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새재 도립공원(2) 제3관문 조령(鳥嶺)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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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관문관리소→ 선비상 신길원현감비(0.2km) →옛길박물관(0.3km) → 영남제1관 · 타임캡슐(1km) → 선정비군(0.6km) → 문경새재오픈세트장(0.9km) → 조산(1.4km) → 지름틀바위(1.6km) → 조령원터(1.8km) → 마당바위 · 상처난소나무(2.1km) → 주막(2.4km) → 용추 · 교귀정(2.6km) → 꾸구리바위(2.8km) → 소원성취탑 · 산불됴심비(3.2km)→조곡폭포(3.3km)→ 영남제2관 · 조곡약수(3.5km)→ 문경새재아리랑비(4.1km)→ 이진터(4.7km)→ 동화원(5.8km) → 장원급제길(6.5km) → 영남제3관(7.0 km) · 조령약수 -이상 ‘문경새재’ 책자 참고(문경새재관리사무소)

*. 제2관문 가는 길
문경새재 길은 기차나 버스가 없던 시절 지금의 경부고속도로 같은 길이었다.
그 길은 말을 타지 않는 경우 모두 걷는 길이어서 길가 곳곳에 전하는 아기자기한 이야기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조상들의 삶과 얼이 어울려 있는 길이 되었다.
그 각기 다른 하나하나를 명확히 구별하기 위해서 나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제1관문으로 해서, 그 다음은제3관문을 통하여 갔었지만 이를 옴니버스(Omnibus)식으로 제1관문에서 제3관문까지 순서대로 구별하여 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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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오픈 세트장: 초곡천 냇가 길 따라 평탄한 황톳길을 오르다 보니 2000년 문경시와 KBS가 문경새재 용사골에 조성한 ‘문경새재오픈 세트장’이 있다.
여기가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불멸의 이순신, 대조영 등의 TV 드라마를 촬영하였다는 곳이다.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나마 들어가 보니 대왕세종, 제중원, 추노 등을 촬영하기 위해서 조선시대 경복궁, 동궁, 사대부집, 저잣거리 성문 등 130여 동의 세트장을 더 조성한 모양이다. 그 산 위에 ‘일지매 산채’도 있었다.
왕건교로 나가 다시 제2관문을 향하는데 초가지붕을 멋지게 휘어진 네 기둥이 받치고 있는 정자 옆에 돌로 쌓은 산 같은 탑이 있다. 조산(造山)이었다.

207FEB3F502B45790BDC4C-조산(造山) : 조산이란 마을 입구나 마을 경계지점이 풍수 지리적으로 볼 때 허하거나 취약하다고 생각될 때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위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산을 말한다.
이를 문경 지역에서는 ‘골맥이서낭당’이라고 한다.
거기서 1.6km를 가니 길가에 길쭉한 막대 바위가 길가를 향하여 벋어 있다. ‘지금틀바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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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틀바우: ‘지름틀’이란 ‘기름틀’의 경상도 방언이다.
참깨 · 들깨 · 콩 등을 볶아서 떡밥을 만들어 보자기에 싸고 이것을 지렛대의 힘으로 눌러서 짤 때 쓰는 기름틀의 누름틀처럼 생겼다 해서 ‘지름틀바우’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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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터(院址):
거기서 1.6km 올라 해발 280m 지점에 원터가 보인다.
원(院)이란 고려와 조선조에 공무여행자인 관리나 상인들에게 숙식의 편리를 제공하기 위해 설치한 공공여관이다.
서울의 이태원도 옛날의 그 원(院)의 하나였다.
조선 후기에는 주막(酒幕) 또는 주점(酒店)이 원(院)를 대신하였다.
옛날 주막에서는 술이나 밥을 먹으면 음식 값 외에는 숙박료를 따로 받지 않았다.
대신 침구를 따로 제공하지 않았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 아랫목을 찾이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래서 대문 가까이 있는 널찍한 방에서는 10여 명씩 혼숙하며 갖가지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문경 새재 길에는 그런 역(驛)이 5, 주막(酒幕)으로는 초곡주막, 돌고개주막, 달지주막 등이 고개와 나루 주변에 있었다.

117F973F502B45900C53C2-무주암(無主岩): 누구든지 올라가 쉬는 사람이 주인이라는 무주암을 지난다.
옛날에 이 무주암 아래에 무인주점(無人酒店)이 있어 간단한 안주를 준비하여 두어서 길손이 이 바위 위에 올라 주변 경치를 구경하면서 목을 축인 후 마신만큼의 술값을 알아서 함에 넣고 가도록 하였다는 운치 있는 바위다.
조령산(1.017m) 입구를 지난다. 여기서 조령산까지는 3km로 1시간 50분의 거리인 모양이다.
교귀정(交龜亭, 해발 318m)이 가까워 오는지 길 양쪽으로 이 길을 지난 시인묵객들의 멋진 한시가 바위에 음각되어 있다.




1242DD41502B456F19738A -교귀정(交龜亭 해발 318m): 교귀(交龜)란 감사, 병사, 수사가 바뀔 때 부신(符信)을 넘겨주고 받고 하던 곳으로 이곳 교귀정에서는 신구(新舊) 경상감사(慶尙監司)가 인계인수를 하던 곳이었다.
그 팔작지붕의 건물도 고풍스럽지만 교구정 앞의 소나무가 더 멋있다.
뿌리가 교구정을 향하여 뻗어 있고, 길손이 쉬어 갈 수 있도록 가지를 남쪽 길가를 향하여 늘어뜨리고 있는데, 그 모습이 무희가 춤을 추는 듯하여 신비감을 더해 주고 있다.
아름다움도 친구가 있는가.
바로 앞에 용추(龍湫) 계곡과 용담(龍潭)이 있어 계곡을 내려가니 얼음처럼 찬 계곡물이 따가울 정도의 맹하(猛夏)의 더위를 잠시나마 잊게 하는데 주위에는 이를 노래한 선인들의 발자취가 한시로 요란하다.

嶺分南北與東西 영분남북여동서
路入靑山縹渺 노입청산표묘
蝽好嶺南歸不得 춘호영남귀부득
鷓鴣碲晝五更風 자고제주오경풍
                           -踰鳥嶺宿村家(유조령숙촌가)/ 김시습

새재는 남북과 동서를 나누는데
굽이굽이 청산 길에 고향을 멀리 두고
계곡물 우는 소리에 밤을 지세네
                            -조령원에서/ ilman 시조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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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재: 오름길 오른쪽에 바위굴이 있다.
이곳은 옛날에는 새우재라는 고개였다는데 옛 나그네의 낭만어린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옛날 이곳 새우재를 지나다 갑자기 내리는 소낙비를 긋기 위해 굴에 들어가 만난 청춘 남녀가 있었다.
둘이는 깊은 인연을 거시기로 맺고 기약 없이 헤어진 후 처녀는 그만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말았다.
항상 아비 없는 자식이라 놀림을 받으며 자라던 아들이 어머니를 졸라 자초지종과 함께 아비의 엉덩이에 주먹만 한 검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를 찾아 전국을 정처 없이 다니던 아들이 산골 어느 주막에 들렀더니 소나기가 갑자기 내리는 것이었다.
그때 함께 유하던 중년의 선비가 하는 말하는 것이었다.
“어허, 그 빗줄기가 마치 새우재 소나기 같구나!” 
아이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 보자 중년 선비가 어머니에게서 들은 것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지라 마침내 부자지간을 확인하고 함께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었다.
지금도 청춘남녀가 이 새우재 굴에 함께 들어가면 사랑과 인연이 더욱 더 깊어져 평생 헤어지지 않고 함께 해로할 수 있다고 한다.”

-귀틀집 : 귀틀집이란 통나무 귀를 우물 ‘井’ 자 모양으로 층층이 얹고 그 빈틈만 흙으로 메워 지은 집을 말한다. 현재 울릉도 나리분지에 문화재로 남아 있는 귀틀집이 그 예다. 자연을 소재로 하였기 때문에 보온성, 습기조절, 삼림욕에 좋아서 현대에 와서는 웰빙 주택으로 각광받고 있는 집인데 그 귀틀집이 새재 계곡 바로 옆에 있다. 널찍한 마당, 사립문과 그 울타리 그리고 일자(一字) 집과 장독, 통나무 의자 등이 옛날을 찾아온 듯한 착각을 일게 한다.

1951B641502B456B0AF73B -꾸구리바위: 새재 전설에 의하면 바위 밑에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의 큰 꾸구리가 살고 있었다.
 이 바위에 사람이 앉아 있으면 꾸구리가 바위를 움직인다고 하였다. 그뿐인가 아가씨나 젊은 새댁이 지나가면 희롱도 하였다고 한다.
꾸구리는 한강 수계의 돌이 많은 여울에 사는 6~10cm의 토종 물고기로 잰 움직임 때문에 생긴 과장된 전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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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성취탑: 옛날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정성껏 한 개의 돌이라도 이곳에 쌓고 가면, 선비는 장원급제하고, 몸이 마른 사람은 살이 찌고, 상인은 장사가 잘 되며, 아들을 낳고자 하는 여인은 옥동자를 낳을 수 있게 소원 성취하여 주는 탑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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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됴심 표석'(경북문화재자료 제226호): 조령 '산불됴심'(경북문화재자료 제226호)이 국문학도인 나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157cm 크기의 이 표석은 행인의 발길이 잦은 이곳의 길손들에게 산불예방은 물론 자연보호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이 산불됴심 표석은 그  자체보다 원추형 화강암 자연석에 음각한 순수 한글로 인하여 그 가치가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한자 전용 시대에 한글로 쓴 이 한글 표석은 이 고개를 넘던 이들이 선비 같은 양반들보다 서민들이 더 많았다는 것을 알게 하여 준다. 
그 한글비가 쓰인 연대도 유추해 볼 수도 있게 한다.   

'됴심→죠심→조심'에서,  '됴심→ 죠심'은 18세기 이후에 생긴 구개음화현상이요, '죠심→ 조심'은 19세기 이후에 생긴 단모음화 현상이기 때문에 이 표석은 18세기 이전의 표석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현재까지 고어로 된 한글비석은 우리나라에 4점이 전하여 오는데 여기 것을 제외하곤 모두 국한문혼용(國漢文混用)이라서 조령산 ‘산불됴심 표지’석은 국내 유일의 순수한글 비석으로 중요한 것이다.

-조곡폭포(鳥谷瀑布): 산불됴심비에서 200m를 올라가면 45m 높이의 3단 폭포가 있다. 비가 온지 오래서인가 폭포 같지 않은 폭포지만 인공폭포라니 비 오지 않은 날 지나가는 나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 제2관문(鳥谷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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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끝나자 조정애서는 왜군을 조령(鳥嶺)에서 막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조령(鳥嶺)은 좌(左)로는 조령산(,1017m), 능곡산(572m), 백화산(,1064m) 등과 우(右)로는 마패봉(925m), 부봉(917m), 주흘산(1,106m)로 이어진 산악지대인데다가 좌우가 다 절벽으로 소수의 병력으로도 대군(大軍)을 막을 수 있는 전량상 천혜의 요충 지대였기 때문이었다.
이 조령이 뚫리면 충주부터는 한양으로 통하는 일사천리(一瀉千里)의 뱃길이라 문경새재는 나라의 관문과 같았다.
그런 충주를 지키자면 조령에서 적을 반드시 막아야 했다.
조정에서는 왜란 때 공을 세운 충주에 사는 의병대장 신충원을 파수관(把守官)으로 임명하여 성을 쌓게 하였으니 그것이 제2관문 조곡관이었다.
그 뒤 문경새재의 세 고개에 관(關)을 지었으니 제3관문 조령관, 응암고개에 제2관문 조곡관, 초곡(草谷)에 제1관문 주흘관을 지은 것이 사적 제147호로 기념하고 있다. 
여기는 제2관문 조곡관(해발 380m)은 제1관문에서 3km를 온 것이요, 갈 곳인 제3관문 조령관까지는 3.5km로 꼭 문경새재의 중간 지점이다. 이제부터는 제3관문 조령관을 향하여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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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봉(斧峰, 916m): 이 개울을 넘어 2.5km/1시간 20을 가면 부봉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그 표석 이정표가 나를 유혹한다.
백두대간이 포암산과 하늘재를 지나 문경새재에 접어들면서 주흘산과 부봉의 6개 봉을 만들어 놓고 조령산을 지나 이화령까지 주능선이 이어 진다고-.
그 6개 봉우리가 916m부터 933m가 된다고-.
그 등산로 상에서 바라보는 백두대간의 능선과 멀리서 보는 문경새재와 그 계곡을 보지 않고 그냥 가겠느냐고 꼬여 대지만 함께 가는 일행과, 차를 가지고 와서 반대편 관문에서 우리를 기다려 주는 고마운 H 형이 있으니 그 이정표로나 챙기며 기약 없는 내일로 미룰 수밖에 없구나.
제3문 조곡관→ 6봉잘록이(20분)→ 6봉(40분)→ 동화원(40분) →제3문 조곡관 /총 2시간 40분)
그래서
바로 그 옆에 있는 ‘문경새재 아리랑비’의 이라랑 노래나 부르며 갈 수밖에-.

문경 새재 물박달 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아기 손질에 놀아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경새재 넘어를 갈 제/ 굽이야 굽이야 눈물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문경새재아리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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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터(二陳趾,해발 475m): 일제강점기 말기에 에너지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서 송진을 체취하여 갈 때의 흉하게 상처 난 소나무 길을 지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난다.
임진왜란 때 실패한 왜놈들이 조선 점령을 드디어 성공한 것이 일제 36년 간이었구나.

이진터(해발475m, 2陣터)는 제1관문에서부터는 4.4km, 제2관문에서는1.4km 지점에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왕은 야인(野人) 토벌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신립 장군를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에 임명하였다.
이에 신립 장군은 농민군 8,000명을 이끌고 문경에 내려와서 제1진을 제1관문에, 제2진을 이곳에 설치하였던 곳이라서 이진터(二陣址)라 하는 곳이다.
왜장 유니나가(小西行長)가 18,000명의 왜군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고자 정탐할 때였다.
함께 조정에서 내려온 김여물과 패전하여 온 이일 장군이 아군의 수가 열세임을 들어 천혜의 요충지로 지형이 험한 조령에서 방어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그의 거친 성격에다가 왕년에 그의 철기(鐵騎)로 야인을 무찌르던 것을 과신하고 듣지 않았다.
전투에 경험이 없는 농군이라 여차하면 탈영을 하는 자가 많아서 사지(死地)에 갔다 놔야 결사 항전할 것이라는 것이 신립 장군의 오판(誤判)이었다.
신립장군은 충주 달천 탄금대에 배수진(背水陣)을 쳤다가 중과부적으로 그만 패전하고 부하들과 함께 남한강 달천 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지만, 그의 고집으로 인하여 한양을 빼앗겨 선조는 신의주까지 몽진하여야 했고 죄 없는 수많은 충주 시민이 죽어간 것이다.
새재에서 퇴진하면서 신립장군은 허수아비를 세워 초병으로 위장 후 충주 달천(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왜군 초병이 정탐하러 와서 보니 조선초병이 지키고 있는데 아뿔싸! 조선 초병 머리 위에 까마귀가 앉아 울고 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천혜의 요새를 넘었다는 그 역사적인 비극의 장소가 바로 새재다.
  이와 연관된 여자를 유난히 좋아하였다는 신립 장군에게 이런 일화도 전해 온다.
새재에 진을 칠까, 아니면 탄천에 배수진을 칠까 망설이던 신립 장군의 꿈에 소싯적 장군을 사모하다가 원한을 품고 자결한 처녀의 원귀기 나타나 권하는 것이었다.
“신 장군님, 대명을 받들어 왜적을 격멸하러 오셔서 어찌 이와 같이 협착한 새재에 포진하여 후세에 웃음거리가 되려 하시나이까. 생각하신 대로 충청도 달천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시면 크게 대승리리다.”

-책바위 이야기(소원성취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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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인근에 살던 큰 부자가 하늘에 지성을 올려 낳은 늦둥이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자라면서 몸이 너무나 허약하여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그 부모가 유명하다는 도사가 문경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물었더니 도사가 이렇게 당부하는 것이었다.
“당신 집터를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을 누르고 있어 그런 것이니 아들을 시켜 그 담을 헐어 그 돌을 문경새재 책바위 뒤에 쌓아 놓고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시라.”
이후 아들은 자기집 돌담을 헐어 삼년에 걸쳐 돌을 책바위까지 나르다 보니 어느새 몸이 튼튼해지고 그로부터 학문도 열심히 닦아 장원급제까지 하게 되었다.
그 후 이곳아 소원성취탑의 장소로 알려지면서 이 길을 지나는 많은 과객들이 일부러 찾아와 장원급제를 기원하는 곳이 되었다.
지금도 입시철이 되면 자녀들의 소원성치를 비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책바위를 보고자 하거든 낙동강 발원지 이정표에서 잘 다듬어진 황토흙길을 버리고 오솔길로 들어가야 한다. 그 오솔길도 제3관문으로 가는 길이다.
길이 황톳길이라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문경시 당국에서는 그 길이 훼손될 경우 복원을 위해서 곳곳에 흙을 산더미처럼 미리 준비해 둔 곳이 많았다.

-장원급제 길 
18214B4C502B4F6310E106영남 선비들은 물론 전국의 선비들이 그렇게도 원하던 장원급제란 도대체 무엇인가?
과거란 고려 광종(958년)부터 갑오경장(1894년)까지 936년간 벼슬아치를 뽑던 시험이다.
과거에는 문과(文科) 무과(武科) 잡과(雜科)가 있었는데 잡과란 역과(譯科)(중국어, 몽고어, 여진어, 일본어) 의과(醫科), 음양과(陰陽科)(천문학, 지리학 등) 율과(律科)를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문과에는 갑과(甲科) 을과(乙科) 병과(丙科)가 있어 각과에 33명씩을 선발하였다.
장원급제(壯元及第)란 문과의 갑과에 첫째로 뽑힌 급제를 말한다.
급제자가 선발되면 국왕은 문무과의 급제자에게 종이로 만든 꽃인 어사화(御史花)와 왕을 만날 때 쥐는 홀(笏)과 술과 과일을 하사하고 은영연(恩榮宴)이라는 축하연을 베풀어 주었다.
다음 날에는 모든 급제자들이 문과 장원 급제자의 집에 모여 공자를 모신 문묘에 가서 알성례(謁聖禮)를 올렸다.
그 후 삼일유가(三日遊街)라 하여 친지(親知)를 불러 잔치를 하거나 선배(先輩)의 집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거나, 시관(試官)을 초대하여 은문연(恩門宴)이라는 축하연을 열기도 하였다.  
금의환향(錦衣還鄕) 길에는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연주하며 고향을 향하였다.
고향에 도착하면 그곳 수령(首領)과 향리(鄕吏)들의 환영을 받았다.
향교(鄕校)에서 알성례(謁聖禮)를 올리고 나면, 수령이 급제자와 그 부모를 불러 주연을 베푸는 그야말로 장원급제의 찬란한 금의환향 길이었다.
우리가 보통 진사(進士)나 생원(生員)이라 하는 것은 소과(小科)에 합격한 유생으로 대과의 예비시험으로 지방에서도 실시하는 과거의 초시(初試)였다.

*. 제3관문 조령(문경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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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도립공원 산책로에서 제1관문에서 제3관문을 오고가고 싶어 하는 사라들에게 가장 큰 애로사항은 차편(車便)이다.
문경읍 방면 여행객들은 문경읍까지 시외버스로 이동하고 문경읍에서 다시 문경새재 행 시내버스를 이용하는 불편을 감수하여야 한다.
충주, 수안보 방면 여행객들은 제3문 가는 시내버스를 이용하여야 하지만, 제3관문까지는 승용차가 아닌 한 조령산자연휴양림 길을 30분 이상 걸어 올라야 한다.
승용차를 가지고 왔다 해도 제1관문과 제3관문까지 두루 답사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사람이 출발점의 그 반대 쪽으로 가서 기다려 주는 희생 없이는 그 산책이 불가능하다. 
오늘은 그 희생을 충주가 고향인 H 형이 맡아주었다
  드디어 ‘문경3관문’(영남제3관, 해발 650m)에 이르니 감개가 무량하다.
생각해 보니 제1관문 주흘관이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한 제1관문이라면, 제3관문 조령관은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한 성문이다.
제3관문은 수안보나 충주 방향에서 온 여행객에게는 여기가 시발점이라서 문루도 성곽도 그렇지만 주위에 많은 한시와 ‘과거길’, ‘선비상’과 ‘문경새재안내도’와 ‘문경새재 과거 길’이란 표석과 조선 숙종 (1708년) 조령성 구축 시 새재 정상에서 발견 되었다는 ‘백수영천(百壽靈泉)이라는 ’조령약수‘와 ’조국순례자연보도 안내‘ 그림 등등이 카메라의 눈을 활짝 열게 한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백두대간 조령 비’요 그 아래 쓰여 있는 오석이 조령(새재)의 유래다.
우리는 과거 길을 떠나는 선비처럼 괴나리보따리 대신 카메라를 메고, 곳곳을 유감없이 카메라에 담다가 드디어 제3관문(조령관)에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런 과거길이 언제 어디였을까?
생각해보니 인천(仁川)에서 나서 인천(仁川)에서 자란 나의 과거길은 대학입시를 위해 서울을 향하던 때였던 것 같다.
그 길에 나도 대학에 급제하여 받은 그 졸업장 하나로, 장가가고 3남매를 낳고 길러 대학 보내고, 시집장가 보내어 살림 내고, 다행히 좋은 세월 만나 당시의 녹봉(祿俸) 같은 연금을 받아 이렇게 주유천하(周遊天下)하며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나도 옛 선비처럼 문경새재 같은 인생의 고개를 넘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남들보다 험난한 가난이란 고개 길을 넘은 것 같다.

가난이란 세상에서 가장 넘기 어려운 고개
그 고개를 넘었더니, 드디어 넘어섰더니
가난도
재산이더라.
꿈꾸던 행복의 고개더라.
-ilman

*. 조령( 鳥嶺, 새재)의 유래
165FD43F502B458432DE6D백두대간의 조령산과 마패봉 사이를 넘는 이 고개는 옛 문헌에는 ‘초점(草岾)’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어원은 억새가 우거진 고개 ‘새’(억새) +‘재’(고개)에서 왔다는 설, ‘새(鳥)’도 날아서 넘기 힘든 ‘재’(고개)에서 유래 되었다 한다.
다른 설로는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에 있다고 해서 ‘새(사이) + 재(嶺)’라고도 하였다.
또 다른 설로는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이화령)보다 ‘새(新)’로 된 +‘재(고개’)라 해서 ‘새재’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경상도 지방을 영남(嶺南)이라고 하는데 그 '嶺'은 새재를 말하는 것으로 ‘조령(鳥嶺)의 남쪽’ 지방이라 해서 생긴 말이다.
영남대로인 문경새재를 넘었으니 이제는 나도 충주로 해서 서울을 향하여 귀성길을 서둘러야겠다.
                   

 -'도립공원 산행기'의 출간을 위해 쓴 글이오니 이 글을 인용한 저작을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지은이 il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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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9 06:15
노만우
일만 성철용 선생님! 오랜만에 선배님의 글을 접하고 보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디.
덕분에 문경새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갑니다
언제 한번 만나 탁주나 한잔 하시지요.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시간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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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9 11:05
한서락
오랫만에 올려주신 문경새재의 자세한 설명과 유래를 잘 보았습니다..
최근 몇년간 여러번 깃대봉,마패봉,1관문, 부봉, 주흘산등을 산행하며

제3관문에서 1관문까지 여러번 다녀와서 더욱 정겹습니다,
올여름 폭염과 장마속에 건강 잘 챙기시고 문경새재까지 다녀오신 모습에
반갑고 , 좋은 설명 감사드립니다 ^^**
댓글
2012.08.20 11:31
가곡
일만 성철용님! 건강 좋으시지요?
영남 민초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문경새재의 유래와 모습을 자세한 설명과
더불어 사진까지 곁들여 주시니 보기가 더욱 좋습니다.

님의 안부와 근황이 궁굼했었는데.... 반갑습니다.
오랫만에 올려주신 산행기 반가웠구요,

항상 건강하시고 즐거운 산행길 이어 가세요.
고맙습니다.^^*
댓글
2012.08.21 01:53
권경선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건하시고, 재미있는 글
즐겁게 읽고 갑니다.

새재에 스민 내밀한 얘기
잘 간직하고, 다시 문경에 가고 싶습니다.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