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가는 길에

1. 낙성대에서
2. 삼성산 산행기
--------------------------

*.1. 낙성대에서


관악산 가는 길에 부르는 소리 있어
낙성대 들렸더니 강감찬 장군께서

긴 칼을
높이 뽑고서
비둘기와 노니시네.


아버지 *궁진(弓珍)과 여우여인 사이에
큰 별 떨어지던 날 태어난 *문곡성(文曲星)

출중한
그 얼굴 꺼려
곰보 얼굴 되었구.


거란군 10만 대병 1만2천 정예병으로
생존자 수천 명뿐의 구주대첩 기쁨으로

현종은
*영파역
마중 나와서
공의 충성 기렸다.



무인 후예 박 대통령 강 장군의 충용 기려
출생지 관악 산록에 유적지 조성하고

낙성대(落星垈)
휘호를 주어
그 뜻 받들게 하였다.

*궁진: 왕건의 공신/*문곡성: 북두칠성/*영파역: 지금의흥

*. 2. 삼성산 삼막사 산행기
(2004.7.5/ 관악역-안양유원지-출렁다리- 만남의광장 능선-명상의 숲- 능선분기점-삼막사-무너미고개- 서울대/내 아내의 유랑의 남편과)

*. 한국 유일의 마애 종

장마철이라 어제까지 비가오고 큰 바람이 지나간 뒤였다. 이런 때는 시야가 멀리까지 트이어 카메라 촬영에 더 없는 좋은 기회라고 아내의 만류를 뒤로 하고 관악역에서 내려서 안양 유원지를 향하고 있다. 오늘 일정은 삼막사를 보고 삼성산에 오르는 일이다.
안양유원지로 가는 길이었다. 비산공원 주차장 뒤 길가에 비각이 하나 있고 그 옆에 샘터가 있다. 한국에 오직 하나 밖에 없다는 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안양 석수동 마애종(경기도 유형문화재 92호)으로 이를 보호하는 보호각이었다.
마애종(磨崖鐘)이란 암벽에 새긴 종이란 뜻이다. 승려가 매달린 음통(音筒)이 있는 종을 당목(撞木으로 치고 있는 모양을 양각으로 묘사한 종인데 연화문(蓮花紋) 등의 문양이 두렷하다.
33숙 28숙으로 아침 33번 저녁에 28번 치고 그 치던 그 종소리가 천년을 계속해서 여기서 울려대고 있었는가. 가만히 눈감으면 그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 샘가 옆에서 노숙자 둘이 밥을 비벼 놓고 식사하다가 함께 하자 권하기에 고맙게 사양하고 발길을 돌리려는데 소주 한 병 값을 놓고 가란다. ‘아하, 먹지 않을 밥을 권한 것은 내 주머니를 탐한 것이었구나!’ 소주 한 병에 1,200이란 말을 듣고 1,000원 한 장에 동전을 찾고 있는 걸 보더니 2,000원  주면 되지 무얼 그리 찾느냐 하는 말에 발길을 그냥 돌리고 말았다. 주는 대로 받지 않는 것은 동정을 받을 자격도 없는 자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염불암(念佛庵) 가는 길은 출렁 다리를 넘어 아스팔트 길을 오랫동안 걷는 길이라고 해서 중간의 만남의 광장으로 오르는 능선 길로 붙었다.
간밤 폭풍 민들레호의 강풍이 이렇게 심하였나, 부러진 나뭇가지가 이렇게 많은 것은 처음 본다. 지도에도 없는 능선 길인데다가 평일이라서 더욱 인적 드문 후미진 능선 길을 오르고 또 오른다. 초행길이라 걱정도 되었지만 아기자기한 바윗길이고 뒤돌아 볼 때마다 시야는 점점 넓게 보여서 혼자지만 지루한 줄 모르겠다.

드디어 확- 트인 오른쪽 계곡 저 너머에 염불암(念佛庵)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려 태조가 도승 능정(能正)을 만나 지은 안흥사(安興寺)가 변한 것이 염불암(念佛庵)란다.
높은 암벽에 석불을 중심으로 암석과 소나무와 어울린 저 정결한 모습을 바라만 보아야하는 이 암릉 코스를 택한 것을 잠시 후회하게도 한다.



관악산이나 삼성산은 다 같은 암산(岩山)이지만 험하지가 않아서 되도록 편한 우회로를 택하지 않고 바위를 탔다. 그 바위는 암릉이었다가 너럭바위가 되고 그것은 다시 멋진 암봉으로 이어지더니

드디어 목탁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곳에 십장생(十長生) 거북이 한 마리가 머리를 번쩍 는 삼성산을 향하여 들고 있다.
이 광장의 아래가 바로 삼막고개로 염불소리 들려오는 곳이 45.m 떨어진 삼막사(三幕寺)이고,   거기서 거꾸로 300m 내려가면 염불암이다.

*. 왜 삼막사라 하였을까

삼막사(三幕寺)는 삼성산 서쪽에 있는 절로 뒤로는 암봉이요 서쪽으로는 전망이 서해까지 뻗치지만 오늘의 날씨는 생각과 같이 전망이 그리 좋지가 않았다.
옛날 원효와 그의 제자 의상, 윤필 세 성인(聖人)이 암자 셋을 지었는데 그때의 일막사(一幕寺) 이막사(二幕寺)는 없어지고 지금은 삼막사(三幕寺)만 남아 있다. 삼성산(三聖山)이란 이름도 그때부터 생겼다 한다.
이 절을 남왈삼막(南曰三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남서울의 수찰(首刹)이자 서울의 4대 명사찰(名寺刹)의 하나임을 뜻하는 말이다.
창건 당시 이 절들이 중국 소주에 삼막사(三邈寺)를 닮았다 하여 삼막사(三邈寺)라 하다가 ‘邈’(막) 자가 어려운 한자라서인가 언제부터인가 오늘같이 삼막사(三幕寺)로 바뀌었다.
2002년 아름다운 화장실로 특별상을 받은 화장실은 그 깨끗함도 그렇지만 유리 너머로 보이는 삼성산(三聖山)의 전망이 유별났다. 몇 년 전에 지리산에 갔을 때 세석평전에 화장실을 만들고 있었는데 대피소 소장의 말로는 용변을 보면서 드넓은 세석평전을 감상할 수 있게 한다던데 이젠 다 완성되었겠지.
접시꽃이 활짝 피어있는 층계를 올라 큰 거북 모양의 샘에서 물통을 채우고, 삼막사 오층석탑과 명부전 등을 둘러보았다.

*. 칠성각의 남근석, 여근석

칠성각(七星閣)을 찾아가는 길의 좌측 암벽에 거북모양의  글자가 있다. 우리나라에 종두법을 처음 들여온 지석영의 형 지운영(池雲英)이  이곳 백련암지(白蓮庵址)에 은거할 당시였다. 꿈에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바위에다가 전서(篆書)로  음각(陰刻)하여 시주한  거북 ‘龜’(귀) 자 글씨를 보고 있노라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에 실감이 난다.
칠성각(七星閣)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칠원성군(七元星君) 즉 북두칠성의 일곱 별을 신으로 하여 모신 곳이다. 삼막사 칠성각(七星閣)은 이조 고종 무렵 지은 것으로 멋진 층계 길이 100여m 나 되는 오름 길을 20분이나 걸어야 했다.

그런데 그 전각 속에는 의외로 조선 영조 때 조성했다는 마애석불(磨崖石佛)을 모시고 있었다.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脇侍菩薩)을 양각한 마애불이었다.

그보다 이곳을 더 유명하게 하는 것이 그 마당 앞에 있는 남근석(男根石)과

여근석(女根石)으로 바위 위에는 아들이나 손자를 원했음인가 많은 동전이 붙어 있는데 그 설명은 다음과 같다.


“2개의 자연 암석으로 그 모양이 남녀의 성기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남 ․ 녀근석이라 부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17년 원효가 삼막사를 건립하기 이전부터 이 남녀 근석은 토속신앙의 대상으로 숭배 되었다고 한다. 이 바위를 만지면서 빌면 순조로운 출산이나 가문의 번영, 무병, 장수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4월 초파일과 7월 칠석날이나 중요한 명절에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치성을 드린다. 이러한 성기 숭배 풍속은 풍부한 수렵 및 풍농, 풍어, 다산, 무병장수 등의 기원이 한데 얽힌 복합 신앙이이라고 볼 수 있다.”

여근석에 비해 남근석이 실하지 못하지만 내일 가기로 예약된 운악산에 있다는 남근 바위는 어떨까 기대해 본다.
칠성각을 옆으로 해서 뒤로 돌아드니 삼성산(三聖山) 가는 길이었다. 저 산 아래 과천 쪽으로 산이 잘려 나간 흉한 자리의 채석장은 지금은 경기교육대학 건설이 한창이었다.

다시 또 바위 길이 시작되고 아슬아슬한 암릉을 지나다 보니 앞에 국기가 휘날리는 암봉이 있다.  456.8m의 삼성산(三聖山) 정상이었다.

정상 높은 곳에 서서 땀 흘려 오른 이만이 볼 수 있는 멋진 세상을 굽어보며, 거기서 처음 만난 40대, 50대를 불러 막걸리와 참외로 정상주를 나누어 마시고 되돌아 무너미고개를 향한다.

생각 같아서는 무너미 고개에서 안양 쪽으로 내려가서 관악산 8봉과 6봉을 타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자칫하면 야간 산행을 할 시간대라 카메라에 여러 각도로 담아 보는 것으로 발길을 서울대학 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인공호수도 보고, 자하 신위선생의 동상도 우러르자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