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 0404. 백운산 억불봉(億佛峰 1,000m) - 전남 광양시

산 행 일 : 2004년 1월 13일 화요일
산행횟수 : 백운산 16회차
산의날씨 : 눈보라. 가끔 잠잠해지고
동 행 인 : 부부산행
산행시간 : 4시간 47분 (식사 휴식 38분포함)

동동마을 <0:27> 헬기장 입구 <0:51> 노랭이재 <0:26> 억불헬기장 <0:41> 억불봉 <0:10> 암봉
밑 <0:22> 억불헬기장 <0:14> 노랭이재 <0:32> 광양제철수련관 <0:26> 동동마을

어제 밤부터 눈이 간간이 내리는 가운데 대설주의보가 발효돼 산행을 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 여
겼으나 아침에 일어나 보니 기온은 뚝 떨어졌어도 차 지붕에만 눈이 조금 쌓였다.
백운산을 찾아 집을 나서, 녹아 내린 눈(雪)물을 뒤집어 쓴 차 꼴이 말이 아니다.
그러나 백운산 자락을 끼고 오르는 길은 얼어붙어 조심했는데도 커브 길에서 차가 비틀거려 아내
가 깜짝 놀랬고 나도 등어리에 땀이 흘렀다.
광양제철 수련관에서 등산하려던 계획을 바꿔 되돌아 내려 동동마을 초대형 등산안내도 앞 주차
장에 차를 세웠다.

10 : 25 버스정류장 팻말이 붙은 가게 옆 마을 안 길도 꽁꽁 얼어 발을 내딛기가 힘든 가운데 가
장자리를 이용하면서 마을회관 앞 왼쪽 길로 꺾고 10여m 오른 후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간이자
동염소주입기'가 있는 곳 콘크리트 포장길이 끝나는 지점 약 50m 전방에 등산로 팻말이 보였다.
뒤쳐진 아내를 보니 잘못된 산행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1주일을 기다려온 아내에게 포기하자는 말을 차마 못하고 "노랭이봉 코스를 생략하고 수
련관 뒤에서 노랭이재 까지 올라가서 상황을 살펴보자"고 하니 고개만 끄덕인다.

'← 등산로' 팻말이 가리키는 밤나무 밭 사잇길로 들어서자 짐승 발자국이 찍혔는데 잠시 후 검은
염소 두 마리가 눈 속에서 풀뿌리를 뽑아 우물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0 : 52 제철헬기장 입구 포장길로 올라 노랭이봉으로 갈 수 있는 능선길이 아닌 수련관으로 난
길을 따르며 메모를 하려고 볼펜을 찾으니 없다.
하필이면 오늘은 예비로 챙기지 못했는데 볼펜, 수건 등은 물론 안경도 한 번 잃어버렸고 -흑석
산- 보성 천봉산 산행 때는 대원사로 하산해서 차 열쇠를 잃어버린 것을 알고 또 다시 정상을 오
르는, 난생 처음 하루에 두 차례나 산행을 했던 웃지 못할 일도 있어 아내에게 내색하지 않고 수
련관으로 들어가자 아무도 없는 것 같더니 음식 냄새가 풍기며 인기척이 들리는 직원식당으로 가
서 사람 좋아 보이는 여인에게 볼펜을 빌렸다.

11 : 10 도로에서 등산길로 올라서면서 보니 사람들의 발자국이 찍혔다.
등산로 주변을 따라 학명, 분포지, 개화기, 결실기, 용도, 나무이야기 등이 기재된 녹색 테두리를
한 노란 나무이름표가 매달려 눈이 길을 덮고 있어도 별 문제는 없지만 앞선 사람이 있다는 것이
저으기 안심이 되었다.

'수련관 0.5km ↔ 억불봉 2.1km' 라 적힌 조그만 스텐레스 이정표 -백운산 주요 등산로에는 500
여m 간격으로 세워놓았고 '백운산등산안내도'가 요소요소에 세워져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를
지나면 늘푸른 나무 대신 옷을 벗어버린 활엽수가 군락을 이룬다.
골이 띵할 지경으로 강한 바람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면 나무가 흔들리지 않으니 능선을 훑어 내리
는 모양이다.
"날씨가 안 좋은데 산에 오셨습니까?"
윈드자켓도 걸치지 않은 젊은이 하나가 인사를 하고는 성큼성큼 앞서더니 금새 멀어졌다.
"히어리? 나무 이름도 참 희한하다"
아내 말대로 히어리, 골병꽃, 노린재, 물갬, 작살, 고광나무 등 낯선 이름도 많다.

11 : 43 소리만 요란하던 바람은 노랭이재로 올라서면서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 했으며 맥놓고 있
다가는 어느 구석에 처박힐지도 모른다.
골난 아이처럼 찌푸리고 있던 하늘이 급기야 눈가루를 뿌려댄다.
"노랭이봉만 둘러볼까?"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올라가면 뭣해. 차라리 헬기장에 가서 지리산이나 보는 게 낫지"
이런 날씨에 지리산이 보일 리 만무하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아내의 말뜻을 알겠다.

11 : 48 '노랭이재까지..'가 '헬기장까지...'로 바뀐 가운데 억새능선을 따르니 하늘에서 내리는 눈도
눈이려거니와 땅바닥에 쌓인 눈도 눈을 뜨지 못하게 흩날린다.
터덜터덜 내려오는 다섯 사람과 마주쳤는데 한 남자가 "억불봉으로 가지 않는 것이 좋겠더라"고
하자 입이 댓발이나 튀어나온 한 여자가 "겁 많은 사람은 어딜 가나 표가 난다니까" 쏘아붙인다.
본의 아니게 우리로 인하여 분위기가 나빠질까 봐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등을 돌렸다.

12 : 14 헬기장에서 지리산이 보이리라고 기대도 안했으나 본능적으로 지리산쪽 부터 바라본다.
순간 순간 눈보라도 숨을 돌리자 '헬기장까지...'가 결국은 계획대로 억불봉으로 최종 결정 났다.
100여m쯤 가다 길을 막아서는 조그마한 바위 앞 눈밭에서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이 사라졌다.
"아까 그 사람들이 여기서 포기했네... 근데 젊은이는 어디로 갔지?"
"눈 쌓인 백운산 종주를 하겠지 뭐"
앞장서서 아내가 따라오기 좋게 길을 내 가며 암봉 남쪽 우회로로 내려섰다가 두 암봉 사이로 올
라 길을 못 찾아 결국은 철계단을 오르고 밧줄을 의지하여 암벽을 내려설 때는 진땀이 흘렀다.
바람에 흔들리다 보니 담력이 대단한 아내의 두 볼도 상기되었다.

12 : 55 억불봉. 벼랑바위 위로 올라서려다 바람에 날릴까봐 그만두고 안전지대에서 가까스로 보
이는 노랭이봉을 내려다보니 억불봉 등산을 포기하고 돌아섰던 사람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섬진강과 지리산 조망지로 제격인 북쪽 바위 위에 아내와 둘이 신발도장을 나란히 찍어두고 무덤
옆 등산안내도가 있는 넓은 암반 부근을 뱅뱅 돌며 밥 먹을 장소를 물색하다 철계단이 설치된 암
봉 까지 가보기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오를때 보다 힘든 눈길을 천천히 때로는 엉금엉금 내려 바람의지가 되는 바위 밑에 자리 잡았다.

13 : 05 납작한 돌을 주워 매트를 깔아주면서 "앉으라"고 하자 "웬 일이세요?" 눈을 크게 뜬다.
자리를 마련해주어서가 아니라 매트를 잊지 않고 챙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13 : 38 뜨거운 커피도 금방 식어버리니 몸인들 오죽하랴. 걷는 게 상책이다.
조금 전에 지난 우리들의 발자국도 눈보라에 망가져 버렸고 노랭이봉 마저 삼켜 버린다.
헬기장이 보이는 곳에서 억불봉으로 오르는 젊은 남녀 일곱 명에게 "조심하라"는 충고를 해준다.

14 : 00 헬기장과
14 : 14 노랭이재를 지나
14 : 46 불 꺼진 수련관 식당 배식대 위에 고마운 마음과 함께 볼펜을 올려 두었다.

15 : 12 동동 마을로 돌아오자 얼었던 길은 녹았고 눈보라도 없으니 꼭 딴 세상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으며 백운산이 뿌옇게 보이는 지점에 이르러 차창 밖으로 올려다보니 거센 바람소리가 아직
도 귓전을 맴도는 듯하다.


▣ 허경숙 - 눈길 산행이 힘드셨겠지만 덕분에 따끈따끈한 산행기 편안하게 대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두분 가시는 걸음 항상 안전 산행과 걸음마다 피어나는 사랑과 축복이 이어지시길...
▣ 김정길 - 2년 반쯤 전, 사십세 가까운 두 아들이 60대의 아버지를 모시고 억불봉에 올라 돗자리를 펴고 점심은 먹다가 혼자 올라온 나에게 음식과 술을 모두 남는다면서 자꾸 권하길래 실컷 얻어 먹고 마시며 이것 저것 묻는 말에 대답을 하였더니, 어르신이 종로에 빌딩을 가지고 있다면서 20평 정도 사무실을 거저 빌려 줄테니 산악회를 만들어 운영 해 보라는 권유를 하시는데 거절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최선호님은 부인께서 등산을 잘 하시니 얼마나 좋을꼬....
▣ 이수영 - 하루에 한사람에게 두번째 댓글을 쓰기도 처음이네요..허허 얼마전에 아내와 함께 다녀온 광양 백운산 (진틀마을-신선대-정상-억불동-노랭이재-광양제철수련원-동동마을) 눈앞에 선합니다. 어제는 이곳 통영에서도 강풍이 휘몰아 쳤는데 산행을 하셨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대단 하십니다. 하지만 고행의 산행일수록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