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속의 영봉들, 육십령에서 향적봉까지
2004. 6. 25/26 흐림
백두대간 종주를 알차게 하기가 쉽지 않다. 남들은 쉽게말해 이래라 저래라 하지만 시간이 허락하는 것도 다행이고 체력이 감당해주는 것만도 홍복이라 생각하면서 그럭저럭 한구간씩을 해결하고 있다. 어쩌다 하나씩 빠진 구간은 곳감 꿰듯 달아놓고 날 잡아 하나씩 빼먹자하니 그 또한 백두대간의 별미처럼 느껴진다.
이산 갈까 저산 갈까 망설이는 것 보다 가야할 산을 만들어 놓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 여러모로 다른 성취감이 있지않을까 생각한다.
오늘 다녀올 육십령 빼재구간도 뜸들인지 오랜 구미당기는 구간중 하나다. 덕유산종주산악회가 마침 있어 편승할 수 있게 되었고 덕유평전도 지금쯤은 어떨는지, 작년 8월 가족과 종주한 후 궁금해진 원추리밭은 잘 가꿔지고 있는지 마음 설레이며 버스에 올랐다.
널찍한 자리와 깔끔한 분위기에 사뭇 만족해하며 편안한 잠을 청해보려했으나, 이런 일이 있나... 기력 넘치는 버스가 GPS를 달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는데 망아지처럼 요동방정을 떨고, 바람가르는 굉음은 귓전을 불안하게 울리며 잠자리날개라도 달면 솟아 오를 것 같은 속도감을 느끼게 하고, 속도 줄이라는 음성멧세지가 안내방송처럼 계속 흘러나오는 데야 할 말이 없다. 그 과속방지장치라는 것이 내가 달면 안전운전이고 남이 달고 달리면 안전불감증처럼 느껴지니 이 무슨 놀부심통인지 모르겠다.
어쨋거나 마음조이며 삽시간에 육십령에 닿기는 했으나 산꾼들은 편안히 잠시라도 눈을 부쳤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테풍이 얼쩡대다가 기세를 꺾고 물러나는 바람에 육십령엔 한숨을 내쉬듯 고요하고 안개로 자욱하다. 올 초 육십령에서 시산제를 올리면서 오늘 있을 육십령-빼재구간을 무탈없이 통과할 것을 기원한 지극정성이 내심 든든한 믿음이 되고있으나 3주간을 산행없이 텡텡 놀다가 긴 종주길에 나섰으니 하물며 산신령인들 이 고행길은 면할 방책이 있으랴.
3:00 육십령에서 목책을 넘어서면서 빼재까지 멀리 갈 길손들이 앞장을 서고 나도 뱁새걸음으로 황새 따르듯 일행 뒤를 총총히 따르며 빼재길목인 백암봉까지 여차저차 가겠노라고 출사표를 그려둔다. 그런데 실상은 야간에, 안개에, 안경에, 빠른 걸음을 하기엔 다 걸리적거리는 것들 뿐이다..
신발끈이 풀려 조여매는 사이 선두일행을 짙은 안개속에 사라져 흔적조차 없고 어느 바위에서 갑자기 길 잃은 사슴되어 다람쥐 체바퀴 돌 듯 오르내림질만 하다가 옆으로 비스듬히 매인 얇은 밧줄을 발견하고는 부지런히 쫓아가보는데 매정한 사람들은 기척도 없이 사라졌다.
3:40 치받는 숨을 꾹꾹 참으며 한참을 오르니 할미봉이다. 조망판 설명이 무색하게 사위는 아직 어둠속을 벗어나지 못한 채 구름속에 가물가물한 모습들이 그나마 초장에 과한 길손에게 탄성과 달콤한 휴식을 준다.
할미봉 암릉을 빠져나와 새벽잠 깬 산새들과 동행하며 바라본 서봉은 끝이 어딘지 계속 험상한 이빨만 내밀고 좀처럼 정상을 내주지 않는다. 어깨높이에 다다른 남덕유정상은 안개가 바삐 드나들며 이런저런 조화를 부리는 것이 필시 비경이라도 보여줄 것 같은 기대를 갖게 한다.
5:35 서봉에서, 구름에 묻힌 육십령일대가 잔잔하니 넋을 빼앗고 삿갓봉 넘어 무룡산에 이르는 등줄기도 구름속을 들락거리며 모처럼 찾은 산객에게 길을 여하히 내줄것인지 고심스러운 듯 한 표정이다. 서봉이라는 큰 고비를 넘고 연신 내쉬는 한숨소리에 오장이 요동하고 등짝에 흥건한 땀줄이 바삭해질 쯤 범꼬리풀이 나풀대는 풀밭길을 지나 철계단을 내려와 남덕유를 오를 것인가를 망설이다가 월성재로 틀었다.
남덕유엔 두 차례나 올랐던 터라 먼길 두고 지체하고싶지 않다는 핑계를 붙여대기는 했으나 어째 월성재를 향한 걸음이 개운치 않고 뒷덜미가 거북스럽다.
삿갓봉이 생긴 모습처럼 만만치 않은 오름길이다. 서봉오름에 과했던 탓인지 헛개비같은 등짐조차 지탱하기가 버겁고 겹겹이 포개 쓴 삿갓처럼 벗기면 또 다른 삿갓봉이 계속 걸음품을 더 내라고 손을 내민다.
비로서 삿갓봉 갈림길에서 남덕유를 지나친 부담에 떠밀려 삿갓봉 오름로 들어섰다.
삿갓봉. 조그만 공간에 홀로 섰는 정상석이 얼마나 반갑던지 기대고 앉아 남은 물 한모금 털어 넣으며 요동치는 가슴이 평정해지기를 기다린다. 구름은 더 짙게 산을 덮고 이따금 봉우리들을 삐쭉삐쭉 들춰낸다. 밀려드는 시장끼에 못 이겨 서둘러 삿갓재로 내달린다.
8:20 삿갓재에 당도하니 부지런한 선두일행이 아침식사를 마치고 주섬주섬 길차비를 서두른다. 길가에서, 정상에서, 볼일 많은 길손과 대략 시간차가 20여분 정도라면... 부지런히 따라가면 백암봉에서 빼재로 진입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지체없이 계단아래 샘물로 내달린다. 염기로 버적대는 얼굴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108배하는 심정으로 오르는 계단을 세어보니 150계단이다.
컵라면에 쑥개떡 몇 조각을 아침상으로 펼쳐 놓으니 성찬이라고 자찬했던 대간팀들과의 아침상이 사뭇 그리워진다. 막걸리 한잔생각이 간절하고 일과처럼 얻어마시던 커피 한잔도 그립다. 오늘은 입호강은 뒷전이라 단촐하게 식사를 마치고 무룡산으로 향한다.
무룡산 오름길 양편에 펼쳐진 초지에는 작년만치나 무성한 원추리가 몇 주 후에 화원을 이룰 만발의 준비를 하느라 힘을 모으고 있다. 아직 이렇다할 화신이 없는 채 온갖 식물들이 생명력있게 몽우리를 키우고 있는 모습들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이것이 덕유산의 어머니같은 품이 아닌가 싶다.
경관좋은 무룡산에 올랐으나 구름의 심통이 여전해 물 한 모금으로 숨을 달래고 동업령으로 향했다. 변함없이 펼쳐지는 야생화군락지대를 지나며 동업령이 가까워지자 가벼운 차림으로 한가롭게 산책나온 산객들이 보인다.
10: 50 동업령, 안성과 거창을 넘나드는 길목에 세워진 이정목이 색다른 운치를 준다. 여느 때 같으면 바람맛이 제법일텐데 오늘은 한점 스침도 없이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쉬어가자니 달갑지 않은 파리떼의 문안인사만 문전성시를 이룬다.
12:00 백암봉에 이르자 안성에서 온 산님들 일행이 점심을 거나하게 마치고 헐떡거리며 오르는 걸인을 자책하는 듯 맞는다. 밤새 빗속을 쒜돌아다닌 개꼴같은 바지갈랭이며 염장에 쩔은 허기진 몰골에 대한 배부른자의 여유인지 인정인지,
‘이미 우린 다 먹었는데 어쩌지요?’
‘남은 반찬이라도 드릴까요?’
‘어디서 오시는 겁니까?‘
답할 기력도 없는 질문공세를 이으며 시선을 일제히 위아래로 훑는다.
스틱에 의지해 어정쩡하게 서있는 초라한 모습이 참으로 기이하였을 것이리라.
육십령에서 온다하니 놀라는 표정들이고 반찬을 줘도 먹을 밥이 없다는 말에 측은지심이 솟는지 혀를 차며, 이거라도 드시라고 포장한 뭔가를 들고 주저하는 것을 받아 들춰보니 튀김에 나물에 ...옹기종기 정성껏 준비한 반찬거리 한줌씩이라..
중봉 오름 어디쯤 바위에 걸터앉아 요기라도 해야겠구나 싶어 고맙게 받아들고는 생면부지의 작별인사에 손사레까지 하고 중봉으로 향한다. 당초 11시까지 백암봉에 이르면 빼재로 들리라하고 열심히 왔건만 지체한 시간이 너무 많아 백두대간 들머리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돌아서자니 아쉬움이 한 짐 가득하다. 덕분에 널널한 시간에 여유를 찾았지만 몸은 천근으로 불어나 다리를 짓누른다.
늘어나는 나들이객들은 오손도손 몽켜다니며 평화로운 덕유평전을 활보하고 중봉에 이르는 안개 잔잔한 초지에는 철 이른 원추리 몇송이가 첨병처럼 솟아 세상물정을 정탐하는 듯 하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숨겨졌던 능선길이 제모습을 찾자 작년 이맘때 소녀처럼 풀섶을 헤치며 달려오던 집사람이 생각난다. 지친자의 환상일께다. 길가에 늘어선 꽃들(털쥐손이)의 환영을 받으며 향적봉에 올라 오늘의 대 장정을 무사히 마치는 줄 알았다.
1:00 향적봉.
칠봉을 거처 삼공리로 하산하는 길을 친절히 알려주신 ㄱ산우회회장님께 감사하게 생각하며 길을 찾아 나섰다. 이후 2시간여의 정글탐험같은 알바를 한 후 백련사 입구로 겨우 탈출해 어렵사리 덕유산 종주를 마치긴 했으나 향후 같은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알바과정을 간략히 소개합니다.
산우회대장님의 설명과 지도대로 스키슬로프의 s자 급회전지점에 들머리가 보이고 빨간 리플까지 달려있습니다. 의심없이 들어서 10여m가니 샘물이 있습니다.
샘을 지나 희미해진 길을 따라 한참을 가니 길은 산죽에 묻혀 자취를 감추고 이따금 노란 리본이 일괄성없게 붙어있습니다. 길은 찾을 수 없고 그나마 노란리본이 길인 줄 착각하고 계속 전진하다가 길이 없음을 한참 후에야 알았습니다.
이하 전형적인 조난의 패턴으로 백련사입구를 겨우 찾아 왔습니다만, 애초 스키슬로프에서의 입구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좀 더 슬로프를 따라 내려가서 들머리를 찾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 길을 처음 가시는 분께 주의를 요합니다.
아울러 ㄱ 산우회회장님께도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귀 산우회를 믿는 마음에서 동행하여 좋은 산행을 하고자 했습니다만 버스의 운행은 안전불감증의 여러유형을 안고 있습니다. 과속을 절제하여주시고 gps음성안내는 운전자만 earphone으로 듣도록 하고 산행인들은 잠시라도 눈을 부칠수 있도록 해 주심이 어떨런지요.
향적봉에서 칠봉가는 길에 대하여 제가 위에 설명한 들머리와 귀하가 설명하신 들머리가 다른 점이 있는지요. 독도에는 늘 오판이 있을 수 있음을 감안하시어 안전하고 확실한 길을 안내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오늘 함께 알바한 인원은 5명입니다.
안내산악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길안내와 사고방지에 최선을 다해야하는 줄 압니다. 귀 산우회의 경우 산행능력에 따라 1)삿갓재에서 황점으로 2)백암봉거처 빼재로 3)향적봉에서 칠봉거처 삼공리로 하산하는 세 부류의 산행을 안내했습니다만 안내인은 한명도 산행에 참여하지 않더군요. 산행중 혹 사고라도 있으면 어떤 대책이 있는지요. 불과 몇 명의 귀산우회회원과 초행손님을 받아들이고 산속에서 각자 알아서 하라는 처사는 안내산악회의 기본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두서없는 이야기를 산행기에 덧부쳐 죄송합니다. 안전산행에 만전을 기하고자 있었던 일을 고발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석기 드림
(꿀풀) ^
(범의 꼬리) ^
(긴산꼬리) ^
# 1 ^
# 2 ^
(원추리)^
#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