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 산행기
<2004년 8월 28일/금산사-심원암-모악산-모악정-금산사/단독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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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미국에서 열심히 나의 산행기를 읽으며 고국의 산하를 그리고 있는 일만의 처남 박종락 사장에게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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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묵대사의 고향
天衾地席爲山枕(천금지석위산침)
月燭雲屛作樽海(월촉운병작준해)
大醉居然仍起舞(대취거연잉기무)
却嫌長袖卦崑崙(각혐장수괘곤륜)

하늘을 이불, 땅을 자리, 산을 배게 하고
달을 촛불, 구름을 병풍, 바다로 술잔 하여
얼큰히 취해 거연히 더덩실 춤추면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 게 불편하이.

임진, 병자호란 무렵 전라도 땅에 행적이 변화무쌍한 진묵대사(震默大師)라는 괴승이 있었다.
스님이 어느 날 위와 같은 게송(偈頌)을 읊었는데 그 시가 너무나 호연지기하여 모악산, 부여 무령사를 비롯한 스님이 노닐던 곳에 주렴으로 걸어 놓고 즐겼다 한다.
우리 외사촌 아우 송원순 사장이 구해준 그 글을 나도 액자에 고이 담아 거실에 걸어 놓고 그런 경지를 부러워하며 살고 있다.
두주불사하시던 우리 아버지를 닮아 일찍부터 술을 즐겨서 목숨을 걸고 마시고 다니는 경지에 도달하고 보니, 주머니 사정도 그러하지만 그보다 건강이 가장 염려되었다. 그 좋아하는 술을 더 오래 마시려면 무엇보다 건강해야 하지 않겠는가 해서다.
그래서 갸륵하게도 언제부터인가 스스로 호를 일만(一萬)이라 하여 돈으로서나마 술의 양을 조절하려 하였다. 술의 종류도 가능하다면 도수가 얕은 막걸리를 주로 하였고, 그것도 요즘에 와서는 흔들지 않은 맑은 윗 것만을 조심스럽게 딸아 마시는 것으로 나의 위장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하고 있으니 어찌 진묵대사의 경지를 넘볼 수 있겠는가.
혹자는 '그런 술은 왜 먹는 거지?' 하겠지만 거기에 대한 일만의 답은 이렇다. 취하라고 마시고, 싸니까 마시고, 물리지 않아서 마시는 거다.
지금 나는 그 진묵대사의 고향 김제의 모악산을 향하고 있다. 그가 유했다고 하는 대원사까지는 갈 수 있을지 염려하면서.
진묵대사는 고(高)씨 처녀가 빨래터로 떠내려 오는 복숭아를 먹고 낳았다 해서 호로 자식이라고 버림받다가 7세 때에 출가하여 소석가(小釋迦)라는 이름을 들을 정도로 유명한 고승이 되신 분이다.
내일부터 금산사 유스호텔에서 1박 2일의 ‘한국동인지문학관’ 세미나에 참석하는 길에 나는 하루 먼저 가고 있다. 내일 새벽에 모악산 산행을 하기 위해서다.

*왜 모악산(母岳山)이라 하는 거지
계집 ‘女’ 자에다가 점 둘을 찍으면 어미 ‘母’ 자가 된다. 점 둘은 여자의 젖을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 김제, 만경 평야에서 제일 높은 산이니 ‘岳’(악) 자를 붙여 모악산이라 한 것이다.
이 호남평야의 중심부에서 제일 높은 모악산에서 발원된 강은 북으로 만경강, 남으로 동진강으로 만경평야와 김제평야를 적셔주는 젖줄이 된다.
김장호님의 '한국명산기'의 '모악산' 편에 이런 말이 있다.
산신뿐 아니라 고대 신앙상의 신은 대부분은 여성으로서 세계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도 영국인이 그렇게 명명하기 전부터 현지 티베트인들은 '초몰룽마(Chomolungma)'라 불렀는데 그것은 '세계의 어머니인 여신의 산'이란 뜻이라는 것이다.
에베레스트(M. Everest)란 1865년 이후 인도 측량국장을 지낸 영국인 관리 조지 에베레스트 경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에베레스트가 8,848m로 세계 최고의 산임을 측량하고 증명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모악산은 삼국유사와 고려사에서는 금산(金山)이라 기록이 보이다가 동국여지승람에는 모악(母岳)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김제(金堤市)나 금산면(金山面), 금천(金川) 등의 금(金) 자를 보면 월평천, 두월천의 사금(砂金)이 많이 나는 데서 유래된 말 같다.
'금산사지(金山寺誌')에 기록되어 있는 모악의 유래에 대한 말은 우리를 자못 흥미롭게 한다. .
삼국유사와 고려사 등에는 이 산을 금산(金山)이라 하여 오다가, 이조 시대에는 엄산, 큰뫼라 불렀다. 엄지와 같이 '크다'는 뜻이었으나 '엄뫼'는 한자로 바뀌는 과정에서 '모악'(母岳)이 되고 '‘큰'의 명사형은 '큼'이니 한자 '금(金)으로 음역(音譯)되어, 금산(金山)으로 표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모악산 정상 아래에 있다는 '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라 하여 모악산이라 하였다고도 하고, 또 김제 평야 등지 에서 멀리 이 산을 바라보면 그런 모습이라 하여 그렇다는 말도 있다.

* 모악산의 새벽 등산
별들은 빛을 잃었지만 그래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등산길에 물통 하나 달랑 차고 나섰다. 금산사까지 가는 도중에 가로등이 꺼지더니 일주문에서 야경을 촬영하려는데 그마저 꺼져 버린다.
금산사는 절 문이 커다란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었다. 금산사 정상의 시설물을 제거하여 불자의 기도처가 되게 해달라고 등산로 차길을 막고 투쟁 중인 모양이다. 할 수 없이 철문을 넘어 우측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가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무리 등산이 위주라지만 금산사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국보 62호라는 미륵전이라도 챙기자. 이렇게 미루다가는 사진 한 장 못남기지- 하는 생각에 뒤돌아 금산사 경내로 들어섰다.
금 산사 미륵전은 한국 유일의 3층 불전이지만 내부는 전체가 툭 터진 하나의 통층이다.
거기 모신 세 분 불상은 모두 입상(立像)인데 중앙 주불 소조삼존불입상(塑造三尊佛立像)은 높이가 11.81m, 좌우의 협시보살입상(脇侍菩薩立像)은 8.79m이지만 안타깝게도 1597년 정유재란의 병화(兵火)로 불타버린 것을 1938년에 완성하여 모신 불상이었다.

등산 후에 챙겨야 할 일이 급하여 나머지는 다음에 보지 하면서 절을 뒤로 하고 모퉁이를 막 돌아 조금 가다보니 부도(浮屠)군이 있다. 우리가 절 근처에 가면 만나게 되는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넣고 쌓은 보통의 부도가 아니라, 그 중 한 부도는 철조 물에다가 파란 플라스틱으로 하늘을 가리었다. 등에 비를 인 거북을 보니 보물24호라는 혜덕왕사진응탑지인 것 같다.
계속되는 지루한 콘크리트 길이었지만 개울물이 길까지 적셔 가며 소리 내며 흐르는 삽상한 여울물소리를 거슬러 한참이나 올라가니 갈림길이 있다.
이정표에는 금산사에서 0.8km 올라온 것이요, 모악정까지는 1.2km, 심원암 0.6km가 남았다. 모악정은 내려오는 길에 보기로 하고 심원암 코스를 택하였다.
모처럼만에 시원하게 하늘로 곧장 뻗어오른 수목을 본다. 마추어 서 있는 하얀콘크리트 전봇대와 나무가 구별이 안될 정도의 서유럽, 동유럽 여행길에서나 만나보던 그런 나무들이었다.
심원암(深源庵)에는 금산사북강삼층석탑(보물29호)이 있어 탑을 돌면서 소원을 빌면 소원 성취한다 하여, 조선조 때에는 서민층과 사대부집 부녀자들의 발길이 그칠 새가 없었다는 암자다.
그 탑에 가서 나도 빈다면 이렇게 빌었을 것이다.
'부처님, 부처님. 일만을 도와주소서. 영웅이 되게 도와 주소서. 서민의 영웅이 되게 하여 주소서. 서민의 영웅이 되는 길은 로또 복권에 당첨되는 것이외다. 도와주신다면 일만은 활빈당이 되어 세상을 사오리다.
모습을 드러낸 심원암은 아침 염불이 끝났는가 굳게 닫혀 있는데, 사찰이나 요사체가 요즈음 신축한 건물이라서 땀 흘려 찾아온 깊은 산사인데도 그윽한 풍취를 반감하게 한다. 마당에 있는 화강암에 양각으로 된 관세움보살상 이외에는 이렇다 할 것이 없다.
탑은 어디에 있는가. 신원사지를 현재 자리로 옮겼다더니 나의 소원성취도 빌어볼 곳이 없구나.

갈림길에서 600m까지 올라와서 되돌아 가기는 억울한데 올라갈 등산로가 어딘지 보이지 않고,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얼른 보니 절 뒤 산죽 우거진 곳에 나무에 매달린 비닐봉지가 보일뿐이다. 수통에 물을 갈아 넣고 깊이 잠든 이 절의 사방을 기웃거리다가 자세히 보니 그 흉한 비닐봉지가 리본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길 솟은 산죽 사이 바닥으로 길의 흔적이 있다. 거길 뚫고 나가니 등산길이 열린다. 어부가 무릉도원을 찾아 들어선 별유천지 같은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토끼인가 산짐승이 숲을 헤치며 도망을 가는지 숲이 요란히 흔들린다.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스틱을 가져올 걸 그랬다. 배낭 속에 준비해온 종을 가져올 걸 그랬다.
절에 있는 풍경이나 종(鐘)이 뱀을 쫓는다고 하지 않던가. 치악산의 전설에서 선비를 뱀으로 구해준 것이 까치가 만들어 낸 종소리이었듯이.
깊은 산 중에 웬 성(城) 터인가. 공들여 쌓은 것은 분명 성터이다. 견훤과 왕건이 패권을 다툴 때의 것인가. 아니면 임진왜란 때 처영(處英)이 승병 1천을 이끌고 왜병을 무찌른 곳이 모악산이라 하더니 그때 쌓은 성인가.
햇빛이 비치기 시작하니 바람이 그리워지는데, 바람도 아직 자고 있는지 온 몸에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반가운 이정표가 있기는 있는데 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기대어 있다. 온 길을 표준삼아 가름하여 이정표대로 직진해보니 영- 길이 안 나타난다. 리본도 없었다. 이럴 때는 큰길로 가는 것이 상책이지 하며 오르다 보니 리본 몇이 나를 안도하게 한다.
이렇게 잘못된 이정표나, 잘못 가르쳐 주는 길 안내는 나그네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산길에서 분명치 못한 이정표를 보며 나는 시국을 걱정하는 국민이 되어본다.
기왕불구(旣往不咎)라는 말이 있다. 지나간 일은 탓하는 것이 아니라는데, 지금의 우리 정국은 정적(政敵)을 제거하기 위해서 거창한 역사의식을 내세워 과거사(過去史) 논란으로 떠들썩하고, 여기저기서 신음하고 있는 만신창이가 된 서민의 민생고는 도외시하고 당리당략을 위한 거시기를 머시기 하려 하지 않는가. 너무 미시적으로만 세상을 보는 것 같다.

드디어 모악산을 빙 둘러 있는 평야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나무 사이로 정상이 보인다. 관악산 같이 송신탑인가 군부대인가가 산꾼에게 섭섭하게도 정상을 온통 독점하고 있었다.
헬리콥터 장에 서니 350m라는 이정표가 정상을 향하여 손짓하고 있다. 이곳은 벌판으로 둘러싸인 전망이 일품이었다. 어느 산이나 정상이 가까운 곳에서는 인적소리가 있듯이 비로소 사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구이저수지 쪽에서 올라온 등산객인가 보다.

헬기장에서 170m를 오른 곳에 정상3거리 가 있다. 여기서부터는 정상까지는 170m만 가면 된다. 멀리 금산사가 손바닥 만하게 숲 속에 묻혀 있었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간 곳은 철조망 밑 어느 상호신용금고가 세워 놓은 알루미늄 구조물에 쓰인 793m라는 글씨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지만 어쩌랴. 분단국가에서 우리가 감수해야 할 현실인 것을.
정상에 서니 멀리 금산사 쪽으로 김제시가 한 눈에 들어오고, 그 반대 동쪽에 거대한 구이저수지가 전개 된다.그 북쪽 어름에 한 눈에 가득 들어오는 아파트촌이 전주인가 보다.
정상이라고 하는 이곳에서는 수암사를 거쳐 진묵대사가 있었다는 대원사를 거쳐서 선녀폭포를 보면서 구이저수지로 내려갈 수도 있다. 장근재를 거쳐 심원암으로 내려갈 수도 있지만 이 모악산은 산도 산이지만 계곡이 유명한 곳이라 계곡과 모악정을 보러 아까 올라온 정상3거리를 향하고 있다. 거기서 모악정까지는 1.1km였다.

한국의 정자는 마루바닥을 지면보다 한층 높게,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만으로 산수 좋은 높은 곳에 자연을 배경으로 한 남성들을 위한 놀이 공간이다. 어찌 산을 핑계하여 정자를 생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물가에 있는 모악정을 사진 몇 장 찍는 것으로 지나치고 말았다. 동료들과 함께 하여야 할 일을 뿌리치고 나만을 위한 새벽 산행이었기 때문이다.

길이가 4km나 된다는 눌연계곡(訥然溪谷)은 굴곡이 심하여 길게 늘여 있다 해서 늘안계곡이라 한다지만' 訥'(눌) 자가 '말 더듬을 눌' 자인 것은 말을 더듬거리는 모양 같이 물의 흐름이 더디어서 눌연계곡이란 말이 더 재미가 있다.
백중(百中)이 가까왔지만 그래도 매미는 울고 있었다. 그러나 가을이 가까이 와서인가 그 소리는 힘이 없었고 우는 매미도 많지가 않았다.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올 여름의 더위에다 몰려오는 태풍 때문에 그 동안은 칩거하였지만 돌아가면 다시 또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해야겠다. 먼저 꿈꾸던 덕유산 종주부터. 그리고 지리산 피아골의 삼홍(三紅)이 어떻게 아름다운지 이 가을에는 반드시 챙겨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