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봉 정상에서 만세를 부르다

(2004. 8. 14.-15. 속리산 산행기)

 

유난히도 무더웠던 올 여름. 입추가 지나고도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일기는커녕, 연일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그래도 가는 여름이 아쉬워 늦여름 끝자락을 붙잡아 속리산을 찾았다.

 

비로산장의 아침.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소리. 이 방 저 방에서 잠을 깬 친구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숲 속의 새벽 공기를 가르는데, 오락가락하는 빗줄기에 마음이 심란하다. 어제는 산 중턱에서 만난 소나기로 속옷까지 흠씬 적신 채, 천황봉 등정을 포기하고 내려와야 했는데, 오늘까지 비가 내리면 대전 친구들과 함께 하는 모처럼의 산행 일정에 큰 차질이 생긴다. 그나마 빗줄기가 굵지 않고,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이며 동녘 하늘이 붉그레한 것이 위안이 된다. 오늘은 비가 오더라도 산에 오르기로 하고 우산들을 챙겨 넣는데, 다행히도 빗발이 멈춘다. 라면이라도 끓여먹고 가야 하지 않느냐고 딴죽거는 친구들을 채근하여 길을 나선 것이 6시30분.

 

복천암 가는 길. 어제 내린 비로 숲 속의 아침 공기는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한데, 소나무 참나무 우거진 비탈길은 낙타등처럼 오르락 내리락 한다. 고갯마루인가 했는데 문득 잘 생긴 부도 2 기가 소나무 숲 사이로 눈에 들어 온다. ‘부도’가 뭐냐고 묻는 한 친구의 질문에 이런 저런 설명 끝에 머리 좋은 친구들이 ‘스님들의 유골 보관함’으로 정리하고, 아직 생생할 때 사진 한 장 찍어 두자며 기념 촬영을 한다.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의 묘지를 배경으로는 사진을 잘 찍지 않는데, 부도나 왕릉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진들을 찍는 것을 보면 이상한 생각이 든다. 주검이 바래면 역사가 되는지…그나저나 죽어서 새소리 바람소리 들으며 이런 숲 속에 누워 있으면, 무척이나 편안할 것 같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해 본다.

 

드디어 복천암. 신병 치료 차 법주사에 들른 세조가 머물며 기도를 올렸다는 유래 깊은 절 마당은 정갈하게 빗질이 되어 있는데, 요사채 울타리에 기어 올라 초롱 같이 생긴 이쁜 꽃 방울을 가득 달고 있는 더덕 줄기들이 아침 이슬 곱게 머금고 사방으로 향기를 풍긴다.

 

山非俗離 俗離山(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으나 세속이 산을 여읜다). ‘세속을 여읜다’하여 속리산(俗離山)이라 이름했다던가. 태고로 산들은 너른 품을 열고 늘 거기 그렇게 있었다. 하루살이 같은 인간들이 제가 필요할 때 마음을 쉰다며 우르르 몰려 왔다가는, 썰물에 거품 잦듯 그렇게 스러져 갈 뿐이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층층이 우거진 속리산 숲 속 길은 걷기에 편안하다. 한가롭게 쏟아져 내리는 매미 소리도, 도심에서 악을 쓰듯 쏟아내는 사이렌 소리 같은 매미 소리처럼 요란스럽지 않아 좋다.

 

용바위골 따라 오르는 길. 길은 시나브로 가파라지고, 친구들의 얼굴마다 땀이 배어나기 시작한다. 길을 따라 이어지는 소나무 숲. 붉은 피부에 늘씬한 몸매를 뽐내며 하늘이 높다 않고 쭉쭉 뻗어 올라간 기상이 아름답다. 늠름하게 자라 시원한 그늘을 마음껏 드리우고 있는 느티나무, 식물의 생태가 가장 안정된 극상림에서나 볼 수 있다는 서어나무도 보디 빌딩으로 가꾼 것 같은 매끈한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고 서 있다. 속리산에 오면 이곳에서 꼭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광우 대장이 두 길이 넘는 바위 위에 우뚝 있는 소나무 사이로 올라 서는데, 걷기에 지친 친구들 호응이 없고 그나마 현빈이가 의리로 따라 올라가 동무를 한다.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날씨. 홀연 앞쪽에서 서늘한 기운이 뻗쳐 온다. 모두들 와! 시원하다 탄성을 지르는데, 앞에 있는 휴게소 간판을 보니 ‘냉천골휴게소’. 아! 그래서 예로부터 ‘냉천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던 게로구나.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 가냐며 휴게소 앞을 지날 때마다 투정하는 재광이를 달래어 문장대로 발길을 서두르다. 길은 자꾸 가파라져 그냥 걷기에도 숨이 턱에 차는데, 이 험한 길을 뛰어 오르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청마회’라는 이름이 새겨진 옷들을 입고 있길래 물어 보니 청주에 있는 마라톤 동호회라고 한다. 깔딱고개를 뛰어서 오르는 사람들. 젊은 사람들은 젊어서 그렇다 치고, 우리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섞여 있고 간혹 여성들도 섞여서 달리는데, 그 넉넉한 체력이 부럽기 그지없다. 

1시간30분의 산행 끝에 드디어 문장대(1,054m)에 오르다. 속리산 최고의 전망이라 하였다던가. 일망무제 발 아래로 끝간 데 없이 펼쳐지는 전망이 시원스럽다. 관음봉 묘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푸르른 소나무 숲을 머리에 인 채 서쪽으로 내달리고, 남쪽으로는 수봉 신선대 입석대 비로봉을 거쳐 최고봉 천황봉에 이르는 백두대간 소백산 산줄기가 기묘하게 생긴 장대한 바위들과 어우러져 장엄하게 이어진다. 늘 구름 속에 가려 있어 운장대(雲藏臺)라 하였다던가. 산골짜기에서 한 줄기 구름이 피어 오르는가 싶더니 금방 산등성이를 넘어 온 산을 휘감는다. 세조가 신하들과 글을 지었다 하여 文藏臺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는 운장대. 광화문에 내걸린 전직 대통령의 한글 현판처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차라리 자연과 어울리는 ‘운장대’란 그 이름을 그대로 두었더라면 훨씬 운치가 있고 아름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장대 위에서 단체 사진 찍으면서 사진기 셔터 좀 눌러달라고 부탁한 것이 인연이 되어, 아름다운 아가씨(?)와 동행이 되다. 뒤 늦게 올라온 재광이가 선녀라고 부르면서 접근을 시도하는데, 마냥 싫지만은 않은 듯. 드디어 아가씨 배낭에서 천도 복숭아 한 개를 얻어내는데 성공하고는 득의양양.

 

금강산도 식후경. 계속 뒤처져 따라 오면서 나이 드니 기계가 낡아 연비가 높아(실제는 낮다라고 해야 할 듯) 자주 주유를 해야만 제대로 작동을 한다고 주장하는 재광이. 드디어 급유를 받을 시간이 되었다. 고갯마루의 문장대 휴게소. 멋진 모자를 눌러쓴 산 속의 신사 성남이만 별나다는 핀잔을 들어가며 육개장 라면을 시키고, 나머지는 전부 김치 국수로 통일. 발이 가는 잔치 국수를 얼음이 둥둥 떠있는 얼큰한 열무김치 국물에 말아 주는데 그 맛이 일품. 모두들 맛있다는 소리를 연발하며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뚝딱 먹어 치운다. 허긴 아침 식사도 거르고 2시간여 강행군을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배가 든든해지니 느긋해진 친구들. 경업대로 하산하기로 한 당초 예정을 바꾸어, 천황봉까지 종주 등반을 해 보자고 나선다. 오리지널(이 말은 특히 갑중이가 강조한 부분이다) 삼총사가 주축이 되어 산보하듯 느긋하게 다니는 악우회 등반이 늘 성에 차지 않던 헌이가, 아무도 안 가겠다면 혼자라도 가겠다고 강경하다. 비가 오려던 날씨마저 화창하게 개었는데, 파란 하늘 흘러가는 흰 구름 벗을 삼아, 손에 잡힐 듯 주능선을 따라 빤히 건너다 보이는 천황봉을, 내친 김에 등정하고픈 마음들이 인다. 일단 길이 갈라지는 신선대까지 가서 결정하기로 하고 출발.

걷기가 한결 수월해진 능선 길. 재급유를 받은 탓인지 재광이가 앞장을 선다. 문수봉을 뒤로 돌아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 덧 신선대 휴게소. 참새 방앗간 타령이 다시 나오고. 막걸리에 감자전에 한약 냄새 짙게 나는 당귀차가 제 맛. 문장대에서 만났던 선녀(?)가 뒤따라 오고. 이정표를 바라 보니 문장대에서부터 지나온 길 1.2km, 천황봉까지 가야 할 길은 2.7km. 어영부영 벌써 1/3은 왔다는 안도감이 천황봉까지 가자는 쪽으로 세를 모은다. 경업대로 내려가기로 한 성남이와 상용이 편에 필요 없게 된 우산에 선녀까지 덤으로 묶어 내려 보내다. 잠깐 만난 인연에 아쉬움이 남았는지 선녀는 배낭에서 먹다 남은 귤과 오이를 꺼내 놓으며 가지고 가란다.

거대한 바위가 산 말랭이에 광개토대왕비처럼 우뚝 솟아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는 입석대. 주로 화강암과 점판암으로 이루어진 산이, 석질이 약한 점판암이 일찍 풍화되고 돌이 야무진 화강암만 남아 각종 기기묘묘한 형상의 봉우리들을 이루었다는 속리산. 그래서 그런지 峰도 많고 臺도 많다. 문장대 신선대 학소대 입석대 경업대 배석대 봉황대 산호대의 여덟 바위부리와 천황봉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 수정봉의 여덟 봉오리가 모두 바위 덩어리이다. 그런가 하면 돌 틈이 벌어진 석문도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 내석문 외석문 상고내석문 상고외석문 비로석문 금강석문 상환석문 추래석문 등 여덟 바위덩이 석문이 있어 때로는 서서, 때로는 그 밑을 기어서 빠져 나가는 묘미가 있다. (법주사 팔산전도 그렇지만, 속리산에는 유난히 8자 들어가는 여덟 가지가 많다. 다르게 부르는 산 이름도 여덟 가지나 있고, 이전에는 다리도 여덟이 있었다고 한다. 특별히 8자가 들어가는 이유를 알아서 댓글로 붙여 봅시다)

속리산 하면 제일 먼저 머리에 떠 오르는 것이 울창한 송림이다. 곧게 자란 아름드리 소나무들의 아름다움이야 어디에 견주어도 빠짐이 없지마는, 험난한 바위 틈에 근근이 뿌리를 의지하여 목숨을 부지하며, 싱싱한 잎새들을 피워내고 서있는 소나무들을 바라 보면, 자못 생명의 엄숙함마저 느끼게 한다. 흔히 속리산 사계절 풍광의 아름다움을 일러, 봄에는 골짜기마다 피어나는 산벚꽃이요, 여름은 울울창창한 푸른 소나무 숲, 만산홍엽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가을 단풍, 그리고 묵향기 그윽한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설경이라 한다. 문장대에 세번을 오르면 신선이 된다는데, 속리산 경관을 논하려면 적어도 계절별로 한번씩은 와 봐야 하지 않을까.

 

 

비로봉을 지나면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길을 가로 막는다. 이름하여 천황석문. 여럿이 함께 지날 수 있을 만큼 넉넉하다. 석문을 나서면 천황봉에 이르는 종주 코스의 마지막 구간. 길은 완만하지만 이미 네 시간을 내쳐 걸어온 다리는 무겁기만 하다. 가슴까지 올라오는 산죽(조리대)이 우거져 겨우 한 사람이 지날 만한 길은 이리 꼬불 저리 꼬불 가르마처럼 이어진다. 베어다가 조리를 만든다는 조리대를, 생태학자들은 식물의 다양성을 해친다 하여 좋아하지 않는다. 땅 위로 조리대가 빼곡하게 자라나면 다른 풀들이 햇빛을 받을 수가 없고, 더구나 땅밑으로 뻗어나는 대나무 뿌리는 다른 식물들이 발조차 붙일 수도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드디어 천황봉(1,058m) 정상에 오르다. 걸어 온 길을 뒤돌아보니, 저 멀리 문장대가 아득하게 보이는데, 모두들 드디어 해냈다는 뿌듯한 마음에 가슴이 벅차 오른다. 우리보다 먼저 올라온 노랑머리 외국인 남녀가 바위 위에 벌렁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높은 산을 신령스럽게 여겨서, 이곳 보은 사람들도 매년 10월 상달이면 천황봉에 올라 산신제를 올렸다고 하는데, 못난 자손들이 겸허함을 배우지 못하고 자연을 어지럽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59주년 광복절.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은 날. 둥그렇게 둘러서서 목청도 드높이 만세 삼창을 외쳤다. 으레 방학 중에 중간 소집되어 불려가는 광복절 기념식 말고는, 산 위에 올라 만세를 불러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일광욕을 즐기다 우리들 떠드는 소리에 일어난 외국인 남자도, 진기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가 되는 천황봉은 삼파수(三派水)라 하여 물줄기가 세갈래로 나누어지는 곳이다. 남으로 흘러내린 물은 금강으로 가고, 동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낙동강으로 가며, 북으로 흘러내린 물은 한강으로 간다. 여름 소나기는 쇠등도 가른다는 말이 있지마는, 같은 구름에서 함께 떨어진 물방울이 한 발짝 차이로 세 갈래로 나뉘어 서로 각기 다른 운명의 길을 간다는 것이, 사소한 일이 계기가 되어 인생 행로가 통째로 바뀌어버리는 우리 인생과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드디어 하산 길. 천황봉에 올랐던 일곱 친구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 하산을 서두른다. 길가에 무리지어 피어난 며느리밥풀 꽃들이 내 억울한 사연 좀 듣고 가라는 듯 손짓을 하고, 분홍빛 물봉선 한 송이가 산들바람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미소를 보낸다.

상환암으로 내려오는 길이 생각보다 가파르다. 이 길을 따라 천황봉에 올랐더라면 상당히 고생했을 것 같다. 길 양 옆으로는 시원스러운 참나무 숲이 이어지고, 도토리거위벌레가 알을 낳고 잘라 버린 설익은 도토리 줄기들이 땅바닥에 즐비하여 발아래 밟히는 것이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상환암은 가파른 절벽 밑에 겨우 터를 잡고 제비집처럼 붙어 있다. 등산객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한다는 요사채 앞에는 벌개미취 한 무더기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오늘이 광복적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궁화 꽃이 활짝 피었다.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고, 앞산을 바라본다. 바위 투성이 가파른 절벽에 군데군데 붙어 자라는 소나무들은 완당의 세한도에 나오는 송백을 연상시킨다. 흰 눈이 수북이 내려 쌓인 경치를 마음 속에 그려본다. 소담스럽게 쌓인 하얀 눈이 소나무 푸른 잎, 기묘한 바위 절벽과 어우러져 더 할 나위 없는 절경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상환암 아래로 은폭동(隱瀑洞) 폭포가 있다고 광우대장이 여러 차례 강조를 했다. 상환암에서 스님한테 은폭이 어디냐고 물으니, “바로 조 밑에 있시유. 별거 아니구만”하고 심드렁하게 말한다. 내려오는 길 내내 헌이와 현빈이와 셋이서 열심히 두리번거리며 찾아 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다. 분명히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는데 폭포는 보이지 않고, 들어가는 길도 찾을 수가 없다. 혹시 낙엽이 지고 나서 계곡이 훤히 들어나는 계절에 온다면 찾을 수 있을런지. 은폭을 찾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일찍이 속리산을 찾은 우암 선생은 이렇게 노래했다.

 

洋洋爾水性인데 何事石中鳴고? 恐濯塵人足하여 藏源但有聲이라오’ (양양하게 흐르는 것이 물인데, 어찌하여 돌 속에서 울기만 하나. 세상 사람들이 때묻은 발 씻을까 두려워, 자취 감추고 소리만 내내)

나무가 우거져 대낮인데도 어둑어둑한 숲길을 가로 질러, 산장에 돌아오니 벌써 1시 지났다. 아침도 거르고 무려 6시간의 산행을 강행한 셈이다. 땀으로 흠뻑 젖은 몸에 시원한 물 몇 바가지를 뒤집어 쓰고, 물푸레나무 밑 툇마루에 올라 앉으니 허기가 몰려 온다. 모두들 시장했는지 밥이 나오기 전에 반찬부터 먹어 치운다. 갖가지 나물 반찬이 그렇게 맛깔스러울 수가 없다. 역시 시장이 반찬. 어제 저녁에 나온 그 밥에 그 나물인데, 어제 저녁에는 이 집의 식사가 시원치 않다고 불평하던 친구들이, 오늘 점심은 맛있다 소리를 연발하며 공기 밥을 추가하여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이런 소란에는 아랑곳 않고, 개울가 나무 밑에서 독서삼매에 빠져 있는 갑중이는 역시 도인이다.

 

이제 슬슬 짐을 꾸려 떠나야 할 시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1-1 비로산장에서 보낸 하룻밤이 아득한 꿈만 같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다녀온 설악산 수학여행 이후로, 친구들과 같이 자며 하는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한껏 들떠 있던 친구들. 광우가 지난 2년간 공을 들인 끝에 성사된 이번 여행에, 대전 친구들이 더 열성을 보여 무려 일곱 명이나 참석을 했다. 계곡에 자리잡은 호젓한 산장. 시설은 낡았지만 빼어난 자연 경관과 주인댁의 훈훈한 인심이 어우러져 부족한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여기 저기 붙어 있는 茅亭樵人 김태환 할아버지의 혼이 담긴 글씨와, 사회 저명인사들이 남기고 간 편액들의 낡은 모습이 이 산장의 40년 역사를 말해 주고. 곱게 늙으신 안주인의 조용조용한 말씨와 따뜻한 보살필. 그런 분위기가 함께 어우러져 더욱 좋았는지도 모른다. 

 

물소리 들리는 개울가 물푸레나무 밑 평상 위에서, 촛불을 가운데 두고 둘러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끝간 줄 모르고 밤 새 이어지던 정다운 이야기들. 수도 이전 이야기가 때로는 딴(?)나라 정치 이야기로 건너뛰기도 하고, 남의 당사 앞 지날 때는 침을 뱉고 지나 간다는 양지쪽당 열렬한 지지자인 한 친구의 열띤 항변도 있었고. 갑중이 왈 ‘시인이니까’ 하면 모든 것이 설명이 된다는 백겸이의 유장한 ‘송하비결’ 해설. 구현이가 입문했다는 국선도에 고수 백겸이의 훈수가 따르고. 악우회는 성격 이상자들의 모임이라 늘 싸움이라는 갑중이의 핀잔이, 악우회의 다양성을 아우르는 넉넉한 마음 같아 훈훈하기만 한데. 이런 술자리에 빠지지 않는 치매 걸린 놈 시리즈로 이어지고. ‘오줌 놓고 지퍼 안 올리는 놈, 물건 안 집어 넣고 지퍼 올리려고 하는 놈, 옷 벗고 마누라 옆에 다가 가다가 왜 옷을 벗었는지 생각이 안나 옷 도로 주워 입는 놈…’ 구현이 왈, 진짜로 물건 안 집어 넣고 지퍼 올리다가 물건이 지퍼 이빨에 끼어 병원을 찾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에 모두 박장대소. 내일의 산행을 위하여 아쉬운대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러고도 구현이와 재광이가 남아 두런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세심정 지나 내려오는 길. 올라 갈 때는 나무들이 걸고 있는 이름표에 눈길이 갔는데. 서어나무. 대팻집나무. 느티나무. 비목. 층층나무. 쪽동백나무. 졸참나무…내려 오는 길은 비로산장에 묻고 가는 추억과 이별의 아쉬움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다 보았다. (2004. 8. 15

 

곁가지 글: 14 8시 반에   만나 속리산으로 내려 가면서, 옥천에 있는 지용 생가에 들렀다. 정겨운 옛 시골 고향 풍경을 그림으로 그린듯한 ‘향수’라는 시는 모두들 좋아하지만, 이 이가 바로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 시간에 정O용으로 배운 월북(?)시인 정지용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훗날의 일. 

향수 시 비를 앞에 두고, 새로 복원된 초가집은, 새로 파서 뚜껑에 자물쇠까지 채워 놓은 우물과 함께 옛 맛을 간직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데, 이 지역의 풍수지리로부터 지용의 일생에 이르기까지 열심으로 설명을 해 주시는 해설사 할아버지의 구수한 입담이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준다. ‘옛 이야기 지줄대며 회돌아 나가던’ 실개천은, 지저분한 생활 오수가 흘러가는 시멘트 벽에 갖힌 개울로 변한 것이,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 준다.

  

옥천읍 교동리 313번지, 지용 생가에서 바로 인근에 있는 육영수 여사 생가는 대문이 굳게 걸려 있어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 섰는데, 서울에서 일부러 찾아 왔다는 말에 지용 생가의 해설을 맡고 계신 할아버지의 친절로 일부러 관리인한테 특별히 부탁하여 들어가 볼 수가 있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차라리 보지 못 하고 그냥 왔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민망한 모습이었다.

 

3 정승이 살았다는 유서 깊은 고택을 육여사의 선친이 1910년에 구입하여 육여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생가에는, 육여사가 생시에 좋아했다는 목련나무만 그 푸르름을 잃지 않고 의연히 서 있을 뿐, 건물은 퇴락하여 모두 헐리고 주춧돌만 남아 있어, 마치 옛 사찰이나 궁궐터를 돌아보는 것 같은 쓸쓸한 풍광이었다. 하나 남아 있는 사당 건물은 지붕 위에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을 만큼, 오랫동안 전혀 보살핌을 받지 못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권불십년이란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말도 없지 않은데, 경부고속도로 내면서 옥천의 육씨들 때문에 옥천인터체인지가 생겼다는 말이 날 정도로 세도가 당당했던 한 시대의 권력가 집안이, 어떻게 채30년도 되지 않아 이렇게 완벽하게 폐가로 변할 수 있는지 권력의 무상함을 절감하게 한다.

 

옛 유지를 돌아 보는 쓸쓸함을 달래 준 것은, 근처의 식당에서 먹은 맛 있는 묵밥이었다. 직접 쑨 묵을 가늘게 가시어 넣고, 잘게 썬 김치와 따뜻한 국물에 말아 나온 묵밥은 오랜만에 먹어보는 맛 있는 음식이였다.

 

사람살이가 하루살이 같이 무상하다면, 자연은 결코 의연함을 잃지 않는다. 말티재 넘어 보은에서 만난 정이품송의 의연한 모습은, 비록 지난 겨울의 폭설로 가지를 잃었지만, 600년 세월을 꿋꿋하게 견디어 낸 고아한 품위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