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포천)

 

 

                                 *산행일자:2010. 1. 15일(금)

                                 *소재지 :경기 포천

                                 *산높이 :849m

                                 *산행코스:무리울삼거리-오뚜기고개-890봉-청계산

                                                -청계저수지 휴가팬션

                                 *산행시간:9시2분-17시12분(8시간10분)

                                 *동행 :서울사대  이상훈동문

 

         

 

 

  요즈음은 시골 길도 포장이 다되어 하얀 눈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길을 걷기가 쉽지 않습니다.

염화칼슘을 뿌려 강제로 눈을 녹이는 도심지의 큰 길은 물론이고 시골 길도 차가 자주 다녀 눈이 내린 길이 그다지 깔끔하지 못합니다. 하얀 눈 위에 맨 먼저 발자국을 남긴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해 하며 그 길을 뒤따라 걸으면서 혹시라도 앞서 간 사람과 만나지 않을까 가슴 설레게 한 시골의 눈길들은 이제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어제 친구와 단 둘이 걸은 포천의 무리울삼거리-오뚜기고개의 군사도로(?)는 그 옛날 시골길보다는 넓었지만 차들이 다니지 않고 내린 눈이 그대로 남아 있어 마치 호젓한 시골 길을 걷는 것 같았습니다.

 

 

  “신화의 시대”를 유작으로 남긴 작가 이청준 선생이 어머니와 함께 걸은 소설 속의 “눈길”은 시오리로 나와 있습니다. 시오리나 되는 산길에 쌓인 눈을 녹인 것은 신작로까지 따라가 차를 태워주는 어머니의 훈훈한 모정이었습니다. 이미 다른 사람에 팔린 옛집에 불을 지피고 옛날의 옷궤를 갖다 놓은 후 하룻밤 자고 갈 아들을 맞는 모정이 시오리나 되는 시골 눈길을 걸어 새벽같이 집을 나서는 아들을 신작로까지 바래다 준 것입니다. 아들을 보내고 혼자서 눈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애틋한 심정을 어머니는 “간절하다 뿐이 것냐. 신작로를 지나고 산길을 들어서도 굽이굽이 돌아온 그 몹쓸 발자국들에 아직도 도란도란 저 아그의 목소리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만 싶었제”하고 며느리에 전했습니다. 염화칼슘으로 눈을 녹이는 도심지의 대로보다 눈 덮인 산길이 더 따뜻해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모정이 쌓인 눈을 녹을 녹여서입니다. 시골에서 빗속을 거닐 때는 별반 생각나지 않은 어머니의 모습이 눈길을 걸을 때면 빠지지 않고 떠오르는 것은 빗물은 어머니와의 애틋한 추억을 쓸어가지만 하얀 눈은 살짝 덮어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전9시2분 무리울삼거리를 출발했습니다.

아침 일찍 산본 집을 나서자 함박눈이 펄펄 날려 이렇게 계속 온다면 중간에 적당한 지점에서 산행을 접고 내려올 수밖에 없겠다 했는데 일동 도착 얼마 전 눈발이 그치고 이내 햇빛이 나기 시작해 한 걱정 놓았습니다. 일동에서 하차해 택시를 타고 이번 산행의 들머리인 무리울로 옮겼습니다. 강씨봉등산로안내도가 그려진 게시판 앞 삼거리에서 오른 쪽의 군사도로로 보이는 넓은 길로 들어섰습니다. 오뚜기 고개로 오르는 이 길은 경사가 완만해 눈길 걷기가 편했습니다. 여기 포천의 최저기온이 영하14도라고 해 옷을 여러 벌 껴입었는데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아침햇살이 따사로워 이내 우모복을 벗어 넣었습니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요양원에서 가료 중인 부인에 아침식사를 제대로 했나 확인전화를 거는 친구에게서 곁에 있음만 행복이 아니고 같이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함을 보았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노라 천천히 걸어 무리울삼거리에서 한북정맥과 만나는 오뚜기고개에 이르기까지 2시간이 걸렸습니다.

 

 

  11시2분 가평의 논남기로 넘어가는 오뚜기고개에 이르렀습니다.

“오뚜기령”이라는 커더란 표지석이 세워진 넓은 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아이젠을 꺼내 찬 후 남쪽으로 1.0 Km 떨어진 890봉으로 향해 한북정맥을 따라 걸었습니다. 2년 전 한북정맥 종주할 때도 눈이 남아 있어 조금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그 때보다 눈이 훨씬 더 많이 쌓여 오름 길이 몇 배 힘들었습니다. 산곡풍이 골짜기의 눈을 능선으로 옮겨놓아 정강이까지 차는 눈에 새로 길을 내며 운행하기가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아침햇살에 표면이 살짝 녹은 하얀 눈이 아이젠에 덕지덕지 들어붙는 바람에 이 눈덩이를 수시로 떼어내야 했고, 위로 발을 내딛을 때마다 뒤로 미끄러져 발뒤꿈치를 들고 눈 속으로 등산화를 깊게 내지르며 걸어야 했습니다. 자연 쉬는 횟수가 늘어났고 보폭이 짧아져 엄청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눈만 아니면 반시간 남짓 걸릴 길을 시간 반을 걸어 올랐으니 3배가 다 걸린 셈입니다. 이런 길을 저 혼자 걸어 올랐다면 힘이 몇 배 더 들었을 것이라 생각하자 친구와 함께 오기를 참 잘했다 싶었습니다.

 

 

  12시50분 연인지맥이 갈리는 890봉에 올랐습니다.

벤치가 서 있는 890봉에 올라 북쪽으로 난 방화선을 따라 눈길을 옮기자 한북정맥의 최고봉인 국망봉이 먼발치로 보였습니다. 시간 반 동안 러셀을 하며 오르느라 많이 지친 몸이 점심을 들고나자 다시 원기를 찾은 듯했습니다. 이 봉우리에서 동쪽의 귀목봉을 지나 남동쪽으로 뻗어나가는 한북연인지맥은 중간에 연인산과 호명산 등 여러 산을 일군 다음 청평댐으로 내려앉는 산줄기로 그 길이가 45km에 이릅니다. 집 떠날 때는 연인지맥을 따라 아베제고개까지 진출할 계획이었는데 앞서 생고생을 하고 나자 이 지맥에 발을 들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속도로는 해 떨어지기 전에 산을 빠져나가는 것이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아 한참 동안 고심하다가 같이 간 친구의 구두 뒤창이 거의 다 떨어져 덜렁거리는 것을 보고 아무래도 지맥종주는 무리다 싶어 포기하고 남서쪽에 자리한 청계산을 오르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이 길은 한북정맥을 종주하느라 한 겨울에 두 번이나 지난 길인데다 앞서 오른 방화선 길보다 눈도 덜 쌓여 초행길의 연인지맥보다 훨씬 안전할 것 같았고 동행한 친구는 두 곳 다 초행길이어서 어느 코스를 택하든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좀처럼 다시 보기 쉽지 않은 고혹적인 설경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13시10분경 890봉을 출발했습니다.

 

 

  15시20분 해발849m의 청계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890봉에서 청계산까지 이어지는 2.1 Km의 능선 길이 앞서 오른 오뚜기고개-890봉 1.0Km의 방화선 길보다 운행하기가 한결 수월했던 것은 능선에 쌓인 눈이 훨씬 적었고 앞서 지난 발자국이 꽤 많이 남아 있어서였습니다. 890봉에서 망구대분기점을 지나 청계산 정상에 이르기까지 앞서 지난 발자국이 세 네 곳 눈에 덮여 보이지 않았을 뿐 대체로 잘 나있었고 가파른 봉우리를 오르는 길에는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산행이 편했습니다. 나무 계단 길을 걸어 청계산 정상에 올라서자 사방이 탁 트여 전망이 일품이었습니다. 동쪽으로 연인지맥과 이 지맥이 일군 귀목봉과 명지3봉 및 연인산이 한눈에 들어왔고, 북쪽으로 명지3봉에서 조금 떨어져 자리한 명지산이 우뚝 솟아 최고봉다워 보였습니다.

 

 

  생각보다 길이 잘 나있어 산행 중 친구와의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2년 간 환경영향평가학회를 이끌었고 지금도 대학에서 환경공학을 가르치는 친구에 제가 불만스럽게 이야기한 것은 우리나라 환경단체들이 너무 반대만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껏 환경단체들이 역대정부에서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국가적 대사업을 흔쾌히 찬성한 것을 별반 보지 못했습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수장으로 일해 온 역대정부 모두가 환경단체가 반대하는 대로 매번 잘못된 일만 해왔다면 이것은 정부의 문제이기 이전에 매번 대통령을 잘 못 뽑은 국민의 어리석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 국민이 이리도 어리석지 않다면 이제 환경단체들도 제대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합니다. 찬성할 것은 찬성하고 반대할 것은 반대해야 그들이 대표한다는 시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환경단체라고 무결점의 단체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도 실수하고 잘 못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반대가 잘 못으로 밝혀질 때는 국민들에 사과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그들이 잘못했다고 사과한 것을 저는 들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이 친구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이슈가 되는 환경문제를 하나하나 따져보고 숙고한 후 찬성할 것은 찬성하고 반대할 것은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4대강 개발을 적극 반대하는 이 친구의 반대논리를 개발을 지지하는 제가 경청하는 것은 이 친구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자세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17시12분 청계저수지 위 휴가팬션 앞에서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청계산 정상에서 청계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이 가팔라 아이젠을 찼습니다. 친구가 뒤축이 덜렁대는 등산화를 신고도 아이젠을 차지 않고 잘 내려가는 것은 두 개의 스틱으로 균형을 잡는 것이 가능할 만큼 몸무게가 가볍기 때문일 것입니다. 운악산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이 왼쪽으로 갈리는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내려갔습니다. 얼마 후 만난 봉우리삼거리에서 오른 쪽 길로 진행하다가 왼쪽으로 내려서자 계곡이 보였습니다. 아직도 길가의 나뭇가지들이 솜뭉치 같은 눈을 붙들고 있어 물이 흐르지 않는 계곡도 황량해보이지 않았습니다. 6년 전 여름 자연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될 만큼 숲이 우거진 이 계곡으로 청계산을 오를 때는 정글을 지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계곡을 빠져 나와 다다른 휴가팬션 앞에서 눈길 산행을 마치고 택시를 불러 일동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번 산행으로 눈길 한 번 원 없이 걸어보았습니다.

눈은 어디에 착지하느냐에 따라 그 수명이 결정됩니다. 강이나 바다 등 물 위에 떨어지면 눈은 그 순간 일생이 끝납니다. 도시에 내리는 눈은 염화칼슘이라는 킬러를 만나지 않아야 수명을 늘릴 수 있습니다. 도로에 내려앉은 눈도 운전자들의 원성 때문에 그리 수명이 길지 못합니다. 햇볕에 못 이겨 자연사를 하는 산속의 눈이 그래도 제 수명을 다하는 편입니다. 이런 눈이 원래 수명보다 더 오래 사는 방법은 고드름으로 변신하는 것입니다. 정신없이 하늘을 날다가 이 땅에 내려앉아 얼마간 쉬다보면 날씨가 풀리고 그래서 녹아버리면 일생이 끝나는 눈이 오랜 시간 생명을 부지해가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얼기와 녹기를 되풀이하며 고드름으로 변해 얼음기둥을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변신을 통해 수명을 늘려가는 눈의 지혜를 배운다면 70 나이를 향해 질주하는  세월이 그리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