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산행기/ 서울외사산 시리스3-2

관악산(冠岳山) 산행기

지난주에는 장마 비를 피해 왕복만도 5시간이나 되는 관악산을 3번 다녀왔다. 시리스로 쓰고 있는 서울 내외 사산(內外四山) 8개 산 중 북악을 제외한 마지막 산행기를 완성하고 싶어서다.
처음에는 자운암 능선으로 올라 사당동으로 내려왔고, 두 번째는 관악역에서 안양유원지 능선으로 삼막사를 지나 삼성산으로 해서 서울대학교 쪽 호수공원으로 하산하였다. 세 번째는 과천종합청사 뒤로 해서 6봉을 왼쪽으로 두고 오르는 능선으로 해서 8봉 능선을 타고 안양유원지로 내려왔다.
한 번으로 대강은 둘러볼 수 있는 다른 산과 달리, 관악산은 갈 때마다 조금만 길을 벗어나도 새 코스로 새로운 세계를 펼쳐주고 있었다. 어느 산 꾼의 글을 보면 그 코스를 14 가지로 나눌 정도였다.

*. 왜 관악산이라 하였을까
관악산의 ‘冠’(관)은 ‘갓 관(冠)’으로 강북 멀리서 보면 산의 형상이 갓 모습 같다하여 ‘갓뫼’라 하였다. ‘冠’(관)을 ‘우두머리 관’(爲中之首)으로 풀이하면 주위의 산 중에서 해발 629m로 가장  높은 산이라서 관악(冠岳)이라 이름 한 것이다.
이 산은 개골산(皆骨山)이라고 하는 금강산처럼 바위가 많은 암산이어서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불리고, 그 서쪽에 있는 산이라 하여 서금강(西金剛)이라고도 하였다.
관악산(629m)은 계곡이 얕고 돌이 많다 하여 남성산으로 백호(白虎)라 하고, 마주 보고 있는 청계산(618m)은 산은 관악보다 높이는 낮고 골이 더 깊다하여 여성산 청룡(靑龍)에 해당되는 산이다.

*. 풍수지리설에서의 관악

  우리나라에서 풍수사상(風水思想)이 가장 활발했던 때가 조선 개국 초 수도를 정할 때였다. 그때 새 서울로 거론된 후보지로는 개경(개성), 계룡, 모악(신촌․ 서강 일대)과 한양이 있었다.
그 중 한양(한 강 ‘漢’+水之北 ‘陽’)은 동서남북의 방위신(方位神)으로 수호신(守護神)인 사신도(四神圖)에 해당하는 산이 있어 좌청룡에 낙산, 우백호에 인왕, 북현무에는 주산인 북악인데, 남주작으로는 안산(案山)이 남산이라면 조산(祖山)은 관악산이었다.
그 남산과 관악산 사이를 외수(外水)인 한강이 명당 한양을 감싸 안고 서쪽으로 흐르고, 내수(內水)인 청계천은 한양 중심을 뚫고 한강과는 반대인 동쪽으로 흘러서 내외수류역세(內外水流逆勢)의 형국이라서 아무리 큰비가 온다하여도 도성 안은 수해에서 안전할 수 있는 한양은 명당 중에 명당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눈으로 길지(吉地)를 파악하려는 풍수지리의 형국론(形局論)에서 보면 관악산은 ‘서울 남쪽에 있는 불산(王都南方之火山)’으로 옛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불인 화산(火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피하기 위해서 주산(主山)을 인왕산으로 하여 경복궁 문(지금의 광화문)을 동쪽으로 내야 한다는 무학대사의 주장과 한강이 불기를 막아 주니 괜찮다는 정도전의 의견이 있었으나 당시의 세도가인 정도전의 의견을 따랐다.
풍수(風水)란 음양(陰陽)에 의해 좋은 것을 좇고 흉한 것을 피하려는 추길피흉(追吉避凶)이 목적이다.

이 풍수(風水)에 깊이 심취해 있던 당시 위정자들은 바라보기조차 꺼리던 두려운 관악의 화환(火患)을 막기 위해서 여러 가지 비방을 해놓았다.
경복궁 정문(광화문) 앞 양쪽에 바다의 신이라는 해태를 만들어 놓기도 하고, 경복궁과 일직선상에 남대문을 세워 궁궐에서 관악산이 덜 보이게 하거나, 다른 문의 현판이 가로인데 반해 남대문의 숭례문(崇禮門)란 액자를 세로 세워서 화산(火山)인 관악의 불기운을 꺾어보려고 하였다. '崇'(숭)은  상형문자로서 그 모양이 활활 타는 불꽃을 연상ㅎ게 하는 한자이고, '禮('례)는 오행에서는 남(南)과 불을 뜻하는 글자로 관악의 불기운을 제압하려는 뜻이었다.
옛사람들이 이렇듯 화재를 두려워하였던 것은 당시에는 지금처럼 성냥이나 라이터 등으로 우리 생활에 절대 필요한 불씨를 그때그때 사용할 수 없던 시절이라서, 집집마다 불씨를 항상 꺼뜨리지 않고 항상 보관해오던 무렵이라서 화재가 잦았던 때문인 것 같다.
옛날에 양반 촌이라는 한양 종각(鐘閣) 이북의 북촌(北村)에서는 관악과 마주 보는 집에서 자란 딸과는 혼인을 거절할 지경이었고, 그런 집의 며느리는 그렇지 않은 친정집에 가서  자식을 낳는 풍습까지 있었다.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의 오행(五行)으로 보면 남방은 ‘화(火)’이지만 남산과 달리 옛사람들이 관악을 유독 이토록 두려운 눈으로 보게 된 것은 관악 정상 능선의 바위 모습 때문이었다. 보라 연주대에서 서쪽으로 삼성산에 이르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바위들을.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면 관악산 모든 길은 연주대로 통한다.

왕관바위

짝짓기바위
연주대로 오르는 길은 사당동, 과천과 안양유원지 등 어느 코스나 능선은 암릉이었다. 그 바위들은 지천으로 많아서 보는 각도에 따라 각각의 물형(物形)을 나타내는데 언제부터인가 호사가들이 바위마다 이름을 매겨 놓은 것이 100여 가지가 넘었다.
어느 네티즌은 공룡바위, 거북바위, 악어바위, 미소바위, 팬터곰바위, 횃불바위, 사자바위, 범바위 남근바위, 여근바위  등 90여개 이상의 사진을 찍어 홈피의 갤럴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관악산과 삼성산은 이정표가 거의 없고 리본마저 거의 없어서 길을 잃고 엉뚱한 곳을 가곤했다.
과천에서 6봉 길을 잘못 들어 6봉을 바라보고 오르는 동쪽 능선 길을 힘들여 올라오다 보니 건너편 바위 절벽 위 바위에서 부부가 점심 식사를 정답게 하는 모습을 보니 흘러간 젊은 시절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나이를 어느새 먹었는지 자식들은 짝을 찾아 벌써 다 떠나가 버렸고, 우리 둘이 살고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아내와 각각인 경우가 많아졌다. 아내는 내가 가까이 가는 것을 아주 싫어하게 되어 각방을 쓴 지가 오래 되었고, 낮에도 운동이다, 친구 모임이다 외출해 버리고나면 혼자서 점심을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젊었을 때 안 하던 청소는 이제 내 차지가 되어 버렸고-.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을 자주하게 된다. 이렇게 살다가 우리 둘 중 어느 하나가 가버리고 나면 혼자 어떻게 사나 하는 연습을 지금 하고 있는 거라고.
내가 사는 일산 호수공원에 중국에서 기증 받아온 홀아비가 된 단정학 한 마리를 놓고 이런 시심(詩心)을 토해낸 것처럼.

십장생(十長生) 학(鶴) 한 마리
짝을 잃고 혼자 산다.
청아한 목소리로 때때로 울부짖으며-.
우리 집
여보, 당신도
저리 살다 가겠지-.
-일산 호수공원 ‘홀아비 단정학’


드디어 정상의 능선에 올라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자리를 찾고 있는데, 과천을 향한 절벽 바위에 한 그루 소나무가 따가운 햇볕을 가려주고 있는 자리가 있다. 신선이 있다면 바둑이라도 한 판 두고 노닐었을 정도의 환상적인 자리다.

거기서 점심 대신 준비해온 감자와 함께 정상주(頂上酒) 한 잔을 기울이면서, 7월 중순이면 매미도 울 때가 되었는데- 하고 있는데 저 왼쪽 절벽 아래에 매미 한 마리가 이제 막 허물을 벗고 날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드디어 나도 관악 바위에 이름 하나 지어 줄 숨은 바위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맴맴 메에- 우는 ‘매미바위’를.

*. 연주대 전설

연주대 정상은  관악산 기상레이더관측소인가. 아니면 군부대인가. 우리가 보통 정상이라고 하는 곳은 오르기도 경사진 버거운 저 암반 위였다.
이 바위를 차일암(遮日岩)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세종의 첫째 아들 양녕대군이 여름에 차일을 치고 이곳에 앉아 북쪽 대궐 경복궁을 바라보았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북으로 서울이, 남쪽에는 수원이, 그 너머 멀리 양주와 광주와 연한 산들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되고, 해질 무렵이 되면 서해의 낙조가 찬란히 빛나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준다는 곳이 바로 이 연주대였다.

자고(自古)로 명승지를 좋아하는 이들은 누구보다도 시인 묵객들이라. 서울대학교 쪽의 호수공원에 동상과 정자로 있는 자하 신위(申緯) 선생은 과천 쪽의 자하동천(紫霞洞天)에 살면서 시·서· 화로 관악산을 노래하면서 살았고, 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를 쓴 정조 때 영의정 채제공(당시 천주교 박해에 맞서 그 신봉을 옹호를 주장하던 분)이 67세에 올라, 83세에 다시 오르기를 약속했다는데, 나는 68세에 올랐으니 이제 술을 작작 먹고 90세 넘게 살아서 다시 올라  호연지기를 말하여 볼까 보다.
사당동 코스로 해서 오르기 전에 들렸던 낙성대의 감강찬 장군의 전설이 어린 곳이 바로 이 관악이다. 벼락방망이를 없애려고 급히 산을 오르는데 자꾸 칡뿌리 덩굴에 걸려 넘어지곤 했다. 그때 강 장군이 칡덩굴을 뽑아버려서 그런가 내 보기에도 이 산에는 칡이 거의 없다.
이 태조가 경복궁을 지으면서 화환(火患)을 막기 위하여 연주봉(戀主峰)에 아홉 개의 방화부(防火符)를 넣은 물 단지를 묻어 두었다거나 연주, 원각사를 지어서 불에 대처하기도 했다는 곳이 이 근처였다.
정상 바위에 우물을 파고 그 우물에 구리로 용을 조각하여 화환(火患)에 대처 하였다는 곳은 출입금지 구역인 저 군부대 내에 있는 모양이다.

관악산,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곳이 우리가 달력을 통하여 보아온 연주대의 모습이다. 절벽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아슬아슬한 작은 암자 응진전(應眞殿)을 향하는 길에 연주대 안내 소개가 다음과 같다.

“관악산의 기암절벽 위에 석축을 쌓아 터를 마련하고 지은 이 암자는, 원래 신라의 승려 의상대사가 문무앙 17년(677)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관악사를 건립할 때 함께 건립한 것으로 의상대라 불렀다고 한다. 관악사와 의상대는 연주암과 연주대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그 내력에 대해서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조선 개국 후 고려에 대한 연민을 간직한 사람들이 이곳에 들러 개성을 바라보며 고려의 충신․열사와 망해버린 왕조를 연모했다고 하여 연주대라 불렀다는 이야기고, 또 하나는 조선 태종의 첫 번째 왕자인 양녕대군과 두 번째 왕자인 효령대군이 왕위 계승에서 멀어진 뒤 방랑하다가 이곳에 올라 왕위에 대한 미련과 동경에 심정을 담아 왕궁을 바라보았다 하여 연주대라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불심을 절로 일으키게 하는 벼랑 끝에 서 있는 이 연주대를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무성한 나뭇가지를 피하여 더 좋은 포지션을 찾다가 그만 연주대가 보이지 않는 연주암(戀主庵)에 오고 말았다. 그 멋진 모습 찍으러 나뭇잎 지고 눈 속에 묻힌 연주대 보러 다시 또 와야겠다.

연주대는 신라 의상대사가 처음에는 관악사(冠岳寺)로 창건하였는데 이성계의 처남 강득룡이 연주대라 이름을 바꿨다는 암자다. 고려 충신 강득룡․ 서견․ 남을진 등이 이곳에서 송도를 바라보며 고려 왕조를 연모하며 통곡하였기 때문에 그리울 '戀'(연) 임금 '主'(주) 연주사(戀主寺)라 했다는 것이다.
그 앞의 높이 4m의 연주암3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제 104호)은 왕위를 잊지 못했다는 세종의 둘째 왕자 효령대군이 세웠다는 탑이다.

그 아래에 연주암이 원래 있었던 자리인 관악사지(冠岳寺祉)가 부도 하나 세워두고 커다란 공양주가 나타나기를 쓸쓸히 서 있었다.
  
관악산 산꾼들이 말하는 관악산의 가장 어려운 길에는 두 코스가 있다. 서울공대에서 오르는 자운암 코스와 8봉코스다. 자운암 코스는 처음 길에 갔으니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며칠 전 삼막사를 거쳐 삼성산(三聖山)을 다녀오면서 시간이 늦어 생략했던 8봉을 가야겠다.

그러나 첫째 봉을 오르면서 나는 곧 후회하였다. 젊어서도 두려워하여 암벽을 만나면 우회하던 길을 이 나이에 오르랴 해서였다. 그러나 뒤 따라 오는 이가 여자라 수탉 같은 오기로 무릎에 피가 맺히도록 올랐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이 떨렸다. 철이 비로소 들어서인가. 그 다음부터는 되도록 봉을 타지 않고 우회로를 택하다가 마지막 끝 봉에 가서는 또 한번 오기를 내었다.
금수강산 우리나라에는 좋은 산이 얼마나 많은데 내 집에서 먼 이 산을 또 오랴 해서, 끝 봉에 가서는 무리를 하여 올랐으나 고진감래(苦盡甘來)라서인가 험하진 않았다. 그 봉은 재미있게도 사람 몸 하나가 겨우 빠져 나오기 힘든 구멍이 있었다. 등에다는 배낭을 지고 앞에다가는 몇 달 전에 거금을 들여 산 800만 화소의 디카 카메라 백을 메고 있어서 거기에 온갖 신경을 다 써 가며 겨우 빠져 나오는데 바위에 긁히는 소리 요란하다.  
‘후유-.’ 모든 어려운 고비를 지내고나니 안도의 한숨과 함께 이제는 서울을 둘러싼 내외 각8산의 등정을 모두 마쳤구나 하는 행복이 물밀듯이 가슴 속으로 전하여 왔다. 먹을 물도 다 떨어졌는데 금상첨화라 바로 아래 계곡에서는 시원한 물소리가 요란하다.
나는 흠뻑 젖은 몸으로 축배의 자축의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다. 경치가 그럴 듯한 곳에 앉아 배낭을 벗었더니- ‘아아, 가방이 열려 있는 것이 아닌가.’  아까 긁히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가방이 열리고 호루라기를 매단 스틱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자식들이 에비의 생일이라고 정성껏 준 돈이라서 오래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그 정성과 바꾼 애지중지하던 그 얼마 쓰지도 않은 새 고급 3단 스틱이-.
혹시나 해서 지친 몸으로 용을 쓰고 올라가 보았더니 방금 굴을 통과해 오는 70대 두 사람이 내 옹색한 물음에 손사래를 친다.
몇 년 전 북유럽에 가서는 고급 망원경을 잃고 왔고, 덕양산(행주산성)에서는 오스트리아에서 사온 멋진 등산용 마크가 있는 모자를 잃었더니, 오늘은 스틱이라. 그렇다면 나는 잃기 위해 물건을 산 것이었구나. '오호 애재라 내 삼가지 못한 탓이로다'. 바늘을 부러뜨리고 썼다는 조침문의 작자의 마음이 이러했으리라.
부디 가급적이면 '나처럼 아껴 주는 그리고 꼭 필요한 사람이 그 지팡이의 주인이 되었으면-'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다음에는 산에 가지고 다니는 물건들은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은 물건을 사야지-.
발이 시리도록 찬 계곡물에 몸을 풍덩 담가도 마음은 답답하기만 하였다.


*추기: 서울의 내외사산 산행기를 여기서 마칩니다.이 시리스에 빠친 북악산은 일반인은 누구나 못 오르는 산이고, 북한산은 글을 쓰겠다는 마음으로 평생을 써도 그 진면목을  다 못쓸 세계의 명산이라서 다음으로 밀어 두겠습니다.
졸고에 그 동안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특별히 한국산하의 문을 다시 두드리게 용기를 주신 청파 윤동균 원장님이 고맙구요. 산행기로나마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