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 閑談 13

비 내리는 산길을 걸으면서 - - -  

    

 

 

 무덥다 무덥다 해도  올 여름 같은 땡볕더위는 난생 처음인 것 같다. 땀이 많은 탓으로 이래저래 올 여름은 무척이나 힘든 여름나기였다. 그토록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도 태풍 “메기”가 폭우를 몰고 들이닥쳐 뜨거운 열기를 단숨에 식혀버리니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코끝에 스며들어 계절의 흐름을 직감할 수 있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고 절기의 이치임을 새삼스레 실감케 한다. 이처럼 흐르는 세월은 두려움을 없애주고 편안함을 가져다주기에 자연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메기”는 엄청난 피해를 남기고 물러갔으나 수마가 할퀸 상흔을 복구하기도 전에 또다시 비가 내리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밤새도록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좀처럼 멈출 줄 몰라 산으로 향하는 열정을 조금씩 식혀간다. 이렇게 비 내리는 궂은날에는 방에 드러누워 부침개나 붙어먹으면서 책이나 뒤적거리면서 푹 쉬는 것이 딱 좋은데 무슨 역마살이 끼어서 야단법석을 떠는지 도무지 내 마음을 가름할 수 없다. 


 “친구들은 가지 않는데 왜 당신만 가려고합니까”

 “괜찮아 비가 오니까 조금만 갔다 올게요”

 동반산행을 약속했던 친구들이 비가 오니까 다음에 가자고 연락이 온다. 언제나 변함없이 산행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해준 아내마저 우중 산행을 만류한다. 그러나 한번쯤 빼먹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부산을 떨면서 비옷을 차려입고 산으로 나선다.


 비 내리는 산길은 적막감이 감돈다. 드물게 만나는 산우들의 모습에서 동질성이 느껴져 오랜 친구를 만나듯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청승맞게 비를 맞으며 산길을 걷는 산우의 마음도 내 마음과 같으리라 생각하면서 산정을 향해 터벅터벅 산길을 걸어간다. 


 비를 맞으며 산행하면 또 다른 흥취에 젖을 수 있다. 궁상맞게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모습이 남들이 보기에는 처량해 보이겠지만 빗소리를 벗 삼아 호젓한 산길을 걸으면 평소에 느낄 수 없었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또 다른 묘취를 만끽할 수 있어 이런 맛이 우중산행의 진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여정은 너무나 짧고 허망해서 흔히들 초로와 같은 인생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자신이 머지않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가는 나그네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면 마음이 홀가분해져 저절로 마음을 비우게 된다고 한다.

  

 누구나 마음을 비우게 되면 너그러워지고, 관대해지면 선량해지고, 착해지면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이기심과 탐욕스러움이 사라져 자신만만하게 거침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처럼 당당한 삶을 살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들의 소박한 염원일 것이다. 꿋꿋한 삶을 살아가려면 비움의 자세로 작은 것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 내리는 빗줄기는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이 교차되어 애절함이 알알이 배어있다.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일년에 한번 만난다는 칠월칠석이기 때문이다. 환희의 눈물과 또다시 떠나보낸다는 서글픔의 눈물이 어우러진 칠석날 비는 언제나 우리들에게 애틋함을 안겨주면서 사랑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사랑이란 많은 것을 알게도 하지만 많은 것을 잃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걸음걸이를 재촉한다.
 

 우리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생활과 생각과 행동을 단순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연속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삶의 틈바귀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명상의 시간을 가지면 진실이 보이고 세상이 똑바로 보인다. 사색하면서 멈춰 서야 비로소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바쁜 삶의 여정 속에서 잠시 틈을 내어 침묵하는 법, 정지하는 법을 하나씩 터득해 가는 것이 삶의 지혜일 것이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오르막길을 급하게 오르니 고어텍스 비옷도 흐르는 땀을 주체하지 못하고 눅눅해져 훌렁 벗어버리고 비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인생길을 서둘러가는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천천히 가는 사람만이 아름다운 것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바삐 서둘었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매사를 차분하게 생각하면서 순리대로 살아가는 태도가 중요함에도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자꾸만 성깔만 부리니 예사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일들을 굳이 돌이키지 않더라도 지나친 성급함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질곡의 시간 속에서 몸부림쳐야 했던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또다시 조급함에 쉽게 젖어드는 내 자신이 한없이 애처로워진다. 아무리 빗줄기가 세차더라도 급한 마음에서 벗어나 느긋하게 산길을 걸어가련다. 
 

 바쁜 삶의 여정에서 잠시 짬을 내어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지나친 기대감보다는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작은 것에서 소중함을 느끼는 것이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 무엇보다 시급한 선결과제일 것이다. 멈춤의 시간은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며 비움은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노란 망우초 꽃 한 송이가 빗속에 바라보니 유난스레 아름다워 보인다. 오래잖아 이 산길 숲에도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 올 것이다. 가을의 의미를 알기 전에 인생의 가을은 성큼 우리 곁에 다가설 것이다. 우리 모두 밀려오는 인생의 가을을 준비 없이 맞이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항상 산행하는 자세로 고달픈 삶을 헤쳐 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별다른 준비도 못했는데 어느덧 인생의 가을걷이가 시작되는 문턱에서 서성이는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인다. 그러나 그동안 흘린 땀의 대가를 거둬들이는 알찬 수확의 시기를 아무런 준비 없이 허망하게 맞이하여 당황하지 않도록 오늘도 다가오는 내일도 언제나 평상심을 잃지 않고 작은 것에 만족하면서 비움의 자세를 견지해 나가려고 무던히 노력하련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