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번은 아내와 꼭 해보고 싶었던 지리산 종주

사실은 5월 1일에서 5일까지 효도휴가 때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는 지리산 국립공원이 입산 통제기간이라 가고 싶어도 가지 못했다. 여름방학이 돌아왔다. 그런데 7월말과 8월 초순은 너무 덥고 장마가 있을 것 같아 8월 11일에서 13일까지 2박 3일 코스로 계획을 잡았다. 가기전 인테넷상으로 살펴보니 종주를 하려면 벽소령산장과 장터목산장에서 각각 1박을 해야 했다. 지리산에 있는 벽소령산장과 장터목산장은 이미 예약이 모두 끝나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15일 까지도 모두 예약이 끝난 상태였다. 이를 보면 많은 등산애호가들이 지리산 종주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지리산 종주 경험이 있는 큰 딸 에게 물어보니 산장에 가면 예약 안한 사람도 상황에 따라 재워준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가기로 결심하고 우비 와 라면등 간편식과 쌀, 김치, 밑반찬 ,그리고 손전등 등 착실히 하나 하나 준비했다. 기차표는 영등포 출발 구례읍도착(전라선)으로 10일 밤 막차를 인테넷 예약을 했다. 막차로 한 것은 구례 읍에 너무 일찍 도착해서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싶기 때문이다.

드디어 10일밤 지리산 종주를 위한 열차에 우리는 몸을 실었다. 영등포에서 밤 10시 57분 무궁화 열차였다. 열차는 비교적 시원하고 편안하였다. 가는 동안 잠을 잠깐이라도 자려 하여도 선잠 일뿐 잠은 오지 않았다. 침대열차를 탔으면 잠이 올텐데 하는 호사스런 생각도 들었다. 11일 3시 40분 구례 읍에 도착 우리는 역문을 나왔다. 역문을 나오는데 이상하게 열차표 받는 사람이 없었다. 시골이라서 믿는지, 배낭 짊어진 사람이라 믿는지 알 수 없었다.

역전을 나오니 아직도 밖은 컴컴하였다. 역전 길 건너에 버스 한 대가 출발하는 것이 보였고 많은 등산객들이 버스를 다 타지 못했는지 그룹을 지어 여기저기 모여있었다. 택시 운전사에게 물어보니 산행을 하려면 성삼재 까지 가야하는데 버스는 30분마다 1대씩 있고 종점에서 사람들을 태워 오기 때문에 등산객이 모두 타고 갈 수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택시를 탔다. 요금은 3만원이었다. 택시는 가는 도중에 합승한 승객을 화엄사에 내려놓고 곧바로 성삼재로 향하였다. 계속 산허리를 돌고 돌았다. 구례 읍에서 멀기도 하지만 멀미가 나도록 산을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볼 때 3만원은 결코 비싼 요금이 아닌 것 같았다.

성삼재 도착시간 4시 10분

아내는 택시에서 내리자 마자 약간 어지러운지 잠시 앉아 있었다. 날은 아직도 밝지 않아 컴컴하였으며 지대가 높아서인지 쌀쌀한 바람까지 불어 약간 추위를 느끼게 하였다. 나는 긴소매의 티샤스를 갈아입었다. 약간 아래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차량들 옆에서 손전등 불이 한 두개 왔다 갔다 하며 몇몇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위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뒤따라갔다. 가는 사람들에게 노고단 가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들도 처음 가는 길이라며 이 길이 맞는 것 같다고 하였다.

우리도 뒤를 따라 갔다. 아직도 캄캄하여 손전등을 켜고 올라갔다.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더욱이 그믐달 밑에 친구별이라는 샛별 하나는 더욱 크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달빛 , 별빛아래 산 능선만 보이는 어두움은 운치를 더해 주고 있었다.

차츰 날이 밝아 오니 주변에는 달맞이꽃이 너무 아름답게 피여 있었다. 그냥 갈 수 가 없어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런데 달맞이 꽃잎 크기가 우리가 평소 보아왔던 것 보다 훨씬 컸으며 달빛을 받아 더욱 노랗게 피어있었다. 올라가면서 계속 아름다운 달맞이꽃을 볼 수 있어 힘들지 않고 올라갈 수 있었다.

노고단 도착 5시 20분,

이미 날은 훤히 밝았고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아침을 해먹고 있었다. 우리는 뜨겁게 먹으려고 컵라면을 하나 사고, 가지고 온 밥과 고추, 김치반찬을 꺼내어 먹었다.

식사후 대충 양치질을 한 후 곧 바로 노고단 대피소 뒷산 길로 산행을 시작했다.

올라가는 길은 약간 넓었지만 가파르고 돌을 울퉁불퉁하게 박아놓아 다소 힘이 들었다. 길을 따라 산위로 오르니 오른쪽으로 멀리 노고단 KBS중계소와 노고단이 보였다. 노고단 가는 길은 입산통제가 되어있었다. 안내판에는 천왕봉이 직진표시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표시된 대로 곧 바로 나아갔다. 길은 산허리를 도는 듯하였고 가는 길은 울퉁불퉁한 돌이 많았지만 힘이 들지는 않았다. 돌길을 지나 숲속 길로 접어들었다. 허리까지 키가 큰 산죽이(조릿대: 조리를 만드는 대나무)좌우에 좁은 길을 따라 널어져 있었다. 또한 이름 모를 주황색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작지만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특히 외롭게 한 두개 피어있는 갸날푼 꽃들은 더없이 애처롭고도 아름다워보였다. 임걸령까지는 3.2 킬로 아무리 가도 임걸령은 나타나지 않았다.

가는 도중에 샘물을 만났다. 물통에 물을 새로 담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산행을 계속하면서 오르락 내리락을 몇 번 반복한 끝에 임걸령에 도착하였다. 온 길을 뒤돌아보니 노고단 중계소가 희미하게 보였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산행을 계속했다.

쉬며 걷고 쉬며 걷고를 반복하면서 삼도봉에 도착하였다. 삼도봉은 정상에 삼각뿔을 박아 놓고 세 개의 면에 경상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를 표시하였다. 여기가 경남, 전북,전남의 경계지역이라는 곳이었다. 산행은 잠깐씩 쉬면서 계속되었다. 땀이 비오듯 흐르고 연신 흐르는 땀을 배낭 어깨끈 앞에 묶어둔 수건으로 온 얼굴을 딱아내었다. 가는 사잇길에 뱀사꼴 대피소로 가는 길이 있었다. 우리는 뱀사골로 가지 않고 직진을 계속하여 화계재를 지났다. 가는 도중에는 키가 큰 철쭉나무가 길 좌우로 빼곡이 널려있었다. 철쭉꽃이 피는 봄이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하면서 지난해 등산했던 가평의 연인산 철쭉도 함께 그려보았다. 아내는 나보다 힘들지 않고 빠르게 걷는다. 나는 지팡이 없을 때는 무척 다리가 무거워 힘겹게 걸어 올라갔지만 지팡이의 좋은 점을 알고부터는 걷는 것이 빠르지는 않지만 꾸준히 걸어가는 편이다. 그리고 올 때부터 왼쪽 무릅이 약간 걱정이 되어서 최대한 이번 산행은 종주이니 만큼 절대 아프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서는 안전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왼쪽 발은 항상 곧은(수직)일자로 딛으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왼발을 약간 곧바로 딛지 않으면 무릎이 아팠기 때문이다

화개재를 지나 연화천 대피소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총각샘이 있다고 지팡이 두 개 갖고있는 젊은이가 말하였다. 그런데 그 총각샘은 잘 찾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가다가 옆으로 빠지는 길이 있는데 그것이 작아서 잘 안보인다는 것이였다. 오는 도중에 만난 여자 대학생은 자기는 예뻐서 그 총각이 자기한테 반하기 때문에 자기는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참 재치있는 위트였다. 계속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면서 총각샘에 위치를 생각하면서 걸어갔다. 내리막길에서 내려와 잠시 쉬려는 참에 먼저간 지팽이 두 개 짚은 젊은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여기가 총각샘이라고 말하였다. 이어서 가는 길을 알려주며 물이 조금있는데 먹을 만은 하다고 하였다. 처녀대학생이 내려가서 우리 물통 2개를 떠왔다. 먹어보니 시원하고 맛있었다. 등산 중에 총각샘 같은 것이 얼마나 등산에 심신을 풀어 주는지, 유우머도 샘이름도 재미있고, 이러한 것들도 등산에 묘미의 하나가 아닐까? 총각샘에서 잠시 쉰다음 연화천대피소를 향하여 산행을 계속했다. 한참가다가 내려가는 층층계 계단을 만났다. 잠깐 계단을 밟고 내려가니 연화천 대피소가 눈에 띄었다. 연화천 대피소에 도착하여 등산화를 풀고 발을 차거운 물에 씻은 다음 곧바로 밥을 해먹었다. 산행중 만난 처녀 대학생도 같이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하면서 그 여자는 다른 일행이 2명이 있는데 너무 늦게 따라와서 먼저 앞서왔다고 했다. 그 여자들은 부스타를 갖고 오지 않았다고 했다. 부스타를 빌려달라는 뜻이 보인다

그래서 점심은 밥을 많이 하여 같이 먹었다. 얼마후 뒤떨어진 일행 2명이 와서 남겨둔 밥을 주었다. 그들은 부끄럼 없이 맛있게 우리가 주는 밥과 반찬을 먹고 미안한지 우리 코펠을 씻어주었다. 산에서 준비가 안되었을 때는 저 여자들 만큼 비위 살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화천에는 털보 아저씨가 있었는데 아내와 처녀대학생이 털보아저씨의 얘기를 감탄하면서 살살 띄워주니까 자기의 위대함을 자랑스레 신나게 말하였다. 엄홍길도 자기 후배이고 히말라야 등반에서 동료가 죽으면 시체를 토막내어 갖고와서 산밑에 내려와서 다시 봉합해서 우리나라로 갖고 온다고 하고, 히말라야 등반대에 셀퍼들의 고지높이별 노임이 다르다며 꼭 자기가 히말라야 등반대인양 자랑을 널려지게 했다. 내가 설악산이나 높은 산 산지기들은 털은 왜 깎고 다니느냐고 하니까? 귀찮아서 그런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1주일에 한 번 등산에 대한 강의하러 갈 때는 수염을 깎고 간다고 하였다. 우리가 물으면 더 신나서 얘기할 것 같은 얼굴이다. 여기서는 다라에 시원한 물 속에 음료수 캔을 그냥 갔다가 먹는다. 그런데 먹은 다음 음료수 값을 매점에 갚아야 한다. 얼뜻보면 그냥 먹으라고 놓아둔 것 같다 털보 아저씨가 슬슬 농담을 하면서도 항상 누가 먹고 돈을 안 내는지 보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나서인지 사람들은 푹 퍼져서 드러눕는 사람들이 간혹 눈에 띄었다.

우리는 배낭을 꾸리고 벽소령산장을 향해 바삐 움직였다. 왜냐하면 산에서는 해가 일찍지기 때문에 5시 전에 벽소령산장에 도착해야 한다는 얘기 때문이다. 종주를 끝내면서 안 안일이지만 오히려 산 능선 길에서는 해가 더 늦게 지는 것을 알았다. 해가 일찍지는 것은 계곡이었다.

가다가 산위에서 우리가 지나온 것을 보니 삼도봉에서 보았던 노고단 KBS중계탑이 보이지 않았다. 멀리 희미하게 보이던 노고단도 보이지 않았다. 또 앞을 보면서 어디가 천왕봉이냐고 물으니까 누군가가 저 멀리 끝에 희미하게 보이는 마지막 산 넘어라고 하였다.

생각해 보니 노고단에 볼 때 멀리 희미하게 보이던 마지막 산이 우리가 점심먹던 산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즉 지리산 종주란 아주 멀리 보이는 희미한 산을 가고 또 똑같이 멀리 보이는 마지막 희미한 산을 가야 하는 것이 지리산 종주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5시 조금 못되어서 벽소령에 도착했다. 우리는 예약을 안 했기 때문에 대피소 뒷마당에 자리를 깔았다. 그늘이 지고 밤이면 별도 잘 보일 것 같아 참 자리가 좋아 보였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보더니 하나 둘 자리를 깔았다. 저녁을 맛있게 해먹고 편히 쉬는데 예약을 안 한사람은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우리도 잘 수 있게 해주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안내자에게 가서 자기방 자리와 내방자리 표를 구입해왔다. 그래서 저녁을 먹고 배낭을 들고 내방자리 번호 140번을 찾았다. 지하에 있으며 군인내무반에 침상으로 되어있었다.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모두 자기가 누울자리 만큼의 공간이 있었다. 꼭 배낭하나 넓이 만큼, 어깨넓이 만큼만 간격이 주어져 있었다. 배낭하나 베개삼고 담요 반에 반접어 놓고 누우면 딱 맞는 면적이었다. 담요 포함 8000원씩 받았다. 추운데 밖에 자느니 그래도 잘 됐다 생각이 들지만 8천원씩 140명이면 110여만원 돈이라고 생각하니 만만치 않은 벌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밖에 나와보니 10시가 되었는데도 저녁을 해먹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때 배낭을 짊어지고 벽소령에 들어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 이 사람들은 야간산행을 각오하고 온 사람들인 것 같았다.

10시 30분쯤 잠을 자러 방으로 들어갔다. 오는 날 열차에서도 잠을 못 잤지만 이 벽소령 대피소에서도 잠은 오지 않았다. 벼개가 없으니까 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소매가 긴 티셔쓰를 깔개에 둘둘 말아 벼개로 만들어 잠을 청했다. 허지만 잠은 그저 건성이었다.

아침에 여자분이 140번 찾는 다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벌써 깨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얼른 옷입고 배낭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얼른 자리를 깔고 아침을 해먹고 다음 코스인 세석산장을 향해 출발했다. 세석산장까지는 3.2킬로로 먼 거리는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배낭을 꾸리고 세석산장을 향해 산행을 계속했다.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산정상에서 지리산을 바라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지리산은 겹겹히 산이 많고 설악산처럼 모가 나지 않은 둥그런 산인 것 같았다. 그리고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이 생각이 났다. 저 멀리 보이는 이 지리산 자락 어딘가에 딱쿵 , 따르르륵하면서 빨지산의 총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더구나 깊은 밤이면 빨지산이 내려와 마을 주민에게 식량을 얻고 재빨리 지리산 숲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것이 상상되기도 하였다. 태백산맥, 아리랑, 토지를 읽은 것이 생생하게 이 지리산에서 보여지는 것 같았다. 아리랑에 연곡사, 화엄사등, 공?스님도 생각이 나게 하였다. 산행길 앞으로 멀리 세석산장이 아닌 장터목 산장이 보였다.

우리는 세석산장 2.6킬로 안내판을 만났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구나 힘이 나서 걸었다. 그런데 아무리 걸어도 세석산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덧 1.2킬로 남았다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잠시 쉬고 산행을 계속했다. 그러나 1.2킬로는 뱫은 거리가 아니었다. 한참 지루하게 걸어가서야 600미터 남았다는 안내판을 만날 수 있었다. 세석산장이 보이면서 넓다란 산 경사면이 펼쳐졌다. 여기가 봄이면 철쭉꽃이 아름답게 펼쳐보이는 사진 속에 지리산 철쭉축제가 이 곳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세석산장은 구능속에 자리잡은 알프스의 집 같았다. 사람들 말로는 세석산장이 시설이 제일 잘 되어 있다고 하였다. 사실은 세석산장은 12시도 못되어서 도착해서 점심먹기는 조금 이른 듯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점심을 먹었다. 점심시간이 이르다 해서 조금 더가서 촛대봉에 올라서 점심을 먹는 다면 우리 혼자만 먹을 것 같아 재미가 없고 우리 둘이 궁상떠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남이 할 때 같이해야 재미가 더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였다.

세석산장은 물이 수도꼭지 2개에서 많이 나온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수도꼭지를 약간 옆으로 틀어져 있는지 모르겠다. 점심을 먹고나서 일어나서 왼다리를 들어 올리려니까 무릎 끝이 너무 아팠다. 잠시 있으니까 괜찮아서 우리는 촛대봉을 향해 올라갔다. 너른 경사면의 들판이 마음이 확트이는 듯 우리는 여유를 갖고 오르면서 꽃도 보고 나무도 보면서 서로 얘기를 주고 받으며 서서히 올라갔다. 촛대봉 가까이 올라가면서 바위가 꼭 사자얼굴처럼 보였다. 그런데 왜 촛대봉이라고 했을까? 의아하다 촛대봉에 올라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촛대봉을 내려가다가 하얗게 핀 들국화를 보았다. 들국화가 너무 개끗하고 아름다워 사진을 찍었다. 촛대봉을 내려와서 다시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아내는 옛날 처녀시절에 나무할 때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이라고 하였다. 바람에도 옛 생각이 들어있었다. 오르락 내리 락을 거듭하여 마침내 장터목 산장에 도착하였다.

아내는 백무동으로 내려가자고 하였다. 나는 우선 내려가서 식수를 2통 떠왔다. 아내는 떠온 물 중에 1통을 양말 벗은 발에다 부으면서 시원하면서 좋아했다. 나도 벗으라고 해서 나도 발에 불을 부었다. 발이 너무 시원했다. 다시 남은 물을 아내가 발에 부었다.

잠자리 한 마리가 빨간 매니큐를 바른 엄지발가락에 앉았다. 도망가지도 않는다 . 이상하게 이 지리산 잠자리는 자주 사람 옆에 오고 도망도 가지 않는다. 산 속에서 외로워 사람도 반가운가 보다 그리고 여기는 매미소리도 천천히 여유있게 우는 것 같다. 서울에 매미들은 바쁘게 시끄럽게 우는데 여기 매미는 많이 울지도 않지만 바쁘게 우는 것 같지가 않다

잠깐 쉰 다음 우리는 내려가기로 하였다. 장터목 산장은 모두 예약이 끝나서 밖에서 자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내소에 들어가서 물어보니 이미 예약은 다 끝났고 어제도 95%정도 예약한 사람이 잤다고 했다. 그리고 여기 장터목은 벽소령과 달라 여기 저기서 올라오기 때문에 거의 예약한대로 방이 찬다고 했다.

나는 천왕봉은 다음에 따로 올라가 보기로 하고 백무동 쪽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내려오는데 어떤 나홀로 등산객은 크고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올라오고 있었다. 아마 저런사람들은 상당히 산행을 좋아하고 상당히 산행에 대해서 깊은 맛을 느낀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준비도 단단히 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려오면서 무릎이 아프면 무리하지 않고 그때그때 쉬어가면서 내려갔다. 괜히 무리하다가 더 아프면 안될 것 같아서이다

내려오다 시원한 물이 있어 양말을 벗고 물에 담그고 머리감고 세수도 했다. 그런데 물이 너무 차가워서 물에 오래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발바닥에서 쥐가 날 것 만 같았다. 지금까지 여러번 등산을 하면서 내려오다 물에 발을 담가보았지만 이렇게 쥐가 잘 것 같은 느낌은 없었다. 아마 너무 오랜시간의 행군으로 발바닥이 너무 혹사당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쉬면서 쉬면서 우리는 내려왔다.

5시 조금 못되어서 다 내려왔다. 백무동 매표소를 빠져나와 민박집, 음식점이 나타났다. 어떤 사람 2명이 우리의 등산여정을 듣더니 감격스러운 듯 우리를 보았다. 그러면서 자기네는 내일 백무동을 올라가서 어디 어디로 간다고 하는데 너무 쉽게 얘기를 하였다. 백무동에서 장터목까지도 만만치 않은데 그들은 너무 쉽게 얘기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시내버스를 타고 일원으로 향했다. 거기에 가야 남원 가는 버스가 있기 때문이다 일원가는 버스 운전사는 시골운전사답게 운전하면서 한 손에 파리채를 들고 운전대 앞에 파리를 잡아가면서 운전을 했다. 한편으로 위험스러워 보이면서도 시골운전사의 한가함을 엿볼 수 있었다. 가다가 버스정류장에서 아는 사람인지 버스를 세워놓고 어이 안타?

이번 지리산 종주는 힘도 들었지만 등산에 맛을 한층 더 깊게 해준 잊지 못할 산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