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산하 운영자님, 관리자님 그리고 보이지 않게 수고하시는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산행일시 : 9월 5일
산행인원 : 홀로
산행구간 : 영남알프스, 통도사에서 표충사까지
산행시간 : 총 11시간 40분

 

07:20 백운암, 비로암 갈림길
08:00 백운암
08:40 능선 삼거리
09:40 영축산
10:55 신불산
11:55 간월산
13:10 배내봉
13:40 배내고개
14:35 능동산
16:30 재약산 사자봉(천황산)
17:20 재약산 수미봉
19:00 표충사

 


가을이 어디만치 왔는지 정찰하려 9월의 영남알프스에 오른다.

 

2주 정도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컨디션이 엉망이다.
운동도 못하고 잦은 술자리로 다리가 풀려있는 듯 힘이 없다.
원래는 토요일에 산행하려고 했으나 전날의 과음으로 말미암아
하루 종일 잔소리를 들으며 집에서 쉬어야 했다.

 

해운대에서 버스, 전철과 고속버스를 갈아타고 신평에 도착했다.
통도사 극락암까지는 택시를 타고 갔다.
비로암과 백운암 갈림길에서 7시 20분부터 산행을 시작한다.

 

여태까지 사용하던 배낭이 작아서 약간 큰 것을 하나 샀는데
수납 시스템과 디자인 마음에 든다.
새 배낭을 울러 메고 산으로 향하는 나의 마음은
마치 새 신을 신고 하늘을 향해 폴짝 뛰어보는 어린아이와 똑같다.

 

백운암으로 오르는 길에 절에서 내려오는 여신도 세분을 보았다.
얼굴이 해맑고 밝다. 어제 백운암에서 자고 이른 아침에 내려오는 듯하다.
아침에 산을 내려오는 사람들, 느낌이 좋다.

 

백운암에 도착하여 약수를 마신다. 물맛이 시원하고 담백하다.
저 아래 통도사를 바라본다. 구름이 살짝 껴있어 희미하게 보인다.
천년이란 세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온 우리의 자랑스러운 佛寶사찰이다.

 

시살등과 영축산 가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에 도착한다.
구름속이라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조망을 즐기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해야겠다.

 

지금은 영축산 작은 정상비 뒤편에 새겨져 있는
“날으는 새는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는 글이
옛날에는 여기 입간판에 쓰여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땀 흘리고 올라와 그 글을 볼 때 기분은 참 좋았다.

 

영축산으로 가는 도중에 알바를 한번 했다.
뻔히 아는 이 길에서 귀신에 홀린 듯이 왔던 길을 되돌아간 것이다.
자욱한 구름속이라 판단력이 떨어지는 듯 하다.

 

영축산 직전의 봉우리에 산악인을 기리는 추모비가 하나 있다.
모 회사에서 산이 되어버린 직원을 추모하여 세운 것이다.

 

언제나 홀로
산을 찾았다는 당신
아무도 모르는
적적한
꽃이 되어간 당신

 

초겨울 먼산
대숲 기슭에 가장 깊은
잠을 청한 당신

 

영축산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아도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빵과 간식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정상비에는 앞서 애기한 “날으는 새는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는 글이 있다.
요즘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는 말이 한창
유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강호의 세계에 답설무흔(踏雪無痕)이란 경공술이 있는데
내공이 경지에 오른 무림의 고수는
눈을 밞아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 산을 사랑하시는 검은 옷의 산행고수들 역시 
가져온 쓰레기와 과일껍질 조차도 모두 되가져 가신다.
이 또한 답설무흔 이요,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날으는 새의 경지이다.

 

신불재로 내려가다가 구름 속에서 길을 잃었다.
사방 억새가 가득한 신불평원에서 어디가 길인지 분간을 할 수 없다.
두 바퀴를 돌아도 돌이 쌓여있는 그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나침반을 보고 억새를 헤치며 한 방향으로 나아가니 주능선 길이 있다.
오늘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불산, 간월산을 올라도 보이는 것이 없다.
영남알프스 장쾌한 산세에 펼쳐진 넓은 억새밭을 보고 싶었으나 아쉽게 되었다.

 

간월산까지 올라오니 몸의 상태가 영 좋지 않다.
다리에 힘이 없고 허리가 뻐근하다.
10살배기 정도의 초등학생을 데리고 온 아줌마와 걷는 속도가 비슷하다.
표충사까지 먼 길을 걸어야 되는데 걱정이 앞선다.

 

배내봉 가는 길에 구름이 걷히더니 해를 볼 수 있다.
신불산과 간월산 정상부는 여전히 검은 구름에 덥혀 있다.

 

산행한지 6시간 20분 만에 배내고개로 내려왔다.

배내고개에 오면 항상 쉬었다가는 컨테이너 휴게소에서
선하게 생기신 주인 할머니에게 막걸리 한 병을 주문하고
의자에 앉으니 만사가 귀찮다.

 

이쯤해서 막걸리 한 잔하고 산을 내려가서 사우나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6시간 이면 적게 걸은 것도 아니고 컨디션도 안 좋은데...

 

그러나 여기서 산을 내려갈 핑계거리가 별로 없다.
무릎이 아픈 것도 아니며, 넘어져 다친 것도 아니요
폭우가 쏟아져 산행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산행이 원래 힘든 것이었지 휘파람을 불며 산을 오르내린 것은 아니다.
그래도 “오, 필승 코리아”인데 어쩌겠는가. 끝까지 가야지.

 

김치를 안주로 해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으니 할머니가 도토리묵을 조금 주신다.
이 할머니는 항상 이렇게 적은 것이지만 더 주신다.
내가 먹은 그릇들은 정리해서 싱크대까지 옮겨드리고
삶은 계란 2개를 달라고 하니 하나를 더 주신다.
아, 사람은 큰일보다 작은 일로 울고 웃는다.

 

막걸리 한 병 마셨더니 취기가 살짝 돈다.
능동산 오르막길을 취한 기분에 올랐다.

능동산 지나 쇠점골 약수터에서 물 한 사발 마시고
임도를 따라 걸어 샘물상회에 도착했다.

 

샘물상회 앞에 노란 꽃이 무더기로 피어있어 무슨 꽃이냐고 물어보니 코스모스란다.
노란 코스모스라? 처음 보는데. 외국에서 들어온 종이라고 한다.

 

재약산 사자봉(천황산)으로 오르는 도중에 쉬는 횟수가 점점 많아진다.
시간이 갈수록 마주치는 사람들이 적어진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
억새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바람의 흔적이다.
바람은 그물에 걸리지 않지만 그물을 흔들고 지나간다.

 

신불산, 간월산과는 달리 사자평에는 구름이 없어 억새를 볼 수 있다.
아직은 약간 이른 철이지만 억새가 절정에 이르면 은빛바다를 이루겠다.
그러나 지금도 역광(逆光)에 무리지어 흔들리는 억새들을 바라보니
이 길은 외로워서 혼자서는 못 걷겠다.
가을의 영남알프스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걸을 일이다.

 

마지막 봉우리 재약산 수미봉에서 남은 간식을 먹는다.
바람이 많이 분다. 어두워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야 되므로 하산을 서두른다.

하늘 아래 첫 학교라던 고사리초등학교 터에서 교적비를 다시 읽어본다.

 

1966년 4월 29일 개교하여 36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96년 3월 1일 폐교되었음

 

나는 학생들이 있던 고사리초등학교를 1975년과 1981년에 두 번 보았다.
이제는 흘러간 옛날이 되었구나.

 

國破山河在  나라는 망했으나 산하는 남았는데
城春草木深  성에 봄이 오니 초목이 무성하다
感時花淚  시절을 슬퍼하여  꽃에 눈물 흘리고
恨別鳥驚心  이별이 서러워 새소리에 마음 놀라네

 

층층폭포를 거치지 않고 고사리분교 터에서 표충사로 내려가는 길을 탔다.
차라리 계곡 쪽으로 갔으면 물소리나 들을 것을
오고가는 사람 없는 적막한 이 길은 매우 지루하였다.

 

19시에 표충사에 도착했다. 예정보다는 1시간 정도 늦었지만
몸 상태를 고려할 때 무사하게 완주한 것만이라도 감사해야할 일이다.

어둑어둑한 계곡에 들어가 12시간 동안 피로와 땀에 젖은,
고생한 발이며 다리며 온몸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매미 소리 보다는 귀뚜라미 소리가 더 많이 들리는 으스름 저녁에
한점의 전등을 밝힌 산골 집들을 바라보면서
여름과 가을이 섞여있는 길을 걸어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밀양 가는 막차와 부산 가는 막차를 운 좋게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