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도남의 까칠한 만추 나들이 - 추월산

25번 고속국도에서 정읍시내로 진입했을 땐 아침8시 반이 넘었다. 6.4.2차선도로를 놔두고 하필이면 차선도 없는 외길로 들어선 버스는 전진 빠꾸에 좌,우회전을 밥 먹듯 하며 별 꾸끔스런 데를 기웃대더니 792번 도로로 들어서 내장저수지를 끼고 돈다.

찬 아침서기가 막바지 단풍을 어르는 몽환적인 만추의 호수를 차창에 끌어오던 버스는 관광호텔 뒤편 꼬불꼬불 벼랑길을 기어오르며, 내장산 아홉 봉우리가 지피어놓은 내장골 화톳불을 차창에 파노라마 시키는 모양이었다.

바짝 붙어 따라오는 산 밑자락만 보이는 기사님뒷줄(좌측) 좌석에 앉은 나를 비롯한 산님들에겐 딴 동네 구경거리였다.

나무들이 지 몸뚱이 불태우다 사그라질 무렵의 장엄한 만추의 풍광은 아름답다 못해 경건하기까지 한 법이다. 그 마지막불꽃을 감상하는 우측좌석의 산님들은 괴성을 지르며 입술이 부풀어 튀어나온 좌측 산님들에게 입 서비스까지 해대고 있었다. 어째 오늘 조짐이 쾌하질 않다.

준령을 넘은 버스는 백양사를 외면하고 순창을 향하다 복흥 시골5일장터로 기어들더니 어느 푸줏간 앞에서 멈췄다. 오늘 부대찌개 끓일 돼지고기를 사기 위해 일욜 아침부터 정읍시내를 쑤셔대다가 시골장까지 온 셈이다. 갈묀 추월산에서 멧돼지 사냥하여 끓일 속셈 이였는데 자연과 생태계보호에 각별한 기사님이 틀었던 까닭 이었다.

나를 비롯한 몇몇 산님들은 맷되지고기맛이 더 구미 당기는데 말이다. 기사님 덕에 추월산 멧돼지 한 마리가 황천 가지 않게 됨이다.

10시를 넘겨 낙덕저수지앞에서 추월산행에 들었다. 닳지 않아 수줍은 급경사산길은 낙엽이 수북이 쌓여 숨차게 한다.

화려한 불꽃의식을 끝낸 나무들은 손가락과 팔들로 스크랩을 짜고 서로의 피부를 마사지하며 차가운 바람을 걸러내고 있다. 나무가 저렇게 많은 가지들을 품고 있는 줄을 미처 생각 못했다.

놈들은 치열하게 살며 세상을 푸르게 만들곤 이내 화려하게 몸뚱일 불태운다. 그들은 가장 아름다운 불꽃놀이를 언제 해야 하는지를 알아 지체안고 실행하곤 모든 걸 내려놓는다.

나설 때와 놓을 때를 알고 어김없이 실천하는 삶은 나를 주눅 들게 한다. 난 60여년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누굴 위해 몸 불사른 적도 미련 내려놓은 적도 없다.

능선에 오르자 낙덕저수지가 풀빛이다. 추월산 나무들이 옷 벗으면서 초록 일부를 거기다 풀어놓은 모양이다. 깃대봉을 거처 수리봉을 밟을 땐 정오였다.

산엔 산신령만 있는 줄 알았는데 봉신령(峰神靈)도 있다고 갈뫼가 갈쳐주었는데 수리봉에 넓은 자리를 빌려 점심자릴 펼치고도 고수레 하나 없이 싹 먹어치웠다, 스무 명 산님들이-.

단체식사자린 먹거리도 풍성하고 입담도 걸판 져 좋다. 난 홀로 산행을 즐기다보니 이런 멋과 맛깔을 못 챙겼고, 더는 몇 번씩 동행을 하면서도 몰라보기 일쑤여서 아는 채를 안했던 까도남(까칠한 도시의 남자)이 됐나싶다.

식사 후 추월산정을 향하면서 여산님 네 분과 동행을 하게 됐다. 디카 배터리 약맛이 가서 사진 찍기도 끝나 그 분들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데 자릴 비껴주며 까성녀(까탈스런 성질머리 탓에 결혼을 안 한 여자)에 바짝 붙으란다.

까성녀가 두 분인데 1년여 전부터 동행해 날 익히 알고 있다는 거다. 근데 지금껏 목례 한 번도 안한 나를 어찌 생각 했겠는가? 자못 궁금했다. 미안타고 하면서 나도 본격 까도남이 된 게다.

까성녀 두 분, 까도녀 두 분과 얘기꽃을 피웠다. 멋쟁이 까성녀들은 황진이와 임재, 사르트르와 보바리의 계약결혼을 얘기하면서도 자기들은 아직 계약결혼 근처에도 못 가 봤으니 성질머리치곤 대단한 모양이라.

까도녀 두 분은 나를 까성녀들에게 엮어줄려나(?) 자릴 내줘 밀었는데 난 못난 언더독처럼 변죽만 겉돌았다. 나이 쉰을 바라보며(내 어림이 엉터리?) 까성녀로 살아가고 있다는 두 까성녀들이 대단하다고 관심이 가지만 '쿼바디스'만 중얼거린 나였다.

까도녀`까성녀들과의 동행은 추월산정(731.2m)을 밟고 상봉을 훑은 후 보리암으로 하강할 때까지 이어졌다.

추월산정에서 바라보는 무등산의 뒷모습은 처음이라. 담양들판 뒤로 안무속에 가슴처럼 솟은 무등의 그림은 무등산의 진면목이라. 또한 상봉이 가까워질수록 명료해지는 담양호는 화사한 가을이 저물며 내놓는 수채화다. 푸른호수물이 삼키고 있는 강천산 중턱에서부터의 금성산성도 아련한 역사마냥 가물거렸다.

벌써 다섯 해도 지났을 테다. 난 어느 해 가을이 절정인 여길 지인 세 명과 보리암을 거쳐 상봉에 올라 제2등산로로 하산했었다. 그때 산은 붉게 불 지피고 있었고 난 황홀경에 빠져 도종환님의 시<단풍드는 날>을 읊조리기도 했었다.

"버려야 할 것

무엇인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아름답게 불탄다.

-후략-"

보리암으로 하강하는데 급경사바위벼랑길은 언제부턴가 죄다 나무데크계단으로 둔갑했다. 오르내리기에 편하기는 해도 산은 네발다리를 걸친 채 싸안고 씨름하며 오르내려야 등산맛과 멋이 난다.

임란때 왜적에 쫒기다 여기서 낙화한 김경업장군 부인 순절비와 의장 김응회의 모부인의 순절 추모비가 보리암 입구에서 마음을 추스르게 한다.

천길 단애가 빙 돌아 하늘을 무등태운 절벽 중턱 692m지점에 보조국사가 지리산 상오주암에서 날려 보낸 나무매 한 마리가 여기에 앉아 스님은 벼랑에 암자를 지었다.

두레박을 던지면 금세 파란 물을 길어 올릴 것 같은 담양호가 있어 더 환장해 버릴 보리암! 바위구멍 대롱에서 감질나게 떨어지는 석간수로 목을 축이고 있는데 익산님이 궁중차를 보시했다.

하늘과 호수만 보이는 암자는 땅거미마저 빨라 어둑해지는데 바람결도 싸해 궁중차의 맛과 향이 형언할 수가 없다. 아까 점심때 누가 준 루왁커피(허풍떤 소리)는 보리암 차맛에 비한다면 사향고향이가 웃다가 침 튀긴 물맛 꼴일 것 같았다.

나무계단을 딛고 한참을 하강하면 질펀한 바위전망대가 나타나는데 거기서 올려다 본 보리암은 흰 색칠을 한 벽의 요사채만 없다면 그대로 천길 단애의 벼랑이다.

눈여겨보면 팔짝 기와지붕이 벼랑에 벽화인양 걸려있을 뿐이다. 이탈리아 바위고성 성 베네딕도수도원보다 더 아슬아슬 아찔하다. 또 한참을 하강하면 바위굴이 나타나는데 동학 때 마지막 항전을 도모한 의병들의 수난의 한숨들이 천정에 응결 돼 찬 이슬방울로 지금도 떨어지고 있나 싶었다.

단풍 다 저버린 까칠한 추월산, 앙상한 나목들이 몸 엉켜 비벼대며 해질녘의 찬바람 막아줘도 난 까칠남 때를 못 벗을 것 같다.

6시가 되자 버스는 왔던 길 되짚어 달린다. 아침에 넘었던 내장산 굽굽이 벼랑길을 기어 내려올 땐 내장골은 시꺼먼 장막을 휘둘렀다. 모든 건 완소 됐던지 까만 재조차 안 보이는 캄캄함인데 갈뫼가 잘 보이느냐? 고 빈정댄다. 자외선투시경이 없으면 심안(心眼)으로 보란다.

문득 코미디 '개콘의 네가지'가 스쳤다.

"그런 갈묀 아침에 심안으로 봤냐? 그렇게 투시하는 심안을 가졌으면 방에 눠서 모든 걸 볼일이지 추월산엔 뭐 하러 왔나?"

"아~! 그렇고 보니까 나 같은 까도남녀들은(까성녀들도 내 뒷줄에 앉았다) 좌측에 자리주고 지네커플일랑은 전망 죽여주는 쪽에 앉았구먼. 미리 다 계산 하고-."

"나 앞으론 생각하는 척 기사님 뒤 1번에 앉히지 말고 상황 따라 주더라고. 나, 비록 심안은 없어도 볼 건 다 본다. 누굴 까막눈으로 보나!"

 

갈뫼, 나 눈도 말짱하고 맘도 텅 비어 보고 품을 건 다 한다오.

오늘 추월산 나만큼 즐긴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구 해.

2012. 11. 18     #사진은 거의'저녁노을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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