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몽마르트 낙산(駱山)

좌청룡(左靑龍) 낙산(駱山,)이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이
북현무(北玄武) 북악산(北岳山)과
남주작(南朱雀)  남산(南山)과.
서울의
내 사산(內四山)이 되어
우리 서울을 지킵니다.
          -서울의 내 사산(內四山)


*. 서울의 하이델베르크 대학가
인왕산 산행기에 이어, 서울의 몽마르트라는 낙산(駱山)의 산행기 자료 수집을 위해 4호선 혜화동역에서 내렸다.
파리에 있는 5개의 언덕 중 그 중 가장 높다는 것이 해발 130m의 몽마르트 언덕이다. 파리의 상징이자 낭만이 되는 몽마르트를 도시 한복판에 있는 우리의 125m 낙산과 비교하여 낙산을 한국의 몽마르트라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낙산 기슭의 우리의 대학가는 서울의 하이델베르크 명명하고 싶다. 독일의 라인강의 지류인 네카 강변 따라  젊음과 낭만의 도시 하이델베르크 대학가는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으로 인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진 도시다.
우리의 마로니에 공원과 그 앞의 혜화동에서 종로5가로 이어져 청계천으로 해서 한강으로 흘러가는 이 대학천 가에 가을이 오면 노랗게 물들던 은행잎도 그러하였지만 ,그보다 지금 그 위에 펼쳐진 찬란한 조각들의 군상이 그런 생각을 갖게 한다.
언제 이렇게 수많은 조각들을 만들어 놓았는가. 산을 가겠다는 발길을 나도 모르게 흥분된 마음으로 종로5가까지 돌리게 하였다.
이곳은 젊음의 쉼터요, 만남의 광장이라서 모든 조각들은 실용적인 뜻에다가 조각미를 가한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긴 의자, 주사위 등을 하나  하나 형상으로 만들어서  아무리 바삐 가는 길이라도 앉아 쉬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각각의 조각마다  이야기와 예술이 얽힌 의자였다. 그 재료가 오석으로  담이나 나무를 만나면 의자가 되는데 꽃밭의 사각형 둘레석 의자에 앉은 이를 보면 그대로 그 꽃밭의 일부가 되게도 한다.
나도 언제가 그곳에 앉아 그리운 사람들을 기다리고 싶다.

마침 지나가던 초등학생 어린이가 있어 저건 뭐냐고 물었더니 아이스크림을 먹고 응아- 한  거시기라며 까깔 웃으며 지나간다.
이 거리의 모습은 파리의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으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샹 젤리 거리보다 더욱 다양하고 아름답다면 지나친 말일까?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나는 이 글을 잠시 멈출 테니 우선 일만(지은이 아호) 따라, 디카 따라 그 모습을 보고 느껴보시라.
































마로니에 공원조각에는 지난날 그 자리에 있었던

나의 모교의 건물의 기념 모형비가 있어 가난했던 고학시절의 나의 옹색한 학창을 뒤돌아보게도 한다.

그 앞에 비(碑)가 있어 가보니 저 유명한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비(五友歌碑卑)였다. 서울대학교 본부가 있었던 이 마로니에 공원이  바로 우리나라 근대 시조문학의 거성 윤선도의 선조 때(1587년)의 생가 터가 있었던 자리였구나.
고산 선생이 수석송죽월(水石松竹月) 같은 말없는 사물에 마음과 정을 붙여주고 보길도의 풍경을 노래하며 살던 것처럼, 나도 꽃과 호수의 나라 일산(一山)에서 노후를 보내면서 국내외의 아름다움을 찾아 하루하루를 살고 싶어서 이렇게 한국의 몽마르트 낙산까지 다시 찾아 온 것이다.

*.성터 따라 가본 낙산

성터 따라 가보는 것이 낙산 산행의 진수(眞髓)이거니 하면서 흥사단 건물을 지나 혜화동 로터리 쪽에서부터 산을 오르기로 했다.

어린이 놀이터를 지나  오르는 길은 점점 가팔라지는데 양쪽으로 다세대 주택과 연립주택들이 즐비하다. 드디어 층계가 나타나고 초여름 녹음이 시작되나  싶더니 싱겁게도 제3전망광장에 금방 올랐다. 혜화문에서 이어져 온 성터가 동대문까지 시작되는 곳이었다.
성 너머로 바라보니 달동네 넘어가 삼선교요, 그 너머 아파트촌을  미아리 고개가 좌우로 가르고 있는데 그 뒤에 희미하게 수락산과 불암산이 보인다.

서울 성곽은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2년 후 전쟁과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거나 도적을 방지하기 위해서 20만 명을 동원하여 세우고 세종 때 돌로 쌓은 것이다. 당시 서울 인구가 6만5천명이던 시절이었다.
성은 높이가 12m, 폭이 4.3cm로 총 길이 18km로 서울의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의 능선을 타원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잇고 있다. 내가 가는 역사 탐방로는 혜화문에서 동대문까지2.1km의  능선이다.
지금까지 내 기억으로는 낙산 정상까지 판자촌과 동숭동 시영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서서 황폐한 곳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정상 부근의 모든 판자촌과 아파트는 다 헐려 버렸고 성벽 따라 멋진 길이 정상이라는 놀이광장으로 오르며 이어지고 있다. 1966년부터 낙산 복원 사업이 시작되어 이젠 낙산공원이라는 이름을 갖고 시민들의 휴식처로 되돌려 진 것이다.
젊어서 이곳 가까운 명륜동과 혜화동의 집과 직장에서 20년 이상이나 근무를 한 내가 이렇게 캄캄하니 다른 이는 말하여  무엇 하랴. 여기 오르기 전에 들렸던 혜화동에 산다는 은행의 여직원도 마로니에 공원은 알아도 낙산공원을 모르고 있었다.
오르는 길은 길지가 않아서 힘들지가 않았고, 가끔 만나는 사람들도 가벼운 옷차림뿐 나처럼 등산 가방을 메고 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제2전망광장, 제3전망광장에 이어 여기서는 가장 높다는 곳이 놀이광장이라는데 그 위의 더 높은 곳에 양옥집 하나가 깃대를 세우고 철조망을 보기 싫게 둘렸다. 군부대였다. 125m밖에 안되는 낙산이지만 그래도 이 산은 도성을 지키는 수호 산이라 옛날처럼 지금도 저렇게 우리의 젊은이 군인들이 수도 서울을 지키기 위하여 밤낮으로 초소에 서 있는 것이다.

*.낙산 얼큰이 냉면 맛
산의 정상인 깃대봉 주변 성 밖은 지금도 창신동 달동네였다. 옛날에는 '요꼬'라 하는 세타 등을 짜는 간이 수공업 공장이 많았다. 그 많은 직공들이 즐겨 먹던 냉면이 지금도 낙산명물로 남아있다. 이화여대 쪽의 충신동성터냉면집, 깃대봉에서 창신동으로 내려왔다는 깃대봉냉면집들의 역사가 20년을 훌쩍 뛰어넘는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낙산 정상에서 마을버스(낙산-동대문) 회차 지점을 조금 내려가 3거리에 있는 낙산공원의 대표 명물집이라는 낙산냉면집을 찾았다.
12시가 훨씬 지난 평일인데도 층계 밑으로 내려가 있는 좁은 골목길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이 집에서 제일이라는 특냉면을 시켰더니,  냉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식성인데도 입에 꽉 당겨오는 얼큰이냉면의 환상적인 맛이라니-. 서민들과 함께 한 역사라서인가 싸고 무엇보다도 양이 많아 푸짐하였다. 아내와 다시 한번 와야겠다, 친한 친구 불러 함께 들러야겠다.
이 낙산냉면집 아래로 쌍용아파트를 조금 지나면 비우당(庇雨堂)이란 초라한 집이 있다.
비우당이란 ‘비’가 오면 방 안에서도 ‘우’산을 바쳐 비를 피한 집 ‘堂’(당)이라 해서 '비우당'이라 했다지만 한자로 풀이해도 '덮을 庇(비) + 비 雨(우) + 집 堂(당)'이 되어 그 뜻이 같다.
비우당(庇雨堂)은 조선 초의 청백리 정승인 유관 선생의 자택이었다. 유관선생은 35년을 정승으로 지냈으나 평생토록 초가집 한 칸에 베옷과 집신으로 살았다. 그의 녹봉은 동네 아이들의 붓과 먹 값이 되거나, 동네 다리를 놓고 길을 넓히는 데에 썼다 한다.
이런 자랑스러운 정치가의 후손들이 오늘날에는 왜 이렇게 썩었는가. 위정자들이여, 비우당을 돌아보거든 깊게 반성하시라. 아-멘.

*.도성 축성 전설/무학대사와 정도전
마을순환버스 회차 지점 부근 성터 바로 아래에 낙산의 유래가 표지로 서있다.

낙산(駱山)은 산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일명 타락산) 또는 그 준말로 그냥 낙타 駱(낙), 뫼 山(산) 駱山(낙산)이라 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풍수사상으로는 낙산은 주산인 북악산의 동쪽에 있으므로 우백호 인왕산에 대치되는 좌청룡에 해당된다. 이 낙산을 두고 정도전과 무학대사와 연관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경복궁 건축할 당시 그 방향을 놓고 서로 생각이 달랐던 것이다.

경복궁은 주변 형상으로 보아 암산(巖山)인 인왕을 주산으로 삼아 야 한다. 그렇게 되면 북악산이 좌청룡(左靑龍), 남산이 우백호(右白虎)가 되어 청룡 주작(朱雀)․ 백호(白虎)․ 현무(玄武)가 잘 어울리게 된다. 만약 북악산을 주산으로 할 경우 왕가와 나라의 변고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무학대사의 주장이었다.
신라 때 의상대사의 산수기(山水記)에는 그렇지 않을 경우를 이렇게 예언하고 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하려고 하는 이가 스님의 말을 듣고 따르면 나라를 연존(延存)할 수 있으나, 정씨 성 사람이 시비하면 5세도 지나지 않아 왕가의 재앙이 있으며 200년이 지나면 국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척불(斥佛) 숭유(崇儒)의 유학자이며 개국 일등 공신인 정도전은 의견이 달랐다.
“예로부터 임금은 남향[南面]하여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자고로 임금이 동향[南面]하여 다스린 예는 없사오니 한갓 중의 주장은 불가하옵니다.”
  여기서 왕가의 재앙은 북악이 주산일 경우에는 내사산(內四山) 중 가장 닞은 동의 낙산이 좌청룡이 되고, 동은 동궁(東宮)이란 말처럼 왕세자에 해당하는 산이기 때문에 역대 맏아들이 되는 와자가 재앙을 받는 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왕세자를 뜻하는 낙산은 산세가 길게 뻗지 못한데다가 다른 산보다 허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선가 이조 27대왕 중에 맏아들이 왕으로 등극한 경우는 이조 560년 동안 3, 4번뿐이어서 안으로는 왕위 계승으로 정쟁이 그칠 날이 없었고, 밖으로는 예언대로 개국 후 200년 뒤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풍수지리설을 진리라고 굳게 믿던 사대부들은 서울의 4대문의 이름을 돈의문(서:敦義門), 숭례문(남, 崇禮門), 숙정문(북, 肅靖門) 석자로 하였지만 동대문의 현판만은 '興仁之門('흥인지문)으로 네 자로 하였다. 그것은 산맥 모양의 갈 ‘之’(지)를 더하여 부족한 낙산의 기(氣)를 보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손우성 저 ‘터’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정도전의 주장에 따라 경복궁을 남향으로 하여 짓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어느 날 무학대사가 논가를 지나가고 있는데 논을 매던 한 노인이 이상한 소리로 소를 나무라고 있었다. ‘이랴, 이 무학보다 미련한 놈의 소!' 이상하게 생각한 무학의 물음에 노인의 답은 이러하였다. ‘한양 땅은 학(鶴) 모양의 터인데 등에 무거운 짐을 실었으니 학(鶴)이 날개를 다칠 것이 뻔한 이치가 아닌가. 그러니까 아무리 공들여 쌓아도 궁궐이 무너지지. 그러니까 성부터 쌓아야 한단 말일세.’ 그래서 경복궁은 성이 먼저 축조된 다음에 궁궐을 지었다.”

*.놀이광장의 전망



놀이광장의 서울 전망은 일품이었다. 인왕산에서 보던 전망보다 우람한 인왕과 북악과 남산의 전경을 어우를 수 있는 곳이 여기 이외에 더 어디 있겠는가 할 정도로.

여기서부터 나무 층계가 아래로 내려가고 있고 그 동쪽 편에 8각정이 있다. 낙산정(駱山亭)이었다. 그 옆에 보이는 밭이 흥덕이네 밭인가 보다.

홍덕이란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후의 효종)이 심양으로 볼모로 잡혀 가 있을 때 따라가서 채소를 가꾸어서 김치를 담가 아침저녁마다 지성으로 드리던 나인이다. 볼모에 풀려나서 귀국하여 왕이 된 효종은 그때 그 김치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흥덕에게 낙산 중턱에 채소밭을 주어 김치를 담가 바치게 하였다는 바로 그 밭이다. 지금은 그 채소를 이곳 관리인들이 짓고 있었다.
낙산 정에서 바라본 서울은 아름다웠다. 파란 녹림지역을 이룬 비원과 종묘와 창경원 너머 서울을 빙 둘러 싸고 있는 인왕산과 북악산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앞이 명륜동과 동숭동 일대이다.

바로 이 정자 아래에 낙산전시관이 있다. 조선시대부터 6․25로 무성한 판자촌 모습과 경제 개발인 한창일 때의 동숭동 아파트 시대를 지나 정리된 현재까지, 낙산이 변천되어온 모습과 여기에  얽힌 사진 자료를 소개하고 있는 곳이다. 그 중 여기서 꼭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성곽 쌓을 때 그 변천 과정의 그림과 설명을 보고 성곽을 살펴 볼 것이다.
태조 때에는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그 기초석이 컸다. 세종 때에는 장방형 돌을 가공하여 썼으나 태조 때처럼 굄돌을 쓰지 않았고, 돌과 돌 사이가 꼭 맞는 것은 숙종 때 쌓은 것이다.
낙산도 그렇지만 낙산 전시관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아서인지 그 규모나 내용이 기대에 못 미쳤다.
게다가 도심에 너무 가까운 산이고, 수많은 판자촌과 아파트로 꽉 찬 것을 몇 년 전에 복원한 곳이라서, 산천도 유구하지 않았고 옛것이라곤 거의 찾아볼 곳이 없어서 나의 발길을 왔던 길을 되돌려 성터에 다시 올라 성 따라 동대문 쪽을 향하게 하였다.
성에는 이 성과 같은 도읍지를 둘러싸는 도성(都城)도 있지만, 낙양읍성이나 해미읍성처럼 군이나 현의 보호를 위해 쌓은 읍성(邑城)도 있고, 창경궁, 덕수궁, 경복궁과 같이 궁궐을 둘러쌓은 궁성(宮城)도 있다.
서울 도성의 이쪽저쪽을 넘나들 수 있는 암문(暗門)이 몇이 있어 그리로 나가 보니 두 곳 다 달동네 밀집 지역으로,  방 하나 부엌 하나로 문밖이  그대로 생활공간인, 곳에서 사글세를 살고 있는 가난한 서민들의 집들이 많았다.

이분들에게는 성터에 있는 정자는 그대로 그들의 거실이요 휴게실이었다. 거기에는 가난 속에서는 가장 지키기 어려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액자가 걸려있고, 저녁 먹고 나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보는 TV가 있어 가난한 어느 농촌의 정자를 보는 듯하였다.
거기서 만난 70대 노인의 이야기가 하산 길의 나를 우울하게 한다.
"그러면요, 가난하니까 이런 산꼭대기 달동네에서 살지요. 젊어서 경마로 재산을 탕진한 걸 이제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