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량도 지리산 여름산행기

 

10년만의 무더위 폭염이라고 한다.
금년 여름만큼 더운 여름도 없었다. 나는 종일 집에서 자고
 밥 먹고 쉬는 백수라서 더 그렇다. 직장에 나갈 때는
그래도 종일 에어컨이 들어와 시원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고
아무리 더워도 할 일이 있으니 신경을 곤두세워서 그런지
더운 정도를 잘 몰랐었다. 살인적인 더위와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니
아직도 정신이 멍멍하다...


                 더워서 한 숨도 잠 못자고 지샌 삼천포의 밤

 

가족과 함께 피서여행으로 경남 삼천포시에 온 것은 지난 8월 6일이었다.
지금은 사천시와 합쳐져서 사천시 삼천포항으로 불리지만, 이곳은 최근 남해와 창선도를 잇는

 삼천포대교의 개통으로 전국의 내노라 하는 여행가, 낚시꾼, 산악인, 식도락가가
 몰려들어 새로운 관광지가 된 곳이다.
마침 가을 전어가 인기를 끌어 시장에서 펄떡 펄떡 뛰는 전어를 아주 싸게 살 수 있는
행운을 만나 소금에 쳐서 구워먹고 전어회를 만들어 갖은 양념에 무쳐서 실컷 즐겼다.

 나는 3일을 연속 상주해수욕장과 거제도, 외도, 상족암, 남일대 해수욕장을 다녀와서
이제는 섬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섬 중에서도 가장 가깝고 배값이 싼 명승지인 통영시
사량도로 들어가자고 제의해 꿈에도 그리던 지리망산(지리산을 바라보는 산)의
산행기회가 주어졌다.

 

아직 백두산 등반을 못한 애숭이가 남한에서라도 유명한 사량도 지리산에 가게 되어
너무나 흥분되었다.  아침 9시에 떠나는 배를 타려고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해도 너무 더워서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동서가 잠을 못 이루고 음주를 하는 바람에
 덩달아 술자리를 합세하게 되었고, 결국 새벽까지 이어져 한 여름밤 복더위와의 싸움이 전개되었다.

 복날이다 복날이다 해도 이번 중복과 말복은 예외가 아니었다.

 

잠 한숨 못 자고 7시에 기상하여 낮에 먹을 것, 수영복, 돗자리, 취사도구를 챙기고 출발하여

고성으로 가는 지방도를 달려 상족암 근처 용암포구로 향했다. 여기서 9시10분에 출발하는 다리호

(페리:차를 12대까지 실을 수 있음)를 타고 20분만에 사량도 내지마을에 하선했다. 월요일이라서

승객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바다 낚시하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한국의 산하 사이트에서

복사해간 산행안내를 보아 알고 있는 반대편의 돈지포구까지 차를 타고 가서 단독 종주산행을 감행했다.

 같이 간 처남과 동서는 산을 올려다보더니 포기한단다.

나는 이런 기회가 다시 오기 힘드니 혼자서라도 가겠다고 우겼다.

         

                  사량도 지리산 초입에서 만난 먹구름과 소나기

 

마을버스기사와 동네어른에게 산행초입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산을 쳐다보며 의아해한다.

" 이런 날에는 가지 마세요..." 한다.
" 왜요????" 나는 물었다.
" 땡볕에 산에 가면 혼나요..."
" 그래도 산행은 할 수 있지요???"
육지에서 흔히 겪는 일로 입산금지기간은 아닌 것 같았다.

 

아침 10시 30분---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우산을 챙기고 출발했다.
제기랄--- 모처럼 사량도를 찾아왔더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검은 먹구름과 비까지 동반하는

악조건이라 처음에는 종주코스를 못 가면 중도에 하산하리라 마음먹었다.
사량초등학교 돈지분교 운동장을 거쳐 좌측으로 난 소로길로 들어섰다. 늦어도 저녁
5시까지는 하산해야 한다. 배를 만일 놓치면 일행이 민박을 해야 한다. 나는 첫 발걸음부터
다리가 무거웠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시간 내에 하산을 완료해야 한다.
모처럼 멀리 남해안까지 휴가 와서 여러 사람에게 불편을 주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지도를 보니 처음 올라가는 지리산(해발 398m)까지 2.1k--- 1시간 반이다. 계속 좌측계곡을

돌아가면 된다. 8월의 계곡은 잡초가 우거져 길이 잘 안보일 정도다. 풀을 헤집고 논둑같은 길을

 오르려니  20여분만에 산의 초입에 도착했다. 어찌나 덥고 습한지 모기가 물어 다리가 엉망이다.

처음 만나는 안부---등산안내판이 주등산로임을 알려준다. 벌써 11시30분이다.
여기가 사량도 윗섬의 맨 끝이다.  앞으로 장장 10k 이상을 달려야 한다. 비는 더욱 세차게 얼굴을

때리고 바람 한 점도 없는 징그러운 날씨다. 다리가 날 죽이는 게 아니고, 일기가 날 죽인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맛도 없이 빙빙 돌아가기만 한다.
사위를 보니 작은 소나무와 참나무만 무성하다.
발에 밟히는 곤충을 자세히 보니 검은 메뚜기다. 아직 오염이 덜 된 오지에서나 볼 수 있는
풀벌레들... 그리고 귀가 아프게 우는 매미소리...
 능선을 넘어가니 이제서 겨우 돈지리 쪽 바다가 보인다. 점점이 무인도가 보이고 배가 한가히

지나간다.

         

                      절리형 너덜바위와 칼바위 능선을 타고 오르락내리락

 

갑자기 소나기가 몰려와 잠시 바위에 붙어 비를 피하고 우산을 꺼내 바람을 막고 앉았다.
이렇게 가다간 종일 가도 못 갈 것 같다. 있는 힘을 내서 너덜바위지대를 지나 헐레벌떡 쉬지 않고

 달렸다. 이제 구경이고 뭐고 없다. 무조건 전진하고 볼일이다.

땀이 비오듯 하더니 바지까지 젖어 무릎이 붙어서 발을 옮기기 힘든다. 잠시 쉬어서 런닝을 벗어

짜보니 마치 세탁한 것 같았다. 배낭에 집어넣고 티셔츠만 입고 뛰었다.
아침도 안 먹고 가는 무모한 산행---힘이 부친다. 비가 그치기만 기다려서 바위봉에 앉아 마누라가

챙겨준 오이를 꺼내 한입 물고 다시 도전이다.
이름 모를 제1봉을 넘어 칼바위능선으로 이어진 굴곡길을 달리기 여러 차례, 직진해서 또 바위에

 올라갔다가 내려서는데 앞이 안보였다. 자일이 없이는 못 가는 길이다.

 

아이쿠...길을 잘못 들었구나 싶어 다시 돌아가 보니 좌측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이길은 거꾸로 내려오면 안보이지만, 나처럼 직진만 하면 그냥 지나칠 것같다 .배낭 속에 준비한

위험표지판(공사장에서 쓰는 큰 표지판)을 꺼내서 나뭇가지에 걸었다. 혹시 나처럼 돈지포구에서

 오르는 후등자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낮 12시 30분, 출발 2시간만에 도착한  정상---거기에 지리산 해발 397.8m라고 작은 표지석이

누워있었다. 그뒤로 멀리 삼천포항의 발전소 굴뚝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제 오던 가랑비도 그치고

뭉게구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올라오는데 너무 힘을 소진해서 20분을 소나무 밑에서 쉬면서 힘을 비축하고 가져간 건빵으로

점심을 때웠다. 이런 속도로 가면 3번째 옥녀봉까지 가려면 시간이 촉박할 것같다. 

 빨리 2번째 봉인 불모산까지 가야 한다. 이곳 칼바위는 부안 채석강의 책바위를 세로로 세운 형상이다.

 금강산의 해금강에 있는 총석정처럼 절리형의 육각,사각 바윗결이 총총히 하늘로 솟았다.

온통 구들장을 세워놓은 것처럼 갈라진 바위다.

           

              말복더위와 작열하는 태양아래 물도 떨어지고

 

안내지도를 보니 돈지리에서 지리산-- 불모산-- 가마봉--옥녀봉--금평항  종주가 5,6시간 걸린다고

나와 있다. 아무리 걸려도, 더워서 여름산행을 느리게 한다 해도 7시간은 안 걸리지 않을까 상상하며

쉬지 않고 내려갔다가 다시 안부에 닿으니 갈림길 표지판이 보였다.
오후 1시 45분. 여기서 하산하는 코스가 나온다. 북쪽으로 내지포구가 0.6k, 반대편 옥동 성자암이 1.3k,

 옥녀봉 직진방향이 2.7k다. 이정표가 맞는지 모르지만 이제 옥녀봉까지 3k 정도만 가면 하산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지루한 산행이었지만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 든다.

 이제 날은 훤히 개여 파란 하늘에는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태양이 작열한다.
사량도 지리산은 그리 호락호락한 산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며 이 산이 뭇 산악인의 심금을 울리는

마력이 있는 산이란 걸 보여준다. 가져온 팻트병 물도 다 떨어지고 계곡은 나오지 않고 미칠 것만 같다.

 

가도 가도 끝없는 항해와 같다. 오늘이 말복 아닌가!!!
준비가 부족한 산행은 고행의 연속이다. 오늘은 종일 단식과 단음에다, 단주까지 겹친 단독 산행에

어김없이 찾아온 배고픔과 허기짐과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오후---난 처량하기 까지 하다.
한편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밑에서 기다리는 가족을 생각하며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종주하기로 맘을 먹었다.

지금까지는 별로 볼 경치가 없었으나 나머지 구간에서 섬 산행의 참 멋을 보여줄 것 같다.

그대로 직진하여 철조망이 쳐진 능선을 지나 불모산(해발 399m)에서 오른편 우회로로 내려선다.

다시 갈림길 표지판이 나왔다. 다시 1시간을 온 것이다. 매점자리가 처음 나와서 반가웠지만, 물을 마실

수가 없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천막이다. 여기서 옥동 1.2k, 지리산 2,1k, 대항 1k, 가마봉 0.8k다. 마지막

 옥녀봉으로 가는 안부다.
한참을 숨을 고르고, 웃옷을 갈아 입고 힘을 비축해보지만 여전히 머리까지도 몽롱하다.
시간은 3시30분이다


            외줄타기와 수직로프 사다리가 아찔한 옥녀봉 코스

 

가마봉(303m)에 올라가 내려다보니 멀리 옥녀봉으로 오르는 등산객이 언뜻 보였다. 처음 나타난 사람이다.

  너무 멀리 가고 있어서 휘파람만 불고 그냥 바위로 숨어버린다. 유일한 이정표다. 이제 그 쪽으로만 가면 된다.

나는 여기서 처음 마누라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위치를 알렸다. 이제 1시간이면 하산한다고...
그러나 첨 가는 길인데 1시간이 걸릴지 2시간이 소요될지는 나도 모른다. 그저 짐작으로 안심을 먼저

시킨 것이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눈이 노랗게 되어 도착한 옥녀봉---정말 멋진 수직벽을 자랑하고 서 있다.

---여기가 금강산인가 설악산인가---아니다, 남해의 사량도 섬이다.
10m 직벽에 굵은 동아줄이 걸린 정상이 순간 아찔하게 한다. 배낭도 무겁고 힘도 없고, 최악의 극한상황에서

 맞은 옥녀바위다.  20여 m 낭떠러지에 세운 쇠사다리--- 길고 직각으로 내려서는 아찔한 하강코스다.

위험하니 우회코스로 돌아가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그냥 간다. 나는 먼저 하산을 빨리 해야 한다.

 

 외줄타기,

 수직로프 사다리타기, 옆길타기, 하강을 수차례 하며  4시 조금 지나서 옥녀봉을 뒤로 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옥녀봉에서 금평항까지 1,2k 거리 1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누가 있어야 확인도 하련만, 이런 복날에 산에

 올라온 내가 잘못이지...생각하며 정신없이 내려서는데, 첫 만남의 기쁨이 생길 줄이야!!! 마지막 철사다리를

 내려서는데, 3명의 여행객이 올라온다.
한 여인은 양산을 받쳐든 채 유유히 올라오는 모습이다. 이제 난 내려서기만 하면 된다.
얼마나 빨리 내려갔는지 나무계단을 마구 뛰어 뒹굴다시피 했다. 드디어 40여분만에 철탑과 청소년수련원이

있는 금평포구 도로에 내려섰다.

             

                                  여러분....복날에는 등산하지 마세요...

 

면사무소 앞에서 마누라를 만나 물부터 부탁해서 포도캔과  포카리 스웨트를 2병 마셨다.  온몸에서 땀 냄새가

 나는 나를 보고 놀라는 눈치다. 6시간 반만에 다시 만난 가족들은 걱정부터 한다.

" 어이...눈이 쏙 들어갔네..."
" 배 고프지 않아요. 빨리 와서 밥 먹어요..."
" 와...지리산이 그렇게 좋더냐???"
" 어떻게 길이 쉽게 찾아지든...'

나는 계면쩍어 아무 대답도 못하고 먼저 샤워부터 하기로 하고 동네 집에 들어가 웃통을 벗고 멱을 감았다.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 날은 이상하리만치 사전준비도 없이 무모하게 입산하였고, 복날이란 것도 잊고 도전한 것이다.

복날에는 주간산행은 삼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사량도 지리산 산행이 나에게 일깨워준 것은 등산에 대해서 오만 방자한 태도를 가지면 안되며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키고, 절대 여름산행은 무리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산상교훈을  남긴 것이었다.

 

일죽 산사람ㅁㅁ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