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산 이름은 없지만
산에서 하루를 즐기기에 충분한 코스라 생각하여
춘천 산우님들과 같이 대룡산 근처를 산행을 하였는데
우연히 벙커고지 안내판을 보게 되었다.

 

벙커힐 전투;
1951년 5월 중공군은 제 2차 춘계 대 공세 중 홍천-인제라인을 공격하다,
주공격선 우측의 미 제2사단 38연대 방어선으로 공격을 전환하였고
다시 격렬한 저항에 부딛힌 중공군은 38연대 좌측의 3대대가 위치하고있는
800고지를 향하여 인해전술을 사용하여 공격하였다.
5월 17일부터 19일까지 이틀에 걸친 "벙커고지" 전투에서 중공군은 5000명이 전사하였고
홍천 방면으로 진출에 실패하여 공세에서 수세로 전세가 변하였다.



(지도)(누르면 확대됨)


남춘천역에 도착하니 솔개님이 나와 기다리고 있다.
구내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택시로 이동,
상걸리에서 임도를 따라 포장이 끝타는 곳까지 올라가는데
편히 올라가는 것도 좋지만 멀미가 나서 혼났다.

-09;00 상걸리.

(대룡산)

임도를 따라가다 u 자로 휘어지는 지점에서 우측으로 올라가
무덤을 지나 그냥 무대뽀로 벌목한 가파른 지능선을 올라가면
578.7봉 동남족 약 600m 높이의 능선 분기봉이다.

-09;34 능선 분기봉

능선에 오르니 북동쪽 사명산이 나무사이로 보인다.

(09;45 사명산)

-09;46 임도


임도에서 보니 서쪽 대룡산과 녹두봉이 멋지게 보인다.

(09;49 좌측부터 머리만 보이는 연옆산-녹두봉-대룡산)

능선 분기봉인 692봉은 임도를 따라 우회하여 안부에서 올려치면
전봇대가 서있는 주능선인데 동쪽의 가리산이 나무사이로 보이기 시작한다.

-10;01 전봇대




(10;13 가리산)

능선엔 눈이 제법 밟힌다.
사오랑 고개가 정확하게 어딘지는 구분이 안되고  
경주 이씨묘를 지나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가니 영춘지맥이다.




(경주 이씨 묘)

-10;37 745.9봉



북동쪽 사명산을 바라보며 막걸리 마시고 출발.
동쪽으로 영춘지맥을 따라가는데 능선엔 레쎌이 되어 있다.



(11;10 동쪽 멀리엔 바위산이 보인다)

-11;16 789봉

789봉을 지나 내려가다보면 능선 우측에 벌목지대가 나오는데
가리산이 멋지게 보이는 전망터이다. 간식 먹고 잠시 휴식.

(11;22 가리산)

늘목고개 분기봉으로 가파르게 오르며 잠시 사방을 돌아본다.
우측으로는 자지봉에서 올라오는 능선 뒤로 연옆산/응봉이 보인다.



(11;32 자지봉쪽 능선이 보이다가 더 오르면)

(11;38 연옆산과 그 우측 응봉이 보인다.)

북서쪽으로는 멀리 용화산도 보인다.


(11;59 용화산)

-12;01 늘목고개 분기봉
영춘을 벗어나 남쪽 춘천시계를 따라 진행.

-12;16 춘천 시계 분기봉
춘천시계를 벗어나 남서쪽으로 진행.

-12;23 916.0봉


군용 삼각점이 있고 북쪽 전망이 처음으로 시원하게 터진다.


(북쪽 전망)(누르면 확대됨)


(확대한 북동쪽 전망. 마적산부터 사명산까지)(누르면 확대됨)


(1=마적산,2=용화산,3=오봉산)

(1=부용산,2=해산)

(사명산)

남쪽으로 조금 이동하여 점심을 먹는다.

(반찬은 여러 종류이나 맨 풀이다)

916.0봉 남쪽 봉우리에선 남서쪽 사면으로 마루금이 갈라지는데
독도 주의 지점이며 전망도 터진다.


(13;36 남서쪽 전망)(누르면 확대됨)


(1=응봉,2=연옆산,3=구절산)

임도가 건너가는 안부를 지나 낮은 봉우리를 넘어가니 벙커고지 안내판이 나온다.

(13;39 벙커고지 안내판)

-13;50 벙커 고지




약 800m 조금 안되는 봉우리인데 벙커고지 안내판과 의자 쉼터를 만들어 놨다.
동쪽으로는 멀리 영춘지맥의 가마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마봉 1192m)



(쥐약님과 솔개님 리본)

벙커고지 남쪽 봉우리를 넘어가니 잠시 동남쪽 전망이 터진다.

(14;12 동남쪽 전망)

(확대한 동남쪽 전망-1)(누르면 확대됨)


(확대한 동남쪽 전망-2)(누르면 확대됨)


(1=가마봉,2=소뿔산)

(1=백암산,2=백우산)

(1=응봉산1103m?,2=용황산648m?)

(청벽산 근처의 649.7봉??)

전망이 넓게 터지질 않아 방향으로만 대충 가늠하고 발길을 옮기는데
청벽산 방향의 인상 깊은 봉우리는 649.7봉인지 알수 없다.
아무튼 춘천 홍천 산들은 오랫만에 만나 본다.



(14;27 모양이 바뀐 가리산)

-14;29 풍천 국유 임도 삼거리


-14;43 750봉



(15;10 우측 가마봉부터 거니고개로 내려가는 영춘지맥이 보인다.)

-15;17 삼거리 둔덕.
동쪽 야시대천으로 능선과 길이 갈라진다.

-15;28 719.3봉


만족스럽지는 않으나 남쪽 전망이 다소 트여 오음산이 멀리 보인다.


        (남쪽 전망)(누르면 확대됨)


(오음산)

(공작산은 나무에 가렸다)

719.3봉에서는 능선이 좌우로 갈라지는데
지도를 우측 능선으로 준비해 와서 우측으로.


(견물 생심)


(생강 꽃-봄!)

546봉 직전에 다소 독도가 까다로운 구간이 나온다.
솔개님은 지도 없이도 제대로 가는데 잠시 알바하다 뒤를 따라 간다.

-16;03 546봉

폐묘 한기를 지나 내려가면 다시 임도가 나온다.
아마도 지도의 큰고개 부근인듯.

-16;13 임도


임도를 지나면 순한 능선이 나오는데 넓은 길이 나있다.


-16;30 능선 삼거리. 좌측 중간 말로 능선과 길이 갈라진다.

(청벽산 근처의 멋진봉우리가 자꾸 눈에 밟힌다)

-16;35 능선 분기 삼거리
넓은 길은 우측 554.3 봉으로 향한다. 좌측으로.

-16;45 502봉


(16;58 능선의 철 기둥)

-17;00 안부 삼거리.
우측 구성포리로 길이 갈라진다.

-17;15 둔덕 삼거리.
우측 구성포리로 능선과 길이 갈라진다.

-17;20 415.9봉

가리산 모양이 또 변하였고 남쪽 전망이 다소 트인다.


(돌아다 본 가리산)


(남쪽 전망)(누르면 확대됨)


(1=오음산,2=공작산의 작은 골재)

(?=봉화산,??=매봉산)

(?=갈기산,??=까끈봉)

신내교까지 못갈 것도 없지만
오랫만에 춘천/홍천의 산들과 산우들을 만났으니
뒷풀이 시간이 넉넉해야할 터!
287봉을 올라가다 빽하여 봉우리 직전의 삼거리에서
좌측 백이천쪽으로 하산을 한다.


(17;48 287봉 사면에서 본 남서쪽 전망)(누르면 확대됨)


(1=공작산,2=응봉산 방향)

-17;49 안부 삼거리. 동쪽으로.


-18;00 백이천


2009.03.29 일요일. 맑음

동그라미,솔개,쥐약,칼바위 님들과 같이 다녀옴.

갈때;
성북역 06;18 춘천행 무궁화호
남춘천 역에선 택시로 이동.

올때;
백이천서 홍천까지 택시로 이동,
홍천 터미널서 버스로 용문와서 기차타고 상경함.


 

"바야흐로, '벙커힐'전투가 시작된것이다.

5월17일 어둠이 지면서, 24개의 벙커에 몸을 숨기고있는 3대대의 전초중대인 킹중대의
병사들귀에 중공군의 뿔피리소리가 차가운 산골짜기의 안개를 뚤고 들리기 시작하였다.
곧이어, 제일선 철조망 부근의 지뢰가 폭발하기 시작하면서,총성이 들리기 시작하였다.
중공군들은 지뢰가 상대적으로 적게 매설된 급경사면을 타고 고지위로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킹중대가 일제사격을 개시하고 고지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중공군과 미군이 교차사격하는 총성과 고함소리가 전 고지위를 뒤흔들었으며,
전투경험이 부족한 킹중대장 '브로넬대위'는 혼란에 빠져, 중대에 퇴각명령을 내렸다.
이에 헤인즈중령은 퇴각중인 중대원에게 원위치로 복귀할것을 명령하고,
고지위에 있는 중공군을 몰아내기 위해 예비소대병력을 고지위로 투입시켰다.
헤인즈중령은 4.2인치 박격포 소대에게 중공군이 몰려든 고지위로 포격을 명령하고는
직접 진두지휘하에 고지위의 중공군을 공격하였다.
날이 밝자, 심각하게 약화된 중공군 공격부대는 고지아래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밤이 되자, 전력을 재정비한 중공군들이 다시 고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치열한 포화속을 뚤코, 중공군들은 자신의 전우들의 시체를 넘고,넘어, 마침내 고지정상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벙커속으로 깊이 몸을 숨긴 미군들과
지상 1미터에서 폭발하여 수많은 날카로운 파편을 날려보내는 다중폭발탄뿐이었다.
38연대 포병대대에서 발사한 105mm다중폭발탄 2천발이 8분동안 고지 정상과 전사면을 향해 일제히 발사되었다.

고지위에 올라와 있던 중공군 전원이 전사하자, 중공군은 제2공격군을 고지위로 올려보냈다.
고지위에 깊숙히 엄페하고 있던 킹중대원들은 800고지정상과 전사면을 포탄으로 짓이겨 줄겄을 포병대대에 요청하고,
제38연대 포병대대는 다른 야포대대의 지원을 받아 밤새도록 10,000발의 다중폭발탄을 발사했다.

날이 밝자 고지위에 중공군 생존자가 전무한 것을 확인한 미군은
전선재정비의 일환으로 소수의 부상자만이 발생한 채 전원무사히 고지를 철수하였다.

5월28일 재반격에 성공한 한국군과 미군은 인제를 탈환하였다.

제2차 춘계대공세중 중공군과 북한군은 65,000명이 전사하였으며,
벙커힐에서 확인된 포병공격에 의한 중공군의 전사자수는 5,000명에 달하였다."
(floodkim1님 야후 blog에서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