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산 산행기

 

ㅇ 일자 : 2004. 10. 30
ㅇ 위치 : 전북 정읍
ㅇ 코스 : 일주문-서래봉-불출봉-망해봉-연지봉-까치봉-내장사(약10km, 6시간)

 

   산악회 정기산행이 출발 전부터 삐걱거린다. 회원 7명중 3명이 불참을 통보하더니, 회원들 중 유일한 아가씨마저 출발직전에 불참을 통보한다. 이럴수가? 창립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 모양인가! 나름대로 사정이야 다 있겠지만은 정기산행 만큼은 산악회를 위하여 본인의 욕심을 접을 줄 아는 양보정신이 필요한데---아쉬움이 길가의 은행나무처럼 물들어 오른다.   

 

  새벽 세시 반의 밤거리에서 힘없는 바람처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어오는 불쌍한 산행대장 제갈량. 어쩌긴, 계획대로 실행에 옮겨야지. 그리고 더욱 멋진 산행을 하여 함께 하지 못한 회원들을 부러움의 낭떠러지로 밀어 버려야지!!!  

 

   그렇게 아쉽게 시작된 제갈량, 지리선녀, 나의 정기산행. 내장산으로 내달리는 1시간 30여분 내내, 우리를 배신하고 지리산 백무동 계곡 어딘가를 좋아라 오르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두 회원의 언행을 쫓느라 입이 아프다. 특히 열을 내는 지리선녀. 지리선녀의 팔뚝을 모르는 두 사람이 아닐텐데 어쩌다 그런 일을 저질렀을고---제발 무사히 다시 만날 수 있길 빈다.  

 

   정읍 I.C를 빠져 나와 내장사 입구에 이르자 이른 새벽인데도 사람들이 북적댄다. 역시 내장산의 명성은 대단한가 보다. 회원들도 슬슬 술렁이기 시작한다. 어둠속인지라 단풍터널의 절경은 하산길에 보기로 하고 차를 몰아 내장사 입구까지 오르는데 길옆으로 도열하고 있는 단풍나무들의 모습이 역시 예사롭지가 않다. 가로등 사이로 언뚯언뜻 보이는 새빨간 단풍나무. 명성대로 색깔이 곱고도 짙다. 아직도 절정은 아닌 듯 싶지만 탄성을 자아내게 하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역시 내장산의 단풍은 틀리구나. 이래서 내장산이구나. 회원들이 한마디씩 던지는 사이 어느새 단풍터널을 죽 빠져나와 내장사 일주문에 선다. 일주문 주변도 사람이 많기는 마찬가지다. 아직 차에서 잠을 자고 있는 사람. 등산을 준비하는 사람. 어제 저녁부터 날을 세워버린 것 같은 사람. 그 틈에서 우리도 서둘러 신발 끈을 동여매고 서래봉으로 향한다.

 

    랜턴에 발길을 의지한 채 일주문에서 서래봉으로 오르는데 지리선녀가 무척 힘들어한다. 어둠 속이라 잘 가늠이 되지는 않지만 길도 상당히 가팔라 보인다. 그래도 평소의 지리선녀답지가 않다. 회원들이 참석이 저조하여 힘을 얻지 못하는 것일까? 새벽산행 답지 않게 바람도 없고, 먼지가 풀풀 날리도록 숲 속이 건조한 것이 지리선녀를 더욱 힘들게 한다. 잠들어 있는 벽련암을 소리 없이 지나고, 먼저 오름질을 시작한 산님들의 야호 소리에 힘을 얻어 서래봉에 오르니, 많은 산님들이 올라와 일출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도 가만히 하나의 바위를 차지하고 앉는다.  

 

    서래봉의 미명 아래 올라서서 돌아보니 뜻밖으로 조망이 좋다. 단풍으로만 유명한 산인줄 알았는데 이런 조망이 가능하다니---나지막하게 탄성이 흘러나온다. 희미하게 눈시울을 적시기 시작하는 동녘하늘 밑으로 부드러우면서 날카로운 곡선들이 만들어 내는 저 화려한 흑백의 미학. 새벽의 운해와 능선의 자락은 언제 보아도 가슴이 시원하고 아름답다. 어떤 산은 긴장을 잔뜩 준 채 주--욱 한쪽으로 흘러내리고, 어떤 산은 하늘로 날아오를 듯 날카롭게 어깨를 일으켜 세우고, 어떤 산은 능숙한 화백의 일획처럼 부드럽게 뻗어 나가고---또 그 선들이 만나 이루어내는 저 적절한 공간의 긴장감과 일탈감을 인간의 어떤 상상력이 감히 흉내 낼 수 있을까. 한참을 넋을 놓고 있다가 시선을 뒤로 돌리자 아직도 환하게 솟아 있는 달빛 아래로 내장산의 주능선들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한눈에 들어온다. 능선 아래로는 단풍계곡의 선율이 부드럽고 화려하기 그지없어, 마치 그 단풍의 바다 속으로 풍덩 뛰어내리면, 주우욱 하고 미끄럼을 타고 내려갈 것 같다. 풍경 속으로 빨려들어 갈 것 같아 자꾸만 뒷걸음질치는 발걸음을 달래고 있자니 어느새 땀이 식고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해가 떠오르려면 아직 멀었는지 동쪽하늘은 변함이 없고, 지리선녀가 더 이상 한기를 참지 못하겠는지 길을 재촉한다. 아쉽지만 일출의 모습을 접어둔 채 불출봉으로 향한다.   

 

   한차례의 멋진 광경을 보고 나서인지 길을 나서는 회원들의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불출봉, 망해봉, 연지봉, 까치봉으로 향하는 능선길. 좌측으로는 내장산의 단풍이 수시로 모습을 달리하며 나타나고, 우측으로는 정읍시내와 저수지가 정갈하게 다가선다. 철계단을 오르고 내리고, 바위를 오르고 내리다 보니 어느새 내장산에서 전망이 제일 좋다는 까치봉에 이른다. 능선길을 걸으며 차츰 이야기를 꺼내 놓기 시작하던 회원들이 까치봉에 와서는 아예 퍼질러 앉는다. 대장이 정상주로 준비한 복분자주를 나누어 마시며 이야기 속에, 내장산 풍경 속에 흠뻑 빠져든다. 백암산도 한잔 나누어주고, 내소사에도 한잔 나누어주고 문필봉, 연자봉에도 한잔씩 나누어 주다보니 어느새 취기가 오른다. 이제 회원들은 단촐한 산행이 오히려 좋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이렇게 여유 있는 산행을 할 수 있고, 한잔씩밖에 돌아가는 않는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실 수 있고---   

 

   산행이란 역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하고, 가슴을 열리게 해준다. 그 만큼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는 것일 게다. 그러고 보면 산을 오른다는 것은, 산에 오르는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은, 어쩌면 씻김굿의 한 종류는 아닐까. 산이라는 고통의 통로를 지나 땅에서 천상으로 오르는 해탈의 작업은 아닐까. 그것을 의식하건 의식하진 못하건, 산을 오르는 마음 어느 구석에 사특한 마음이 들어설 수 있을까. 일말의 파도도 일지 않는 저 눈부신 가을 하늘. 그곳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기꺼이 고통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저 인간의 행로. 산에 오른다는 것은 지상에다 삶의 터전을 이룬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은 아닐까. 어쩔 수 없이 고통스럽고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벗어나려고 몸부림칠수록 더욱더 빠져들고 마는 인간의 타고난 천형은 아닐까.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단풍은 피어나고, 피어난 단풍의 세상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런 저런 이야기 속에 회원들의 얼굴에도 어느새 단풍물이 들기 시작한다. 흩어졌던 생각들은 추스려 이제 천천히, 조심조심 하산을 시작한다. 올해의 단풍은 대체로 좋지 않다. 너무 건조해서인지 나뭇잎들이 그냥 말라버린 느낌이다. 그래도 가끔씩 보여주는 새빨간 단풍에 시선을 빼앗기며 천천히 내소사로 접어든다.   

 

    내소사에는 단풍이 절정이다. 사람들은 시골운동회 날 같다.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서래봉의 바위와 내소사를 배경으로, 대웅전 앞의 단풍나무를 배경으로, 우측편의 은행나무와 감나무를 배경으로, 일주문을 배경으로, 우리도 몇 장 풍경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내장산의 단풍이 유명한 것인지. 사람들이 내장산을 유명하게 한 것인지. 단풍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흥에 치여서 단풍터널 목 좋은 자리에 않아 이제 하산주를 마신다. 술이름도 단풍주란다. 단풍이 꿀꺽꿀꺽 잘도 넘어간다. 새빨간 단풍나무가 되도록---   


   조촐했지만 나름대로 즐거웠던 산행. 단풍뿐만 아니라 조망도 꽤 괜찮았던 내장산. 산이란 어느 산이고 나름대로의 멋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얼마만큼 그 멋을 느끼느냐 하는 것 일게다. 작으면 작은 데로, 크면 큰 데로---사는 일도, 사람을 보는 일도 이와 다르지는 않을 터인데--나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 것인지. 내장산의 말발굽 같은 산능선들이 몇 차례 가슴을 밟고 지나가는 정읍 땅 가을 날.
   
  
 

(단풍터널의 단풍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