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상산 산행기

 

 

                *산행일자:2007. 9. 29일

                *소재지  :전북 무주

                *산높이  :1,034m

                *산행코스:서창리 적상산가든-장도바위-향로봉-적상산

                          -안렴대-안국사-덕유산국립공원적상분소

                *산행시간:11시38분-16시34분(4시간56분)

                *동행    :나홀로


 

  어제는 오랜만에 덕유산 북쪽에 자리한 적상산을 다시 찾아 올랐습니다.

다섯해 전 과천시산악연맹 회원들과 함께 이 산을 올랐을 때는 목디스크 악화로 어깨쭉지가 잘려나가는 것처럼 아파 무척 힘들었습니다. 산에서 돌아오자마자 입원수속을 밟고 며칠 후 대수술을 받고나서 얼마동안 목에 기부스를 하고 다녀야 했습니다. 수술받은 그 주를 빼고는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석달여 기부스를 한 채 산을 오르내리며 스스로 제 산 욕심이 참으로 끈질기다 했습니다. 백두대간 종주 중에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지나며 층상암벽이 허리 띠를 해 두른 듯한 적상산의 서쪽사면을 여러번 보았습니다. 그 때마다 곧추 선 저 암벽이 끈질기게 받들지 않았다면 그 위의 향로봉이 수백만년 동안 건재할 수 있었을까 싶어 언제고 이 산을 다시 찾아 은근과 끈기를 한번 배워가고 싶었습니다.


 

  기대했던 대로 적상산 도처에서 끈질김의 현장을 만나보았습니다.

서창리 도로에서 산행을 시작한지 한시간만에 다다른 샘터(?)가 첫 번째 현장이었습니다. 커다란 바위에 뿌리를 내려 종국에 그 바위를 둘로 갈라 놓은 큰 나무를 보고 이 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에 놀랐습니다. 낙숫물이 툇돌에 구멍을 내기보다 더 힘들게 느껴진 것은 낙숫물은 중력의 도움을 받지만 나무가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그 바위를 가르는 것은 순전히 자력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현장은 샘터에서 조금 올라 만난 장도바위였습니다. 민란을 평정하고 개선길에 오른 여말 명장 최 영 장군께서 길을 가로막고 있는 바위를 장도로 내리치자 이 바위가 둘로 갈라져 길을 열어주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과연 한 사람은 충분히 지날 만큼 틈새가 벌어져 있었습니다. 최영장군의 고려조에 대한 애국충정을 기리고자 누군가가 지어냈을 이 이야기가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음은, 공간을 뛰어넘는 오늘 날의 휴대폰보다 시간을 뛰어넘은 옛 설화의 생명력이 훨씬 더 끈질긴 덕분입니다. 마지막 현장은 이조실록을 보관하고 있는 사고지였습니다. 차시간을 대느라 밑으로 지나가며 눈길만 주었지만 왕조의 역사를 가감없이 그대로 후손들에 전해주고자 했던 우리 선조들의 끈질긴 역사의식이 없었다면 이같은 깊은 산골짜기 여러 곳에 사고를 지어 분산 보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 전 큰아들이 제게 이르기를 이순신장군이 원균장군보다 또 하나 뛰어난 점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꼬박꼬박 일기를 써 “난중일기를 남겼다는 점이라 했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철저한 기록정신과 이를 후세들에 온전히 넘겨주겠다는 끈질긴 역사의식이 오늘날 막강한 국력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전 11시38분 서창리를 지나는 19번 도로변의 적상산가든에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아침6시반 경에 산본 집을 나와 천안까지는 전철로, 다시 무궁화호로 영동역까지 갔습니다.

반시간 남짓 기다려 직행버승에 올라 무주에 도착한 시각이 11시 10분 경으로 돌아오는 차편을 확인한 후  안성가는 군내버스에 올라 10분 후 서창리에서 하차했습니다. 날씨가 쾌청해 차도를 건너 시멘트도로를 따라 얼마고 오르는 동안 목덜미가 따가웠습니다. 시멘트 길이 끝나는 서창마을에 다다르기까지 전에 없던 팬션들이 보였습니다. 마을 끝 서창리통제소에에서 조금 더 가 5년전에 시산제를 지냈던 적상산 제단을 들렀습니다. 입구에 세워진 익살 스레 보이는 화강암의 장승들에 적상산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12시 7분 향로봉3.1Km의 표지목이 세워진 오른 쪽 들머리로 들어섰습니다.

목덜미를 따갑게 비춘 햇살이 나뭇 잎에 가려지자 비로소 가을의 냉랭함이 느껴졌습니다. 공원에서 정성스레 손질한 조용한 돌길을 몇 분 걸어 계곡을 건넜습니다. 그리 굵지않은 통나무 몇개를 엮어 만든 나무다리가 시멘트다리보다 훨씬 정감있어 보였습니다. 계곡을 따라 오르던 길은 향로봉 2.7km전방에서 계곡과 헤어지고 잘 다듬어진 돌길을 따라 산오름을 계속했습니다. 고속도로에 면한 이 산의 서쪽사면은 거의 깍아지른 듯 경사가 급해 똑바로 길을 내지 못하고 지그재그로 길을 만들어 산길을 걷는 운치가 더했습니다. 향로봉2.3km 전방에서 오른 쪽 옆 계곡에서 벗어나 왼쪽 위로 난 돌계단을 따라 걸어 올랐습니다.


 

  12시33분 향로봉1.7Km 전방의 샘터(?)에서 복숭아를 꺼내 들며 10분 여 쉬었습니다.

좁은 폭의 너덜겅 사이로 흐르는 아주 작은 물줄기가 샘물로 일컬어지는 것이 아닌가해 손바닥으로 물을 조금 받아 마셔보니 물맛이 여느 샘물보다 훨씬 못해 샘터로 부르기는 영 아니다 싶었습니다. 바로 그 때 제 눈을 끈 것은 바위를 가르고 뿌리를 내린 커다란 서어나무였습니다. 단순히 바위에 뿌리를 내린 정도가 아니고 바위를 두 쪽으로 갈라놓았습니다. 과연 나무는 위대했습니다. 길고 긴 세월을 단단한 암반에 뿌리를 박고 서서히 틈을 벌여나가 급기야 바위를 가른 힘은 바로 저 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무생물에 대비되는 생명의 위대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아, 그래서 미국의 시인 조이스킬머가 시는 나같은 엉터리 시인이 짓지만 나무는 하느님이 만드신다고 읊었구나 싶었습니다.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본격적인 지그자그 흙길인데다 넓은 폭에 경사도 완만하고 활엽수가 하늘을 가려 나이든 부부들이 두 손 잡고 함께 걷기는 딱 좋아 친지들에 한번 이 산을 권해볼 생각입니다.


 

   13시31분 장도바위를 지났습니다.

앞 길을 가로막는 거암을 장도로 내리쳐 길을 냈다는 최영 장군은 고려조의 충성스러운 맹장으로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 일파에 죽음을 당했지만 그를 숭모하는 백성들은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들 민초들 중 누군가가 지어냈을 장군에 관한 설화는 이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민초들의 끈질긴 삶을 통해 이러한 설화들이 대대로 전해져왔기에 설화의 끈질긴 생명력은 바로 민초들의 끈질긴 삶에 기초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5분 후 서문지를 지나 적성산성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삼국시대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적성산성은 그 길이가 8km가 넘는 석성으로 나중에 최영 장군도 축성을 건의했다 합니다. 이곳 서문지를 비롯한 4개문지에 2층의 문루가 세워졌고, 산성 서쪽에 미창과 군기창을 겸한 창고가 세워졌다하여 아랫마을이 서창(西倉)으로 불린다 합니다.


 

  14시6분 해발1,024m의 향로봉을 올랐습니다.

서문지에서 20분 남짓 이어진 평탄한 남진 길은 능선 삼거리에서 끝났습니다. 능선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10분간 북진해 향로봉을 오르자 조망이 일품이었습니다. 저 멀리 남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연봉들이 혹시 백두대간이 아닐까 했지만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네 다섯평 넓이의 공터에 덕유산국립공원에서 세운 표지목에는 이 봉우리의 해발고도가 1,034m로 표기되어 있습니다만 지도에 나와 있는 1,034m의 정상봉은 이 봉우리에서 남쪽으로 1km 가량 떨어져 있는 이동통신사 기지국이 들어서 있는 봉우리이기에 바로잡습니다. 향로봉에서 능선삼거리로 다시 돌아가 정상봉으로 직진했습니다. 능선삼거리에서 15분간 남진해 올라선 정상봉에는 기지국만 들어서 있고 삼각점이 보이지 않아 조금은 실망스러웠습니다. 바로 하산해 다시 7-8분을 남진해 철제낭간이 세워진 바위 안렴대에 올랐습니다. 이곳 또한 전망이 좋아 40분 전에 올랐던 향로봉의 다소곳한 자태가 한눈에 들어왔는데 덕유산 향적봉을 끝내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15시3분 안국사 경내에 들어섰습니다.

안렴대에서 안국사로 내려서는 능선삼거리로 돌아와 점심을 들었습니다. 안국사를 거쳐 내북창 버스정류장까지 16시30분안에 닿아야 하기에 점심을 미루었는데 시간안에 도착할 것 같아 준비해간 떡을 후다닥 들고 나서 동쪽의 목제계단 길을 따라 안국사로 내려갔습니다. 고려 충렬왕 3년 월인대화상이 창건한 안국사에는 여느 가람과는 달리 대웅전이 보이지 않았고 그 자리에 극락전이 들어앉아 독특했습니다. 좌우로 천불전과 지장전을 배치한 극락전에서 흘러나오는 차분한 음악소리가 바로 아래 보이는 적상호와 더불어 향로봉과 안렴대를 정신없이 내달은 저를 잠시나마 마음 편히 쉬도록 했습니다. 광해군 6년에 세웠다는 실록과 선원록을 보관해온 사고지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버스시간에 쫓겨 들르지를 못하고 내북창 버스정류장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16시34분 덕유산국립공원 적성분소에서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안국사의 일주문을 나선지 1시간 20분만에 적성분소에 다다르기까지 아스팔트 찻길은 계속해 지그재그길이어서 생각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습니다. 적상호 삼거리에 닿기 직전 오른 쪽 치목마을로 들어서는 샛길로 들어섰다가 다시 원위치하느라 5-6분을 까먹고 나서 정신없이 걸어내려가느라 양수발전을 위해 물을 가둬둔 적상호에 제대로 눈길한번 주지 못했습니다. 향로봉-정상봉 주 능선의 동쪽 사면도 서쪽 사면과 마찬가지로 급경사여서 지그재그로 길을 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만, 서쪽 사면의 흙길에 비해 동쪽사면의 아스팔트 길은서둘러 뛰다 싶이 걸어내려가기에는 훨씬 더 발바닥이 아프고 무릎에 오는 충격도 컸습니다. 고얀 길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내려왔어도 이미 적성분소에 16시30분을 넘겨 도착해 하루 2대 밖에 없는 내북창 발 막 버스를 놓쳐버렸습니다.


 

  잠시 숨을 돌린 후 내북창을 지나 노선버스가 다니는 727번 도로상의 외북창까지 걸어가겠다고 제가 갖고 있는 마지막 끈질김을 동원하려는 차에 의외의 한 분이 저를 도와 주었습니다. 서울에서 무주리조트로 내려왔다가 짬을 내어 안국사를 들러 본 후 다시 리조트로 돌아간다는 50대 초반의 한 부부가 차를 세우고 제게 동승을 권했습니다. 일부러 손을 흔들어도 그냥 지나는 차들이 거의 다인데 손도 흔들지 않은 저를 태운 분은 1970년대 후반 몇 해동안 록크라이밍에 빠졌던 산꾼으로 요즈음은 부인이 더 산에 열심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산꾼이 아니고서야 후질구레한 모습의 하산객을 차에 태워 줄 리가 만무하다는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편히 무주에 다다랐고, 영동역에서 예정보다 30분을 당겨 서울가는 기차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존함도 여쭙지 못한 두 분에 이렇게나마 감사 말씀 올립니다.


 

  10월이면 절정에 이른 단풍이 붉은 치마를 해 두른 듯 하다하여 적상산(赤裳山)의 이름을 얻은 이 산에서 끈질감의 현장을 찾아보며 은근과 끈기를 배워갖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바테리 충전기가 고장 나 끈질감의 현장들을 카메라에 담아 오지 못해 아쉽습니다만, 가슴 속에 담아온 은근과 끈기는 산행의 모토이기에 오래오래 담아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