌 사이를 조심스럽게 뜀박질하면서 오르다보니 암벽을 오르는 기분을 자아내 점차 무섬증이 사라집니다. 바윗돌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들어가면 갈수록 한데 뒤엉켜 안정감을 주기에 한결 여유가 생깁니다. 경사가 심함에도 서로가 서로의 버팀이 되기에 무너지지 않는 자연의 조화로움에 경외감이 가득합니다. 
 

 바윗돌을 조심스럽게 오르다보니 “너덜은 오랜 시간 동안 풍화 작용으로 조각난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세월의 모래시계다. 이러한 거대한 시간의 흐름에 비춰보면 인간의 삶이란 그야말로 하루살이에 불과하다.”라고 너덜을 아주 멋스럽게 표현한 윤제학의「산은 사람을 기른다」라는 책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금방이라도 와르르 허물어질 듯 보이지만 바윗돌 하나하나가 서로 버티고 서있기에 쉽게 무너지지 않고 너무나 의연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극명하게 선을 긋고 막말을 해대면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반목과 질시로 일관하면서 논쟁의 소용돌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애써 안타까움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과연 내 자신은 지금쯤 누구의 버팀목이 되고 있을까? 어엿한 버팀목의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한심스럽게 누군가에게 기대어있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는 아닐까? 어디쯤에서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가름해보려고 마음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또 비춰봅니다. 산정 가까이에 다다르니 누군가가 앙증맞게 쌓아놓은 돌탑에 돌 부스러기를 쑤셔 넣으면서 어서 빨리 지리산 연가를 부르고 싶다고 염원해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버팀목 역할을 다하려면 말하기 보다는 듣는데 더 치중하고, 누군가에게 시키기 보다는 먼저 하려고 노력하고, 무엇인가를 받으려고 원하지 말고 작은 것이라도 베풀려고 애쓰고, 누구의 잘못을 꼬집기 보다는 칭찬하고 격려하는 자세를 견집(堅執)해나간다면 비록 우리들의 삶의 여로가 짧은 가을 햇살이라고 하지만 반드시 알찬 매듭을 알알이 맺어 나가리라 확신합니다. 


 

 

 J형!

 그리도 곱디 고왔던 단풍도 이젠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어 애련한 모습을 바라보니 새삼스럽게 봄은 산자락에서 시작되어 산정으로 올라가지만 가을은 산꼭대기에서 출발해 내려오는 자연의 순리를 상기시켜 삶의 가치를 일궈나가는 시간들이 너무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줍니다. 
 

 수많은 추억거리를 남겼던 가을도 우리 곁에서 가물가물 먼발치 멀어져갑니다. 만추의 낭만이 너무나 아쉽기에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싶어 짙은 가을 향기를 한껏 들이켜 마셔봅니다. 그래도 떠나가는 가을이 못내 아쉽기에 이별의 노래를 부르렵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