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나의 빛깔과 향기를 찾아서


“아빠, 저도 백두대간 종주하고 싶어요!”

10년 전 여름 우리 가족 넷이서 설악산에 갔을 때, 대청봉 정상에서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큰아들이 나에게 한 말이다. 그 당시 내가 백두대간 구간종주를 위해 지도를 펴놓고 대간의 마루금을 긋거나 자료를 정리하느라 집안에서 부산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아들도 이에 호기심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나는 아들이 대학생이 되면 함께 백두대간을 종주하기로 약속했다.

이후 아들은 나를 따라 산에 다니기를 좋아했고 명산에 다녀온 뒤에는 복사한 지도에다가 그 코스를 형광펜으로 칠한 다음, 자기 책상 유리판 밑에 차례로 깔아놓곤 했다. 나는 그 모습이 무척 대견스럽게 느껴졌지만, 구태여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어 대학입시 공부에 몰두하느라 힘겨워할 때 나는 아들의 책상 지도 옆에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써서 함께 넣어 주었다.

“The future belongs to those who prepare for it.”(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것이다.)

보스턴에 있는 푸르덴샬 생명보험회사 본부 건물에 쓰여 있는 말이라고 한다. 미래는 우리 모두에게 다가오고 있지만, 그것은 저절로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미리 기다리고 준비하고 취하는 자만이 그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 말은 아들의 공부를 격려하고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를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나 자신의 미래를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과연 참다운 나의 미래를 준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제프리 스템프스는 미래란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한 순간 한 순간이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미래라는 것도 결국 현재의 한 순간 한 순간에 달렸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현재 자신의 삶에 대한 확신이 없고 행복하지 못한 내가 20년, 30년 후의 미래를 어떻게 기약하며, 설사 목적한 바를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미래의 진정한 행복이라고 누가 보장해 주겠는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 일면 외적 성취를 이룬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이 있고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사람일수록 더 많은 고민과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 외적 성취가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나자 노망든다고 어물어물하다 보니 해놓은 일 없이 지천명이 다 된 나에게서 부귀는 떠난 지 이미 오래이다. 그럼 나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이런 생각으로 마음이 혼란할 때 나에게 보석처럼 다가온 책이 있었다. 그건 로빈 S. 샤르마가 쓴 ꡔ나를 찾아가는 여행ꡕ이었다. 미국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법정 변호사였던 줄리안 맨틀은 외적인 성취로 보아서는 최고의 성공을 거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인생의 패배를 자인하고 모든 재산을 팔아 인도로 영적 여행을 떠났다. 그는 3년만에 히말라야의 현명한 예언자로 변한 뒤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내면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한, 외면에서 거둔 성공이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네. 잘 알다시피 행복과 부귀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

이 말은 정신적인 만족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외적 성취도 그 자체가 업이 되어 또 다른 고민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게 된다는 말이리라. 나는 이 말이 무척 감명 깊게 느껴졌다. 부귀와는 한참 동떨어진 사람의 푸념이나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 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삶의 정곡을 찌르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언젠가부터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진실로 ‘나’는 어디에도 없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보니 제 아무리 큰 성취를 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 보면 그것이 항상 불만스럽고 왜소해 보이는 것이다.

결국 이 책에서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준 것은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꽃이 꽃을 피우고 새가 소리 내어 울듯이 나는 나의 꽃을 피우고 향기를 풍겨라. 비록 그 향기가 여려서 남이 느끼지 못하더라도,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소리로 영혼을 울려라. 그 때 비로소 참된 나를 찾아 행복할 수 있다.”

나도 나의 꽃을 피울 수 있고, 나의 향기를 풍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조차 감도 잡지 못하는데, 어떻게 꽃을 피우고 향기를 풍길 수 있다는 말인가? 한 동안 이런 회의에 빠져 고민하다가 나의 600회를 넘은 산행일지를 보는 순간, 문득 나의 꽃과 향기는 바로 이 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진한 감동을 받고 행복했던 공간이 산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여름날 장엄하게 쏟아지는 장백폭포의 위용에 감탄하며 백두산 올라가는 길에 지천으로 피었던 이름 모를 야생화, 눈보라 휘날리는 한라산 백록담에서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치닫던 고라니의 울음소리, 한 겨울 설악산 중청봉에서 대청봉으로 가는 길에서 강한 눈보라에 휩쓸려 날아가려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게 해준 누운잣나무, 덕유산의 덕유평전을 수놓았던 철쭉꽃과 원추리꽃…….

나의 답답한 일상과 욕망이 내 순진한 영혼의 멱살을 쥐고 마구 흔들 때는 물론, 세상사가 잔잔한 기쁨과 감동으로 다가올 때도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것이 이러한 산행 추억들이다.

내가 백두대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백두대간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하던 1990년대 초부터였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지리산까지 이어졌다니! 그리고 우리의 산이란 산은 모두 이 산줄기에 닿아 있어 백두산만 하늘에서 잡아 끌어올리면 한반도의 모든 산과 땅덩어리가 한꺼번에 하늘로 따라 올라갈 수 있다는 가정이 너무도 흥미로웠고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처럼 내가 피상적으로 느끼기 시작한 백두대간에 대한 관심이 확실한 믿음으로 내게 다가온 것은 조석필님의 ꡔ산경표를 위하여ꡕ(1993)라는 책을 대하고부터였다. 이 책은 우리 조상들의 산하에 대한 체계적 인식을 담은 ꡔ산경표ꡕ를 소개하고 해설한 것으로, 나로 하여금 백두대간에 대한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알고 보니, 백두대간은 단순히 우리 선인들이 사용하던 산맥 이름이나 지리 개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전통적 산수관과 철학에 입각한 한민족의 공간적 상징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그리하여 일본인 지리학자 고또분지로가 지하자원의 수탈을 목적으로 엉터리로 수립한 태백산맥이니 소백산맥이니 하는 것을 버리고, 우리 조상들의 산수관과 철학에 의해 정립된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이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의 지리와 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중 전남대학교 O.B.산악회에서 발행한 ꡔ백두대간 종주 등반 기록집ꡕ(1993.12.)을 처음으로 대하고 나서는 백두대간 종주의 열망이 나를 더욱 못살게 굴었다. 이 46일간의 종주 기록을 대하고 나서부터 나도 백두대간 종주를 해야겠다는 결심과 설렘 때문에 한 동안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만 나면 내 마음은 백두대간 길을 내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사인 나로서 그 긴 시간을 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보통 여름방학은 길어봐야 40일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선책으로 나는 구간 종주를 하기로 했다. 1994년 여름에 처음으로 동료 2명과 함께 늘재에서 죽령까지 걷기로 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무거운 짐과 부실한 팀워크 때문에 고생이 너무 심한 나머지 이화령에 도착해서 중단하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다른 동료들에 비해서 그다지 지치지 않았고 다리에도 별 이상을 느끼지 않았다. 이때부터 나도 백두대간 종주를 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후 해마다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일정 구간씩을 끊어서 단독종주를 실시했다. 명산이나 이름난 구간은 평소 공휴일 등산을 통해서 웬만큼은 다 다녀본 곳이기 때문에 나머지 구간만을 잡아서 땜질식으로 종주를 한 것이 2002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결과 상주 구간을 비롯해서 강원도의 몇몇 구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대간 길을 밟은 셈이 되었다.

이제는 일시 종주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데, 나라고 해서 못할 것이 없어 보였다. 시간이 부족하면 시간을 짜내보고, 그래도 부족하면 남보다 빨리 걸으면 되지 않겠는가?

백두대간을 종주한 분들의 기록을 참고하고, 나의 구간종주 중의 산행일지를 검토해 보니 약간의 무리가 뒤따르기는 해도 맘만 먹으면 40일 이전에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나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백두대간을 일시에 종주하면서 그 고통과 환희를 동시에 느껴보기로 결심했다.

백두대간 종주를 결행하기까지 아내의 걱정은 물론, 노부모님의 염려, 고3 수험생인 둘째 아들에 대한 미안함, 형제자매와 주위 동료들의 걱정도 나의 대간 종주에 대한 의지와 결심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그 동안 내가 산행을 통해서 느낀 산의 매력이 일시 종주를 단념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의해 모양과 형태가 만들어진다.”라고 괴테가 말한 것처럼, 나는 어느덧 산에 의해 나의 모습이 만들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모두들 힘들고 어렵다는 무더운 여름철의 백두대간 일시 종주를 통해서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나의 빛깔과 향기를 찾아보고자 했다. 언감생심 이 종주를 통해서 탐(貪)․진(瞋)․치(癡) 삼독심(三毒心)까지야 버릴 수 있을까마는, 진정한 나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아들과의 약속을 지킨다는 것도 기뻤다.

그 동안 대학입시 공부로 쇠약해진 아들도 대학 1학년 여름방학이 되자 나와의 약속을 지키겠다며 다른 모든 계획을 취소하고 흔쾌히 따라 나섰다.

-부자 백두대간 종주기 [감사하지 않은 게 없었다](푸른사상, 2004)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