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

한치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우매함.

답답한 일상을 버리고 잠시나마 속세를 떠나 볼까 하는 심정으로 등산화 끈을 조입니다.


대표적인 저녁형 인간인 저도 산행날 만큼은 초아침형 인간으로 돌변 합니다.


05시 기상
비에 젖은 아스팔트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윤기가 흐르고 손님을 기다리며 눈꺼풀이 무거운 택시는 하얀연기를
꽁무니로 연신 토해내는 잔뜩흐린 토요일(17일) 새벽 입니다.

남부 시외버스 터미널 도착(06:30)
남쪽으로 향하는 버스들이 즐비하고
아침을 여는 이웃들은 허둥지둥 빈속을 채우고
각자의 남쪽으로 떠납니다.

조금씩 내리는 비가 눈으로 변했으면 하는
기대를 안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어떤분이 말티재에 눈이 쌓여
속리산까지 못갈꺼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단은 3시간 밖에 못자고 나 온것이 아까워
청주로 가서 다시 생각 해 보기로 긴급 합의 후 버스에 탔습니다.

승객은 우리 일행을 포함하여 5명.
어두운 하늘에선 진눈깨비가 내리고 어둠을 뚫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선잠에서 깨어나니 청주.

내리는 눈은 무에그리 급한지 땅에 닿자마자
물로 변하여 바닥은 그야말로 엉망진창.
청주에 사는 일행과 합류하여 속리산행 버스에 오르니
기사분이 말티재 못 넘으면 보은으로 다시오면 된다고
흔쾌히 말하고 비장하게 속리산을 향하여.....

창밖엔 눈 나리고 희뿌연 차창밖으로
너른논에 쌓인 설경이 가로수와 어우러져 " 삼포 가는길"의 한 장면 같습니다.

보은을 지나 드디어 말티재.
지금까지와는 다른 하얀눈의 별천지가 펼쳐지고
버스는 우리의 염원을 안고 정성스레 한구비, 한구비 참을성있게 오릅니다.

속리산 도착(10:00)

쌓인 눈을 치우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법주사로 향합니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니 문화재 관람료까지 포함시킨 가격이 싸지 않습니다. ( 나는 법주사 많이 봤는데....)

일주문을 지나 눈 쌓인 길을 눈을 맞으며 걷습니다.
속세를 벗어난것 처럼 마음은 고요해 지고
그저 내리는 눈을 보며 마음을 정갈케 합니다.

법주사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문장대코스로 접어드니
조금있다 상수원을 위한 저수지가 나타나고
얼음위에 쌓인 설원이 우리를 반기고 구름에 가린 봉우리들은
신비함을 간직한체 우리를 유혹 합니다.

아이젠을 꺼내 다들 착용하는데
저는 진정한 산꾼은 아이젠없이 오른다고 우기면서 눈길을 오릅니다.

이뭣고 다리를 통과 하니 득도를 한것 같아 뿌듯 합니다.
수 많은 스님들이 "이 뭣고"라는 화두를 가지고 용맹정진 하셨을 텐데
이 짧은 다리만 건너면 해탈을 한다?.....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 짧은 찰나에도 해탈의 경지에 들어 설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위로 복천암이 보이고 금강송이 이 겨울에도
붉은색 줄기와 진초록의 위엄을 뽐내는 구간을 지나
양철 지붕의 간이 휴게소에 다다릅니다.

하늘에선 아직도 풍성하게 함박눈을 뿌려주고
좌판에 있는 도토리묵이 담긴 큰그릇 물위에도
눈이 엉겨있어 도토리묵은 희미하게 보입니다.

산죽이 많은 구간.
기세좋게 겨울에도 푸른잎을 간직한 산죽도
소리없이 내리는 함박눈엔 기세가 꺽여 다들 고개를 숙이고
깊은 겨울잠 속으로 빠지려나 봅니다.

또 휴게소.(많기도 하지... )

문장대 700M 를 남겨두고 제법 된비알이 시작 됩니다.
산새들은 먹이를 찿아 지져귀고 목탁소리같이 울리는 소리는
딱다구리의 식사시간임을 알립니다.

허벅지 근육이 뻣뻣해 지는 것이 잠시 쉬라는 신호인가 봅니다.

운장대라고도 불린다는 문장대는 역시 구름속에 가려 보이지 않고
눈은 계속~ 죽 ~
길옆의 계곡엔 얼음가운데 숨구멍이 뚫려 있고
고라니나 노루가 물마시기 좋을 만큼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경상북도 표지가 보이는가 싶더니 다시 휴게소.
속리산 국립식당가인지
등산객이 허기에 지쳐 쓰러질까봐 배려를 하는 것인지...
약 30분 마다 나타나는 휴게소에는 먹거리가 충분합니다. (법주사 입구에서 부터 문장대까지 6개의 휴게소)

휴게소 앞의 전나무엔 눈이 쌓여 있고
지독한 개스는 시계가 극히 불량 합니다.

문장대에 오르니 한치앞도 안보이고 심한 눈보라만이 땀을 식힙니다.
휴게소로 내려와 시래기국과 밥, 발효가 너무 잘 돼 시기까지한
조 막걸리를 두어사발 마시고 눈쌓인 산위로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보니
신선이 된듯도 합니다.

술마시고 나니 다들 종주의 꿈은 슬며시 접고
준비해간 꽁치김치찌개에 한잔더~
러셀하고픈 충동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다시 올라온 그길로 하산.

더 쌓인 눈은 아이젠을 저에게도 채우게 하고
일행들은 진정한 산꾼이 웬 아이젠이냐고 합니다.

지난번 선자령에서 못본 눈 속리산에서 실컷 보았습니다.

내리막길을 급할 것 없이 담소를 나누며 걷는 길은 다시 환속을 하는 길입니다.
막걸리의 취기가 남아있는 저는
저 고요한 산사에서 불목하니로 살아볼까 생각 하기도 합니다.

철제 당간지주와 눈쌓인 나무가지 사이로 금빛찬란한 거대한 불상이 보이고
부처님뒤로 구름이 걸려있는 봉우리는 상서로운 풍경을 자아 냅니다.

일주문을 벗어나니 사바세계가 다시 나타나고
귀경길을 서둘러야 한다는 사실을 감지한 다리는 부지런하게 움직입니다.

버스표를 예약하고 버섯전골 더덕무침에 또 한잔.

버스는 다시 어둠이 내리는 말티재를 넘고
아직도 눈내리는 길을 따라 속세로 속세로 향합니다.


▣ 산그림자 - 안녕하세요.. 산그림자 입니다.^^ 하얀겨울에 속리산 산행길에 나섰다니 부럽습니다.. 겨울 풍경이 아름다운 속리산 의모습을 상상하게 하여 주신 님의 마음에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신 발걸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김정길 - 사바세계를 벗어나는데 문화제관람료가 문제입니까? ㅎ ㅎ ㅎ 진정한 산꾼님이 아이젠 때문에....
▣ 불암산 - 무척 좋으신 산행 하셨습니다. 전국적으로 문화재관람료를 내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요? 저또한 법주사를 몇번 보았거든요, 물론 산 자체는 가격의 흥정대상이 아니지만, 항상 문화재관람료를 같이 내는 산행시마다 약간은 ...... 항상 즐산하시고 겨울철 안전한 산행을 위해서 아이젠은 필수지요..행복하십시요.
▣ 문창환 - 눈덮힌 속리를 다시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ㅎㅎㅎ 진정한 산꾼이니까 아이젠 하시겠지요? ^^
▣ san001 - 역시 술이 문제네요. 그래도 술이 없으면 산타는 멋이 적겠죠. ㅎㅎㅎㅎ
▣ 신경수 - 하하 재미있는 산행하셨네요 그 술 저도 한잔 주시죠 ㅎ ㅎ ㅎ 좋은 산행 팍팍 하시고 설 잘 보내십시요
▣ 김찬영 - 잠시 속세를 떠나 눈덮힌 산에 취해 .막걸리에 취해 ...... 우리의 설날 잘보내시기바랍니다
▣ 이수영 - 역시 님은 탁월한 언어 표현력을 가지고 계시군요. 제가 제일 모자란 부분이 이같이 위트와 재치가 번득이는 문장력인데 탁월한 문장력을 소유한 님의 재능이 부럽습니다. 초막걸리 두어사발에 취하셨나 보네요 허허..
▣ 서정길 - 막걸리에 취한 산사의 불목하니를 상상하니 부처님께서 빙그레 웃으실 듯 합니다. 좋은 곳을 다녀 오셨군요. 구정연휴 잘 보내시고 좋은 글 많이 많이 올려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